조글로로고
말꼬리에 머리태 끌리워 화형당한 최계옥렬사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월3일 09시55분    조회:950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계옥

[기획2]놈들의 말꼬리에 머리태 끌리워 화형당한 최계옥렬사
건국 65주년 맞이 특별기획보도-《81년만에 공향에 돌아온 항일녀전사의 충혼》 제1편

조선인들이 비교적 집중적으로 모여 산 차조구(지금의 안도현 석문진)일대는 19세기말부터 항일의병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였다. 박영철선생의 외가집은 바로 차조구 동흥툰의 혁명세가라고 할수 있다. 박선생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때부터의 외가집의 항일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맞이가 큰이모 최기철, 그리고 외삼촌 최동호, 어머니가 외삼촌 다음이고 어머니 아래로 작은이모 최현춘이 있었다.

 
최계옥렬사의 아들 최동호/ 자료
 
 
최계옥렬사의 세 딸. 앞줄왼쪽 큰딸 최기철, 오른쪽 작은딸 최현춘, 뒤줄 둘째딸 최수련 즉 박영철선생의 어머니다./자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외아들 최동호를 조선 반일지사들의 계몽교육기지였던 룡정동흥중학에 보낸다. 학교때부터 외삼촌은 신문화운동에 용약 뛰여들었고 1922년에 졸업한후에는 중국공산당조직의 신임과 양성을 받아 항일유격대의 골간으로 활약하다 맑스주의교육을 더 깊이 받게 하느라 나중에는 쏘련으로 파견되여간다. 외삼촌이 동흥툰집에 드는 일은 점점 뜸해지면서 일본경찰과 그 앞잡이들은 외삼촌의 사진을 들고 찾아내려고 헤매다닌다. 놈들은 시집간 큰이모, 어머니한테도 툭하면 찾아와 으름장을 놓군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외할머니는 중공지하통신련락소의 지시를 받들고 산속 유격대에 옷감, 량식 등 물품을 구입, 운송을 해왔다. 이에 련루되여 외할아버지는 1925년 연길현감옥에 잡혀들어갔다. 외할아버지는 2년간 고추물주입 등 고문을 받으면서도 옥중에서 지조를 잃지 않았다. 결국 열물을 토하는 위독상태로 출옥하게 되여 얼마후 세상을 뜨고말았다.

1930년 중공 연(연길)화(화룡)중심현위가 건립되였는데 큰이모부 즉 외할머니의 큰사위 최태훈은 중공연길현 선전부장, 조직부장으로 활약했다.(《최씨렬사비》에도 적혀있음)가문의 영향하에 작은이모 최현춘도 인차 유격대에 가입했다.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가 세상 뜬후 아예 집을 버리고 유격대에 있는 사위와 아들, 작은딸과 함께 조선인으로 구성된 연길현(지금의 안도현도 당시는 연길현에 속했음) 항일유격대에 들어간다. 외가집과 한마을에 살던 외할머니의 큰사돈 최희경(최계옥의 큰사위 최태훈의 부친)도 유격대에 있었다. 외할머니의 유격대입대 및 활동 이야기는 어머니한테서 들은바도 있지만 《최씨렬사비》에나, 외할머니의 렬사등록서류에도 간단하게나마 기술되여 있다.

최계옥렬사의 반쪽초상사진에 근거해 복구해낸 최계옥렬사의 초상화. /연변대학미술학부 최호걸 작

유격대에 입대할 때 외할머니는 이미 두 외손자를 본 55세 년장자였지만 혁명적 투지는 열혈청춘 못지 않게 끓어넘쳤다. 유격대에서 외할머니는 통신원으로 있으면서 유격대의 물자구입, 정보수송 등 임무를 맡고 유격대가 활동하는 차조구, 삼도구, 오도구 일대 산길을 수없이 오르내리였다.

우리 어머니는 본가집 온집식구가 투신해있는 유격대를 항상 동경해왔다고 한다. 

