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화백과 미인도의 녀인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8월6일 10시16분    조회:753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박춘자



순 백색의 백두산이 머리우에 높이 걸려있다. 녀인들은 백두산을 경배하고 숙연히 서있다. 외가닥으로 땋아서 등에 늘인 머리는 그들이 순정의 마음을 간직한 정결한 처녀들이라는걸 알리고 있다…

그림 “성산”에 등장하는 녀인들의 뒤모습은 그림 “무리(群)”에서도 나타난다. 이때의 녀인들은 머리를 얹고 비녀를 꽂은 성숙한 녀성들의 “무리”이다.

녀인들의 뒤모습은 함축적이고 내성적인 조선족녀성들의 미를 상징한다. 고향의 녀인들의 이런 화상에는 고향에 대한 화백의 애정과 향수가 흠씬 묻어나고 있었다.

“그림에 표상이 아닌 고향의 넋을 심고 싶어요.” 박춘자는 유달리 녀인들의 뒤모습에 집착한 그의 작품에 이렇게 해석을 달았다.

박춘자는 중국 공필화(工筆畵) 영역에서 내노라고 하는 거물급 화백이다. 공필화는 일명 세필화(細筆畵)라고 하는데, 아주 섬세하고 화려한 채색으로 인물 특히는 녀인을 많이 그리는 동양화의 쟝르이다. 박춘자는 그간 중국과 영국, 한국에 개인전을 7차 개최한 경력을 갖고 있다. “중화컵 중국화대상경연”, 중국 “풍속화대상경연”, “당대 공필화전시”, 동북아 국제미술전시회, 전국 중국화전시회, 당대예술가들의 중국과 한국 순회전시회 등 많은 중량급 경기와 전시회에 입선되고 상을 받았다.

박춘자의 작품은 선후하여 중국미술관, 서안민속박물관, 한국 청와대, 키르기스스탄 대통령부, 영국주재 중국대사관 등 부문에 소장되었다. 그가 중앙민족대학 미술학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내놓은 저서 “중국 소수민족제재의 공필 인물화 창작과 교학”은 중국 소수민족 제재의 공필화 영역에서 유일한 교과서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고 보면 화백 자신이 바로 “그림”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는것이다.
 
종이공예, 소녀의 마음에 그려진 그림


“세상물정을 알면서 눈에 제일 많이 익힌 게 그림이였지요.”

어릴 때 구들에는 그림이 마냥 꽃잎처럼 널려있었다. 아버지가 직업관계로 그림과 벗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는 돈화시 제2중학교 미술교원이었다. 어린 박춘자도 연필을 들고 늘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만화책에 나오는 애기곰과 엄마곰, 풀밭에서 뛰노는 꽃사슴, 하늘을 날아예는 새가 그의 첫 모사품이였다.

“어허 우리 공주의 작품을 모으면 그림책이 되겠네.” 아버지는 딸애의 비뚤비뚤한 그림에 언제나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진짜 딸애의 작품은 그림책이 되고 있었다. 언제인가부터 작품의 주인공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재롱을 부리는 얼룩강아지와 모이를 쫏는 병아리가 그의 화판우에 옮겨져 뛰놀았다.

소학교 4학 때 박춘자의 가족은 연길에 이사를 했다. 박춘자는 연길시소년궁전 미술써클반에 입적했다. 박춘자의 그림은 언제나 닭의 무리에 서있는 두루미처럼 유표했다. 그의 일생에서 첫 그림 상은 이맘때 수상했다. “학습을 잘하여 나날이 향상하자”라는 제목의 종이공예 작품은 주 그림전시회에 입선되었으며 잡지 “소년아동”에 실렸다.

박춘자는 지금까지 그림 대상을 수두룩이 받았지만 인상이 제일 깊은 상은 그래도 그때 창작했던 종이공예 작품이라고 한다.

“상을 받은 날 너무 기뻐서 온밤을 뜬 눈으로 보냈어요.”

