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서울대인문사회계열 최초 조선족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1월23일 10시00분    조회:627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강광문
강광문(38·사진) 교수는 서울대 인문사회계열 최초의 조선족 출신 교수다. 경북에 뿌리를 둔 그의 조상은 일제때 중국 요령성에 건너가 길림성 매하구에 정착했다. 민족학교를 다닌 그는 중국 명문인 베이징대를 졸업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올해 초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가 거친 동아시아 3국은 오늘의 조선족을 주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조선족의 미래를 ‘1인칭’ 화법으로 재구성했다.

디아스포라의 꿈 ‘초국적 민족공동체’

지도를 펼쳐 손가락 끝으로 이어본다. 경북 영천, 대구, 서울 지나 평양으로, 신의주 거쳐 중국 심양(선양)까지. 짚어가는 손가락조차 현기증 난다. 아득한 그 길을 어찌 왔을까. “기차 타고 왔지.” 할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른들 손에 끌려 만주로 향하던 12살 소녀는 차창밖 고국 풍경 대신 거대한 기차만 마음에 담았을 것이다.


소녀는 동족의 남자와 결혼했다. 먹을거리가 무궁무진하다 해서 고향을 떠났지만, 부부는 영 살기가 어려웠다. 길림성과 요령성의 넓은 땅을 옮겨 다니며 번번이 새로 땅을 갈았다. “손을 움직이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할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해.” 할아버지도 나에게 말했다. 땅에 이마를 박고 살아온 그들은 나더러 땅을 떠나라 하였다.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하였다.

나는 기차 타고 고향을 떠났다. 베이징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일본 도쿄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3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심양, 베이징, 도쿄를 거쳐 서울까지. 아득한 그 길 위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모든 곳에 속하였다. 나는 긴장하고 갈등하는 동북아시아에서 평생을 유랑하고 대를 이어 떠돌았다. 민족·국가의 경계에 서성이느라 민족·국가의 속박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살아 계셨다면 할머니는 말했을 것이다. “우리 손자 장하구나.” 2005년 1월10일 저녁 8시41분, 할머니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길림성의 동생이 도쿄의 나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했다. 나는 통곡했다. 그가 고국을 떠나고 그 손자가 고국에 돌아오기까지 70여년이 걸렸다. 돌아와 앉아 있으니 그 시절이 사무친다.

나, 강광문은 서울법대 최초 조선족 교수다.
경북 출신 조부모는 일제때 중국 길림성에 건너가
역사의 격랑 속에 민족교육을 했다.

할머니의 고향은 경북 영천,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이역만리에 와서도 조선족은 피의 뿌리를 찾아 백년가약을 맺었다. 경북 출신 부부는 여덟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와 그 형제의 고향은 모두 다르다. 그것은 난리의 세월이었다.

 할아버지·할머니 세대는 중국 정부가 제공한 땅을 기반으로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조선족은 한족보다 더 열심히 농사지어 더 많은 소출을 올렸다. 그 돈으로 연변대학을 짓고, 한글로 적힌 민족신문을 발행했다. 일제강점기에 국외로 이주하기는 미국·일본의 동포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치·교육·언론에서 두루 민족공동체를 일군 것은 조선족뿐이다.


나는 높은 교육열 덕에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도쿄대서 박사를 받고 한국에 왔다.
70년만에 조부모가 떠난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길림성 매하구 조선족 제11중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관심사는 오직 공부였다. 우리는 반복되는 시험에 매달렸다. 선생님들은 ‘경쟁의 냉혹함’, ‘인생의 실패’를 거론하며 어린 우리를 닦달했다. 이미 그때부터 우리는 한족과 묘한 경쟁을 치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아야 했다. 모든 민족학교는 어느 한족학교보다 교육열이 높았다.

우리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모두 배웠다. 치우침 없이 모든 언어를 익힐 때까지 선생님들은 가혹할 정도로 우리를 밀어붙였다. 그들은 우리가 특정 언어에 국한되어 자라길 바라지 않았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어린 조선족의 운명을 그들은 예감했을 것이다. 조선족은 어떤 환란에도 굴하지 않는다. 우리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다가오는 시절을 잘 이겨내야 했다. 우리의 ‘초국적 정체성’은 도도한 ‘민족적 자긍심’ 위에 형성됐다.

 

동북아에서 평생을 유랑하고 대를 이어 떠돌았다.
조선족은 100년간 진행된 민족분산을
이제 새 공동체로 진화시키고 싶다.

입시지옥을 견뎌낸 나는 베이징대에 입학했다. 그제야 나는 동북에 집거한 조선족의 한계를 보았다. 조선족 대학생은 대체로 무지했다. 오직 대학 입학이 목적이었을 뿐,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 부모의 수준을 넘어서는 질문이었다. 세계는 동북은 물론 중국보다 넓었다.

