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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연군의 살아있는 전설 이재덕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2월16일 08시42분    조회:9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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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이재덕
항일연군의 살아있는 전설 이재덕
글/ 김 호 림
 

“오늘 동무들이 여기에 와서(온 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녀는 약간은 어눌한 우리말이지만 아주 똑똑한 발음으로 이렇게 말꼭지를 뗐다.
그녀는 일행이 갖고 간 우리말 잡지 “중국민족”의 글을 별로 망설이지 않고 쉽게 읽고 있었다. 우리말 세계와 동떨어진지 반백년이 넘었지만 우리말과 글은 여전히 손과 발처럼 그녀의 일부로 되고 있었다.
“(우리말과 글은) 너무 오래돼서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중국말로 이렇게 말하더니 부끄러운 듯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97세의 노인은  금세 10대의 소녀처럼 주름이 깊은 얼굴에 홍조를 띄워 올린다.
병상 옆의 의기에서는 심장박동 그래프가 아래위로 포물선을 연속 긋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의 통증 때문에 얼마 전 고급병동에 입원했다. 몸에 부착한 붉고 푸른 선들이 아니라면 영락없이 시골에서 조석으로 만나는 이웃집의 푼더분한 할머니였다.
기실 그녀는 이재덕이라는 이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70년 전 만주 땅에서 항일의 총대를 잡았던 노전사는 현재 생존자가 불과 한손으로 헤아릴 정도, 이중 이재덕은 최고령자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이재덕의 전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조선 김일성 주석의 특별초청을 받은 “국빈”, 김일성 주석의 부인 김정숙의 친밀한 전우, 주은래 총리의 “외국국적” 기밀담당 비서, 러시아정부의 국가보위전쟁승리 특별훈장 수훈자… 등등.
그러고 보면 인간 이재덕에게는 소설보다 더 기이한 사건들이 일장 드라마처럼 벌어진 것이다.
 
청천강에 흘러간 부채의 이야기
두 살 때였다. 어린 이재덕은 고모의 등에 업혀 동구 밖에 갔다가 신기한 그림을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회억록 “송산(松山)의 눈바람”(2013)에서 그때 흥에 겨워 소리치던 정경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저것 봐, 강물에 큰 부채가 떠있어!”
실은 청천강에 떠있던 큰 돛배였다. 푸른 산과 푸른 물, 흰 돛은 이재덕의 기억에 찍힌 고향의 유일한 모습으로 되고 있었다.
고향의 이 그림에 적힌 이름은 조선 평안남도 개천군 답도리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림과는 달리 그녀의 집안은 서글픈 생활상을 그리고 있었다. 지주의 비탈 밭 몇 뙈기를 부쳐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1920년 초, 조부가 지주의 마름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구타를 받아 세상을 떴다.


이때 부친이 처우는 갈수록 큰 위험을 받고 있었다. 부친은 일찍 1917년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하면서 늘 외지에서 활동했고 이 때문에 특무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조모는 고향을 떠나 만주에 이주할 것을 제의했다.
1920년, 어린 이재덕이 두 살을 넘기던 그 해 겨울 일가족은 솥 하나, 이불 두 채를 메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재덕은 그때 일가족이 밤중에 남몰래 도강했으며, 엄마가 그를 등에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있던 정경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부친에 대한 인상은… 저에게 매우 엄했습니다.”
부친 이상희는 중국에 온 후에도 계속 압록강을 넘나들며 조선 독립단체의 활동에 투신했다. 어느 한번의 전투에서 부친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집에 돌아와 요양했다. 이 기간은 어린 이재덕의 기억에 부친과 함께 있은 시간이 제일 오랜 나날이었다.
그때 어린 이재덕은 또래들과 함께 집 근처에서 술래놀이를 했다. 술래가 된 이재덕은 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또래들이 숨길 기다렸다. 마침 밖으로 나온 부친은 그녀가 엉덩이를 다 드러낸걸 보자 넉가래 같은 손바닥으로 엉덩짝을 철썩 두들겼다.
“다 큰 처녀애가 이게 무슨 해괴한 꼴이냐!”
부친은 이날 딸애에게 처음으로 매를 댔다. 부끄럽고 서러웠던 어린 이재덕은 엉엉 울면서 동네 이웃집으로 “가출”을 했다고 한다.
총상이 치유된 후 부친은 또 귀대하여 새로운 전투에 뛰어든다. 그러던 1923년 봄,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 후 옥중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서한이 중국으로 날아왔다.
부녀의 비운의 재회는 그로부터 약 70년 후 묘향산의 부친의 묘소에서 이뤄졌다.
각설하고, 아버지가 늘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친이 집의 버팀목으로 되었다. 할머니의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 농사일은 물론 집안의 잡다한 일도 모친 한 사람의 몫이었다.
“엄마와 할머니, 나 세 사람이 엄마 한 사람에게 의지해서 생활했습니다. 엄마는 정말로 견강한 여인이었습니다.”
훗날 모친도 부친처럼 반일운동에 투신하며 나중에 흑룡강성 탕원중심현(湯源中心縣) 당위원회 위원, 중심현 여성협회 주석으로 있었다. 1933년 10월, 모친은 배신자의 밀고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이때 수감된 공산당원, 적극분자 11명과 함께 학립(鶴立) 일본헌병대의 뜰에 있던 옛 우물에 생매장되었다.
이 무렵 탕원 지역에는 항일유격대가 설립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초기의 성원이 20여명에 불과한 이 탕원 반일유격대는 나중에 4,500명 규모의 항일연군 제6군단으로 발전한다. 1934년 유격대가 산속으로 이동할 때 어린 이재덕은 단연히 유격대에 입대를 탄원한다. 집안에 홀로 남은 그녀는 유격대에 가입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유격대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대원이었다.
 