1932년 여름의 어느날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오도구쪽 산속 유격대 밀영에 마차로 싣고간적 있었다. 신록에 가리워진 숲속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많은 유격대원들의 얼굴을 처음 봤다고 한다. 그속에서 그 많은 년세에 쉼없이 뛰고있는 외할머니를 보면서 대단해보였고 가슴아팠다고 한다. 그날 어머니는 거기서 작은이모 최현춘을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모와 외할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추수》, 《춘황》투쟁를 비롯한 전투이야기를 들었으며 김일성, 《코대(림춘추)》 등 인물들의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공산당의 힘이 그렇게 크고 항일유격대조직이 그렇게 드세다는걸 알았다…》고 감탄했다. 다만 그 대오속에서도 외삼촌은 만나보지 못했다면서 어머니는 외삼촌이 《큰일 하는분이여서 만나보기 힘들었어. 늘 여기저기를 다니시는분이였으니까…》 하며 아쉬워하며 탄식하군 했다.

그해 일본놈들은 대량의 군경을 《간도림시파견대》라는 이름으로 연변에 증파해 대토벌, 대소탕을 감행했다.

1932년 10월 23일(어머니는 음력으로 기억) 재밤에 외할머니가 《투문재》(지금의 석문진거리)장에서 유격대의 동내의 30여벌을 마련한 큰 보따리짐을 이고 유격대가 있는 삼도만으로 가는 길에 동흥툰 우리 집에 들어선다. 산후병에 시달리는 우리 어머니가 걱정되고 돌이 막차는 나의 형님을 한번 들려보지 않고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결국 외할머니의 행적은 밟히고말았다.

우리 집에서 나가 삼도만으로 가는 삼도구 산중턱에서 일본경찰들과 그 앞잡이놈들에게 외할머니가 불행하게도 붙잡히게 되였다. (중평촌 중심마을에 일제 파출소가 있었다. 지금도 촌민들은 그 자리를 정확히 짚는다.)

행선지를 대고 《빨갱이》, 항일분자, 유격대원들을 불어내라고 놈들이 아무리 윽박질러도 외할머니가 입을 열지 않자 놈들은 외할머니를 묶어 수레에 실었다. 외할머니가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놈들은 외할머니의 긴 머리태를 수레의 풍채에 묶어버린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산길을 근 1리나 내려왔다.

이때 중평의 조선인 악패 앞잡이 박락순이란 놈이 말을 타고 올라왔다. 그뒤로 중평골의 백성들이 길에 모여나왔는데 그속에는 우리 집과 한 마을에서 산 셋째삼촌 박치현(아버지의 셋째동생)도 있었다.

외할머니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듬으면서 《네놈들은 이 땅에서 쫓겨나고말것이다. 망하고말것이다…》고 소리지른다.

박락순은 말에서 내려 일본놈한테 뭐라 하고는 외할머니를 수레에서 끌어내려 아예 머리태를 매놓은 끈의 이쪽 끝을 자기가 탄 말꼬리에 맨다. 이윽고 이자는 말에 올라타고 채찍을 날린다. 할머니는 인차 말에 질질 끌려나갔다. 삼촌 박치현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얼굴을 돌릴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얼마 안 가 전신이 피범벅이로 되였다. 할머니는 실신한채로 동흥툰을 벗어나 박락순과 일본놈들이 만들어놓은 《형장》에 끌려온다. 거기에는 나무단들이 빙 둘러놓여져 있었는데 외할머니 말고도 외할머니의 큰사돈 최희경과 그의 두 전우(이름 모름)가 피투성이채로 묶여있었다.

놈들은 나무단을 더 올리고 불을 달았다……

우리 어머니가 이 가슴 찢어지는 과정을 우리 셋째삼촌한테서 들을 때는 이튿날 새벽이였다.

정신이 반은 나간채로 셋째삼촌과 함께 허둥지둥 《형장》에 찾아간 어머니는 재무지를 파헤친다. 타다남은 위장우에 치마띠꼬리가 보였는데 그것이 외할머니의 유해를 분별할수 있는 유일한 참조물이였다.

서리사람으로 된 우리 어머니는 그자리에 물앉아버린다…

삼촌은 삼촌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져버린다.

어머니는 옷을 벗어 할머니의 유해와 띠꼬리를 감싸안는다.

《형장》북쪽 좀 뉘연한 자리에 어머니는 맨손으로 외할머니의 유해를 묻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느닷없이 창문지에 뚫려진 구멍을 발견하게 된다.

외할머니가 그렇게 놈들한테 들켰는가 싶어 어머니는《내가 좀 건강해서도,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안 들렸어도…》하면서 또다시 오열한다.

어머니는 그후 셋째외할머니(외할아버지의 셋째제수)한테서도 외할머니의 수난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셋째외할머니네 집도 우리와 다 한마을이였으니까.

