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함미자《고향무대에서 연변노래를 부르고싶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3일 11시23분    조회:738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국내의 첫 녀힙합그룹인 T.G.4는 노래 《날아라》 등으로 인기상승가도를 달리며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또 련속극 《아들딸들》, 《나비야 날아라》 등의 주제곡들을 불러 실력을 인정받았고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각 연예프로에 출연하여 여러가지 상을 받았으며 2004년에는 CCTV-1의 음력설야회에 출연하여 전국에 널리 알려지며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함미자씨는 그룹의 유일한 조선족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내 심장이 완전히 미쳐버렸어
나 한순간 사랑에 푹 빠져버렸어
끈적한 운명을 이제야 깨달았어
터질것 같은 내 마음
그를 가지고싶은 내 마음
………

자신이 작사하고 그룹 T.G.4중의 한 성원인 니니가 작곡한 노래 《분홍빛하트》로 2008년 연변TV음력설야회에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일 함미자가수가 화제를 모으고있다. 

아직도 연변노래를 많이 사랑하기에 모처럼 서게 된 고향무대에서 연변노래를 부르고싶지만 현재의 모습을 담은 노래를 초청해왔기에 열광적인 댄스를 곁들인 현대노래를 부르게 되여 조금은 아쉽다는 함미자씨, 그래도 자신이 작사한 노래를 고향사람들에게 선물하게 되여 가슴이 설레인단다.

고향을 떠난지 어언간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정말로 많은 일들이 발생하였다. 

되돌아보면 굽이굽이 고생도 많았지만 그속에서 성취감과 행복을 맛보면서 달고쓴 음악길을 달려왔다. 물론 가수로서 성공한것도 가슴뿌듯하지만 마음드는 남편과 결혼하여 떡판같은 아들을 본것이 더욱 행복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생활이 쪼들리지만 않았어도 예술학교를 끝마쳤을지도 모른다. 1982년 룡정에서 태여난 함미자씨는 어릴 때 어머니가 식당을 경영하여 남들보다 유족한 생활을 했었다. 비록 성악을 따로 배운적이 없었지만 유치원때부터 공연에 많이 참가하였던 함미자씨는 초중 1학년때 가수로 되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다행히 집에서도 귀여운 딸애를 가수로 양성하고싶어 강신자선생님한테서 가르침을 받게 하였다. 그때 일주일에 세번씩 룡정에서 연길로 오가면서 열심히 배운 덕분에 1997년 예술학교 음악반에 붙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로씨야에 돈벌러 간 아버지가 간경화복수로 앓으면서 번 돈을 다 밀어넣어 치료하였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거기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로씨야에서 장례를 치른후 고향에 돌아왔는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한달간이나 입원치료를 받아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가정의 중임이 가냘픈 어머니의 어깨에 떨어졌다. 소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과 한학기에 학비만 6천원씩 들어가는 함미자를 공부시키려고 어머니는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았다.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때문에 가슴아파하는 함미자씨에게 제일 큰 힘이 되여준분이 바로 스승인 강신자선생님이였다.  강신자선생님은 함미자씨의 가정형편을 헤아려 가끔 돈도 100원이나 200원씩 쥐여주며 힘을 북돋아주군 하였다. 그 덕분에 함미자씨는 더욱 이악스레 공부에 달아붙을수 있었다. 1998년 함미자씨는 강신자선생님의 추천으로 연변TV의 문예프로에 출연, 《내 고향 오솔길》을 불러 정식으로 데뷔를 하였다. 그렇게 이름을 알린후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불러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함미자씨는 어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의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2000년 함미자씨는 연변예술학원 성악학부(본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때 선배였던 아리랑그룹의 성원 진우를 만났는데 그는 북경백첩문화회사에서 새 그룹을 모집하고있으니 한번 면접시험을 보라고 권고했다. 함미자씨는 합격안되면 유람하는셈치려고 북경으로 떠났다. 

