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리귀남 - 중국 신생대 대표 화백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9월19일 09시46분    조회:690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리귀남 화백 프로필

조선족 남 1965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출생.

1992년 중앙민족대학 미술계 유화전업 졸업.
1999년 중앙미술학원 유화계 연수반 졸업.
현 중앙민족대학 미술학원 유화계 전업강사,유화계 계주임.
현 중국유화협회 회원.

1992년부터 국내외 미술전에 출품.1998년 개인전 개최.다수의 작품이 국내외 예술기구와 개인들에 의해 소장되고 있다.

리귀남 화백은 중국 신생대 대표성 화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 풍격으로 당대 도시인들의 정신세계와 형상특징,생황상태 등을 표현하고 있으며 강렬한 형태와 색채대비를 활용하여 자유로운 상상과 민감한 형식을 새롭게 구축해내고 있다는 평가다.




모든 사상을 한가지 태도로 전환시켜야---리귀남 탐방실록

40세 남짓한 이 사나이는 그닥 표준적이 못되는 한어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예술과 생활을 표달하는 그의 열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아니, 열정이라기 보다는 아예 격정이라고 하는것이 더욱 합당할것 같았다.

아름다움은 강렬한 정감때문에 자리를 내주었으나 그것은 마음속에 직접 가 닿는 진감이 있었다. 그는 한가지 태도를 안고 창작했다. 그의 미술작품은 산뜻하고도 비극성이 넘쳤고 진실하면서도 주관적 색채를 띠고있었다. 그는 이 사회에 대한 자신의 민감성과 섬세성을 전부 화폭속에 융합시켰는데 그것은 심령의 충격력이였다.
리귀남은 지금의 예술가들에게 가장 부족한것이 바로 시대정신이며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음: 60년대에 출생한 예술가들은 지금 모두 "인기가 폭발"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때문에 이 년대의 예술가들이 보편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어떤 배경과 환경에 처해있다고 보는가? 

리귀남: 정치배경으로 말하면 이들도 중국 10년동란의 "문화혁명"시기에 출생했는데 그들의 성장과정에 긍정코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그 때 그 사람들의 목표와 리상은 상대적으로 명확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구호를 웨치면서 자랐으며 나라의 호소를 받들고 무의식중에 감화되는 낡은 것들이 아주 많아 개변시키려고 해도 대단히 어려운 실정이다. 

물음: 그 때의 예술가들은 확실히 모주석의 "예술은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하고, 예술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한다"는 호소에 호응하였댔는가? 그렇지 않으면 주관요소가 비교적 많은것이였는가?

리귀남: 상대적으로 말하면 주관적인것들이 그래도 비교적 많았다고 본다. 모주석께서 말씀하신 "예술의 백화제방"은 확실히 틀린것이 없다. 예술은 생활속에서 와야하고 그뒤에 더욱 높은 표달이 있어야하는데 이는 영원히 틀린것이 없다.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은 사회 현상태를 떠날수 없다. 이를테면 진정으로 량심이 있는 예술가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있고 사회를 관심하는 사람들이다. 

물음: 지금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60년대 출생한 사람들인데 당신은 최대의 공동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리귀남: 이는 우리나라의 력사배경을 봐야한다. 90년대 전에는 그래도 테마성 그림이 비교적 많았으나 개혁개방후에 조금만 개방되였으며 다만 다른 나라들의 기법과 같은 것을 흡수한것이 비교적 많았으며 형식문화 등은 흡수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 때 라중립의 <아버지>가 영향력이 아주 컸으며 모두들 그 때에야 자신의 화상을 크게 그려도 된다는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였다. 하지만 변혁시기는 몇해 가지 않았다. 지금 예술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작품이 예술가치가 어떠한가는 말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처지이다. 너무 이르다고 본다. 기껏해야 10년도 안되는데 한 예술명인의 침전은 적어도 몇십년의 세월을 소요하고 있다. 하기에 지금은 아직 이르다고 하는것이다. 

