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동희철작곡가의 평범한 가정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7월4일 08시05분    조회:934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안해에 대한 남다른 사랑
동희철선생의 평범한 가정이야기    
             
프로필
1929년 4월 13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남상동에서 출생
1934년 중국 간도에 이주
1944년 연길간도사도학교 본과 입학
1946년 중국인민해방군 길동군구 정치부 문예사업대대에서 바리톤 연주원으로 있음.
1966년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주임
1989년 적령리직
60여년간 음악생애에서 600여수에 달하는 음악작품 창작.

전국 작품평의에서 가요 《형제자매들 한자리에 모였네》(허동철 작사)가 1등상, 《선생님 들창가 지날 때마다》(김철 작사)가 2등상, 가무극 《로동경쟁승리후》(리영섭 극본)가 우수작품상 수상

첫 작곡집 《고향산기슭에서》(김경석 작사), 교정가요묶음으로 된 두번째 작곡집 《배움터의 멜로디》, 성인가요편으로 된 세번째 작곡집 《사랑의 메아리》, 김경석시인과의 합작편으로 된 네번째 작곡집 《인생반려》

《국가1급작곡가》로서 중국음악가협회 회원, 중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회원, 연변음악가협회 명예회장, 연변라지오텔레비죤예술단 명예단장,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교사연구회 고문, 연변문화발전촉진회 상무리사 등.

우리 민족의 출중한 음악가인 동희철선생은 력사적사명감과 책임감을 안고 노래로써 우리 민족의 혼을 살리기 위해 모든것을 바쳐왔다. 그 성공뒤에는 《무명영웅》 부인의 대공무사한 헌신이 있었다. 하여 동희철선생은 늘 《〈성공한 남자의 뒤에는 현명한 부인이 있다〉는 말이 나한테 딱 어울린다》고 습관처럼 말하군 한다.

평범한 농촌처녀와 결혼
1954년 9월, 연변고급중학교(지금의 룡정고급중학교)으로 전근할 때만 해도 동희철선생은 결혼하지 않았다. 워낙 인물체격이 좋은데다 예술에 장끼가 있어 가는곳마다 인기가 많았다. 그때 주말마다 룡정시 교외의 수남촌에 살고있는 부모집에 내려간 동희철선생은 수남촌 공청단 선전위원으로 활약하던 김영순의 부탁으로 공청단활동에 참가하여 노래를 배워주게 되였다. 그러던중  인물이 환하고 체격이 호리호리하며 노래를 잘 부르는 김영순과 사랑을 나누게 되였고 사귄지 4개월만인 12월 첫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결혼식을 올렸다. 

후에 학교에서 분배해준 룡정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여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였지만 그 사랑의 보금자리는 둘만의 공간이 아니였다. 동희철선생은 8남매중 넷째였고 아래로 동생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그들이 학교 가까이 있는 형님네 집에 와서 공부하였던것이다. 그때 한사람의 로임으로 시동생들의 공부뒤바라지에 살림까지 하다보니 생활이 쪼들렸지만 안해는 군소리 한번 없었다. 다른 딸들은 본가집을 섬긴다는데 김영순은 먹을 쌀이 떨어져 본가집에 가서 가져온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늘 부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있는 동희철선생은 《우리 로친 나 하나만 바라보고 시집와서 숱한 고생을 하였다》며 입버릇처럼 외우신다.

   지지리 가난했던 나날
1956년,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부 조장으로 전근한 동희철선생한테는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새로운 일터에서 음악편집을 함과 동시에 왕성한 정력으로 작곡하고 음악활동을 펼쳤다. 그러면서 선생은 아들딸 5남매를 보게 되였다. 

생활이 쪼들리자 부인은 선후로 연길시제함공장, 자전거수리공장, 분필공장 등 곳에서 로동자로 일했다. 일하면서 부인은 아이들을 돌보고 여가를 타서 석탄도 주어왔으며 교외에 밭을 일구어 남새를 심어 생활에 보탰다. 

