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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연극가협회 주석 전득주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4월9일 13시10분    조회:6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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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연극예술의 코기러기
 
지난해에 이름난 극작가 리광수선생의 뒤를 이어 연변연극가협회 주석으로 선거된 전득주 30여년간의 피타는 노력을 거쳐 이름없는 연극배우로부터 유능한 연출로, 조선족연극예술의 코기러기로 자리매김한 그의 인생궤적을 진맥해본다.

가수의 꿈을 키우던 나날

1951년, 군인가정의 3남매중 맏이로 태여난 전득주의 소시적 꿈은 커서 가수로 되는것이였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시간만 있으면 라지오를 틀어놓고 음악을 감상하는 그를 두고 아버지는 가문에 없은 풍각쟁이로는 되지 말라고 하면서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꿈을 접을 생각이 전혀 없은 전득주는 라지오다이얄을 최대한 낮추어놓고 식구들 몰래 노래를 들었고 연길시2중 초중부에 들어간후에는 학교선전대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

1968년 가을, 초중을 졸업한후 집체호의 호장으로 되여 선전대의 친구들과 더불어 안도현 만보향 금광촌에 하향한 전득주는 그곳에서 선전대를 뭇고 문예활동을 다채롭게 조직해나갔다. 따라서 금광촌은 주급문예회보공연에 참가하여 상을 타기도 하면서 린근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고 전득주 본인은 문예병으로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다.
당시는 혁명적본보기극을 선호하는 년대라 그 삽곡들을 많이 불러야 했는데 줄곧 조선족학교에 다닌 전득주로서는 아무리 해도 난생 처음으로 접촉하는 경극을 소화해낼수 없었다. 전직가수로 되는데 대해 어느정도 회의를 느낀 전득주는 화룡현 고성리변방검사소로 자리를 옮기고 번역관의 인생을 선택하였지만 초중 2학년때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다보니 번역도 마음대로 되여주질 않았다. 고맙게도 부대에서 길림성군구에서 조직하는 번역간부훈련반에 추천해주어 한조번역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였다. 배움에 목말라있던 전득주는 1분1초도 랑비할세라 공부에 열심하면서 부지런히 지식수양을 쌓아갔다. 덕분에 구두번역이든 문자번역이든 다 해낼수 있는 수준을 갖추게 되고…  
“송충이는 풀잎을 먹어야”
제대한후 연변뻐스공장에 배치받은 전득주는 공장선전대에 들어가 독창을 하면서 과외가수의 인생을 시작했다. 바로 그해에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중견력량 여러명을 잃은 연변연극단에서 배우를 대량 모집했다. 이렇게 되여 가수로 되는것이 꿈이던 전득주는 차차 기회를 보아 가무단에 이적할 타산으로 우선 전업예술단체인 연변연극단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다년간 선전대에서 뒹굴어서인지 연극도 해볼만했다. 그래서 노래공부에 일정하게 정력을 분산시키면서도 《쌍둥이처녀》 등 작품에서 주역을 맡으며 홀로서기에 진력하게 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연극에 재미를 붙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연극이 싫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환경을 바꿔보고싶었던 전득주는 친구를 통해 연길시기상대로 전근했고 착실하게 사업하여 2년만에 고공과(高空科) 과장으로 발탁되였다. 그러나 매일마다 레이다를 조작하면서 일기변화를 관찰하는 고공과의 사업은 수학기초지식이 거의 령이나 다름없는 전득주에게는 힘에 부치는 짐이였다. 당시 최씨성을 가진 서기 또한 열정도 있고 수완도 있지만 수리화기초지식이 상대적으로 박약한 전득주의 전도가 걱정되여 평생 기상대에서 일할 생각이라면 학습기회를 마련해주겠다고 했었다. 

전득주가 재차 진로를 두고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고있을 때 연극계의 원로인 최수봉선생이 집으로 불러주었다. 그날 최수봉선생은 아들벌이 되는 전득주를 위해 일부러 술상까지 차리고 “한번 좋아하면 발을 빼지 못하는 성미인걸 다 알고있다”고 하면서 연극단에 복귀하여 좋아하는 연극을 다시 해보라고 조언을 주었다.

