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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리정-민들레의 청순함 간직한 녀가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7일 08시03분    조회:9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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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고개에 올라선후에야 독창가수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찾고 노래인생의 화려한 전성기를 맞아온 박리정가수가 최근에 구슬땀이 슴배인 CD 2조를 출품하여 화제를 모으고있다. 무명가수로부터 인기가수로의 탈바꿈, 자아가치를 실현하는 길에서 그가 흘린 땀방울은 얼마나 될가?

배움에 싫증을 모르던 시절

기자와 마주앉은 박리정가수는 말주머니를 헤치기 바쁘게 《저의 성장에서 큰언니의 도움이 컸어요. 진짜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거든요.》라고 말했다.

연길시 소영공사(지금의 소영진) 민흥대대(촌)의 남새재배농민가정에서 2남3녀 5남매중의 막내로 태여난 박리정은 열살 년상인 큰언니의 등에 업혀 자랐다. 당시 부모님들이 매일 밭일을 나가다보니 막내동생을 챙기는 일은 자연히 큰언니한테 차례졌는데 언니는 어디로 가든 리정이를 업고다녔다. 조선민요를 건들건들하게 잘 부르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노래를 꽤나 잘하는 언니는 또 어린 리정에게 매일 노래를 배워주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용감하게 노래를 부르도록 적극적으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리정이 또한 타고난 재간이라 할가 목소리가 유달리 챙챙하고 곡조를 잘 넘기는데다 기억을 특별히 잘해서 한번 배워주면 가사를 인차 암송하여 3절까지도 거침없이 부를수 있었다. 그래서 대여섯살때부터 언니를 따라 사원대회에 참가해서는 회의를 시작하기전에 노래를 한두수씩 부르고 부대에 위문공연을 가면 무대에 나서서 제법 독창을 하여 사랑을 독차지하군 했다.

차츰 노래에 취미를 가지게 된 리정이는 학교에 붙어서도 새로운 노래를 배우는것을 일종 애호로 간주했다. 《혁명적본보기극》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던 그 년대에 우리 민족의 가요를 접촉할수 있는 경로는 오직 조선영화를 관람하는것뿐이라 리정이는 새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련속 두세번씩 관람하면서 영화삽곡들을 배우기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꽃파는 처녀》, 《한 간호원의 이야기》, 《무명영웅》, 《보이지 않는 요새》 등 많은 조선영화들을 관람하고 그 삽곡들을 몽땅 배워낸 그는 또 그런 노래들을 주동적으로 친구들에게 배워주기도 했다.

집이 연변병원 동쪽에 위치한 신흥대대로 이사를 오고 연변1중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 후의 어느날, 친구인 구정화가 문화관에서 노래시험이 있다면서 구경이나 가자고 잡아끌었다. 준비도 없이 따라나선 리정이는 그장난삼아 노래를 불렀는데 구정화와 함께 성악학습반에 참가할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데 3개월간의 학습을 마치고나서 노래를 더 잘하는 구정화는 합격되여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들어가고 리정이는 그만 학교로 돌아오게 되였다. 

(나도 좀만 더 잘했더라면 합격되였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구정화를 부러워하던 리정이는 뒤늦게라도 학교선전대에 들어가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불러보고 또 장차 예술학교에 붙어 노래로 성공해보리라 작심했다. 이때로부터 그는 공부에 열심하고 선전대의 활동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연변예술학교의 정영숙선생님한테서 개별지도를 받으며 노래공부에 정력을 몰부었다.
그 보람으로1980년에 연변예술학교 성악전업에 응시한 리정이는 2차나 학습반에 참가하면서 3차의 시험을 무난히 통과, 길림성에서 유일한 성악전업학생으로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자기의 위치를 찾기까지

4년간의 학창생활에서 리정이는 전화자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는 행사에서 독창도 하고 교내민가시합에서 2등을 따내기도 했다.  

