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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범송-카메라와 더불어 60여성상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19일 14시44분    조회:7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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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촬영가 황범송선생의 예술인생

평생을 카메라와 동무하면서 “사진보도”로 유명한 원로촬영기자 황범송선생 선후로 연변일보사, 연변박물관, 주당위정보처, 비서처, 보밀실 등 부문에서사업하면서 무려 3만여점의 사진작품을 창작해내고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진자료를 수집,정리하여 연변의 촬영예술을 발전시키고 우리의 력사를 후세에 전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해온 선생이 지난 2008년 개혁개방 30돐을 기념하면서 펼쳐진 국가급평의에서 상을 따내여 뛰여난 촬영예술가로서의 품위를  또한번 떨쳤다.

스승을 찾아 700여일

1930년 7월 왕청현태생인 황범송이 사진에 대해 흥취를 가지기 시작한것은 하마탕향우급학교( 及 校)를 졸업하던 해인 13살 소년시절이였다. 

졸업을 앞두고 “이후 장군이 되라”고 간곡히 부탁하던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장차 무엇을 하면 장군이 될수 있을가?”라고 궁리를 거듭하던 그는 졸업사진을 찍으러 카메라를 메고온 사진사를 보는 순간 그처럼 사진을 찍어도 장군에 짝지지 않는 유능한 사람이 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사진기를 마련할수는 없었지만 꿈을 하루빨리 실천해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그는 대도시에 가서 사진기술을 배울 타산으로 무작정 집을 떠나 도보로 30리 상거한 대흥구로 갔다. 기차역까지 나갔지만 돈이 없어 기차표를 살수 없게 된 그는 서서히 움직이는 목단강행렬차를 바라보며 너무도 애가 타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기차의 시동과 함께 생긴 끌힘이 그를 끄당길줄이야? 얼결에 기차바곤 손잡이를 잡고 목단강까지 간 그는 시내의 사진관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제발 잔심부름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질 않았다.      

목당강에서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그는 슬그머니 할빈행기차에 올랐고 거기에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치치할, 장춘, 길림을 거쳐 집을 떠난지 2년만에 연길까지 왔다. 

고맙게도 일본 도꾜의 오렌따학원에 류학을 가서 4년간 사진을 전공한후 연길에 돌아와 사진관을 차린 김모웅선생이 나어린 그를 조수로 받아주었다. 간난신고끝에 꿈을 실현할수 있는 지름길을 더듬어낸 황범송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사진기술을 열심히 배우는 한편 시간만 있으면 선생이 대학에서 배우던 교과서를 뒤적이며 그 내용들을 밤낮으로 외웠다. 스승님 또한 한가지라도 더 배우지 못해 아글타글하는 꼬맹이가 대견해서 모든 기술을 다 전수해주기에 최선을 다하고 애지중지하는 서적까지 몽땅 물려주었다. 덕분에 그는 비교적 빠른 시간내에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독립적으로 사진작업을 할수 있는 기술수준을 구비하게 되였다.

사진기자의 사명감

16살때 전선원호사업에 참가하여 카메라를 메고 돈화, 라법, 신잠, 소구자, 로일령, 륙도하까지 갔다온 황범송선생은 그후 연길시공급판매합작총사 촬영부에서 사업하다 1952년부터 《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의 전신)  촬영기자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에 앉아서 취재대상이 오기를 무한정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불꽃튀는 생산투쟁속에, 인민대중의 생활속에 심입하여 다채로운 현실을 재현하고 가장 빠른 시간내에 보도를 해야 하는 신문촬영기자의 사업은 영광스럽고도 간고하였다. 