물음: 80년대 서방예술의 대면적 류입으로 말미암아 90년대의 화가들은 전환기에 처해있었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중국은 몇년의 시간을 들여 서방나라들에서 몇십년동안 겪은 길을 걸어왔다고들 말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슨 감촉이 있는가? 
리귀남: 그것은 절대적으로 틀린것이다. 서방 100년의 예술로정을 겪어 왔지만 우리는 10년도 안된다. 지금의 중국에서 탄부와 료리사들마저 당대 예술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나는 우리들이 아직도 갈길이 멀고도 멀었으며 지금까지 그 정도가 못된다고 본다. 지금에 와서 진정으로 책임감이 있는 예술가들은 아직도 당대와 시대의 사회정신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퍼그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시대정신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부족한것은 사상무기이며 우리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상은 아직도 서방의 철학사상들이며 우리나라 본토의 근대와 현대에 아직도 상대적으로 위대한 사상가가 나타나지 못했으며 따라서 예술가들은 토대가 없었다. 나라에서 올해에야 문화를 잘 틀어쥐여야하며 경제가 일정한 시기까지 발전한뒤에야 문화로써 추동하게 되였느데 우리는 이제야 이 문제를 인식하게 되였으며 이제야 문화로 추동하기 시작했다. 

물음: 당신도 60년대에 출생한 분으로서 80년대에 서방예술의 영향을 제일 깊게 받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때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리귀남: 맞다.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때 사람마다 같지 않았지만 가장 큰 영향은 서방예술의 다양성으로서 화책에서 대단히 많은것들을 보았으며 서방 현대예술의 리론은 아주 많았다. 

물음: 당신은 금방도 지금의 예술가들은 모두 특별히 텅텅 빈것처럼 사상토대가 없다고 얘기했는데 그렇다면 반대로 80-90년대에 예술에 대한 제도의 압제가 있을때 나온 작품과 예술가들이 상대적으로 좀더 심각하다는 뜻이 아닌가? 

리귀남: 85년 미술 새 붐의 총격사건과 89년 학생운동으로부터 나는 그들이 무슨 도리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다만 한가지 형식을 추구했다고 본다. 

물음: 당신은 그 때의 작품들이 당시에 심각한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리귀남: 나는 가소롭다고 생각한다. 

물음: 그렇다면 지금의 작품들은 어떤가? 

리귀남: 더욱 가소롭다. 나는 그들이 무엇때문에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의 좋은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방의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같은 예술가는 미국사회가 낳은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에 어떤 고도에 도달할지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물음: 당신은 류소동과 함께 모두 "신생세대" 예술가에 속하지만 당신들이 표달한 내용과 형식은 모두 일정하게 부동하다. 그가 표현한것은 지금 사람들의 무료, 청춘, 자아 등 일부 상태를 표현했으나 당신은 서방의 프랑시코 디 고야와 피터 폴 루벤스의 영향을 비교적 크게 받았으며 회화언어에서는 또 프랜시스 베이컨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표현과 비슷하다고 본다. 당신은 학습단계에서 어느 영향을 비교적 크게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리귀남: 서방의 영향을 비교적 크게 받았는데 나는 학생시절부터 알브레히트 뒤러를 비교적 좋아했다. 서방의 표현형식이나 기법을 배우려면 일찌기 배울수록 배우기 쉽다. 서방 예술사를 돌이켜보노라면 모두 한세대, 한세대 내려오면서 선배 명인들을 따라배웠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국화계에서 어떤 사람들이 혁신을 부르짖고 있는데 어찌 될수있는 일이라고 할수있는가? 예술은 연변과정이 있는데 혁신은 령으로부터 시작하는것이 아닌가? 토대가 없는데 어떻게 계승이라는것을 운운할수있겠는가? 서방에서는 명인들을 따라배우고 계승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모든것을 타도하려고 하는데 이는 될수 없는것이다. 

물음: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스승한테서 계승한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는데 당신은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있는가?

