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엔 언제나 고향 민족이
녀장부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향 민족이 있었다
ㅡ대련만기국제무역유한회사 대표 김미화씨
대련 앞바다를 근거지로 전 세계 해양을 누비며 한해 매출액 6억여원을 창출하는 녀장부, 대련만기국제무역유한회사 대표 김미화(42)씨, 그는 요즘 기업과 문화의 접목을 스스로 이루고저 고심하고있다.
기타 계렬회사는 제쳐놓고라도 “대련보세구만기국제무역유한회사”와 “대련해양석유화공유한회사”라는 대기업 리사장을 맡고있는 그녀는 매 하루가 벅차기도 할텐데 요즘 또 한 단체인 대련조선예술문화박물관을 설립하고 시운영에 들어간것이다. 그러나 기업창업보다 문화산업이 훨씬 어렵고 힘들다고 피력했다.
1989년 연변대학 법률학부를 졸업하고 대련수산물그룹 수출입부에 취직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개인창업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1만 6천여명의 직원들이 운집하고있는 대형회사에 취직한것으로 자랑스러웠고 얼마후 맡은 한국부 부장이라는 이름에 만족했다. 1992년 중한수교가 되면서 그의 영향력도 커지기 시작하여 한국을 상대로 한 업무가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초심을 잃지 않고 조선족이면서 연변이라는 특정지역출신인 자신을 늘 마음에 새기며 고향과 민족과 모교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자는 다짐으로 매일매일 사업에 충실했다.
1995년 1월, 개인적인 계기와 스스로 창업을 해보려는 용기에 떠밀려 등록자금 2천원으로 보세구에 만기국제무역유한회사를 설립하고 가공업을 곁들인 해산물수출입사업을 가동했다. 주요대상국은 한국이였다.
“그땐 회사만 설립하면 사업이 일사천리로 다 되여가는줄만 알았어요. 무일푼에 인맥관계마저 전무하고 시장확보도 백지였던 상태였지요. 거기에다 경험까지 부족하다보니 촌보가 난행이였습니다. 단지 창업하겠다는 오기 하나만으로 시작했고 죽을 힘을 다해 버텼습니다.”
적은 량의 오다라도 생기면 하이에나처럼 물고 놓지 않았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수신자부담전화를 수없이 해댔다. 그런 노력으로 당해 100여만원 자산을 늘여가는 대변신을 가져왔다. 따라서 사업체도 점차 규모화로 자리잡혀가고 무역상대도 한국, 조선, 일본 등 다국가로 늘어났다. 조선과의 무역시 전화비용은 일체 그의 회사에서 부담하는것을 원칙으로 한다. 초창기 한국 무역파트너들에게 수신자부담전화를 수없이 했던 당시의 상황을 잊을수가 없기때문이다.
40대라는 젊은 나이임에도 그녀의 수면시간은 이미 하루 4시간으로 고착된지 오래다. 수출용해산물은 늘 시간을 다투기에 선적을 위해서는 랭장작업장에서 밤샘작업을 해야 한다. 오후 2시에 바다에서 건져올린 해산물(특히 굴, 광어 등)들은 랭장작업장까지 운송하는 과정에도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식사도 영하온도를 유지하는 작업장에서 해결하면서 선별, 포장작업을 끝내고 항공탑승까지 마치면 이튿날 8시 출발이 눈앞이다. 그나마 모든 과정이 순탄하면 다행이다. 항공편이 결항하거나 갑자기 화물운송에 긴장국세가 겹치는 날이면 화급한 상황이다. 지난 1995년 여름의 일은 잊을수가 없다. 일본행 항공편이 갑자기 긴장하여 5톤되는 해산물을 선적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허용시간에 맞추려면 반드시 선적해야만 하는 항공편이였다. 아니면 전부의 재산을 날리는것은 제쳐놓고 련쇄적으로 일어날수 있는 계약위반책임을 피면할수가 없다. 그는 체면불구하고 화물배정 관련 과장, 부장, 지령원까지 찾아 손이 발이 되게 간청하고 애걸했지만 안되자 그자리에 꿇어앉아 버티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화급한 상황을 두번 겪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1997년부터 석유시장에 뛰여들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 SK와의 합작관계가 이루어진것이다. 세계 해양을 누비는 선박들에 석유를 공급하고있는 한국 SK 관련회사에서 가끔 석유값대신 해산물을 받게 되는데 그녀의 회사에서 다년간 그 해산물들을 넘겨받으면서 인연이 되였던것이다. 두터운 신용관계를 바탕으로 한국 SK회사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 협력관계에서 합작, 합자관계로 거듭났다.
기업운영은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모든것을 결정할 때가 많다며 멋있는 과정보다 최선을 다해 성공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 해마다 성공가도를 달려 현재 일년 매출액이 6억여원을 웃돌고있다.
해산물 관련회사에서 석유관련회사까지 이미 두마리 토끼를 잡은 김미화씨는 이제 세번째 토끼를 잡고저 주사위를 던진 상태다. 수년간 기업창업을 해오면서 문화산업의 번성이 전반 사회발전에 주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것을 느끼고 문화산업에 뛰여들기로 작정한것이다. 연변대학 교수로 있는 부모님들의 영향으로 일찍 예술문화에 눈을 뜬 그는 사업을 하는 동안 조선고미술작품들을 위주로 국내외 고품위 예술작품들을 소장, 이미 1,000여폭(점)을 확보해 대련조선예술문화박물관을 오픈했다. 그리고 새해에는 향항 모 실업체와 함께 조선 광산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신들메를 조이고있다.
현재 대련해양대학에 인민페 30만원을 지원, 김미화장학금을 설치한데 이어 연변대학 농학원에 일정자금을 지원하여 장학사업을 후원하고있는 그는 대련시조선족사회 각종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고있다. 향후에도 고향과 민족과 모교를 가슴에 안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인터넷료녕신문 차경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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