(그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나는 아무래도 연극을 해야 하는가봐!)
이런 생각을 굴리노라니 당장 연극단으로 돌아가고싶어졌다. 그즈음 연극단은 석현으로 공연을 떠났는지라 연길에는 그의 복귀의향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마음먹은 일을 당날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미인 전득주는 그길로 저녁기차를 잡아타고 도문까지 간후 석현을 바라고 걸음을 다우쳤다. 이렇게 20리 밤길을 걸어 밤 11시경에 석현에 도착한 그는 연극단 지도부에 자신의 의향을 밝히고 받아주겠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젊음을 자랑하던 시절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연극이라는 한우물만 파나갈 결심을 가지고 연극단에 돌아온 전득주는 맡겨진 사업임무를 깐지게 완성하는외 시간만 있으면 책이나 신문을 읽으며 자기제고에 힘다했다. 하나라도 더 배우지 못해 아글타글하는 그 모습에 “저 젊은이가 장차 무슨 일이든 해낼거야!”라고 하며 탄복의 눈길을 보내주던 지도부성원들과 연직원들은 그 다음번 지도부개편에서 당원도 아닌 전득주를 단장으로 선거했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연변연극단 제1책임자의 짐을 떠멘 전득주는 나름대로 몸을 내번지고 사업하여 일정한 성과도 올리고 입당도 쟁취하였지만 연극예술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서 갑갑할 때가 많았다. 한시급히 보다 광범위한 지식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감안한 그는 중앙희곡학원에 진학하여 체계적으로 배워볼 용단을 내렸다. 

중앙희곡학원에 진학하려면 우선 정치, 어문, 지리, 력사 등 5개 과목의 문화과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겨우 3개월, 그것도 하루종일 공부에만 전념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렇다고 시험을 포기할수도 없게 된 전득주는 오전에는 출근해서 일상사무를 처리하고 오후부터 밤중까지 머리를 동여매고 시험준비에 달라붙었다. 덕분에 평균성적 82점(합격선은 75점)으로 문화과시험관을 넘은 전득주는 까다로운 실기시험에도 합격되여 길림성의 유일한 행운아로 중앙희곡학원 연출학부에 입학하였다. 

중앙희곡학원에서 공부하는 3년간 학급의 유일한 조선족인 전득주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갑절 더 노력하면서 공부에 열심하여 학과목마다 우수한 성적을 따내였고 학급담임교원까지 손에 땀을 쥐고있던 론문고비도 87점의 성적(제3위)으로 무난히 통과하였다. 연변연극단에 돌아와 졸업작품 《사나이를 찾습니다》의 연출임무를 원만히 수행하고 총성적 제5위로 중앙희곡학원을 졸업한 전득주는 그후 《그 총각과 택시아가씨》, 《요란한 사랑》, 《꽃본 나비》 등 여러부의 연극에서 연출을 맡으며 소문을 놓았다. 연변대중들의 환영을 받는 인기배우인 한석봉은 바로 《그 총각과 택시아가씨》에서 주역을 맡아 실력을 인정받았고 다른 한 인기배우인 김동현은 《요란한 사랑》에서 주정뱅이형상을 창조한것을 계기로 “주정뱅이전문호”로 되였다.

1988년,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학부를 개설할 임무를 맡고 예술학원에 전근한 전득주는 교원초빙으로부터 학생모집 등 모든 준비사업을 혼자힘으로 해냈을뿐만아니라 학부의 사업이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선후에는 교수대강은 물론 대사교재까지 제손으로 편찬하면서 후대양성에 살손을 붙였다. 결과 첫기에 벌써 전도유망한 제자들을 여러명 양성해냈는데 그들중 채용, 오성복과 윤향화는 연변연극단에서, 김문혁과 리경화는 연길시조선족구연단에서 중견배우로 활약하고있으며 당년에 소년아동제재의 TV극 《별찌》에서 주역인 주성길의 배역을 맡았던 황권학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뉴스종합채널에서 총편판공실 주임으로 사업하고있다.

좌절의 고배

연극계에서 전도유망한 연출로, 대학교에서 유능한 교원으로 각광을 받던 전득주가 좌절의 고배를 맛보게 된것은 지난세기 90년대초였다.

당시 학습차로 한국에 간 전득주는 실천가운데서 보다 많은것을 배워낼 속셈에서 187회짜리 TV련속극 《정든 님》제작진에 가담, 조리연출을 맡고 팽이처럼 돌아쳤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로 되여 곤혹을 치르게 될줄이야? 

