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휘남현 루가조선족향 농민 김삼덕의 창업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5월31일 08시21분    조회:725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한수교 이후 한국기업의 대거 중국진출은 조선족들에게 취직과 창업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취직하여 불과 몇년 사이에 말단직원으로부터 관리층으로 승진하였고 일부는 선진적 관리방법과 생산기술을 터득한 후 자체로 기업을 꾸려 성공하기도 했다.

한국기업의 일개 고용원으로부터 산동성 굴지의 기업인으로 성장한 길림성 휘남현 루가조선족향 룡광촌의 김삼덕은 그중 성공한 창업자의 대표라고 할수 있다.

맨 주먹의 사나이 청도시로 진출

1989년 봄, 룡광촌에서 농사를 짓던 김삼덕부부는 8살 나는 큰딸과 3살밖에 안되는 둘째딸을 형님네 집에 맡기고 친구들로부터 몇백원의 로비를 얻어가지고 산동성 청도시로 돈벌이를 떠났다.

1983년 결혼때 형님이 살림집까지 사주었으나 도박에 집까지 날려버리고 다시 형님네 집에 들어가 살아야 했던 김삼덕이다.

아홉식구가 비좁은 집에서 구차하게 붐비는 삶은 그의 마음을 늘 무겁게 짓누르고있었다. 신세를 고쳐보겠다고 형님이 구해준 돈 5000원을 들고 흑룡강에 가 대면적벼농사도 시도해 봤으나 경험부족으로 결국 페농하고 도망치다싶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본 촌에서 논 3헥타르를 도맡아 부쳤으나 그 수입으로 흑룡강에서 진 몇만원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수는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모험적으로 찾아 떠난 곳이 생면부지의 청도였던것이다.

청도에서 김삼덕부부는 한국독자기업인 동방양항복장회사에 취직하였다. 처음에 김삼덕은 회사의 현장 통역을 맡아보았는데 한국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하고 생산기술도 모르다나니 욕도 많이 먹고 수모도 많이 당하였다.

그래도 참아내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이듬해에는 대리로 승진하였다. 한국사장이 오다를 가져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박시의 복장공장을 찾아 생산을 조직하였다. 로임은 시초에 500원이던것이 1000원으로 올랐고 대리로 된 후에는 5000원을 받았다.

3년간 김삼덕부부는 아껴쓰면서 열심히 일해 10만원의 자금을 모았다. 동방양항복장회사에는 조선족직원이 30여명 되였는데 서로간 갈등이 많았다. 갈등이 갈수록 심해지자 1994년 5월 김삼덕은 자체로 기업을 꾸려볼 생각으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산동성 치박시로 떠났다.

우여곡절 겪으며 신용으로 성공길 개척

동방양항복장회사의 대리로 있던 기간 한국사장이 준 오다를 가지고 치박시를 자주 찾았던 김삼덕은 그곳의 복장공장을 너무나 익숙히 알고있었다. 하여 신심가득히 10만원을 지니고 치박시에 와 집을 잡고 자체 창업을 시도했으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바이어를 찾는 국제전화비에10만원을 다 날려 버렸는데 찾아오는 바이어는 하나도 없었다. 김삼덕은 회사를 그만둔것을 후회도 하고 혼자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3년간 부부가 아껴쓰면서 피땀흘려 번 돈을 허무하게 날리고 나니 앞길이 캄캄해났다.

김삼덕이 곤경에 처해 있던 1994년말, 한국 바이어 백일만이란 사람이 나타났다. 백일만사장은 김삼덕에게 청바지 5000견지의 오다를 주었는데 김삼덕은 질좋은 청바지를 1전의  커미션도 받지 않고 20일만에 무상으로 납품했다. 품질이 보장된 제품이 제때에 납품되자 백일만사장은 두번째로 청바지 오다 1만 5000견지를 주었는데 김삼덕은 청바지 한견지에 1원80전의 커미션을 받았다.

김삼덕이 신용을 지키고 바이어의 까다로운 요구에 맞는 제품을 제때에 조직해주자 백일만사장은 한국에서 캐주얼을 수입하려면 산동 치박시에 가서 김삼덕을 찾으라고 홍보했다.