셋째삼촌은 우리 형제들이 철이 든후 외할머니의 순난 전 과정을 말해준적 있었다.

 
2011년부터 외할머니 최계옥렬사의 사적을 정리하던 주인공인 최계옥렬사의 외손자 박영철선생은 2013년 8월 25일 당년 외할머니가 채 넘지
못했던 삼도구-삼도만길을 다녀온다. 사진은 삼도구에서 삼도만으로 넘어가는 령마루에서 사색에 잠기는 박영철선생.  /김희정
 
외할머니를 잃은 뒤 어머니로서는 외삼촌과 작은이모의 행적을 알길이 더구나 묘연해진다.우리 집을 지켜보는 놈들의 눈은 더 많아졌고 어머니는 늘 공포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외삼촌과 작은이모랑 함께 혁명하던 가문의 친척집을 통해 외삼촌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으로 떠나갔고 이모는 동북항일련군에 편입돼 조선과 쏘련국경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리고있다는 소식을 들을수 있었다고 한다.

광복후 1946년초 작은이모 최현춘은 상급의 지시대로 동북항일련군으로부터 연변에 조선인간부로 파견되여왔다. 작은이모는 한동안 (1949년 3월 조선으로 나가기전까지) 연변의 부녀사업 주요책임을 맡고 사업하였다.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면서《꿈만 같았다》고 개탄했다.

그 때 작은이모는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던 전우 려영준(해방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원 원장, 부주장 등 요직 력임)동지한테서 외삼촌 최동호를 찾으려고 수소문했고 중공조직에서는 쏘련의 《쁘라우다》(쏘련공산당기관지)에 외삼촌을 찾는 글을 냈는데 여전히 소식이 나지지 않았다는 전달을 받았다고 가족에 알렸다고 한다.

역시 그해초 우리 집은 차조구 사득촌으로부터 연길로 이사왔다. 외할머니의 유가족으로 어머니앞으로 집을 배려받았던것이다. 큰이모네, 셋째외할머니네와 한 줄집에서 살게 되였다. 큰이모와 세째외할머니는 다 남편들의 유가족으로 집을 분배받았던것이다.

그때에야 서로 마주서 보니 두집 다 녀자들만 남아있었다. 큰이모네는 큰이모부 최태훈이 외할머니가 순직한 이듬해 신창동전투에서 일본놈들과 싸우다가 희생되였고 아들 최우는 당시 길동군정대학에 가고 집에 없었다. 셋째외할머니네는 셋째외할아버지 최봉일(외할아버지의 셋째동생)이 림춘추를 따라 항일하다 1931년 대토벌 때 희생(광복후 조선에서 렬사칭호 받음)되였고 셋째외할머니네 아들 최동만도 큰 이모네 아들 최우와 함께 금방(1946년 2월20일 )길동군정대학에 가고 집에 없었다.

우리 집이 이사와 얼마 안있어 《원쑤를 처결》하는 날은 오고야 말았다.

차조구일대에서 수많은 항일혁명자들과 무고한 백성까지 극악무도하게 살해한 박락순주구는 드디여 차조구에 설치한 심판석에 오른다.

《어머니와 혁명선렬들이 기다리던 광복은 왔으며 일본침략자들은 멸망하고말았다. 나는 정부와 인민을 대표하여 그리고 희생된 최씨가문렬사들을 비롯한 무수한 렬사들과 남아있는 그들의 가족을 대표하여 박락순주구놈을 처단한다. 인민의 공적인 너희들은 백번 죽어 마땅하다…》 하고 작은이모님이 심판대회에서 발언했다. 심판을 마치고나서 작은이모는 자신이 직접 권총방아쇠를 당겨 박락순을 시원하게 처단해버렸다.

그 경과에 대해서 우리는 어머니한테서 몇번 들었지만 연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셋째외할머니가 집에서 또 《그래도 너희 작은이모가 직접 자신의 권총으로 외할머니의 원쑤를 갚았으니…》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니 감회가 남달랐다.

