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무순 조선족사회의 코기러기였던 고 박수빈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30일 23시27분    조회:876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무순 조선족사회의 코기러기


고 무순시조경협 리사장 박수빈선생을 추모하여

2009년 3월 22일, 장장 36년간(교육사업 39년)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한후 무순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사령탑을 맡아 10년을 숨가쁘게 일해온 박수빈선생이 70세를 일기로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그의 서거로 무순시 조선족사회는 우수한 코기러기를 잃었고 훌륭한 동지를 잃었으며 탁월한 사회활동가를 잃었다. 바로 며칠전까지만 해도 기자와 통화하면서 사업토론을 했고 서거하기 사흘전에도 출근했던 그가 아닌가. 참으로 갑자기, 너무 총망히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박수빈선생은 1939년 3월 15일 길림성 훈춘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4세때 부모를 따라 무순에 온 그는 무순시조1중을 졸업한후 료녕성농업기계학원 화학공정학부에 입학했다. 성적이 우수하였던 그는 1960년 대학생의 신분으로 료녕무선전학교에 교원으로 선임됐고 1962년 대학을 졸업한후 료양제1고중의 교원으로 배치되였다가 이듬해 무순시조1중 교원으로 전근, 선후하여 교연조장, 교무주임, 교장직을 맡고 많은 일들을 해왔다. 1977년에는 련속 5년간 졸업반 화학교수를 맡으면서 대학입시성적을 전 성 조선족고중의 첫자리로 이끌어올려 교육국으로부터 “대학입시 화학성적 1위”칭호를 받았고 무순시 선전사업자, 우수담임교원의 영예를 받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75년 교영공장에 있던 기간에는 무순화학섬유공장의 생산페액으로 수입크롬합성제를 대체할수 있는 공예기술을 연구해내여 전 시에 보급함으로써 좋은 경제효과를 창출해 시경제위원회의 표양을 받기도 했다.

  교장으로 된후 그는 학교관리를 실속있게 하여 선후로 “무순시문명학교”, “무순시록화선진단위”, “무순시위생사업선진단위”, “무순시화원식단위”, 전국민족교육선진단위” 등 칭호를 따내였고 그 개인은 선후 2회 신무구인민대표로 당선되였으며 무순시우수사상정치사업자, 료녕성중소학교우수교장 등 영예칭호를 받았다.

  1999년 박수빈선생은 정년퇴직하게 되였다. 이때 그의 앞에는 새 갈림길이 놓여있었다. 집에 돌아가 휴식하면서 만년의 천륜지락을 누리는것이 한갈래요 한 외자학교에서 우월한 로임대우를 조건으로 초빙하는 유혹이 한갈래이며 아무 로임대우도 없이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것이 한갈래였다. 박수빈선생은 제3자를 선택했다. 편하게 지낼수 있는 조건도 외면하고 돈을 벌수 있는 기회도 뿌리친채 왜 아무 보수도 명예도 바랄것 없이 힘들고 번거로운 사회단체를 그는 선택했을가. 그것은 조선족간부로서 모름지기 조선족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때문이였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회단체의 활동무대가 날로 커지고 그 역할 역시 날따라 중요해지고있으며 할일이 많으므로 이를 통해 조선족사회에 더욱 큰 기여를 할수 있다는 일종의 의무감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수십년간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많은 학생들은 물론 사회 모든 분야의 조선족 간부와 군중들을 수없이 접촉하면서 조선족사회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긍정면과 부정면 등을 두루 알고있으므로 이 부분의 사업을 잘해낼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도 갖고있었다. 주저없이 그는 무순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리사장으로 나섰고 퇴직한 이튿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협회사업중점으로 그가 첫번째로 내건 구호는 “교량, 봉사, 기여”였다. 즉 당정부문과 조선족대중의 교량역할을 하고 조선족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민족단결을 위해 기여한다는것. 그리고 그가 첫번째로 손을 댄것은 조선족교육의 분포조정문제였다. 그는 협회간부들과 함께 조선족학교들을 다니며 조사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정부에 반영함으로써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였으며 《료녕조선문보》의 지속발전문제, 민족향진합병후의 조선족간부사용문제 등을 상급 관계부문에 적극 반영하는외 조선족군중들에게는 관련 정책 등을 해석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줄였다.

  박수빈리사장과 협회간부들의 노력으로 조선족사회의 다채롭고 활발한 문화활동이 늘어난것은 협회사업의 일상적인 사업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 이를테면 해마다 전개되는 민속축제나 각종 체육운동대회, 봄맞이문예야회, 로년예술축제, 청소년문예콩클, 각종 보고회나 기념대회, 서화전시,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활동들은 조선족들의 응집력과 단합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최근년래 한국로무가 활발해지면서 가정문제, 자녀문제 등이 조선족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였다. 협회에서는 이들의 뒤근심을 덜어주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한국로무인원들의 자녀들을 조직해 한국에 나가 부모를 만나게 했는데 지금까지 연 300여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또 백혈병환자학생을 위해 사회모금활동을 조직하는 등 군중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기에 적극 나섰다.

  박수빈리사장은 또 무순시의 유일한 조선족양로센터를 세우고 사회의 도움을 쟁취해 건물을 짓고 살림을 차려주며 봉사를 따라세우는 등 작업을 깐지게 하였다. 현재 100여명의 조선족로인들이 이 양로센터에서 생활하고있는데 착실한 우질봉사로 입양자들은 물론 사회의 보편적인 호평을 받고있다.