1984년에 졸업하고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배치받은후 그해에 있은 전국순회공연에서 하미련과 더불어 녀성2인창을 부른 원인이라 할가 박리정은 줄곧 우수한 2인창가수로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장장 10년간 후배인 한선녀와 나란히 무대에 올라 《혁명의 꽃씨앗을 뿌려갑니다》 등 조선가요를 많이 불렀고 1997년에는 또 둘이 함께 녀성2인창으로 연변가무단시험에 합격되였다.

그런데 연변에서 한다 하는 인재들이 운집한 연변가무단에 들어가고보니 압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예술학교에서 여러가지 창법을 두루 배운 실력으로 공연때면 그래도 가야금병창이나 녀성중창으로 무대에 오를수는 있었지만 제일 골치아픈것은 해마다 한번씩은 꼭꼭 관을 넘어야 하는 실무회보였다. 

번마다 성적이 그닥잖고 언젠가는 꼴찌를 하여 1년에 1개월분씩 덧주는 로임도 타지 못한 리정이는 힘든 노래인생을 선택한것을 후회하면서 다른 단위로 전근할 궁리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그렇게 좋아하는 노래와 멀어지게 되는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리정이가 한창 고민에 모대기고있을 때 누군가 조선 평양에서 오신 예술가들이 하남시장부근의 예술양성쎈터에서 노래를 가르친다고 알려주었다. 이것은 원래 조선노래를 더잘 부르는 리정이로 말하면 자아가치를 실현할수 있는 晝좇?징검다리였다.

(그래, 한동안 힘들다고 소시적 꿈을 버릴수야 없지…)

평양예술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선노래로 성공을 안아올 결심을 굳힌 리정이는 시간만 있으면 예술쎈터로 달려가서 부지런히 배우고 자기를 제고하기에 모지름을 썼다. 작곡가 최정만, 성악가 김귀녀, 주성희 등 평양에서 오신 예술가들 역시 리정이의 고운 목청에 탄복하면서 노력만 하면 우수한 독창가수로 성장할수 있다고 신심을 안겨주었다.

신기하게도 예술양성쎈터에 《출근》하면서부터 리정이의 노래실력은 눈에 뜨이게 제고를 가져와서 2003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에 가서 《4월의 봄》예술축전에 참가하고 거기에서 중창에 출연하여 2등상을 타는 희열을 맛보게 되였다. 

견물생심이라고 락오자로 뒤떨어져있을 때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는데 정작 2등을 따내고보니 1등이 욕심났고 오기가 생겼다. 

(아무때건 꼭 독창을 부르고 1등상을 따내고야 말리라.)

이렇게 윽벼르면서 귀로에 오른 리정이는 연길에 돌아온후 시간만 있으면 예술쎈터로 달려갔고 그해가 막 저물어가는 12월부터는 련휴일도 휴식할세라 매일 장출근하면서 조선가요 《뻐꾹새》만을 집요하게 련습했다. 

노력과 성공은 정비례라고 하더니 그녀는 과연 노래 《뻐꾹새》로 2004년 2월 16일에 있은 시범공연에서 호평을 받고 《4월의 봄》예술축전에서 오매에도 바라마지 않던 금상을 받아안았다.  

닫는 말에 채찍질을

불혹의 나이가 되여서야 노래인생의 단맛을 체험한 박리정은 닫는 말에 채찍질하면서 더욱 큰 성과를 따내기 위해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렸다.

2004년 전국성악기악무용콩클때였다. 리정이는 성악전업조의 겨룸에 참가하고싶었지만 만일의 경우 망신이라도 할가봐 걱정이 태산같았다. 생각다 못해 그는 수상할 희망이 있을 경우에만 단위에 회보하기로 작심하고 우선 연변경기구의 예선에 참가했다. 그런데 상상밖으로 연변경기구에서 최고점수를 따내고 그해 8월 북경에서 진행된 총결승에서 1등의 영예를 안아오게 될줄이야?!

이때로부터 박리정앞에는 대통로가 펼쳐져 여러가지 콩클이나 공연에 참가하여 장끼를 자랑하고 수상의 기쁨을 만끽할수 있는 기회가 륙속 차례졌다.