리귀남: 학생들에 대한 나의 관점은 1학년때 인차 예술명인한테 접근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5-6명을 골라 나중에 서서히 2-3명으로 줄이느라면 나중에 자기의 풍격이 형성되기에 처음에는 그래도 명인을 따라배워야한다는것이다. 나는 서방의 그 어떤 기법, 소재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은 유화가 제일 먼저 그래도 서방에서 나온것이고 소재는 세계가 공동으로 소유한것이지만 나중에 당신이 그려낸 풍격과 사상은 당신 자신의 것으로서 표달은 반드시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의 것인것이다. 이전에 우리들은 "유화의 민족화"를 주장했는데 나는 아주 가소롭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의 사상이 아직도 공고화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민족화를 실현할수 있단 말인가? 한 예술가가 진정으로 사회상태를 관심한다면 자연적으로 표달할수 있으며 소재는 개의치 않을것이다. 

물음: 나 개인은 그래도 당신의 개인풍격이 아주 뚜렷하다고 생각되는데 당신은 그래도 서방을 따라배우는것으로부터 벗어나온 리유는 무엇인가?

리귀남: 나는 색채가 아주 산뜻한것을 좋아한다. 내가 조선족인것과 관계있는듯 하다. 무의식간에 감화되는것과 핑크색 복장과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나는 너무 숨막히는것 같아서 회색을 그려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부동한 점이라고 본다.
물음: 나는 당신이 그린 인물가운데 그래도 인체, 초상화 같은것들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본다. 당신은 사람이 당신의 정신사상표달을 기탁하는 유일한 담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리귀남: 주로 초상화를 위주로 한다. 강의나 학생들과 함께 그릴때도 비교적 간단하다. 요즘 밖에 나가 돌면서 가끔 정지물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껴 집에 돌아와 그려보았다. 

물음: 당신은 다원화 회화언어와 다방면의 발전을 생각해본적이 없는가? 

리귀남: 예술은 워낙 아주 다원화적인것으로서 나는 줄곧 조각을 하고 싶으며 자신의 감각에 따라 조각하고 싶다. 장치는 가끔가다가 한번씩 시험해볼수도 있다. 

물음: 장치는 관념적인 것이 더욱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리귀남: 나는 무엇을 관념이라는지 궁금하다. 도대체 우리의 유화에 관념이 없단 말인가? 관념이란 다만 문자놀음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갖고 해석한 것을 우리가 그림으로 그린다면 문자를 갖고 해석하기 아주 어렵게 된다. 예술가들은 정신세계의 것을 그리며 화판틀에서 표달하는것은 더욱 많이는 상상해낸것들로서 화면의 표달은 긍정코 주관적 색채들인것이다. 

물음: 90년대 이후 예술작품들은 남녀감정,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달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당신은 무엇때문에 줄곧 독립적인 개체를 그려왔는가? 

리귀남: 나는 가끔 두 남자를 그리군한다. 하하......아주 많은 생각들은 서로 다르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채색공소재의 령감은 쪽걸상 대원들한테서 왔는데 우리 지금 사회에는 영원히 올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로일대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하기에 쪽걸상 대원들은 줄곧 차거운 쪽걸상에 앉아 있게 되다. 정말 뜻 깊은 것이라고 할수있다. 




물음: 당신이 그린 모델은 나중에 가서 전반 화면의 효과를 나타내고있는데 하나의 특히 민감한 감각으로서 비극성 감정이 들어있다. 당신은 모데를 고를때 특별한 편향성이 있는가? 아니면 누구나 다 될수 있고 다만 나중에 자기의 주관적으로 한가지 감각을 첨가하는가? 

리귀남: 그렇지 않다. 모델은 첫 감수에 의거해야하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반드시 아주 강렬한 감수의 전제하에서만 령감이 떠오를수 있다. 어느 한번우리들이 차를 운전하여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한 젊은 민공이 중간에 서있었는데 사람은 살아있었으나 눈은 텅비여있고 입가에는 또 미소를 머금은 감각을 보였으며 초췌한 모습으로 차안을 들여다 보고있었다. 그의 그와 같은 상태는 나에게 아주 심각한 인상을 주었다!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였다. 우리는 그래도 마실것은  다 마시고 먹을 것은 다 먹었지만 이 사람은 거리가 너무나도 컸었다.