중한간의 문화교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있는 상태에서 해당부문의 허락도 없이 한국의 드라마제작진에 가담하고 또 조리연출이라는 “견장”까지 달았으니 말밥에 오를법도 했다. 귀국후 한동안 조사대상으로 지목되고 당내엄중경고처분까지 받은 전득주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학부 주임의 직무를 내놓고 연극단으로 돌아가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였다.

한창 손을 펴고 일해서 성과를 쌓을 나이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빈둥거리자니 너무도 억울해서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도저히 버텨낼수 없게 된 전득주는 중앙희곡학원시절 동창생들의 주선으로 108회짜지 텔레비죤련속극 《천지인생(天地人生)》제작진에 가담하여 부연출을 맡았다.

지금에 와서 전득주가 다행으로 생각하는것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 텔레비죤련속극제작실천이 그후 연변에서 22회 텔레비죤련속극 《진달래》를 출품하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여준것이다.

연극의 황금기를 수놓아가던 나날

그후 시정을 받고 주문화국으로부터 연변연극단 업무단장 겸 연출로 임명된 전득주는 전에없는 사업열정으로 각항 사업을 밀고나갔다.

이때는 연극 《털없는 개》가 전국적인 인기돌풍을 몰아오면서 중국조선족연극이 바야흐로 상승세를 타고있던 시기라 배우들은 《총각별동대》, 《사랑의 품》 등 새로운 작품들을 줄기차게 련습해서는 동북3성의 조선족집거구역을 돌면서 순회공연을 할랴, 북경에 회보공연을 다녀올랴 퍼그나 분주히 보냈다. 따라서 업무단장으로서의 전득주도 해당 련계며 조직사업으로 한가할 사이가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연출이라는것을 항상 명기하고있은 그는 연극 《사랑에 지친 녀인》 등 작품에서 연출을 맡으며 자기를 갈고 닦았다. 

1997년에 전득주는 사업의 수요로 연변문련에 전근되여 연변연극가협회 상무부주석 겸 비서장으로 일하게 되였다. 이 시기에 와서 몸은 비록 연극단을 떠났지만 계속해서 연변연극단의 예술총감직을 맡은 전득주는 일상사무에만 매여있지 않고  《무우골의 이야기》, 《댄스를 추는 아이들》, 《열선전화》 등 연극과 《비오는 날》, 《납작못》, 《우리의 선생님》, 《등산복》,  《가짜돈》 등 20여부의 소품에서 연출을 맡았고 창작품도 여러부 내놓았다. 

중앙희곡학원 졸업전야에 원장선생님으로부터 “자기의 형식에 자기의 내용을 부여하라”는 당부를 받은적 있는 전득주는 연출사업에서 자기만의 좌우명을 견지하고있는데 그것인즉 첫째로 자기를 반복하지 않고 작품마다 비슷한 풍격을 도입하지 않으며 둘째로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적인것을 추구한다는것이다. 

다년간의 연출실천에서 전득주는 이 좌우명으로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전통의 토대에서 자기화한 풍격을 창출하기에 최선을 다했다. 하기에 그가 연출을 맡은 작품들은 하나같이 개성을 가지고있으며 또 이 우세로 해당 전문가들과 대중들의 긍정을 받아 《요란한 사랑》은 170여차, 《댄스를 추는 아이들》과 《무우골의 이야기》 등은 100여차 공연되는 성과를 올리였다.

학창시절에 《가정성을 론함》이라는 제목으로 된 졸업론문을 펴낸적 있는 전득주는 또 지금까지  《체험파대사 허동활의 표현풍격》, 《21세기를 맞이하는 연변연극》, 《중국조선족예술교육》(합작) 등 1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는것으로 중국조선족연극의 발전에 기여를 했다. 

고마운 사람들

출중한 사업성과로 《진달래》문예상, 길림성 희곡분야의 돌출기여상을 비롯한 묵직한 영예를 따내고 조선족연극예술의 코기러기로 자리매김한 오늘에 와서 전득주는 30여년의 연극인생을 총화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고 속심을 터놓았다.