종이공예는 박춘자에게 상뿐만 아닌 또 하나의 꿈을 깊이 심어주었던것이다.

박춘자는 급기야 그림속에 깊이 묻혀버렸다. 방과후이면 버릇처럼 기차역으로 뛰어가 화판을 펼쳐들었다. 주름이 밭고랑이처럼 패인 할아버지와 외가닥 머리를 달랑이는 처녀, 사구려를 외치는 아주머니… 각양각색의 인간 만화경이 화판에 일일이 담겨졌다. 박춘자는 일요일이면 푸른 숲이 우거진 산이나 하얀 모래톱이 펼쳐진 강가를 찾았다. 푸른 숲과 하얀 모래톱은 그에게 자연적인 순수한 색감을 피부로 감촉하게 했다.

“그때는 세상이 그저 그림으로만 보이는거예요. 정말 그림에 미치다싶이 했지요.”

박춘자는 하루에 3,4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느라고 밤에는 자정이 넘어야 눈을 붙이기 일쑤였다. 어느덧 그림은 그의 생활의 전부로 되고 있었다.

부모는 딸애의 그림 그리기를 있는 힘껏 도와주었다. 바쁜 살림형편에도 푼돈을 쪼개어 그에게 화필이며 색감, 종이들을 꼭꼭 챙겨줬다. 이때 박춘자에게 길라잡이가 나타났다. 박춘자는 선후로 김영호 화백과 장홍을 화백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생(寫生)과 색채 훈련을 받았다.

벽지 돈화에서는 전혀 꿈도 꿀수 없었던 그림의 천지가 소녀에게 펼쳐지고 있었다.

박춘자는 그렇게 행복할수 없었다. “어쩌면 부모님께서 저를 위해 연길에 이사를 한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지요.”

1981년, 박춘자는 중앙민족대학 미술학부에 입학하여 공필화를 전공하게 되였다.
 
“고향의 넋”이 그림에 피어나다

대학시절 박춘자는 화판을 메고 늘 산과 들을 넘나들었다. 산해관 남쪽의 산서성과 섬서성, 하남성 등 지역을 다니면서 병마용과 비림, 백마사 등 고적을 탐닉했다. 고적에 깃든 천년의 문화는 더구나 그의 애틋한 향수를 자아냈다. 박춘자는 집안 고구려고분, 연변민속박물관에 발자국을 또렷이 찍었다. 아예 이불 짐을 싸들고 안도현의 시골에 가서 생활체험을 하기도 했다.

고향의 풍속과 력사는 나중에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박춘자의 대학졸업 작품은 “조선족의 혼례”였고 론문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풍속인물화”였다.

졸업한후 박춘자는 북경실용미술직업학교에서 교원으로 있게 되였다. 이 기간 조선족녀성을 소재로 삼은 그림 “달빛”, “빨래”, “널뛰기”, “가을” 등 10여점의 작품이 전국조선족서예그림전시회, 전국 풍속화경연, 전국미술전시회에서 상을 받았다.

박춘자는 그림 작업에서 종이와 비단, 옥양목 등 다양한 바탕 재료위에 은근하게 배어나는 세련된 색을 구사함으로써 공필 담채화(淡彩畵)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한적하고 온화하다. 조선족녀성들의 여유 있고 상냥하며 맑고 소박한 기질이 그림 전체에 가득 풍긴다.

그의 그림에는 대개 두세명의 인물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단아한 민족의상 차림으로 달빛 혹은 옅은 운무속에 묵묵히 서있거나 조용히 인사를 올린다. 그들 주위는 한적함과 고요함뿐이다. 마치 대기속의 빛과 구름에 녹아버려 혼연일체로 된듯 하다. 인물관계와 번다한 내용을 버리고 녀성 전반의 성스럽고 깨끗한 기질을 박춘자 그만의 담백한 화필로 담아낸 이런 그림들은 꿈같은 유유한 시적 내음이 다분하다. 한편 짙은 향토의 숨결속에서 깊숙한 역사와 문화의 그림자를 엿볼수 있다.

