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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문예사업에 몰붓는 심혈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2월14일 11시21분    조회: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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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상무부주석인 리성비의 이야기

20대시절부터 시를 써서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꼬박 10년간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 주임직을 력임한적 있는 리성비씨  1990년대에만도 선후로 5권의 시집을 펴내면서 전도유망한 청춘파시인중의 한사람으로 자랑을 떨쳐가던 그는 최근년에 와서 길림성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상무부주석으로 활약하면서 우리 민족 민간문예 발굴, 보급, 전승, 연구 등 사업에 모든것을 바쳐가고있다.

시와의 만남

량부모가 고아나 다름없는 가정에서 삼형제중 둘째로 태여난 리성비는 부모님들의 사랑이 형이나 동생에게 더 많이 쏟아지다보니 동년시절을 퍼그나 외롭게 지냈다. 당시는 전방에서 돌아온 부모님들이 사업배치를 받기전이여서 성비네 식구들은 외할머니가 재가해간 고장인 팔도촌(룡정시 팔도향)에서 살았는데 나어린 성비는 무수한 날 홀로 개울가나 논밭 그리고 산과 들을 헤매며 물고기나 개구리, 참새, 메새를 잡는것으로 시간을 보냈고 강아지나 염소, 토끼와 친구로 지내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일곱살때 아버지가 주수리국에 배치받은 덕분에 연길시에 와서 소학교, 중학교에 다니게 되였지만 1969년에 온가정이 룡정시 동성용진 장남촌으로 하방(下放)을 내려가면서 성비는 또다시 농촌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후 아버지가 정책시달을 받으면서 집체호에 호구를 붙인 성비는 기나긴 밤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어서 심심풀이삼아 책들을 읽었는데 그때 감동과 충격을 제일 많이 안겨준 책이 뿌쉬낀시집이였다.                                        

이렇게 뿌쉬낀의 시를 읽으며 시에 흥취를 갖게 되고 점차 시문학에 도취되여버린 그는 이따금 떠오르는 구상을 필기장에 적어두며 아무도 모르게 시습작의 걸음마를 타기 시작했다.

1978년 여름에 연길시에 돌아와 9.3공장에 배치받은 리성비는 3년동안 불도젤과 씨름하며 억척스레 일해 2등공을 세우면서도 시창작의 꿈만은 접지 않았다. 1981년에 연길시화학비료공장에 전근하여 여유시간이 비교적 많은 보이라공을 선택한 그는 짬이 생기는대로 시창작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며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입하였고1982년 10월에는 마침내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꾸리는 《은하수》잡지에 처녀작 《세멘트》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성휘, 김태갑, 조룡남 등 선배시인들과 가까와진 그는 시인들의 집문턱을 조심스럽게 넘나들면서 부지런히 가르침을 받았고 나중에는 시인의 집에 호적을 붙이고 잠시 그 집에 머물러있으면서 별같은 시인이란 이름을 갖기도 했다. 그후 결혼을 하고 어린애까지 있게 되자 리성비는 8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단칸방에서 세집살이를 하는 처지였지만 낮이면 공장에 나가 힘든 육체로동을 하고 퇴근후면 딸애를 업고서 책을 보거나 시를 썼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연변일보》, 《길림신문》, 《연변문예》, 《은하수》, 《도라지》 등 신문간행물을 통해 륙속 독자들과 대면하였고 리성비는 전도유망한 로동자시인으로 인정을 받아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86년 5월 1일에는 《일에서 굳힌 의지와 완력으로》라는 제목으로 된 보도를 통해 《길림신문》에 사적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불타는 창작열

사업에서, 창작에서 난제에 부딪치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지식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감지한 리성비씨는 시험을 거쳐 연변대학에서 꾸리는 3년제 종업원반에 입학, 조선언어문학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그런데 당금 600원의 학비를 내야 하는것이 문제였다. 성비씨의 얼마 안되는 로임으로 세식구가 빠듯하게 생활하는 형편에서 600원은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그렇다고 요행 차례진 학습기회를 포기할수도 없게 된 그는 낮이면 공부를 하고 밤이면 쥐가 욱실거리는 상점에서 수직을 서면서 돈을 벌어 학비를 마련했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리론지식을 체계적으로 학습한데다 시우들의 도움으로 미숙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갈고 닦으며 실천속에서 배운 지식을 공고히하니 성비씨의 창작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그는 《모래》, 《백두산》 등 수십수의 시와 가사, 수필 등을 륙속 발표하면서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한후 연길시텔레비죤방송국에 배치받은 성비씨는 휴식일도 별로 없이 밤낮으로 뛰여다니는 기자의 삶을 살면서도 창작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취재현지로 달리는 차안에서나 취재도중 잠간 숨을 돌리는 사이에도 령감만 떠오르면 그 내용들을 빠짐없이 적어두었다가 어쩌다 생기는 휴식일이면 단위에 나가 정성껏 정리하면서 완성품으로 승화시켰다.