그러자 1995년부터 한국바이어들이 물밀듯이 김삼덕을 찾아들어 그 혼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수 없을 지경이였다. 김삼덕은 사업관계로 친분이 깊은 치박시대외수송회사를 찾아 합작하자고 청들었다. 생산은 치박시대외수송회사에서 책임지고 오다는 김삼덕이 얻어오며 커미션은 김삼덕이 가지기로 하였다.

1995년 김삼덕은 100만 견지의 캐주얼을 수출, 300만원의 리윤을 창출하였다. 사업이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인 1997년,  한국에서 IMF외환위기가 발생하였다. 중국제품의 한국수출길이 막히고 한국으로 수출한 물건값도 돌아오지 않았다. 300만딸라를 날려버린 김삼덕은 하루 아침에 빈털털이로 되고 말았다.

한국의 경제가 좀 호전되자 3년간이나 김삼덕과 무역거래를 해온 서울 동대문시장의 리순자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래동안 중국물건이 한국시장에 들어가지 않아 지금 없어서 못파는 상황이라며 빠른 시일내에 5만견지의 캐주얼을 만들어 보내라는 요구였다. 재생의 기회를 찾은 김삼덕은 밤을 패면서 리순자사장의 오다를 조직하여 납품하였는데 그때로부터 그의 사업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하였고 사업이 순조로와 큰 자금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웅지 펼치며 굴지의 기업 창출

장사가 잘 되고 찾는 바이어 많아 오다가 넘쳐나자 김삼덕은 자체로 복장공장을 꾸릴 꿈을 꾸었다.

2000년초, 그는 한국에 가서 서울 동대문시장의 리순자사장을 찾았다. 손수 복장공장을 꾸릴 계획을 이야기하고 제품질을 높이고 생산원가를 낮추어 앞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리순자사장에게 납품하련다고 털어놓으면서 설비 살 돈 200만원(인민페)을  꾸어줄수 없겠냐고 했다.

김삼덕의 됨됨이를 잘 아는 리순자사장은 흔쾌히 인민페 200만원에 해당되는 한화를 꾸어주었다. 김삼덕은 이 돈으로 한국에서 설비를 구입, 치박시에서 2만평방메터 되는 공장건물을 임대하고 본격적인 창업을 시작하였다.

리순자사장의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고저 김삼덕은 납품할 때 캐주얼 한견지 가격을 0.2딸라 낮추어 주었는데 4년간 천만견지를 이 가격으로 제공하였다. 서로 믿고 밀어주는 이런 관계는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공장건물을 임대하여 쓰니3년 사이에 그 임대료만 100만원이 나갔다. 자기 소유의 공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김삼덕은 오랜 파트너인 치박시대외수송회사와 손잡고 주식회사인 흠동해복장유한회사를 건립하고 자신이 리사장을 맡았다.

2003년봄, 자금 400만원을 투자하여 치박시고신기술개발구에 3만 3000평방메터 되는 공장부지를 사놓고 2400만원을 투자하여 공장건물을 짓고 기계설비를 구입하였다. 그때로부터 김삼덕은 해마다 공장건설에 500만원씩 투자하면서 기업을 간단없이 키워나갔다.

현재 치박시흠동해복장유한회사 공장건물의 건축면적은 3만평방메터, 고정재산은 8000만원, 21개 생산라인에서 종업원 1200여명이 일하고있다.  해마다 나라에 상납하는 세금액은  1000만원 이상이다. 공장의 일당 청바지생산량은 만견지, 년간 수출액은 3800만딸라인데  주로 미국, 이딸리아, 독일, 한국, 일본, 카나다 등 나라로 수출하고있다.

치박시 주촌구에도 김삼덕의 개인공장이 있다. 건물면적은 4000평방메터, 직원은 280명이며  매년 생산해내는 100만견지의 복장을 전부 한국으로 수출한다.

이외 교주시에 흠동해분공장도 앉혔는데 임직원은 1000여명이다.

