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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일대 방송원 김미원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3월31일 09시12분    조회: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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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던 나날 보람찬 인생

지난세기 60년대, 70년대에 연변인민방송국의 조선말프로를 애청해온 청취자들이라면 “이 시간 방송에 ‘설하’였습니다”라는 말을 퍼그나 많이 들은 기억이 있을것이다. 당년에 “설하”라는 이름으로 가가호호의 안방에 찾아가던 주부방송원 김미원  80고개를 넘어선 지금에 와서 김미원선생은 벌써 아득한 옛날이 되여버린 주부방송원시절을 뒤돌아보면서 “보람차면서도 힘든 나날”이였다고 고백한다.

1929년, 지금의 룡정시 광신향 신화촌에서 태여난 김미원은 딸 일여덟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동녀인데다 너무 이쁘게 생겨서 부모님들과 세 오빠들은 물론 온 동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하면서 자라났다.

당시 공부를 많이 하지는 못해도 꽤나 유식했던 아버지는 배를 곯더라도 자식들만은 꼭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것을 신조로 삼고있었다. 덕분에 미원이는 소학교시절부터 오빠들을 따라 7리 상거한 룡정시내로 오르내리며 공부를 할수 있었고 1946년에 제1기 졸업생으로 룡정중학교를 졸업한후에는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조선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진학이 무산된후 서평양교통성에 취직한 미원이는 교원으로 되려던 꿈을 이루기 위해 편안한 문서사업을 포기하고 강선소학교에 들어가 2학년 담임교원을 담당하면서 산수, 어문, 체육 등 학과목을 두루 가르치며 청춘의 희열을 만끽했다. 

이시기 처녀교원 김미원에게서 제일 기쁜것은 조무래기들과 함께 우리 말, 우리 글을 마음껏 배울수 있게 된것이였다. 비록 룡정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고는 하지만 일제통치시대라 노화교육을 실시하면서 일본글만 배운 미원이는 이때로부터 교수안을 쓰기 위해서라도 우리 글을 열심히 자습했고 또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부단히 배운 지식을 공고히 했다.                                  

1949년에 휴가차로 귀국했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집에 눌러앉고 얼마후 심심산골인 룡정시 덕신소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은 김미원선생이 방송사업에 몸을 담게 된것은 결혼을 하고 북경으로 전근해가게 된 1950년대중반이였다.

남편 김일선생은 연변대학 조문학부 1기졸업생으로서 1950년대초에는 연변인민방송국 문예조의 조장직을 맡고 소설랑독, 번역, 편집, 가사창작 등 사업을 막힘없이 해내면서 중견역할을 했다. 그후 중국국제방송국이 설립되면서 김일선생은 북경으로 전근되였고 결혼후 남편을 따라 북경에 들어간 김미원선생은 목소리가 챙챙하다는 우세로 국제방송국 조선어부의 방송원으로 되였다. 

그런데 목소리 하나만 믿고 발을 들여놓은 방송원사업은 조선어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김미원선생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버거운 짐이였다. 호흡조절, 악센트장악 등 책만 읽고서는 도저히 해결할수 없는 문제들이 수두룩했지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도움을 줄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한동안 애가 타서 손톱여물만 썰던 선생은 불현듯 사무실을 함께 쓰고있는 일본어방송원에게서 가르침을 받을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어대화를 마음대로 할수 있는 미원선생은 이렇게 일본어방송원의 도움으로 부딪친 난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맡은바 방송임무를 수행해나갔다.

년년생으로 오랍누이를 낳아 키우며 방송사업에 어느정도 적응하게 된 1960년도였다. 연길시 장백향 신풍촌에 살고있는 가족들로부터 어머니가 중풍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김일선생은 장남인 자기가 꼭 부모님들을 책임져야 한다면서 연변으로 돌아갈 결심을 내렸다. 국제방송국 책임일군들이며 동료들이 말려도 막무가내였고 안해가 통사정을 해도 그 고집을 꺾을수 없었다. 어쩔수없이 김미원선생은 또 남편을 따라 연변에 돌아왔고 연변인민방송국의 방송원이 되였다.

연변인민방송국에 와서 부딪친 첫 난제는 거처가 마땅치 않은것이였다. 잠은 림시 탁아소에서 자기로 했지만 거기에서 철부지 둘을 거느리고 살림을 한다는건 무리였다. 렴치불구 애들을 결혼전인 시누이에게 맡기고 남편과 둘이서 낮에는 사무실에 나가있고 밤이면 들어와 대충 살림을 했다.