물음: 하하, 알고보니 당신도 감정이 아주 섬세하다. 그렇다면 당신이 표달에서 선호하는 이러한 민감과 비극적 색채에 대해 자신을 비관주의자라고 보는가? 

리귀남: 나는 아주 섬세하고 여러가지 장면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관찰한다. 하지만 나는 비관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화면을 통해 이 세계를 보기도 한다. 생활과 예술은 두가지 개념으로서 내가 말하는것은 생활의 감수이지만 화면을 표달할때 또 다르며 더욱 격렬해 진다. 

물음: 당신은 동시에 한 예술교육가로서 예술은 엘리트문화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대중문화라고 생각하는가? 

리귀남: 예술교육은 반드시 엘리트문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이 이토록 많은것을 배웠다면 응당 이 시대를 리드해야한다고 본다. 지금 아주 많은 교원들이 사회를 따르고 사회와 결부시킬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다른 한 방면으로 일부 사람들이 이 사회를 개조하고 이 사회를 리드해서 될수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일부 희생이 있게 되며 영웅주의도 틀린데가 없다고 본다. 

물음: 당신이 말하는것은 한개 면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일반 대중과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고 인정하고 있는데 당신은 자신이 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가르쳤기에 필경 예술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기에 응당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접촉하도록 해야하지 않겠는가? 

리귀남: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관점으로 말하면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타 일들을 하고 있으며 예술을 보급하는것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음: 당신은 학생으로부터 교원이 되기까지 줄곧 학원의 체제하에서 근무해왔는데 당신한테 영향이 없는가? 

리귀남: 없다. 이는 개인의 일로서 당신이 표달하는 화면은 당신이 표달하고 싶은 것이며 남들이 간섭할 일이 아니다. 어디에 가든지 모두 마찬가지로 그려야한다. 이 대부분은 자신만의 문제일 뿐이다. 서방의 예술명인들은 모두 학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교육체제에는 긍정코 그래도 문제가 존재하고있다. 줄곧 그래 왔으며 아무런 변화발전이 없다. 예술교육은 교육해낼 방법이 없다. 그것은 잠재적인것이고 개인적인것으로서 우리는 일부 기법 같은 것들을 제공해줄 뿐, 실제적인 것들은 역시 개인것으로서 주로 개인문제에 속한다. 

물음: 교원사업은 예술계보다 더욱 안정적이고 깨끗하지 않는가? 

리귀남: 그것은 긍정적이다. 교원사업은 더욱 좋은 편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 전국 각지에서 왔으며 그들은 아주 많은 생각들을 갖고 와서 집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사회의 아주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생각은 더욱 단순하고 더욱 순수하다고 본다. 

물음: 량자는 충돌하지도 않는다. 당신은 지금의 생활상태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가?
리귀남: 아주 만족하고 있다. 내가 할것들을 다 한뒤 날마다 그림을 그리고 교학한다. 내가 감수한 것들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있는데 좋은 일이다. 

물음: 자신의 생활에 대해 만족감을 갖은것은 아주 행복한 일이다. 리선생님의 오늘의 대답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숭고한것을 목표로 바다에 구경나간 사람들이 일단 대안에 이르기만 하면 휘황을 따낼수있다.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가 말하다싶이 회화예술은 돌아간 분의 형상을 남길수 있다. 사회책임감을 가진 예술가가 남기게 될것은 형상 뿐만 아니라 일종 시대의 정신인것이다. 