뒤돌아보면 연극계에서 걸음마를 탈 때부터 가르침에 정성을 쏟은 장인어른 허동활선생, 관건적인 시각에 명지한 선택을 하도록 조언을 주신 최수봉선생, 당조직에 소개해주며 어머니의 사랑을 몰부어온 정인덕선생, 가장 힘들 때 사랑의 손길을 보내준 중앙희곡학원시절의 선생님과 동학들…이들 모두가 전득주에게는 은인처럼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 가장 고마운 사람은 그래도 리결사부주장과 연변주당위 전임선전부장인 리득룡이라고 한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연변을 소재로 한 텔레비죤련속극이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된적 없다는 현실에 대해 가슴아프게 생각한 전득주는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상무부주장으로 사업하고있는 리결사를 찾아가 텔레비죤련속극을 찍도록 지지해줄것을 간곡하게 청들었다. 리결사부주장은 그자리에서 현금 1만원을 비준해주면서 북경에 들어가 해당 수속을 밟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셔올것을 지시했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전득주는 개인저금 6만원을 허물고 선후로 6차나 북경에 드나들면서 준비사업을 추진했고 이름난 극작가인 고만탕(高 堂)을 연변에 “모셔와서” 현지답사를 하도록 2차나 길안내를 하고 20여명을 취재하도록 다리를 놓아주면서 극본창작을 “밀어맡겼다.”

그즈음 선전부장인 리득룡은 북경의 중앙당학교에서 학습중이라 전득주는 초보적으로 완성된 극본을 가지고 중앙당학교로 찾아갔었다. 그때 리득룡부장은 틀린 글자까지 고쳐가면서 까근히 읽어보고나서 의견을 제기해주었고 연변에 돌아가 여차여차 처리하라고 일깨워주었다.

연변의 옹군모범 송순녀를 원형으로 하는 22회 텔레비죤련속극 《진달래》(일명 《눈보라속의 진달래》)는 2005년에 제작에 들어가고 서천성 문천에서 강진이 발생한 날인 2008년 5월 12일부터 중앙TV 제3채널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였다. 그때에도 리결사부주장과 리득룡부장은 선참으로 전화를 걸어와 축하해주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운좋은 남자

취재를 거의 마무리할 림박에 전득주는 직업선택을 잘하고 장가를 잘 들고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것이 인생에서의 가장 큰 성공이라고 이실직고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득주는 일찌감치 전공을 바꾸었기에 연극으로 성공을 안아올수 있었다. 다시말하면 꿩대신 닭이라고 노래 대신 선택한 연극이 기실은 성공의 지름길이였던것이다.

다음 연극인 전득주의 오늘이 있게 된것은 안해의 내조와 갈라놓을수 없다. 안해 허숙은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대해주면서 무릇 남편이 하고저 하는 일이면 종래도 반기를 드는 법을 몰랐다. 당년에 예술을 포기한답시고 기상대로 전근했을 때에도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진달래》의 제작을 위해 사처로 뛰여다니면서 가정의 저금을 다 허물어도 바가지 한번 긁지 않은 현명한 안해가 있기에 전득주는 뒤근심이 없이 연극이라는 한우물만 파면서 인생을 즐길수 있었던것이다.

전득주의 아들 또한 온 가정의 자랑거리이다. 금년에 28살인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1중을 졸업한후 남경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거기에서 화학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스웨리예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다. 대학 2학년때에 입당을 쟁취하고 학생회 부주석으로 활약한 그애는 우리 민족의 전통미덕을 그대로 전수받아 웃어른들을 공경하고 가정처사를 잘해서 주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있다. 지난해에 그애가 모처럼 귀국했을 때 외할아버지가 편찮으시여 병원에 입원했었다. 이것을 알게 된 그애는 집에 있는 20일간 매일마다 병실로 때식을 날라가서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했으며 목욕이며 머리감기는 물론 손톱발톱을 깎아드리는 자질구레한 일까지 전담하면서 극진히 보살펴드렸다.

지난해에 열린 연변연극가협회 제7차대표대회에서 만장일치의 찬성표로 연변연극가협회 주석으로 선거된 전득주는 최근에 와서 기층조직에 대한 지도, 극본 토론과 수개 등 사업에 많은 정력을 할애함과 동시에 리퇴직배우들로 조직된 봉사예술단도 지지해주면서 연극인들의 “친정엄마”역할에 충실하고있다. 중년세대연극인 전득주의 소망이라면 힘이 닿는한 계속 연극을 위한 사업에 모든 정력을 몰붓는것이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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