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명춘-30년 일편단심 상모춤사랑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3월7일 10시14분    조회:2056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국가급무형문화재종목 대표계승인 김명춘 후계자양성에 고민


지난 2월 28일,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제2기 국가급무형문화재 종목 대표계승인(第二批国家级非物质文化遗产项目代表性传承人) 명명 및 증서 수여식에는 문화부가 공포한 551명의 종목 대표계승인 가운데 100명만이 선정되여 참가하였는데 우리 주의 김명춘이 바로 그가운데의 한사람이다. 이로부터 그는 이미 “국보”(국가급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족농악무(상모춤)의 대표적인 계승인으로 명명된것이다.

1977년,  연변 상모춤의 고향 왕청현 배초구 길상촌 과외선전대에서 활동하던 시기, 그 어느 춤에 비해 상모춤에 자석처럼 끌려 처음으로 상모를 돌리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장장 30여년 동안 상모만 돌려온 김명춘, 야장쟁이처럼 직접 손으로 알루미니움그릇을 두드려 상모의 벙거지를 만들고 농촌에서 쇠줄조차도 얻기 힘들어 자전거살을 빼내여 상모의 물채를 만들었던 그는 이젠 아예 손에 익어 벙거지, 징쟈, 물채, 짓(상모의 각 부분) 등을 자기 요구에 따라 재료별로 자유로 선택하여 만들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성급, 국가급 상을 수십차 수상했고 국경 40돐 기념행사, 오문회귀문예야회 등 국가의 큰 행사에서도 화려한 모습으로 상모춤을 표현했던 그는 28메터 되는 긴 장상모를 돌리는 순간만큼 행복했던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제 50대에 들어선 그는 상모춤은 비록 서민적인 농악무라지만 예전처럼 농민이나 과외인들에 의해서는 기술적으로 질제고를 가져올수 없다면서 요즘은 상모춤 후대양성과 상모춤 리론연구 및 해외와의 교류 등 문제로 고민중이다.


북경에서 돌아온 이튿날 기자가 만난 김명춘은 우리 주에서 유일하게 “국보”의 대표계승인으로 된 크나큰 영예를 안고도, 국가문화부에서 수여한 증서를 앞에 놓고도 얼굴은 별로 밝지를 못했다. 국가로부터 조선족농악무의 대표적인 계승인이라는 영예를 준것은 동시에 그에게 차세대 계승인을 양성할 의무를 맡긴것인데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거리가 바로 후대양성문제였던것이다.  작년 9월, 왕청현문화관에 상모춤예술단이라는 현판을 걸었지만 사실 예술단에서 상모춤을 열심히 배우고있는 배우들은 대부분 한족이라는것 그리고 이제 50대에 이른 그의 춤동작을 초과할 젊은이를 찾지 못해 안타까운 그는 어쩌면 연변에서 상모를 돌리면서 동시에 몸을 옆으로 회전하는 고난도동작인 “잡아뛰기”를 할수 있는 조선족배우가 이제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으로 마음이 아프다. 몇년전까지만도 이런 “잡아뛰기”를 할수 있는 조선족배우가 있었지만 그 배우마저 2005년에 한국으로 돈벌러 가버리자 현재는 연변에 이 춤동작을 할수 있는 배우가 없다고 한다. 한족배우들은 열심히 배우려고 하지만 민족의 정서라는 한계때문에 조선족배우만큼 조선족전통음악의 리듬을 잘 탈줄 모른다고 한다. 하여 김명춘은 요즘 조선족녀성배우들에게 상모춤을 배워줄 계획을 세우고있다. 상모는 원래 남자가 돌리지만 현재 조선족 젊은 남자들이 상모에 애착을 갖고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는 녀성배우들에게라도 전수할수밖에 없다고 한다.