비밀신호, 장작더미에 덮인 백포白布) 이야기
사실상 이재덕은 어릴 때부터 항일운동에 투신하고 있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일찍 항일투사였던 부모의 영향을 받았고 또 학교를 다니면서 조선인 혁명가의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1927년, 아홉 살 나이의 이재덕은 탕원현 하서툰의 모범학교에 제1진으로 입학한다. 이듬해 최석천(崔石泉, 일명 최용건)이 학교 관리를 담당하며 교장으로 있었다. 최석천은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제1부수상으로 있었다. 학교명 “모범”은 바로 그와 같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학교를 근거지로 삼아 혁명의 후대를 육성하려는 결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동구 밖 저습지의 풀밭에서 “나쁜 놈”을 붙잡던 일은 어린 이재덕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조직하여 자주 야전연습을 벌였다. 어느 날 자정에 긴급집합 신호가 울렸다. 학생들은 대여섯 명이 한 팀으로 되어 동구 밖의 저습지에 가서 “나쁜 놈”을 잡았다. 키를 넘는 풀밭에는 무덤이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귀신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긴장하고도 흥분했다. 나중에 무덤을 포위하고 다가가 보니 교원 두 명이 무덤가에 앉아있었고, “귀신불”은 그들이 피우는 담배의 불빛이었다. 이런 연습은 학생들의 담을 길러주었다.
이재덕이 살던 하서툰(河西屯)은 한때 중공 탕원현 당위원회의 임시 주둔지로 있었다. 사람들은 일본군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해 안전가옥으로 마을 산기슭에 움을 몇 개 팠다. 움 하나는 한 번에 서너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평소에 간부들과 젊은 단원들은 모두 움에 숨어 있었다. 이때 이재덕은 마을 공산당 청년단 소조장으로 있었다.
그녀의 기억에는 병상의 흰 이불처럼 하얀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동네 어구의 장작더미에 백포를 덮으면 적정이 없다는 신호였지요. 백포가 없으면 적정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재덕은 어느덧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원숙한 비밀 항일요원으로 되고 있었다.
언제인가 어린 이재덕은 조직의 긴급서한을 전달하다가 일본군 병사와 맞닥뜨리지만, 들나물을 캐러 나왔다고 하면서 임기응변을 하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격대에 가입한 후 그녀는 첫 전투에서 여전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유격대는 탕원 경찰대대와 뜻하지 않는 조우전을 벌였는데, 기관총 소리가 연발로 요란하게 터지자 이재덕 등 여대원들은 급급히 산위로 뛰었던 것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이 기관총은 아군 대원이 쏜 것이었으며 이에 두려운 경찰대대는 황망히 도망했다고 한다.
  밀림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이재덕은 점차 본격적인 “전사”로 성장했다.
  솔직히 유격대 시절 그녀에게 총탄보다 더 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었다. 그 무렵 동만주 일대에서 “민생단(民生團)”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조선인을 위주로 하는 친일단체 “민생단”이 유격대를 와해하려 시도한다는 것. 이재덕의 주변의 많은 조선인 전우들이 억울하게 “민생단”으로 몰려서 처형되었다. 그때 동만주에서 “민생단” 사건으로 최소 수백명의 조선인이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이재덕은 부대에서 오해를 빚지 않기 위해 조선인과도 중국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8.15 광복 직후 연변에서 관원으로 있을 때 우리말은 벌써 중국말보다 더 생소한 타민족의 언어처럼 되고 있었다.
 