 시험에서 합격되여 미래의 동경을 안고 돌아온 함미자씨한테 집식구들은 한결같이 반대하여나섰다. 다행히 스승인 강신자선생님은 함미자의 실토정을 듣더니 《너의 의사를 존중한다. 큰 도시가 너한테 더 알맞는것 같다》며 적극적으로 지지하더니 직접 나서서 식구들을 설득해주었다. 그때 그녀는 속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꼭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지금도 함미자씨는 자신의 가수인생에서 큰 가르침을 준 강신자스승이 고마와 고향에 올 때마다 찾아서 인사를 드린다.
북경백첩문화회사와 5년간의 계약을 맺은 함미자씨한테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였다. 몇만명의 도전자들을 제치고 올라온 다른 세 성원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함미자씨는 그들과의 화합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중국어실력이 다른 성원들보다 차해서 여러가지 곤난을 겪기도 하였다. 첫해는 공연할수 없는 형편이라 로임을 타면서 그럭저럭 보냈지만 이듬해부터는 공연을 뛰여야만 수입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첫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지금도 사스가 돌 때의 그 어려웠던 나날들이 눈앞에 선하다. 당시 모든 출연이 끊어진 T.G.4 성원들은 무려 반년간이나 한세집에 갇혀있었다. 부모한테 손내밀수 없었던 그들 네 사람은 밥 2원어치와 1원짜리 국재료를 사다가 끓여서 끼니를 에우면서 지긋지긋한 사스가 빨리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한편 계속 련습을 견지하였다.
그렇게 타향에서 이런저런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함미자씨가 용하게 이겨낼수 있었던것은 바로 남자친구(지금의 남편)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북경에 간 해에 친구의 소개로 만난 7살이상인 남자친구는 개인사업을 하였는데 아주 자상하였다. 힘들어서 방황할 때마다 또 외지생활에 고독해할 때마다 말없이 옆에서 지켜준 남자친구가 그녀에게는 큰 힘이 되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함미자씨였기에 듬직하고 책임감이 강한 남자친구한테 더욱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도 많은 애로가 있었다. 리유라면 사회상의 예술하는 녀자에 대한 곱지 못한 시선들이였다. 함미자와 사귀는것을 모르는 친구들이 남자친구앞에서 함미자에 대한 좋지 못한 평가들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다고 친구들한테 《내가 사귀고있는 녀자니깐 그런 말들을 하지 말라》고 할수 없었던 남자친구는 함미자씨가 가수로 발전하는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은 친구들의 모임에 동행했는데 친구들이 TV에서 자주 보았지만 녀자친구인줄을 몰랐다면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날엔 친구들이 어려워서 말하지 않았지만 후에는 《하필이면 예술인을 찾았는가》하면서 《결혼까지는 가지 말라》고 반대까지도 했다. 

남자친구는 특히 인터넷뉴스에서 어느 가수가 감독과 어쩌느니 하는 기사들을 볼 때면 아주 기분이 언짢아하였다. 

그래서 함미자씨는 남자친구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자주 공연표를 가져다주면서 리해시켜보려고 하였다. 한번은 남자친구를 불러 성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듣고 표현도 보면서 그룹 자체를 리해해주기를 바랐다. 남자친구는 《TV에서 볼 때보다 실제 보니 더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잘한다고 승인은 하면서도 가수일을 그만두었으면 하는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 반대는 결혼후에도 계속되였다. 

사실 회사에서 결혼에 대해 반대하는 편이기에 그들 둘은 2006년 4년 련애끝에 고향으로 와서 슬그머니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후 남편이 사업하는 항주에 신혼집을 잡은 그들은 갈라져있는 시간이 만나는 시간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하루는 남편이 함미자씨한테 《내가 통계해보니 당신은 한달에 다섯번정도 집에 오는데 하루 자고는 이튿날 곧바로 북경에 날아간다》며 롱담조로 말했다.

