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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팔균회장-민족사업에는 정년퇴직이 없어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5월15일 11시10분    조회:8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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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시조선족련의회 로팔균회장의 마음다짐 

 60세를 종점으로 때가 되면 좋건 싫건 정년을 맞이해야 하는것은 공직사회의 불문칙이다. 평생의 정력을 몰부었던 정든 사업터를 떠나야 한다는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일, 더구나 사회적인정과 뭇사람들의 공경을 한 몸에 받아오던 지도적위치에서 물러나야 한다는것은 한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지도적위치에서 물러난 이들중에는 《리직》 또는 《퇴직후유증》이란 병아닌 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지도자로부터 평민으로의 과도기에서 중요한것은 《심리조절》이다. 심리조절이 잘돼야 마음의 평온을 찾을수 있고 여생을 더 보람차게 보낼수도 있다.

심양시 대동구의 원 정협주석 로팔균씨의 경우도 다를바 없다. 금년 2월 정년을 맞으며 허전해지는 마음을 눅잦힐수 없었지만 그는 마냥 소침해질수만은 없었다. 정년후에는 민족사업에 전격투신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기에 새 일터로 가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정년을 맞이할수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전에는 겸직으로 〈련의회〉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전직회장〉이 된 셈》이다. 

1970년 료녕대학 화학학부를 졸업하고 심조1중에 배치받아 교편을 잡은 로팔균씨의 꿈은 훌륭한 교육자가 되는것이였다. 20대 한창나이에 정열적으로 사업해 4년만에 부교장으로 발탁되였으며 2년후인 1976년에는 황고구위에 뽑혀올라갔고 또 2년후에는 심양시 170중의 부교장, 당총지서기직을 담임하였다. 1982년에는 황고구교육국 부국장, 당조부서기로, 1983년에는 황고구부구장으로 발탁돼 련 3기 근무하다가 1993년에 구위부서기, 상무부서기로, 2000년에 대동구위 부서기 겸 정협주석으로 전근했다. 

30여년에 걸친 공직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큰 좌절 한번 겪지 않고 무난히 정년때까지 직무에 충실할수 있었다. 수십년의 공직생활을 돌이켜보며 로팔균씨는 두가지 면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첫째는 《정정당당하게 벼슬한다》(堂堂正正作官)는 자신의 신조에 항상 충직했고 둘째는 본 민족을 위해 나름대로 보람찬 일을 해왔다는것이다. 

정치무대라고 순결하지만은 않고 무릉도원(世外桃園)은 더욱 아니다. 당과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도 인간인만큼 각종 유혹에 로출되여있고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팽창하는 물욕을 억누르지 못해 흔히 권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는 부정부패에 련루된다. 이 면에서 로팔균씨는 항상 《청렴한 관리》형상을 보여주었다. 수십년의 관직생활에서 그는 경제비리에 말려든적이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급을 추기 위해 상급에 회뢰하는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로팔균씨에게는 례외였다. 조선족간부로서 그가 그만한 위치에 오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사업에서 능력을 보여주었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당당하고 할 말을 할수 있었다. 

재직시절 그는 본 민족을 위한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황고구 부구장, 부서기시절 그는 문교위생을 주관했는데 80년대 일제시절 옛건물에서 고생하던 명렴로조선족소학교(현 화신조선족소학교》와 주강가조선족소학교는 그가 직접 나서 자금문제를 풀어주어 새 교수청사를 지을수 있었다. 명렴로학교는 그의 도움으로 교원사택까지 일부분 해결할수 있었다. 모교인 심조1중에도 경제적으로는 크게 도와주지 못했지만 교원전근같은 문제로 찾아오면 발벗고나서 해결해주었다. 우홍구 《화신그룹》(원 화평촌)태생이라 심양에 그를 잘아는 사람들도 많아 그의 사무실에는 항상 찾아오는 조선족들이 많았는데 그는 싫은티를 내지 않고 자기의 능력범위에서 해결해줄만한 일은 밀어버리지 않았다. 아빠트재개발로 인한 파가이주(動遷), 교원의료비결산문제 등으로 찾아오는 조선족들을 얼마나 접대했는지 그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2003년 그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회장으로 추대되였다. 《련의회》회장단 출범시 그는 《련의회》는 심양지역조선족들을 묶어세워 민족의 전통문화를 발굴, 발양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키우고 얼을 지켜가는 리드역할, 교두보역할을 충분히 해야 한다고 《련의회》의 취지를 력설하였다. 

정치무대라고 순결하지만은 않고 무릉도원(世外桃園)은 더욱 아니다. 당과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도 인간인만큼 각종 유혹에 로출되여있고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팽창하는 물욕을 억누르지 못해 흔히 권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는 부정부패에 련루된다. 이 면에서 로팔균씨는 항상 《청렴한 관리》형상을 보여주었다. 수십년의 관직생활에서 그는 경제비리에 말려든적이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급을 추기 위해 상급에 회뢰하는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로팔균씨에게는 례외였다. 조선족간부로서 그가 그만한 위치에 오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사업에서 능력을 보여주었기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당당하게 할 말을 할수 있었다. 