박춘자는 국제적인 교류와 내왕에서 민족성과 현대성의 관계를 절실히 느꼈다. 그는 화필로 고집스레 향토의 뿌리를 찾았다. 지난 세기 90년대 그가 창작한 그림 “궁녀”, “하늘”, “정토”, “고향의 넋” 등은 그 전의 작품보다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녀인상들의 무겁고 조용한 기색 그리고 투명하고 고느적한 배경색은 서정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그림들은 전통적인 공필(工筆)의 미인도(美人圖)와 거리를 멀리하고 있다. 조선족 녀성들의 기질과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에는 화외음이 깊숙이 깔려있다. 다름 아닌 조선족 녀성들의 생존상태에 대한 화백의 사색과 앞날에 대한 기대이다.

이런 작업의 연장선에서 그의 그림에는 조선족은 물론 티베트족과 묘족, 뚱족, 하니족, 위글족 등 민족들의 일상생활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독특함 그 자체로만도 고유한 민족문화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지요.”

공필화는 섬세함과 인내성을 필요로 하는 그림이다. 색감만 해도 반복적으로 칠하는데 연한데로부터 진한데로 수십번의 작업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림 한점을 그리는데 한두달의 시간이 소요되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선 하나라도 잘못 그어 실패하면 그림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박춘자가 지금까지 내놓은 공필화 작품이 100여점에 불과하다는데 공감이 가는 대목이였다. 그야말로 하나하나의 작품이 모두 화백의 피와 땀으로 가꾼 정성어린 열매였다.
 
화백의 또 하나의 도전
1997년부터 박춘자는 영국 런던 앨(AIR) 화랑에 5년 계약을 맺고 1년에 한번씩 개인전을 가졌다. 앨 화랑은 런던 굴지의 화랑으로 그만큼 작품에 대한 요구가 까다로울 정도로 높았다. 따라사 박춘자가 받는 압력도 여간 무겁지 않았다.

“정말 창작의 한계를 느꼈어요. 무언가 발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거예요.”

박춘자는 단연히 교직을 버리고 다시 학생의 위치로 돌아간다. 한국 홍익대학 미술학원의 석사연구생으로 입적했던것. 2년 후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모교 중앙민족대학 미술학원의 강단에 올라선다.

최근 그의 새로운 시도를 나타낸 “헤엄(遊)” 계렬의 작품은 창작구상과 인물조형의 표현 기법에서 모두 새로운 돌파를 보이고 있다. 화면에서 자태가 예쁜 조선족 소녀와 한가로이 헤엄을 치는 물고기는 모두 여유로움이 넘친다. 박춘자의 주관적인 창작성은 작품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의 예술은 보다 원숙한 경지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화백은 이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또 스스로 도전장을 던졌다. “인제 공필화를 떠나서 수묵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수묵화는 화려한 공필화와는 달리 현란한 채색을 피하고 먹의 정신성(精神性)을 구현하는 양식으로 동양인의 미적 의식과 사의(寫意)를 반영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그림이다. 단색의 먹만을 써서 그리는 수묵화는 시종여일하게 채색화에 전념하고 있던 박춘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펼치고 있다.