그러나 고생은 계속되였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개조대상》이 된 동희철선생은 돈화 마호공사의 한 시골에 이사를 가게 되였다. 5남매를 이끌고 한족마을에 이사내려온 동희철선생은 농촌구락부활동을 조직하면서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바삐도는 동희철선생을 위해 부인은 농사일에 참가하는 한편 자녀교양은 물론 집안일을 도맡아하였다. 집집마다 남자들이 파는 김치움도 혼자 손으로 팠고 구들목도 남편이  나간 사이에 홀로 뜯었다. 어쩌다 도와주려고 해도 절대 시키지 않는 부인의 마음속에 동희철선생은 음악의 달인이자 예술의 신이였다.

다 주지 못한 자식사랑
5남매를 키우면서 동희철선생부부는 공부를 잘시켜 좋은 대학에 보내고싶었다. 그러나 사회환경과 가정환경때문에 자식농사만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큰아들 동호림은 부모를 따라 다시 연길로 올라왔지만 얼마 안지나 다시 돈화 마호공사의 한 시골에 지식청년으로 내려갔다. 후에 대학입시가 회복되였지만 시험자격을 가지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한테 《뒤문이 없으면 옆문이라도 뚫어달라》고 애걸했지만 워낙 정직했던 동희철선생은 아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후에 동호림은 연길시편직물공장에 취직하여 일하는 한편 대학공부를 하였고 다시 연길시 TV방송국으로 전근하였다. 

아버지의 장끼를 그대로 물려받은 막내딸 동옥선은 《국가1급무용가》로서 동희철선생의 자랑이였다.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부단장으로 사업하는 동옥선은 일찍 중국조선족 제1차 미인선발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경력도 있었다. 미모와 재간을 겸비한 딸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효녀이기도 했다.

큰딸 동옥금은 련합대학을 졸업하고 연변TV방송국 뉴스부에 배치받았다. 후에 신경관능증에 걸려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워낙 완치가 어려운 병이라 결국 국가2급장애인 진단을 받고 집에서 휴양하게 되였다. 그 휴양이 지금까지 계속되여 동희철선생부부는 마음고생을 많이도 하였다. 십여년간 한번도 약을 떨구지 않은 부인은 딸을 정규적으로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진받은후 약을 지어와서는 날마다 먹으라고 독촉한다. 심지어 자신이 고혈압으로 입원중이면서도 딸이 걱정되여 저녁이면 남편을 집에 돌아가서 쉬게 하는 부인을 두고 동희철선생은 《녀자가 약해도 어머니 되는데는 강하다〉는 우리 말이 안해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부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작년부터 고혈압으로 갑작스레 앓고있는 부인을 위해 동희철선생은 지금 대부분 시간을 병시중에 보내고있다. 그는 《남편과 자식에게 한평생을 바친 로친이 복을 많이 받고 행복해야 되는데 아직도 앓고있는 딸때문에 편안히 앓지도 못하여 너무나 안스럽고 불쌍하다》면서 소리를 싫어하는 부인을 위해 작년부터는 매일 한두시간씩 치던 피아노도 치지 않는다. 작년에는 부인과 함께 가끔 모아산에 소풍도 다녀왔지만 지금은 가까운 산책도 어려워하는 부인때문에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함께 보내면서 돌봐주고있다.

앓는 딸과 부인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때론 괴롭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사고로 지금까지 삶을 살아온 동희철선생은 《누가 만약 나더러 만년생활 어떠냐고 묻는다면 후회없는 인생살이 복받으며 산다하리》하고 말한다. 