당시 탁아소온돌에는 까래를 폈는데 세번째 애를 임신한탓으로 냄새에 특별히 민감해진 김미원선생은 지린내가 코를 자극하는통에 도무지 방바닥에 누워있을수 없었다. 생각다못해 북경에서 갖고온 길다란 밥상에 걸상을 붙여놓고 간이침대를 만들어 그우에서 잠을 잤다.

저녁은 애기엄마들이 모두 퇴근해서 애들을 데려간 다음에야 불을 지펴서 밥을 짓다보니 매일마다 날이 어두워서야 에때우군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는 금방 숟가락을 들려 할 때 전기가 고장나면서 박산난 전구며 흙먼지가 밥그릇에 내려앉아 저녁을 굶기도 했다.

어른들은 힘든대로 참고 지낼수 있었지만 시댁에 맡겨둔 애들은 아빠엄마가 그리워서 병이 날 지경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겨우 5살밖에 안되는 딸 란화가 공원북쪽에 위치한 방송국까지 찾아왔다. 고모가 알면 보내지 않을가봐 슬그머니 빠져나와 걸어서 왔다는것이였다. 아빠엄마가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어린것이 혼자서 길을 떠났을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미원선생은 딸애를 껴안고 눈물을 쏟았다.

미구에 자그마한 집이라도 생기니 그리운 고생은 면하게 되였지만 생방송을 많이 할 때라 늦게 퇴근하다보니 애들을 제대로 챙겨줄수 없었다. 그시기 방송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어린것들은 엄마가 들어와 저녁밥을 지어주기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가로세로 쓰러져 굳잠에 빠져있기가 일쑤였다. 오죽하면 막내딸 국화가 할머니를 사오라고 지청구를 들이댔을가?! 

시부모님에 대한 의무는 처음에 경제적으로만 감당하다가 시아버님까지 건강상황이 나빠지자 시동생네가 시아버님을, 김미원선생네가 시어머님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런데 중풍뒤끝에 치매가 온 시어머님은 쩍하면 옷에다 실수를 해서 매일이다싶이 강변에 나가 빨래를 하면서 마지막길을 지켜드렸다.  

연변인민방송국 방송조에 출근한후 김미원선생은 방송실무에서 압력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국제방송국에서 내려온데다 여느 방송원들보다 머리가 크니 뾰족하게 잘한다는 평판은 받지 못하더라도 못한다는 말은 최소한 듣지 말아야겠다는 부담감이 컸던것이다.

한동안 머리를 쥐여짜던 선생은 그래도 책이 이런 고민을 풀어줄것 같은 예감이 들어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던중 조선에서 출판된 《화술통론》을 접촉하게 되였다. 방송실무에서 자주 부딪치게 되는 크고작은 문제들을 상세하게 취급한 《화술통론》은 리론지식에 목말라있던 선생에게 급시우의 역할을 했다. 한번 또 한번 책의 도움으로 난제를 해결하면서 리론지식의 단맛을 체험한 선생은 이때로부터 시간만 있으면 《화술통론》을 손에 들고 놓을줄 몰랐다. 누군가 두터운 《화술통론》을 힘들게 뒤적이는 선생이 안스러워 얇다란 단행본을 갖다주었다. 어디선가 주어와서 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몇년간 갖고다니다가 잃어버렸지만 선생은 그때 단행본을 얻어다준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수 없었다.

이시기 선생이 부딪친 다른 한 난제는 축음기조작법을 모르는것이였다. 모든 설비가 락후하던 그 년대에 음악프로는 방송원이 생방송으로 노래제목이며 작사가, 작곡가를 소개하고나서 록음을 틀어놓거나 축음기를 작동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되였다. 그런데 축음기를 다루어보지 못한 선생은 솜씨가 서툴어서 쩍하면 노래의 앞부분을 잘라먹군 했다.련속 여러차나 실수를 빚어낸 선생은 나중에 밖에 나가 축음기가 있는 집을 수소문해서 조작법을 익혀냈다.

방송원은 자기의 프로를 시간맞춰 청취하면서 장점을 계속 발양하고 단점을 극복해야 자기를 부단히 제고할수 있다. 그런데 라지오가 있는 집이 쌀에 뉘만큼 적던 그 년대에는 방송을 수시로 들을수 있는 여건이 구비되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선생은 길을 가다가도 라지오소리가 들려오면 멈춰서서 방송에 귀를 기울이다가 프로가 끝나서야 자리를 뜨군 했다. 이런 경로를 통해 부족점을 발견하고 제때에 해결책을 강구하니 실무수준 또한 끊임없는 제고를 가져올수 있었다. 