1954년 봄, 농촌에서 봄갈이차비를 다그치는 실태를 보도하기 위해 길을 떠난 황범송선생은 먼저 연길시 흥안향의 송인준농업생산합작사에서 “선종”장면을 찍은후 왕청현 중안향을 향해 발걸음을 다그쳤다. 의란진 구룡촌을 지나 류채촌에 이른 선생은 당지 농민들의 만류도 불구하고 거의 절반이나 걸음을 절약할수 있다는 지름길에 접어들었다. 마침 리화까지 가는 고부간을 만나 동행하게 되였는데 닭덕대고개를 넘어서 소소리높은 가둑나무사이를 누벼내려가노라니 길가에 사람의 수족과 머리만 남은 시체가 늘어져있고 저쪽에서 범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엔 마음을 더 크게 먹고 뛰지 말라”고 하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리화촌어구에 당도하니 혼비백산해서 먼저 뛰여온 고부간이 촌장네 집까지 안내해주었다. 

촌장은 그들이 닭덕대산을 넘어왔다는 말에 놀라운 표정을 보이더니 어제 의란구로 가던 사람이 범한테 물려죽은 사람을 보고 되돌아내려왔다고 하면서 “래일 아침에는 중평으로 해서 배초구쪽으로 돌아가라”고 강권을 했다. 그러나 길을 에돌아가면 70리, 쿨룽산을 넘어가면 20리라는 말에 그는 다음날 아침에도 지름길을 택했다.
시름은 놓을수 없게 된 주인집 로인이 칼로 보드랍게 썬 엽초와 성냥을 건네주며 이상한 소리가 나면 담배를 말아서 피우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로인이 준 엽초를 말아서 한모금씩 길게 빨아 연기를 뿜어올리면서 어헝소리가 나는 바위중턱 아래길을 지나서 목단천 서산중턱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목재를 실은 마차 한대가 수레길을 내려오고있었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달려내려간 선생은 목재우에 올라앉아 중안까지 가서 온상안에서 푸르싱싱 자라나는 담배모를 찍어가지고 귀로에 올랐다.

신문촬영기자로 사업하는 20년간 선생은 쩍하면 긴급취재임무를 수행하느라 한두끼씩 굶으며 뛰여다녔고 신문사에 돌아와서도 한시급히 사진을 현상해서 편집실에 교부하기 위해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바삐 돌아쳤다. 밤중에 귀가해서 늦은 저녁을 먹노라면 피곤기가 몰려들면서 온몸이 해나른해나기도 했지만 자기가 신고스레 찍어온 사진이 다음날 신문 1면 뚜렷한 자리에 실릴 때면 그동안의 고생이 말끔히 잊혀지면서 이름할수 없는 긍지감에 가슴을 설레이군 하였다.

“운좋은” 사진기자

황범송선생은 연변에 오신 중앙수뇌자들의 시찰장면을 렌즈에 담을수 있는 영광을 누린 “운좋은” 사진기자이다.  그동안 선생은 선후로 주은래, 주덕, 동필무, 박일파, 하룡, 류백승, 륙정일, 호요방, 등소평, 강택민, 리붕, 양상곤, 만리, 팽진, 교석, 주용기 등 부총리이상급 당과 국가지도자 50여명의 빛나는 형상을 촬영하여 연변사책에 올리였다.

모처럼 연변에 시찰을 내려오는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가까이에 모시고 사진촬영을 할수 있는 행운은 어느 사진기자에게나 다 차례지는것이 아니다. 그만큼 번마다 보다 멋진 장면을 렌즈에 담는것이 수행사진기자의 욕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촬영기자는 연출이 아니기에 때로는 머리속에서 오래동안 구상해온 장면이 형성되지 않아 애간장을 태우기도 한다. 

1983년 8월 등소평동지가 장백산에 오르실 때였다. 등소평동지가 수행인원들과 합영을 할 때까지도 리상적인 장면을 찍지 못한 선생은 안타까운 마음에 조남기동지의 곁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옆구리를 다쳐놓고는 옆으로 빠져 내려갔다. 선생의 의도를 눈치챈 조남기동지가 최림동지와 함께 등소평동지의 신변에 접근하여 장백산개황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때라고 선생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 감격적인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이리하여 심원한 력사적의의가 있는 예술적화폭이 만들어지게 되였는데 이 사진은 선후로 전국의 20여종 간행물에 발표되고 《등소평문집》에도 수록되였다.