상모춤 대표계승인이라는 영예를 인생의 두번째 이름으로 소중히 여긴다는 김명춘, 상모춤은 애착과 사랑 그리고 집착이 없이는 절대 쉽게 배울수 있는 춤이 아니라는 김명춘은 집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손수 만든 상모를 정중하게 “모셔”놓고있었다. 30여년 동안 상모와 함께 한 그의 장인정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30여년 동안 상모춤만 사랑해온 일편단심과 상모춤에 쏟아부은 피땀이 있었기에 우리의 농악무(상모춤)가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될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강정숙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강유진 군은 2005년 재학시 앤아버 시의원직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3년만에 의원보다 더 나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라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강 군은 지난해 11월 10일 비행기에 오르면서 오바마 후보가 강유진 군의 등을 치며 격려하는 사진과 12월 21일 하와이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골프...
  • 2009-05-26
  • 1흔히 기자들을 일컬어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라 칭한다. 견문이 많아야 현장감이 있는 신문기사를 많이 써낼수 있다느 말로 풀이된다.  하지만 음악가가 발로 뛴다면 보편적인 통념을 거부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통념을 깨친 음악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중국조선족민 간음악집》(이하 음악집으로 략함)을 펴낸...
  • 2009-05-22
  • “성공자의 과거가 비참할수록 행복하다.” 한국련속극에 나오는 이 대사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예술인이 있다. 가요 “모두다 갔다”, “인생살이”, “금이야”, “마음부자 제일부자” 등 노래를 불러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안은 대중가수 최승화, 신물나는 가난...
  • 2009-05-22
  • “동포연구 ‘한우물 파기’ 올해로 20년 맞았다”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 다음달 1일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식 개최 동포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던 1989년부터 중국과 CIS지역 동포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해외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사진)가 다음달 1일로 창립 20주년을 맞...
  • 2009-05-21
  • 지난 12일, 금융위기와 조선족기업경제발전 포럼에 참석한 장춘(长春)의 대화호텔 이규광 동사장이 포럼을 통해 '건전한 기업과 충실한 경영가가 되는 길'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규광 동사장은 "창춘은 정치와 문화가 함께 발달한 도시로써 창춘의 기업인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경제활동에서 치밀한 ...
  • 2009-05-18
  • "평범속의 휘황" -조선예술품소장애호가 위배평 취재기 중조수교 60주년을 맞으며 가동된 "중조친선의 해"를 계기로 조선예술품 소장가 위배평씨를 취재하기위해 그의 사업터를 찾은 것은 해빛도 따사로운 5월의 하루였다. 위배평씨의 사업터인 베이징시 공상행정관리국 해전분국 자죽원 공상소를...
  • 2009-05-16
  • 연변에서 코리아복장 유한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손향 동사장이 지난 13일, 금융위기와 중국조선족기업발전 포럼에 참석했다. "기업인들이 한대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문제점을 상호 보완해주는 자리라 생각돼 바쁜 일정에도 참석하게 됐다"고 포럼참석 계기를 밝혔다.손향 동사장은 "작년보다 참석 인원이 많...
  • 2009-05-15
  • 색스폰으로 엮는 연주와 전수의 인생—음악학원 군악학교 등에 18명의 제자 수송우리 연변은 해방전에 이미 규모를 갖춘 관악대가 여럿 있었고 해방후엔 학교를 위주로 각 현, 시마다 관악대가 활약했다. 또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관악연주가들을 양성해 국내 큰 악단은 물론 해방군 각 군악대에도 대량 수송했다. 오...
  • 2009-05-14
  • 20여년간 한 일터에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 현재 연변대학부속병원 영상1과 주임으로 활약하고있는 조지매는 대학입시를 회복한뒤의 첫 패 대학생으로 1982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의학원 의료전업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근무했다. 20여년간 그는 라사마냥 연변대학부속병원이라는 이 기계에서 착실하게 사업하면서 그...
  • 2009-05-14
  • 20여수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대중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곡가 고창모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운명적이였다.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된것도,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게 된것도, 연변에서 작곡생활을 하게 된것도… 청춘을 문화대혁명이란 특별한 시대에 보내게 되여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행...
  • 2009-05-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