김일성 대위가 연어를 잡아온 이야기
  일명 마발(馬勃)이라고 불리는 야생 버섯의 검은색 분말을 상처에 뿌리면 소염과 살균 역할을 한다. 또 로오안(老烏眼)의 나무껍질은 물로 끓인 후 상처를 씻을 수 있다…
  이 민간처방은 훗날 깊은 산속에서 산후 후유중의 부종으로 고생하던 이재덕을 사선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입대한 후 부상자를 간호, 치료하는 등 비전투원으로 있으면서 이런 민간처방에 익숙했던 것이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재덕은 1937년 7월 우보합(于保合)과 북만주의 밀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보합은 동북항일연군의 유명한 지휘관이며 무선전신 전문가이다. 이때 동북항일연군의 창시자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 그들 신혼부부의 주례를 섰다고 한다.
  이재덕은 결혼 후 주보합을 따라 유명한 항일장령 조상지(趙尙志, 1908~1942) 수하의 제2로군 32대대에 가게 된다.
  이듬해인 1938년의 겨울, 동북항일연군은 제일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남편 우보합은 발가락이 비죽 내민 양말을 신었는데, 두 발이 얼어서 빵처럼 부어올랐다고 한다. 일부 전사들은 나무껍질로 신을 삼아 신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민간처방”은 일본군의 미친 듯한 숙청과 포위 등으로 인한 급양과 물자의 결핍을 메울 수 없었다.
  이해 연말, 이재덕이 소속한 대대 300여명의 대오에는 불과 37명밖에 남지 않았다. 북만 항일연군의 기본대오는 손실이 심각했으며 전투인원이 무려 2/3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1940년 초, 동북의 유일한 항일무장을 보존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은 전략적인 전이를 단행했다. 일부 부대가 동북에 남아 전투를 견지하고 대부분의 부대는 육속 소련 극동지역에 철퇴했다.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된 항일연군 교도여단이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여단의 번호는 소련 극동방면군 독립 제88보병여단이었으며 대외번호는 8461보병특별여단이었다.
  “(조선의) 김일성(주석)을 잘 알아요. 야영(野營) 시절에 함께 있었으니까요.” 이재덕은 그 시기를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영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항일연군 전사들이 집중되었던 훈련 숙영지로, 남북에 각기 한 개씩 있었다. 남과 북 야영을 토대로 삼아 88여단이 창립되었던 것이다.
  88여단은 혼성(混成) 여단으로 일명 “국제여단”이라고 불렀다. 반은 소련인이고 반은 동북항일연군의 중국인과 조선인이었다. 여단은 아래에 다섯 개 대대를 설치했는데, 제1대대 대대장이 바로 훗날 조선 국가주석을 지낸 김일성 대위였다.
  1943년 8월, 이재덕이 맏딸을 출산했을 때 김일성 대위는 전사를 시켜 우쑤리강에서 잡은 큰 연어 두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고 한다. 훗날 김일성 대위는 일부러 숙영지에 위문을 오기까지 했다.
  기실 이재덕은 김일성 대위보다는 김정숙과 익숙했고 가까웠다. 김정숙은 김일성 대위의 부인으로 이재덕과 함께 통신대대의 중국소대 1분대 대원으로 있었다. 1분대는 2, 3분대와 달리 전부 여성으로 구성된 분대였다.
  탁아소는 부대 숙영지에서 몇 리 정도 상거했다. 엄마들은 밤낮으로 탁아소에 가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말째였다. 그래서 이재덕은 여느 엄마들처럼 탁아소에 갈 때면 다른 아기들에게 자주 젖을 물렸다. 통신대대 여전우의 자식들은 나이가 모두 비슷했는데, 와중에 이재덕의 맏딸이 제일 어렸다고 한다.
 
백년 전설의 후기
  8.15 광복 후 이재덕은 남편 우보합을 따라 중국에 남는다. 그녀처럼 남편을 따라 중국에 남은 조선인은 또 한 고향의 조선인 전우 이민이 있었다.
  “어머니가 중국에 남은 건 주요하게 중국사람인 아버지와 결혼했기 때문이지요.” 병시중을 들던 이재덕의 넷째 아들 우광(于光)이 이렇게 해석했다.
  “그때 이숙정(李淑貞)과 같은 중국인이 조선으로 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숙정은 88여단 시절에 조선인 전우 김경석(金京石, 평양시 초대 시장)과 결혼했지요.”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 그리고 옛 전우와의 재회는 그로부터 3년 후 이뤄졌다.
  1948년 11월, 그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을 경축하기 위한 중국 조선인대표단의 일행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흐른 1992년 4월 이재덕은 김일성 주석의 특별초청으로 김일성 탄신 80주년 축제에 참가했다.
  극적인 이야기는 또 하나 있다. 이재덕은 1953년 6월 비로소 중국 정무원(국무원) 관원이 전달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가입 임시증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에 앞서 1950년 정무원 비서청의 기밀비서로 있으면서 정무원의 기밀문서와 정무원의 “옥새”, 주은래 총리의 인감을 보관하고 있었다. 외국 국적의 여인이 정부 요해처와 요인의 “옥새”를 관리한 경이로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2015년은 중국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 깊은 해를 맞는 감수를 묻자 이재덕은 금세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었다. 불시에 목이 꽉 멘 듯 한겻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상불 70년 전 만주의 이름 없는 산과 강에 쓸쓸히 사라진 전우들이 슬픈 기억으로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만주의 광야에 외롭게 서있는 백년 고목이 눈앞에 하나의 비석처럼 부옇게 떠오르고 있었다.*
 
        (민족단결 2015.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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