김삼덕의 흠동해복장유한회사는 현재 전국 복장동업종중 수출량 제98위, 산동성복장동업종중 수출량 제1위를 기록한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배우로부터 문화사업인으로 되기까지1990년대중반에 텔레비죤련속극 《사랑의 품》에서 어질기만 했던 백설이 친엄마배역을 맡은것을 계기로 여러부의 텔레비죤련속극과 연극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오향옥이 인제는 어엿한 문화사업인으로 변신하여 보람찬 사업을 펼쳐가고있다.최근에 연길에 온 그녀는 중앙...
  • 2009-07-20
  • 할빈 안중근사적전시관 장영철관장의 이야기◆ 전시관 관람객들에게 전부 무료 개방◆ 안해의 노래방 운영수입으로 운영◆ 의거 100주년 행사 일조해주길 할빈시 조선족사회에는 너나없이 새시대의 《민족영웅》이라 일컫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민족의 영웅이고 세계의 영웅인 안중근의사의 얼을 기리여 순수 개인의 힘으...
  • 2009-07-20
  • 연기생활에 몸담그어 26년 ―연변가무단 국가1급배우 리만수의 이야기 1983년에 연극 《우리 학교 철남이》에서 주요인물인 아버지역을 성공적으로 창조하면서 연기생활의 첫발자국을 멋지게 내디딘 국가1급배우 리만수 26년간의 피타는 노력을 거쳐 연변연극단 중견배우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 2009-07-17
  •    밥상과 맺은 인연     전통적으로 구들문화를 고수하며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의 밥상 또한 독특한 특징이 있다. 테이블형이 아닌 구들에 앉아 식사하기 편하도록 앉은뱅이형이다. 다년간 우리 민족 전통밥상생산에 종사해오며 회사를 탄탄하게 꾸려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심양신홍목업...
  • 2009-07-16
  • 연변주정부 리룡희주장이 공청단길림성위원회 서기로 재직시인 2003년 “중국조선족어린이들과 함께 한 20성상-한석윤”기념모임에 보낸 축하문에서 “…중국조선족어린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탁월한 공헌을 했고 …특히 소수민족어린이들의 신문사업발전을 위해 걸출한 공헌을 하여 공청단중앙의...
  • 2009-07-10
  • 북경에서 맹활약하는 부부방송원독자들은 1990년대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활약하던 부부아나운서 리철용과 김홍화를 기억하고있는지? 조선족이지만 한어말방송을 너무도 멋지게 하여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던 리철용(辛文)과 조선말 《요청한마당》사회를 많이 맡고 단아한 모습을 자랑하던 김홍화―10년전에 북경에 진...
  • 2009-07-08
  • ‘윤동주 시비, 생가, 기념비 건립에 앞장선 이윤기 소장창립 20주년 맞은 해외한민족연구소국제화 시대에 국경은 ‘국토’보다 ‘문화’와 ‘경제’를 토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현재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 동포는 800만이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용정에 ‘윤동주 시비&rsq...
  • 2009-07-06
  • 언제나 민족문화사업의 선두자가 되여 상지시조선족문화관 관장 리미영의 사업에서   (흑룡강신문=하얼빈)김동규 기자= 상지시에 가면 20여년을 조선족문화사업에 자신의 심혈을 고스란히 기울여 온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상지시조선족문화관...
  • 2009-07-06
  • 최보금씨 아나운서에서 인기프로의 프로듀서로—물 오른 《라디오소설》프로 인기브랜드로 부상요즘 개설 2주째를 맞은 연변인민방송국 “라지오소설”프로가 청취자들속에서  큰 인기를 얻고있다. 독서에 게으른 사람도 “라지오소설”프로를 통하여 음향, 효과, 해설, 배음 등으로 립...
  • 2009-07-03
  • 조선족걸립무 보급에 여생을 바치는 사람 일전에 있은 료녕성무형문화유산전시활동에서 본계시조선족걸립무 대표전승인인 김명환씨는 현장에서 조선족걸립무의 유래를 관중들에게 소개하면서 “조선족걸립무의 보급계승사업은 힘들지만 잘되고있다”고 표시했다.    올해 62세인 김명환씨는 1967년...
  • 2009-07-0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