동희철선생과 가족의 건강과 쾌차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안중근의사연구 국내 원시자료집 펴낸 조선족력사학자 할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 서명훈옹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격살과정을 과학적으로 밝혀◆ 해내외 안중근의사 연구학계에 일대 전기 마련◆ 의거 당시 매스컴의 반향을 발굴해 집대성◆ 405편의 글과 소식을 수집정리해 사진본으로 편찬 금년 3월 26일은...
  • 2010-03-29
  • 새로운 건축문화를 창조 (흑룡강신문=하얼빈) 이수봉 기자 = 할빈공업대학 토목학원 최창우 교수(박사, 47세, 연변 룡정시 출신)는 1986년 절강대학 토목공정학과를 졸업하고 연변과 대련 등지의 건축설계원에서 사업, 2002년 일본나고야대학 토목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졸업후 약 4년간 일본의 한 건축설계원에서 연구원...
  • 2010-03-28
  • 《영원한 고향의 멜로디》로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ㅡ60성상 음악창작의 외길만 걸어온 저명한 작곡가 동희철옹 《영원한 고향의 멜로디》로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 《고향산기슭에서》, 《형제자매들 한자리에 모였네》 등 대중이 즐겨부르는 허다한 인기가요들을 작곡하여 한세대 또 한세대...
  • 2010-03-25
  • —길림천우그룹 전규상회장을 찾아 사람의 내외면을 한꺼번에 표현할수 있는 단어가 있다. 터벅터벅 길을 걷다가 스치는 사람들속에서조차 공기처럼 쉽게 발견되는 , 그래서 어찌보면 더욱 느끼기 힘든 "사람의 향기"가 바로 그것이다. 길림천우그룹 전규상회장(57세}한테서 풍겨오는 사람의 향기는 바로 &...
  • 2010-03-24
  • 색소폰으로 엮은 예술인생  연길시문화관 국가2급연주원 김명일의 색소폰사랑“음악이 없는 생활은 살고싶지 않다”는 색소폰 연주가 겸 지도교수인 김명일선생은 현재 연길시문화관 음악부 주임, 연길시음악가협회 리사, 중국음악가협회 회원, 동북3성색소폰협회 리사, 중국색소폰협회 회원, 심양군구군악학교 ...
  • 2010-03-21
  •  심양 의류업계 선두주자 리영 심양서 처음으로 자체 녀성의류패션쇼 마련본사소식 1991년 의류업에 투신한이래 대외 오다가공과 자체 브랜드개발로 심양지역 의류업계의 선두주자로 거듭난 심양안나의류그룹 리영(조선족, 44)회장이 드디여 다년간의 숙원을 실현, 심양지역에서 처음으로 자체개발 녀성의류패션쇼...
  • 2010-03-19
  •  이민사 민간자격증 시험 수석 차지해  "외래어가 많아서 수업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는데 최고 점수로 합격해 놀랐어요."     지난해 8월 입국 후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다소 위축됐었다는 중국동포 김미란(25.길림성 연길시)씨는 요즘 들어 자신감과 웃음을 되찾았다.   &n...
  • 2010-03-17
  • 한 녀류작가의 희로애락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리혜선에 대한 이야기 련속 두기나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고있는 리혜선씨 1980년대 중반에 단편소설 《눈내리는 새벽길》을 《연변문예》에 발표한것을 계기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지난 25년간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으면서 볼거리가 있는 작품을 ...
  • 2010-03-16
  • 심양시 우홍구 싸강자에서 “김원경중의진료소”를 운영하고있는 김원경(71)의사가 발명한 “오시맥기문개혈반과 “기문침구시경반 ” 침구료법이 일전 국가지적재산권국의 심사를 거쳐 특허를 따내였다.    김원경의사가 50여년동안 연구를 거쳐 발명한 “오시맥기문개혈반&rdquo...
  • 2010-03-16
  •  심양시조선족문학회 제9기 회장 권춘철 인터뷰 권춘철프로필: 1964년심양시출생 중앙민족대학졸업 문학지"갈매기편집 료녕민족출판사편심정교수 현재료녕민족출판사총편집조리겸조선문편집실주임   수상 경력: 2007년중국조선어문사업선진개인표창 2009년제회세계한민족우수청년상수상 다년간책임편집...
  • 2010-03-1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