2005년, 한국 몽골 수교10돐을 맞이하면서 한국북방민족예술교류협회에서는 몽골, 중국, 조선, 일본의 예술인들을 초청하여 대형기념공연을 조직하게 되였다. 리정이는 함께 연변가무단에서 활璿求?박경숙가수와 더불어 그번 행사에 참가하였는데 서울 장충공원 체육관무대에서 2인창도 부르고 각기 독창도 불러 둘이 다 금상을 탔다. 2006년, 두번째로 《4월의 봄》예술축전에 참가한 리정이는 조선가요 《내 나라의 푸른 하늘》을 불러 금상을 타고 그해 8월에는 전국조선족성악콩클에 참가하여 노래 《물레타령》과 《뻐꾹새》로 금상을 받아안았다.

2007년, 세번째로 《4월의 봄》 예술축전에 참가한 박리정은 또 노래 《봄맞이처녀》로 최우수상을 따내고 상금 1000딸라를 탔다.

2004년 노래 《민들레고향》으로 연변텔레비죤방송의 매주일가에 출연하면서부터 리정이는 또 라지오방송과 텔레비죤방송의 각종 야회와《매주일가》, 《요청한마당》 등 프로에 자주 등장하는 가수로 자리매김하였다. 

40고개에 올라선후 노래인생의 전성기를 맞아온 리정에게 새로운 소망이 생겼으니 그것인즉 자기가 부른 노래로 음반을 만드는것이였다.

평양에서 방송프로제작에 참가하여 조선노래를 한어로 부른 리정이는 귀국한후 자기가 알고있는 조선노래들을 한어로 번역하여 음반을 만들어볼 구상을 무르익혔다. 마침 연길시의 리영선생이 중국음악가협회의 부탁을 받고 조선노래가사를 대량 수집해서 한어로 번역하고있었다. 2006년 9월에 이 소식을 접한 박리정은 즉시 리영선생을 찾아가 자기의 구상을 터놓으면서 번역가사를 제공해줄것을 간절히 부탁드렸다.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해 아글타글하는 녀가수의 소행에 감동을 받은 리영선생은 이미 번역해놓은 가사들을 제공해주고 박리정한테서 넘겨받은 가사까지 깐지게 번역해준외 연변인민방송국(한어말)의 아나운서 오양( 洋)을 스승으로 모시고 발음을 규정받는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제기했다.

이리하여 박리정은 2006년 11월 오양과 함께 평양에 가서 현지에서 발음을 규정받으면서 록음을 완수, 북경출판사 출판그룹과 북경전자음향출판사의 제작으로 끝내는 CD  2조를 출품하게 되였다.

박리정가수의 소개에 따르면 《민들레》라고 이름지은 CD중 1조에는 《민들레》, 《민들레고향》 등 조선말로 부른 연변노래 16수와 한어말로 부른 연변노래 16수가 수록되였고 다른 1조에는 한어말로 부른 조선노래 32수가 수록되였는데 대부분이 영화삽곡이나 귀에 익은 민요들이라고 한다.

자기가 부른 노래로 CD를 만드는 소망이 현실로 다가온 오늘에 와서 박리정가수는 결혼한지 20년이 넘도록 살림걱정 안하고 일에만 집착할수 있은 자기는 복많은 녀자라고 고백했다. 밥상 한번 알뜰히 차려준적 없는 안해를 리해해주는 남편도 그렇지만 그동안 집안살림을 도맡고 손군까지 키우면서 며느리 뒤바라지를 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신 70고령의 시어머님과 가까이에 살면서 크고작은 일들을 걱정해주는 손우시누이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3년째 북경에 들어가 성악쪽으로 발전하면서 홀로서기를 하고있는 아들(21살)이 볼 때마다 셈이 더 들고 진보가 있어서 언제나 든든하다며 흐뭇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민들레의 청순함을 고이 간직한 박리정가수가 화면까지 곁들인 음반을 출품할 다음 목표를 하루속히 실현하고 또 더욱 높은 봉우리를 점령할 그날을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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