그 시기 리성비씨는 밤에 잠자리에만 들면 줄지어 떠오르는 령감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처음에는 다시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에라, 래일 기억을 더듬으면서 적지 뭐…”라고 하면서 그대로 꿈나라에 들어가군 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깨고보면 전날 밤에 그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던 령감들이 한글자도 생각나지 않아 도무지 적어내려갈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령감들을 흘려버리기를 여러차나 반복하던 성비씨는 령감만 떠오르면 한밤중이라도 일어나서 적어놓고야 시름을 놓는다고 하시던 선배님들의 말씀에 진정 리해가 갔다. 그때로부터 하루저녁에 10여차씩 전등을 다시 켜더라도 령감이 떠오르면 즉각 적어두는 습관을 키웠는데 이런 소중한 자료들은 후에 훌륭한 시편으로 세련되여 독자들과 대면하고 여러 급별의 상을 안아오기도 했다.

그후 《예술세계》잡지의 편집으로 전근하고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 주임직을 맡게 된 성비씨는 본직사업인 문예리론편집임무를 제때에 완성하는 전제에서 《도문강여울소리》중국조선족시가연구토론회, 《연변지용시문학상》, 《2000세계시인 시랑송대회》 등 대형행사를 조직하고 《연변녀류시회》를 창립하며 《조명희문학제》를 이끌어내는 등 사업을 전개하느라 퍼그나 분주하게 보냈다. 그즈음 안해가 한국으로 떠나가면서 딸애를 보살피고 세집을 옮기는 등 모든 가정일을 혼자서 도맡아야 했고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이 생기면서 장식을 하기 위해 원자재구입까지 하다보니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바삐 돌아쳐야 했다. 그와중에도 개인시집을 네권이나 묶어내고 《천지》월간사의 문학상, 연변일보의 《해란강》문학상, 연변인민출판사의 《백두컵》문학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주정부《진달래》문예상, 길림성《장백산》문예상 등 영예도 무더기로 따냈다니 본인의 로고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루종일 발바닥이 다슬게 뛰여다니다가 한밤중에 귀가해서 누룽지에 된장으로 늦은 저녁을 에때우던 나날을 떠올리며 성비씨는 “그때 ‘팽이처럼 돌아친다’는 성구의 참뜻을 알게 되였다”고 고백했다.

우리 민족의 민간문예사업을 이어가는 길에서

《나는 당신의 고무지우개인가》, 《이슬 꿰는 빛》, 《하늘 그리고 붉은 거미》, 《분단의 아픔을 안고》, 《겨울강은 흐른다》 등 시집을 묶어내고 수백편의 시외에 《나는 시내물》, 《고향의 진달래》  등 가사도 수백수 발표하면서 유능한 시인중의 한사람으로 소문을 놓던리성비씨가 민간문예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것은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비서장, 상무부주석, 길림성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등 직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1996년부터 연변민간문예가협회의 사업에 몸을 담은 리성비씨는 민간문예 수집정리 및 출판사업을 중시하는 한편《중국조선족민간이야기구술대회》, 《중한민간음악가창회》, 《연변조선족퉁소예술절》, 《룡정어곡전농부절》 등 굵직한 행사를 펼치면서 민간문예 및 민속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함과 동시에  해당 연구토론회를 수차나 조직, 개최했다. 그리고 김재권선생이 수집정리한 이야기대왕 《황구연전집》출간을 위해 2004년부터 연변민간문예가협회와 길림성민간문예가협회의 해당문건을 작성하고 주문련, 주당위 선전부, 주민족사무위원회, 주정부의 동의를 거쳐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를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 결과 주당위 등개서기의 뜨거운 관심과 지지로 2008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0권이 전부 출판되였다.