재직시절 그는 본 민족을 위한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황고구 부구장, 부서기시절 그는 문교위생을 주관했는데 1980년대 일제시절 옛건물에서 고생하던 명렴로조선족소학교(현 화신조선족소학교》와 주강가조선족소학교는 그가 직접 나서 자금문제를 풀어주어 새 교수청사를 지을수 있었다. 명렴로학교는 그의 도움으로 교원사택까지 일부분 해결할수 있었다. 모교인 심조1중에도 경제적으로는 크게 도와주지 못했지만 교원전근같은 문제로 찾아오면 발벗고나서 해결해주었다. 우홍구 《화신그룹》(원 화평촌)태생이라 심양에 그를 잘아는 사람들도 많아 그의 사무실에는 항상 찾아오는 조선족들이 많았는데 그는 싫은티를 내지 않고 자기의 능력범위에서 해결해줄만한 일은 밀어버리지 않았다. 아빠트재개발로 인한 파가이주, 교원의료비결산문제 등으로 찾아오는 조선족들을 얼마나 접대했는지 그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2003년 그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회장으로 추대되였다. 《련의회》회장단 출범시 그는 《련의회》는 심양지역조선족들을 묶어세워 민족의 전통문화를 발굴, 발양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키우고 얼을 지켜가는 리드역할, 교두보역할을 충분히 해야 한다고 《련의회》의 취지를 력설하였다.  

지난 수년간 그는 《련의회》의 이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였다. 우선 조선족사회 각 계의 열성을 충분히 발동시키기 위해 산하단체들을 많이 내왔는데 《련의회》의 버팀목으로 되여주고있는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를 발족하였고 이어 《교육협회》, 《예술가협회》, 《태권도협회》(민속운동협회), 《료식협회》, 《골프협회》, 《시조문학회》 등을 선후로 발족시켰다. 원래 있던 《녀성협회》 등을 합치면 산하에 2급 《협회》들이 13개에 달한다. 공식등록을 한 《심양시조선족로인협회》와 《심양시조선족문학회》도 자금난으로 고생하다가 《심양시조선족련의회》를 큰 집으로 삼았다. 이외 일찍 세워진 소가툰분회외 동릉구, 황고구, 우홍구분회가 설립되였다. 

《련의회》의 새 회장단이 출범한 지난 몇년 심양지역의 조선족활동은 전례없는 호황기를 맞았다. 2004년 12년간 중단되였던 《심양시조선족 6??북릉유원활동》이 회복되였다. 조선족의 모임날이면 400년전 청조의 왕실공원이였던 《북릉공원》안의 소나무숲에는 조선족천지다.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학교별, 직장별, 촌과 로인협회를 단위로 모여앉아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우수교사표창식이 거행되고 문예공연이 펼쳐져 민족적정서를 만끽해본다. 여러가지 뜻을 담아 펼치는 《북릉유원활동》은 심양지역 조선족들이 기다리는 명브랜드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심양지역의 가장 큰 조선족행사인 《민속축제》가 해마다 원만히 펼쳐졌다. 민속축제에 기업, 농촌, 학교 그리고 각 사회단체들이 적극 동참, 60여개 팀이 나와 수천명에 달하는 겨레관중들앞에서 씨름, 그네, 널뛰기 등 30여개 전통민속운동항목을 두고 각축을 벌리며 학교, 로인협회 등은 춤과 노래실력을 겨룬다. 시조선족기업가협회축구단과 재심양한국인협회축구단의 친선경기도 펼쳐진다. 실로 겨레들의 마음을 들뛰게 하는 축제다. 

《련의회》는 우리 민족 어린이들의 글재주를 키워주자는 취지하에 해마다 즉석작문콩클을 진행해오고있으며 얼마전에는 《심양시조선족꼬마작가협회》를 발족, 그 회원이 100명에 달한다. 

지난해 《련의회》는 교사절을 맞아 《련의회》이름으로 성대한 우수교원표창대회를 열었다. 심양지역 각 조선족중소학교(사범)에서 추천한 8명의 《명교원》 및 2006년 전 성 문과장원 박정영학생과 담임교원이 푸짐한 물질장려를 받았다. 각 분회에서도 지역학교의 빈곤학생과 빈곤호부축활동을 꾸준히 해오고있는데 동릉분회에서는 해마다 설이면 수십세대에 달하는 빈곤호들을 방문해 보조금을 전달해주고 수십명의 빈곤호학생들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준다. 

정년퇴직후의 타산을 묻자 로팔균씨는 산하 기업가협회 기업들을 틈틈히 방문해 정감을 교류하는 한편 《련의회》이름으로 발간하는 《심양조선족》을 더 잘 꾸리고 《료녕조선문보》의 발전에 저그만한 힘이라도 보태고저 《코리안타운》을 합작해 꾸리기로 했다며 이젠 《잡지》와 《신문》의 총편집으로 되였으니 《문인》생활을 해봐야 할것 같다고 하였다.

 리덕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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