그 무렵 고향에선 수상한 일들이 시작됐다. 민족학교는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빠르게 망가졌다. 학생이 부족하여 문 닫는 학교가 생겼다. 살아남은 학교의 위상과 수준도 급격히 추락했다. 조선족이 새로 진출한 대도시에는 민족학교가 없거나, 있더라도 사립학교뿐이었다. 공립 민족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민족 정체성에 대한 회의도 확산됐다. 요즘 젊은 조선족 부모들은 중국 주류사회에서 잘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뭣하러 조선족 정체성을 고집하느냐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주류에 대한 열등감이다. 조선족은 중국 현대사의 모든 국면마다 유난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외할아버지는 항일전쟁에 참여했고, 할아버지는 국공내전에 가담했고, 작은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전선에 나갔다. 심지어 산아제한까지 조선족은 한족보다 열성으로 나섰고, 조선족 인구 자체가 줄었다. 그 바탕에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열등감이 있다. 소수는 변화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으면 절멸할 것이다.

이제 조선족 젊은 부모들은 열등감에서 자식들을 해방시키려 한다. 중국 소수민족에 머물지 않고 세계 무대에서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는 꿈을 꾼다. 중국은 그 무대를 향하는 바탕이 된다. 중국의 위상이 커지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커다란 변화를 온몸으로 헤쳐온 조선족에게 ‘G2 시대’는 예삿일이 아니다.

‘복합적 코리아 공동체’를 형성해
조선족을 통해 우리민족이 국경·국적을 넘어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선족 대이주 때문에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민족공동체가 급격히 유실되고 있다. 그 결과, 선조들이 개척한 동북3성의 터전을 잃을 수 있고, 조선족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꿀 기회가 남아 있다. 조선족이 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작지만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만들고, 느슨하지만 지구적인 유대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지난 100여년 동안 진행된 한민족의 분산을 거대하고도 새로운 공동체로 진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 거주 한국인은 80만~90만명이다. 일본에도 재일동포 사회가 있다. 이주 조선족이 한국인·재일동포 등과 어울려 ‘복합적 코리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조선족 디아스포라(대이주)가 갈등하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까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그 책무의 일부가 한국인들에게도 있다. 나는 지금 책을 쓴다. 30대 조선족의 한국 정착기다. 연말에 출판될 예정이다. 한국인들이 우리를 통해 새 미래를 보았으면 좋겠다. 땅을 찾아 사방천지를 유랑하고,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다시 이역만리를 떠돈 우리는 조선족이다.




한겨레 유신재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27)   ― 청도 미신커생물과학기술유한회사 리사장 리향란 인터뷰       새로운 창업 2개월 전망 밝아        다함께 건강하고 즐기는 사회 희망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어            사...
  • 2012-12-07
  • 한 녀교수의 조선족연극 사랑   연변대학 연극학부 학부장으로 사업하고있는 한영희교수는 20년간 조선족연극의 교수와 연구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이루어 학계와 연극계의 주목을 받고있다. 1965년 연길시의 한 평범한 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한영희씨는 연길에서 소학교, 초중, 고중 교육을 마친 뒤1984년, 중국연극...
  • 2012-12-06
  • 30년간 한우물만 판 리룡문농민 암소 한 마리로 시작한 소사육업... 현재 년간 150마리 출하규모 형성   암소 한마리로 소사육업을 시작한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의 리룡문농민(49세)이 30년간 한우물만 판 결과 지금은 년간 소 150마리 출하 규모를 형성하여 화룡시에서 소사육 1인자로 손꼽히고있다. 가정별생산량...
  • 2012-12-06
  •     (흑룡강신문=서울) 윤교원 특약기자 = 20년동안 오로지 이미용 기계를 개발하면서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루어 오는 중소기업인을 만났다. 외산 제품이 점유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용기계 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토대로 한국 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는 ㈜하성전자 하충현 대표를 인터뷰 했다. &n...
  • 2012-12-05
  • 고전춤을 추고 있는 박설화 부교수   (흑룡강신문=연변) 윤운걸 길림성특파원 = "무용은 마음의 정감표현으로 그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무용이란 예술로 표현하자면 반드시 그 무용의 내용이 깊이가 있어야 한다"라고 서두를 떼고 있는 박설화 부교수 무용가이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무용예술이란 시공간을 다음과 ...
  • 2012-12-05
  • 30대 판소리 무형문화재 전승자 최려령     무형문화재 전승자 하면 년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을 떠올리지만 연변 전통음악 분야에는 30대 판소리 전승자가 있습니다. 주급 판소리 전승자 최려령씨를 만나봤습니다. 1993년 최려령은 당시 연변대학 예술학원 민악학부 주임인 작은 할아버지 방룡철의 소개로 연변의 ...
  • 2012-12-04
  •     연변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예술단의 최향화양을 만나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헌례영화《해란강반의 벼꽃향기》에서 주인공 김향화역을, 텔레비죤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우리 집...
  • 2012-12-0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