2005년에 첫패로 길림성무형문화재양성반에 참가하고 그 이듬해에 주문화국에서 조직한 연변무형문화재전문가소조 조장으로 된 그는 각 분야의 전문가 12명을 조직하여 구전문학, 민간음악, 민간무용, 전통악기, 전통복식, 민속놀이, 민간공예, 전통명절을 포함한 우리 민족의 무형문화재 신청사업에 정력을 기울였다. 전문가들의 신근한 노력으로 우리 주의 69개 항목이 주급무형문화재로, 45개 항목이 성급무형문화재로 비준받았으며 상모춤, 널뛰기, 그네, 퉁소, 전통회혼례, 장고춤, 학춤 등 15개 항목은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되였는데 성비씨가 직접 신청한 《황구연민간이야기》는 2007년에 길림성무형문화재로 등록되였다.

정협위원으로서의 성비씨는 다년간 우리 주의 민간문예사업을 둘러싸고 가치가 있는 제안들을 여러건이나 제기하였는데 《민족문화유산을 보호할데 관한 건의》는 우수상을 탔고 《민간공예미술제품의 산업화발전을 추진할데 관한 건의》와 《연변 근대조선족의 전통가옥을 보존할데 관한 건의》는 중점제안으로 평의되였으며 《두만강문화를 개발하고 인문관광지를 건립할데 관한 건의》는 정협회의에서 호평을 받고 연변일보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인간 리성비

착하고 어진 눈이 유달리 인상적인 리성비씨는 실생활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화기애애하게 지낼수 있는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사나이이다. 선배님들을 존중하고 손아래 문우들 앞에서도 틀을 차리거나 호통을 치는 법이 없이 언제든 형님답게 처사하는 그에게서는 남을 무시하거나 자기를 뽐내는것 같은 행위는 찾아볼수조차 없다.

애주가인 성비씨는 선을 보러 나갈 때에도 절반은 흙이 되여있을 정도로 술에 착찹하다. 그래서 문우들과 더불어 술잔을 나누며 정감을 교류하고 우의를 돈독히하기를 특별히 좋아했었다. 8평방메터짜리 세집에서 살 때에도 석화, 리임원, 김인선, 최룡국, 림금산, 주룡 등 시우들이 찾아와서 맥주잔을 부딪치며 밤을 새는 날이 푸술했다. 그때 조룡남선생도 여러차나 다녀갔는데 집이 너무 비좁아서인지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다가 성비씨의 딸애한테 소비돈을 쥐여주곤 묵묵히 돌아서군 했다.

딸 리매에게 있어서 성비씨는 따뜻한 아버지이자 자애로운 “엄마”였다. 그동안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어엿한 27살 처녀로 자라난 리매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작곡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연길시조선족예술단 창작조에서 사업하고있다. 량부모님에 형님과 동생까지
 선후로 세상을 떠나가고 안해는 아직까지도 귀국하지 않아 사람이 그리운 성비씨지만 미더운 딸애가 곁에 있기에 이전처럼 외롭지가 않고 그애만 보면 가슴이 뿌듯해나면서 절로 힘이 생긴다고 한다.

2002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2004년 9월에 로신문학원 고급연수반에 연수를 다녀온 리성비씨는 시창작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인의 자존심, 순수함과 창의력 그리고 시인의 량심을 갖고 부단히 해탈을 꿈꾸어야만이 혼탁한 세월에 너와 나의 가슴에 와닿는 예술적가치가 있는 시를 써낼수 있다고 피력하였다. 그는 또 천부보다는 노력을 많이 해왔다고 터놓으면서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도 놓치지 말고 자기의 정서와 감각, 언어로 새롭게 표상화하기에 공력을 들여야만이 시공간을 뛰여넘고 시대를 초월하는 훌륭한 시를 써낼수 있을것이라고 터놓았다.

최근년에 리성비씨가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연변민간문예가협회의 사업에 매여있다보니 시창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오래동안 작품집을 내놓지 못한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작품집의 원고집필을 기본상 마무리한 그는 앞으로는 창작의 탕개를 늦추지 않고 보다 많은 작품을 독자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할것을 약속했다.

아래에 리성비씨의 시 《진정을 살면》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진정을 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오// 진정을 살면/ 때로는 눈물이 흐르오//엄마야/ 난 왜 진정을 사누?//버릴래야 버릴 곳도 없고/ 자를래야 자를 칼도 없소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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