그시기 방송국울안에서 살고있은 김미원선생에게는 명절당직이며 밤대거리가 유난히 많이 차례졌다. 그러나 선생은 언제 한번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문화대혁명기간 기타 녀방송원들이 방송을 중지당한 기간에는 녀성들이 감당해야 할 방송임무를 혼자서 도거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설하(雪河,원래는 남편인 김일선생의 필명)”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아들딸 3남매를 키운 김미원선생은 또 자식들을 바르게 키워낸 훌륭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물려받은 맏딸은 어려서부터 랑독을 제법 잘했고 지식청년으로 룡정시(연길현) 팔도향(공사) 로동촌(대대)에 하향한 1975년 가을부터는 공사방송소의 방송원으로 추천받아 장끼를 자랑하였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후  연변1중에 배치받아 영어교원으로 사업하고있는 그는 선후로 “5?”로력모범. 전국우수외국어교사, 국가급골간교사 등 많은 영예를 따내였다. 그동안 영국브라인턴(Brighton)대학에 연수도 다녀온 그는 또 1990년대에 라지오, 텔레비죤을 통해 영어강좌를 진행하면서 우리 주의 영어보급을 위해 일정한 공헌을 하였다.

둘째인 아들 서경이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취직했는데 지금은 제작부에서 맡은바 사업을 열심히 하는 한편 언제나 바쁜 누나의 몫에 외지에 있는 녀동생의 몫까지 다 하면서 홀로 있는 어머니의 생활을 책임지고있다. 

 막내 국화는 김미원선생이 심혈을 제일 많이 쏟아부은 자식이다. 3남매중 하나는 꼭 예술가로 키우고싶었던 선생은 당시 소학교 5학년생인 국화를 바이올린연주가로 키울 욕심에 지도교원까지 물색했는데 연길시내를 참빗질해도 바이올린을 살수 없었다. 어느 친척집에 바이올린이 있다는것을 알아낸 선생은 그 집에 찾아가 시세보다 돈을 더 많이 주면서 거의 빼앗다싶이 바이올린을 가져왔다. 그런데 선생님한테 갖고갔더니 성인용바이올린을 소학생이 어떻게 다루는가고 하면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또 어느 집에 어린이용바이올린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자기 자식을 배워주련다고 하면서 아무리 사정해도 팔념을 하지 않았다. 막부득이한 상황에서 보름만 쓰기로 하고 빌려왔는데 제시간에 돌려주지 않으니 임자가 와서 찾아갔다. 또다시 바이올린을 얻어들일 일이 한심해서 김미원선생은 한숨만 톺았다. 그러는 학부모가 딱했는지 이번에는 선생님이 자작바이올린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바이올린이 생기고보니 마땅한 교재가 없는것이 또 문제였다. 그리하여  지도교원이 내주는 련습곡악보를 집에 가져다 베끼기 시작했다. 그닥 좋지 않은 시력으로 그것도 밤작업을 하다보니 아무리 도정신해도 틀리는 곳이 있어 항상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딸의 성공을 위해서 선생은 몇번이고 달갑게 다시 베끼군 했다.
이렇게 지도교원이 얻어다준 자작바이올린으로 엄마가 손수 베낀 곡들을 련습하면서 첫발자국을 뗀 국화는 초중 1학년때에 중앙민족학원에 입학, 6년간 바이올린을 전공한후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악단에서 악사로 근무하다가 중앙민족학원 본과반에 진학하였다. 졸업후 장춘영화촬영소 악단에 배치받아 수석바이올린수를 담당한 국화는 현재 길림성가무단에서 1급연주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후대양성에 정진하고있다.

1981년에 퇴직휴양한 김미원선생은 로인대학에서 문오부장직을 맡고 여러가지 문예활동을 조직하기도 하고 남편과 함께 문구를 배워서 운동장에 장출근하기도 했으며 2002년부터는 등산을 견지하면서 로년생활을 다채롭게 윤색해가고있다.  허리와 척추를 다쳐 운동장에 드나들지 못하게 되고 령감까지 먼저 떠나간 지금에 와서 선생은 일주일에 2,3차씩 단위의 로인활동실에 나가 마작을 노는것을 소일거리로 삼고있다.

자식들과 손군들의 효성에 받들려 근심걱정없이 천륜지락을 누리고있는 김미원선생이 여생을 보다 건강하게, 유쾌하게 지내기를 기원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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