남편이 가수일을 지지하지 않지만 자신의 꿈이였고 여직껏 해온 일이기에 버릴수 없었다는 함미자씨는 임신 6개월까지도 그 열광적인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였다. 그때 소속사에서 임신한 사실을 몰랐기에 진단서를 들여놓고 고향에 와서 아들을 출산한후 한달만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 공연에 참가할수 있었다는 함미자씨한테 시부모님이 제일 든든한 뒤심이였다. 가수며느리를 누구보다 리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시부모님들은 며느리가 시름놓고 노래부를수 있도록 지금까지 손자를 맡아키우고있다. 그래서 이제 막 두돐이 되는 아들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더 친근감을 가지고있으며 엄마는 그냥 사진속의 얼굴로 알고있다. 이번에 시댁에 와서 아들한테 《엄마 어디에 있어?》하고 물으니 글쎄 옆에 두고도 사진을 가리켜 사람들을 놀래웠다.
비록 아들이 자기를 몰라보아 가슴이 아팠지만 예술에 대한 애착이 여전한 함미자씨는 《앞으로 예술에서 더 성공하고싶을뿐더러 예술쎈터를 꾸려 많은 가수를 양성하고싶다》고 한다. 그런 함미자씨의 꿈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것을 축원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쓸쓸한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려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시작은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였다. 중국 옌볜에서 양팔이 없는 지체장애인 최금호씨를 사계절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담았다. 방송은 반응이 좋았지만 김광호 감독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싶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다큐멘터리에서 ...
  • 2008-07-04
  • 창립 4주년맞은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 대표 김해성 목사 ‘크레파스와 물감에 살색을 없애야....’ - 차별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진료 제공“감사하고 또 눈물이 납니다”국내에 하나뿐인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에서 만난 중국 심양이 고향인 김혜숙(52, 여)씨.김씨는 한국에 건너와 애기를 돌...
  • 2008-07-04
  • —현장총지휘 리종환씨를 만나 온몸으로 열심히 지휘하는 리종환씨,  그의 지휘하에 1만명도 훨씬 넘는 무용배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리종환씨는 이번에 자원봉사자로 나서 현장총지휘를 맡게 되였다. 연변군중예술관 부관장으로 대형행사때마다 총연출의 중임을 떠메였던 리종환씨는 퇴직한 몸이지...
  • 2008-06-29
  • 목단강지구 문과장원 - 외교관이 되고싶어요 대학입시 시험에서 659점의 성적, 흑룡강성 문과 장원의 663점 보다 4점이 떨어지는 성적을 따낸 해림시조선족중학교 고3-2반의 남홍옥학생이 목단강지구 문과 장원석에 올랐다. 《어제 저녁 동창들로부터 저의 시험성적을 알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해 기뻐 했는데...
  • 2008-06-28
  • 환자의 아픔은 곧 의사의 아픔입니다연변대학병원 중의과 김향숙주임의 진찰권을 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 기다려야 겨우 뗄수 있다고 한다. 진찰권이 긴장하다는것은 그만큼 의술이 높아 환자량이 많음을 의미하지만 김향숙주임의사는 "환자들이 병원의 지명도를 보고 찾아온것이지 저 개인을 보고 온것이 아닙니다&q...
  • 2008-06-27
  • 《떼떼부부》가 며느리를 보게 되였다. 즉 《작은 떼떼》가 사귀는 녀자친구를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시키러 온다. 그런데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며느리감을 보고 왕청같은 말들을 늘여놓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는 며느리감을 보고 말한다는것이 로친한테 대고 말한다. 그래서 김광철은 난처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사리밝고 례...
  • 2008-06-15
  • 2년에 국가특허발명 5건 농민발명가 천해룡(53세)씨는 다년간 모색과 연구끝에 지난해와 올 상반년짧은 2년여 기간 ‘다기능 비누곽’, ‘정량분유채취기’ 등 국가발명특허를 3건 획득하고 2건은 현재 신청 출원중에 있다. 흑룡강성 오상시 광휘향의 조선족 농민 천해룡씨는 지난해 5월 ‘다기능...
  • 2008-06-14
  • 박민자 연변가정연구소 소장 통일의 밑거름으로 조선족 활용 기대  “조선족의 중국 이민정착사는 150년이다. 만주 땅을 개간하고 중국을 건설하는데 기여하여 당당한 중국국민의 위치를 확보했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산업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코리안드...
  • 2008-06-13
  • "의사는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또 배운 리론지식과 실제경험들을 관통시켜야만이 진단의 정확률을 높일수 있다"고 늘 얘기하는  연변대학병원 소화내과 주임 박희서는 시골 아저씨와도 같은 소박하고도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평소 환자를 진찰하거나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할 때도 항상 차근차...
  • 2008-06-13
  • 중국관계자 중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난 두 차례의 한중올스타전 때 중국 올스타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방복순(69) 통역이었다. 방 통역의 한국과 인연은 벌써 18년이 넘어간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는 되지 않았지만, 스포츠 교류는 있었던 90년 김학영 국제심판과 중국인 심판의 가교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
  • 2008-06-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