고향의 녀인은 인제 공필화가 아닌 수묵화에서 또 하나의 순수한 시정(詩情)으로 활짝 피어나게 되는것이다.*

<<예술세계 >> 2014년 제3호/북경 김호림



파일 [ 4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일전 길림성 영길현 구전수리전업1국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였다는 김기영씨(71)가 불편한 몸으로 기자를 찾아왔다. 두툼한 자료봉투를 꺼내놓으며 털어놓는 사연인즉 독립군의감(醫監)출신인 부친 김환(金煥)의 독립투쟁경력이 해빛을 보게 해달라는것이였다. 본인의 조사자료와 한국, 연변대학 등지에서 수집한 문헌자료...
  • 2005-12-15
  • [원제: 동심에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워] 일찍 중국선진생산자의 일원으로 중국군영회(群英會)에 참가하고 소수민족대표로 주은래 등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던 최윤복로인(76세)은 근 반세기가 지난 오늘이지만 그때의 그 영광이 새삼스럽기만 하단다. 최윤복은 1948년에 화룡중학교를 졸업하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화룡...
  • 2005-12-14
  • 중국 일류 대학생들의 선두인물 권정 김호림ㅣ중국국제방송국 기자 jinhulin@hanmail.net 권정(權靜), 그 이름에 사람들은 거개 생소함을 느낀다. 그러나 북경 대학입시 수석합격자라고 하면 대뜸 “아, 그 애 말이예요”하고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한다. 북경에서는 2000년에 아주 드물게 2000년에 대학입시성적 성적...
  • 2005-12-14
  • [한겨레] 말총머리 휘날리며 날카롭게 상대를 쏘아보던 자오즈민. 2.5g짜리 탁구공 하나의 마술로 세계를 제패하며 중국 마녀군단의 선봉에 섰던 그는 1989년 한국 남자탁구 국가대표 안재형(41)과 결혼해 큰 화제를 뿌렸다. 한국과 중국이 적대국이었던 시절, 이 둘은 탁구를 통한 ‘이념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모두...
  • 2005-12-10
  • 장백조선족자치현 십이도구진 십이도구촌의 리병권농민은 북오미자재배로 치부의 길을 개척하고있다. 올해 49세인 리병권농민은 2003년에 과전현 등지에 가 자비로 북오미자재배기술을 배운후 퇴경환림으로 지난해 촌의 42무에 달하는 다락밭을 도급맡았다. 그는 선후로 9만여원의 자금을 들여 외지로부터 당지 기후에 적합...
  • 2005-12-08
  • [원제:김부인모피복장회사 신장 개업] 조선족 기업가 최명철씨가 총경리를 맡고있는 김부인모피복장회사가 지난 2일 할빈 도외구에서 성대한 의식을 가지고 신장개업에 들어갔다. 40여년이란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는 김부인모피복장회사는 최근 년간 미국, 한국, 일본 등 나라들을 비롯한 국내외 수십여개 모피복장유명회사...
  • 2005-12-08
  • 한 평범한 가정주부가 연구 발명해낸 “일종 대퇴골괴사치료약물 및 그 제법”이 국가발명특허를 따내여 린근의 주의를 끌고 있다. 훈춘시에 거주하고있는 김영자(50세)는 다년간의 투병중 꾸준히 병마와 싸워가며 자기 몸을 제1실험실로 삼아 마침내 국가특허약물을 연구발명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18살 꽃나이시절에 그...
  • 2005-12-08
  •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에서 두손을 잃었으나 《이 생명 다할때까지 혁명하겠다》는 호언을 남겼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퇴역해 한생을 묵묵히 농업생산에 종사한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전국군인모범으로 주덕, 주은래의 접견을 받았던 리수봉(78세)로인. 유소년시절부터 심양, 할빈 등 지를 류리걸식하던 리수봉씨는 1945년...
  • 2005-12-07
  • 우리 민족이 북방지역 벼재배력사를 개척한지 120여년이 되는데 그동안 북방입쌀 생산, 발전에 불후의 기여를 하고 많은 시대적과학기술일군을 배태시켰다. 20세기말 특히는 시장경제가 활성화하여 입쌀미질경쟁이 치렬할 때 국가특수대우향수자이며 길림성농업과학원 김윤주(지금 김심인이라 부름)연구원은 세계에서 처음으...
  • 2005-12-06
  • 12월 4일 제5차 《전국법제선전일》을 맞으며 2005년 《년도10대법제인물》 평선결과가 발표되였다. 이들로는 허문유: 료녕성공안청 형사정찰총대 대장 형사경찰의 본보기. 동려화: 공익변호사 약자의 권익 수호자. 진건교: 호남성인대 대표 마음은 언제나 민중과 함께. 중국법률원조기금회: 약세군체를 위해 소송을 걸고 자...
  • 2005-12-0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