 이외에도 협회의 다양한 활동을 위한 경비문제, 조선족간부등용문제, 투자유치활동과 무순에 투자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다방면의 봉사, 불우이웃돕기 등∼ 박수빈리사장이 협회간부들을 이끌고 조선족사회를 위해 해놓은 일은 이루 말할수 없다. 이렇듯 빈틈없는 조직력과 믿음성 있는 착실한 봉사 등으로 협회는 무순시 조선족사회의 “정부”로, 기둥으로,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협회사업이 정규적인 궤도에 오르고 새로운 발전을 시도하고있는 때 박수빈선생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이는 무순시조선족사회의 손실일뿐 아니라 료녕성 조선족사회의 손실이다. 그는 갔지만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은 영원히 빛날것이며 그 이름 또한 무순시 조선족군중들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두손모아 빌뿐이다.                                  

료녕조선문보 윤재윤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겨레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음악인생 음악인생 60여년에 노래 500여수 펴낸 동희철선생을 찾아서   60여년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직전부터 음악교원사업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음악인재를 양성하고 수많은 명곡들을 지어 세인을 감화시켜 존경을 받는 음악인이 있다. 바로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음악부 주임사업을 하다가 ...
  • 2012-03-31
  •   단동시내에 자리잡은 “고려거(高麗居) 복춘점”, “고려거 빈강점”, “해당관” 등 대형음식체인점은 단동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본 유명한 음식점들이다. 이 음식점들의 주인은 박상화(38세)씨, 3개 체인점을 소유한 주인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아담한 체격에 예쁘장한 얼굴...
  • 2012-03-30
  • 성공가도 달리는 조선족3세 이야기1   동북농업대학 강효문 동물의학박사 (흑룡강신문=하얼빈) 마국광 기자, 리흔 실습생 = 동북농업대학의 강효문( 42세. 사진 ) 동물의학박사가 동물약물 연구개발 분야에서 활약하고있다.   길림성 돈화시 출신인 강박사는 1995년 연변대학 농학원 축목전업을 졸업, 2003년 서울대학 ...
  • 2012-03-28
  •   칼과 가위로 승부를 건 사나이 ㅡ심수항영오금제품유한회사 서정파사장 “좋은 선배와 친구들이 있다는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혼자로서는 력부족인것을 좋은 선배, 친구들이 있어서 공장도 꾸리고 사업도 확장시켜 나올수 있었지요.” 겸양지덕의 모습을 보이는 서정파사장, 한사람을 사귀더라도 ...
  • 2012-03-27
  • 2차대전이 결속된후 조선반도는 본의 아니게 외세에 의해 국토가 두동강남으로써 재중동포들은 근 반세기만에야 비로소 반도 남반부의 모국과 교류할수 있었다. 직접 총칼 들고 일제와 싸웠던 투사들은 대부분 저세상으로 떠나간 뒤 다행히 모국에서 그 후손들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을 펼쳐 현재까지 수백명에 달하는 재중...
  • 2012-03-27
  • 연변음악교육의 견증인 라혜주선생을 만나 연변주창립초기 제1대 음악교원 수백명의 음악전문인재 배양 87세 고령에도 피아노치기는 빠질수 없는 일과의 하나라는 라혜주선생. 올해 87세(1926년생)인 라혜주선생은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 경축대회에 참가한 일원으로 력사의 견증인이다. 당시 연변사범학교에서...
  • 2012-03-26
  • [기획30]사람은 인간적인 냄새가 나야 제맛 —연길고려원술집 림룡춘총경리의 기업경영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 연길고려원술집 림룡춘(林龙春)총경리 프로필 1960년 길림성 화룡시 용화향출생 연변조선족기업가협회 감사 연변전통료리협회 리사 연길성보국제상무청사유한회사 부사장 력임 연길애득백화유한회사 총경리...
  • 2012-03-26
  •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에서 군사암호를 연구해오면서 엄청난 기술발명으로 이름을 떨쳤던 남상호교수(73세), 그의 암호연구는 단순한 비밀을 해독하는 단계를 훨씬 뛰여넘어 정보문명시기를 겪고있는 오늘 인터넷세상을 바꾸어가는 획기적인 전자암호연구에 이르고있다.  미래 인터넷세상을 안전하고 청결하며 고...
  • 2012-03-26
  •   3월 15일, 기자는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 조광훈(58) 총경리를 인터뷰했다. 조광훈이 어떤 인물인가를 한마디로 소개하면 공장장(경리)원로, , , 이다. 그의 이런 별호는 이렇게 해석된다. 그는 1986년 32살에 도문서 제일 어린 공장장(도문시민족비닐공장)으로 선발되여 지금까지 줄곧 도문시민족비닐공장, 도...
  • 2012-03-26
  • 80고령에도 창작활동을 견지 500여편의 작품 창작 왕청2중 교정에 세워진 《첫수확》노래비앞에서 [길림신문 2012-02-28] 지난 세기 60~70년대에 지식청년들에 의해 널리 불려지면서 조선족가요계를 풍미한 노래중의 하나가 바로 《첫수확》이다. 40,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열창되고 있는 이 노래의 작사자는 김세형(80세)...
  • 2012-02-2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