강택민동지가 룡정시 동성용향 룡산촌 제4촌민소조에 내려가셨을 때였다. 강택민동지가 박만수농민네 집으로 들어가실 때 경호원들은 이 집엔 신화사기자들만 들어갈수 있다고 하면서 앞을 가로막았다. 기자로서 이 기회를 놓칠수 없다고 생각한 선생은 전장송비서장을 찾아 기어이 허락을 받아내고야말았다. 이리하여 황범송선생은 강택민총서기가 조선족농민 박만수네 집에 들어가 신을 벗고 조선족구들에 앉으신 장면, 조선족가마뚜껑을 열어보시고 널마루를 열고 부엌을 구경하시는 장면, 신기한 눈빛으로 찬장이며 이불장을 둘러보시는 장면…을 부지런히 찍었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강택민동지는 그 집만 방문하고 인차 연길로 돌아와 비행장으로 나가시였다. 하기에 지금도 선생은 당시의 정경을 회상하면서 “그때 체면만 차렸더라면 그런 장면은 영원히 찍을수 없었을것”이라고 하면서 감개무량해한다.

이밖에 선생은 연변에 들려가신 외국지도자들의 모습도 렌즈에 많이 담았는데 조선지도자 김일성동지가 도문에 들렸을 때 사진을 멋지게 찍었다고 칭찬을 받고 그후 초청에 의해 평양을 방문하는 향수를 누리기도 하였다. 

밀어버릴수 없는 의무

1972년에 연변박물관에 전근해간 황범송선생은 각종 전람의 수요에 의해 사진을 열심히 찍는 한편 중화민족의 반제반봉건투쟁력사와 우리 민속을 구김없이 반영할수 있는 사진자료들을 발굴, 복제, 정리하는것을 밀어버릴수 없는 의무로 간주해왔다. 

목표도 단서도 없는 자료수집사업은 겉으로 흘러보내는 시간이 많고 때로는 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령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선생은 갖은 방법을 다해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동북조선족천입사, 반일민족독립운동사, 항일투쟁사, 해방전쟁사를 형상적으로 보여줄수 있는 사진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선후로 동북문헌보관국(심양), 무순탄광문헌보관관, 대련문헌보관관을 참빗질하며 150여점의 사진자료들을 복제해왔다. 그리고 동북항일련군의 활동에 관련된 사진자료를 수집하던 1977년에는 30여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북경에 있는 주보중장군의 부인 왕일지녀사를 찾아가서 250여점의 자료들을 복제해옴과 동시에 70여권이나 되는 주보중장군의 일기책을 번지면서 동북항일련군 조선족 지휘관들의 성명과 직무, 전투성과를 밝힌 자료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1950년 10월 5일부 《인민일보》를 통해 모택동주석께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돐 경축행사에 참가한 소수민족대표단을 접견하실 때 연변조선족대표단이 선물로 드린 조선족두루마기를 받아입으신 모습을 본적 있는 선생은 그 사진의 원판을 보려고 신화사문헌보관관에 여러차나 다녀왔지만 헛물만 켰다. 그럼에도 선생은 포기를 하지 않고 그 사진을 찍은 정경강동지를 여러번이나 찾아가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귀중한 사진을 얻어왔다. 저명한 촬영기자인 정경강선생이 그 다음해인 1978년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하니 모주석께서 조선족두루마기를 입고계시는 사진은 하마트면 연변인민들앞에 재현되지 못할번했다.  

통계에 따르면 황범송선생이 촬영, 수집, 복제한 사진가운데서 3500여점이 선후로 《연변문물전람》, 《전국소수민족전람 조선족관》 등 대형전람에 전시되였고 1000여점이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등 책자와 화책에 수록되였다. 

그동안 여러 급별의 작품평의에서 묵직한 상들을 따내고 《중국 연변》, 《중국 제1자치주 연변》 등 작품집(화책)을 출판한 선생은 최근 2년간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덕수, 장덕강 등 동지들이 연변에서 사업하실 때의 모습을 담은 화책을 7권이나 출판하였다. 80고개를 바라보는 지금 선생은 평생 루적한 사진자료들을 정리하여 륙속 화책으로 만들어낼 타산으로 일감을 손에서 놓지 않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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