내가 마흔에 들어서서 오래간만에 도문에 계시는 외가6촌형 최철석(정부공무원이였음)을 방문하면서도 외가집의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형님도 《물론 광복을 맞은후여서 정부와 사법쪽에서 일본놈의 앞잡이를 처단한거라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니들 작은이모가 자기 어머니를 처참하게 살해한 박락순이란 앞잡이원쑤놈을 직접 권총으로 쏴죽였으니 속이 좀 내려가지…》 하며 외할머니를 너무나 처참하게 살해한 놈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그러다 《니네 작은이모 그때 연변전원공서(전칭은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광복후 공산당조직이 연변에 세운 정권대표기구)의 전원으로 있었다. 대단했지...》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내 손에 있는 충주최씨의 족보도 그 형님한테서 그때 정리해 받아가진거였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주인민검찰원 김광진검찰장 《김광진검찰장이 부임한 몇년래 연변의 검찰사업은 주목할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어떻게 말하면 지금이 연변의 검찰대오건설이 가장 잘 되고있는 시기이고 지도부건설이 가장 잘된 최적의 시기이며 상급의 인정정도가 가장 높은 시기이자 간부 및 사법경찰들의 사기가 가장 왕성한 시기라...
  • 2013-09-03
  • 연변가무단의 청년가수 최려령씨는 시기를 잘 만난 행운아인듯하다. 가무단에 발을 들여놓은지 2년밖에 안되지만 처음 참가하게 된 제3회 전국소수민족희극회보공연에서 창극 “심청전”의 주역인 심청의 역을 맡아 우수표현상뿐만아니라 우수각색상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녀는 수상보다도 점차...
  • 2013-09-02
  • 8년째 두만강박람회 진두지휘…"옌지에서 투자 기회 잡으세요"   박람회가 동북 3성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미국 시민권자인 저를 조선족 기업가들이 신(新)조선족이라며 형제처럼 대해주어 이제는 옌지(延吉)가 '제2의 고향'처럼 친근합니다." '제9회 연길&midd...
  • 2013-08-30
  • 포장 기술 도입해 옌볜 시장 평정하고 내륙·해외로도 진출 (연길 =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연길·두만강지역 국제투자박람회에 월드옥타 옌지(延吉) 지회가 단체로 16개 부스를 받아서 회원사들의 상품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한상(韓商)을 비롯해 바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박람회야말로 해외 진...
  • 2013-08-30
  • 동북3성 한겨레 리더 릴레이 인터뷰   대한민국주선영총영사관 조백상 총영사 (흑룡강신문=하얼빈) 김영우특약기자= "올해 초에 본부에서 실시한 종합적인 영사서비스 평가에서 전 세계 160개 해외 공관 중에서 1위를 달성했습니다. 본부로부터 축하금을 받아서 나누어서 직원들에게 조그만 기념품 전달하고 기쁨을 함께 ...
  • 2013-08-29
  • 【경주=뉴시스】김재원 기자 = 저우위보 인민일보 인민망 한국지국 대표는 지난 28일 경북 경주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화백포럼 특강에 앞서 시민과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최양식 경주시장과 업무추진 협약을 맺었다. 이번 협약으로 인민망은 경주시의 주요 소식과 행사를 중화권 독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경주시...
  • 2013-08-29
  • -길림성 통화현조선족학교 김명선교장을 찾아 학생들의 딱친구인 교장선생님, 교원들을 잘 챙겨주는 교장선생님, 민족특색을 굳게 지키는 교장선생님, 문제가 생기면 과감히 담당하는 교장선생님, 제일 먼저 등교해 손풍금치는 교장선생님, 축구 잘하는 교장선생님…통화현조선족학교 김명선교장을 일컫는 말들이다....
  • 2013-08-26
  • 황유복 략력 1966년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대학에서 봉직.1987년 9월ㅡ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1984년부터, 미국, 일본, 카나다, 쏘련, 몽골, 한국, 호주 등 20여개 대 학에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
  • 2013-08-26
  • 대련시조선족학교 김영실부교장을 찾아 대련시조선족학교 김영실부교장이 전국 교장훈련모임에서 강연하는 장면. 대련시조선족학교에서 14개월 동안 로임 1전도 받지 못하고도 원망 한마디 없이 매일 즐거운 기분으로 학생사랑에 묻혀 교수에 전념한 녀교원이 있다. 그것도 소비가 높은 대련이란 대도시에 금방 정착해 9살...
  • 2013-08-24
  • 中서 자란 그들 한국문화 낯설어 동포애로 안아줘야 진정한 화합 “많은 조선족에게 한국은 애틋한 고향이자, 낯선 타향입니다.” ‘조선족대모임’은 2003년 개설된 국내 최대의 조선족 인터넷 커뮤니티다. 회원 수는 6만여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70% 정도가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이 모임을 운...
  • 2013-08-2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