博宝艺术网  曹原/조글로미디어 종합


리귀남 유화작품 보기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중한투자무역 법률봉사의 《1번지》북경시금평변호사 사무소 김련숙대표변호사 만나본다 ●  중국의 첫 중한투자무역법률봉사 사무소 설립● 《전국 우수변호사 사무소》를 창설● 《북경시 10대 변호사》 칭호, 전국녀성변호사협회 부회장● 한국대기업과 주중 한국기관과 기구의 법률봉사 전담 북경시금평변호사 사무...
  • 2009-11-26
  • 료리연구가 리숙씨의 음식탐구 스토리연길시중의 수백개소에 이르는 료식업체가운데 휴머니즘경영을 선언하고 유기농,무공해 식재만을 쓰며 고객들에게 알뜰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주인이 있다. 그가 바로 연길시 수상시장 청향관의 리숙 경리( 48세)이다.“식당이라 하지만 영리성만 따진다면 그런대로 넘어갈수 있죠...
  • 2009-11-26
  • 국경 ‘보따리장수’서 조선족 제1의 거부로… 태양광발전소 협상차 방한 김춘학 中 금약그룹 회장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牧丹江)시 김춘학(46) 금약그룹 회장. 그는 한국 기업과의 협력 모색을 위해 한국을 자주 찾는다. 헤이룽장성 조선족 제1의 부자로 알려져 있는 그도 처음에는 중·...
  • 2009-11-25
  •  발해만의 “선장”으로 거듭난 사나이 ㅡ대련우련선무대리유한회사 김광일대표 창업기국경 60주년 및 “중조친선의 해”를 맞아 대련우련선무대리유한회사 대표 김광일(41)씨의 야심은 발발하다. 발해만을 근거지로 조선의 광물자원해운사업에 10여년을 매진해온 그는 요즘들어 조선의 항만...
  • 2009-11-24
  • 칼럼을 통해 조선족사회 제반에 대해 바른 말, 쓴 말을 많이 하여 직통배기교수로 유명한 정인갑교수(62)를 만난것은 지난 11월 8일 저녁무렵, 북경 망경부근의 조선족음식점에서였다. 마침 일요일이여서 협회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다녀왔다는 등산복차림의 정인갑교수는 재작년에 정년퇴직한 분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 2009-11-24
  • 중국조선족 제반 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 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고 주덕해선생 회고■ 호요방: 주덕해동지의 서거소식을 들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는 《그는 훌륭한 동지였다》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 인민정부(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신)가 성립,  주덕해가...
  • 2009-11-24
  • 내몽골초원에 핀 아름다운 진달래 내몽고자치구 아영기 신발조선족향 향장 윤창길을 만나본다윤창길 프로필: 1964년 출생, 내몽고자치구 아영기 나지툰 제2중학교 졸업; 1982년-1985년 중국인민행방군 51312부대 복역 , 입당 1986년-2001년 아영기인민법원에서 사업, ; 2001년부터 지금까지 아영기 신발조선족향 대리향...
  • 2009-11-23
  • 박성국-마약사범을 벌벌 떨게 한 조선족경찰관천안문광장에서 서로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조선족경찰을 본 관객이 깜짝 놀라 《천안문광장에 연변의 경찰까지 동원되였나?》하고 말해 주위를 웃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북경시에 조선족경찰이 20여명 있는데 지난해에 이들중 13명이 뜻깊은 만남의 장을 가졌다고 ...
  • 2009-11-20
  •  산림개혁의 선두주자 박희춘 우리 성 산림개혁의 모델 제공신빈만족자치현 현임 환경보호국국장 박희춘씨가 신빈현 북사평향 당위서기 재임기간 실시한 “집체림 개인관리소유제”를 골자로 한 산림개혁이 전 무순시에 보급되고 우리 성은 물론 길림성의 부분 시에서도 실시돼 명실공히 산림개혁의 모...
  • 2009-11-20
  • 중국에서 의대 교수가 된 조선족 교포, 신종성 교수님20년 전 연변에서 열린 고려의학회. 우연히 참석한 이 학회에서 한국의 비뇨기과 높은 수준을 보고 무작정 한국 유학길을 택한 조선족 교포 출신의 중국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8년간의 힘든 유학 생활 후 북경의과대학의 비뇨기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 2009-11-2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