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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고 듣고싶은” 한 남자의 인생멜로디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1월25일 09시55분    조회:8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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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라성도

현 연변대학예술학원 음악학전업 성악교연실 주임 라성도의 이야기


      해란강 물소리 듣고싶었소/ 선경대 진달래 보고싶었소
      산기슭에 언덕에 과일동산/구름같은 사과배꽃 보고싶었소
      평강벌 칠십리 설레는 벼파도/황금의 물결소리 듣고싶었소 
      고향의 그 모습이 보고싶었소/고향이여 화룡이여/못견디게 그리웠소

      1996년 연변TV음력설야회에서 송경철가수가 불러 하루밤사이에 대중가요로 떠오른 노래 《보고싶었소 듣고싶었소》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변함없는 인기를 과시하고있다. 오늘 기자가 만나본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 노래의 작곡자 라성도선생이다. 약간은 야윈듯한 몸매에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는 라성도선생은 한마디로 젊음의 패기와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는 중년의 신사였다.

무용수로 빛낸 학창시절


      1955년 3월 11일에 훈춘시 위생국국장이였던 아버지 라희룡과 어머니 한옥련사이에서 6남매중 셋째로 훈춘현소재지에서 출생한 라성도는 귀여운 “미모”에 작고 아담한 체구때문에 녀자아이로 오해받기도 했다. 성도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동네형님들은 앞다투어 성도를 자전거앞자리에 태우고다니며 “세상구경”을 시켜주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녀학생들보다 더 유연한 몸놀림과 풍부한 표정연기를 바탕으로 성도는 소학교와 중학교시절에 학교의 무용수로 큰 활약을 펼쳤다. 잦은 전학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는 곳에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그가 가는 곳에는 늘 분위기가 뜨거웠다.
      그러던 어느 한번 학교의 교내운동대회날이였다. 성도의 장끼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던 담임선생이 그를 주석대에 마련된 학생장끼자랑무대에 추천했다. 무용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성도였지만 학우들과 선생님들앞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려니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믿음에 찬 담임선생님의 반강제적인 요청에 못이겨 조심스레 마이크를 넘겨받은 성도는 마음을 다잡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운동장 곳곳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휘파람소리가 울렸다. 뜻밖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있는 성도의 앞에 당시 학교의 교장선생이였던 김응준시인이 대견해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라성도학생, 래일 당장 학교 성악대에 가입하시오.”
      그렇게 뜻하지 않게 올랐던 장끼자랑무대가 성도의 꿈을 바꿔주는 계기로 되였다. 자신의 노래실력에 대해 뜻하지 않게 인정을 받은후 라성도의 무용수꿈은 서서히 가수꿈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속에서 그는 차츰 성취감에 도취되여갔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중앙라지오방송국에서 조선말아니운서를 초빙하고자 학교를 찾아왔고 라성도에게 호감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초빙제의를 보냈다. 큰 도시에서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라성도는 화려한 유혹을 결연히 뿌리치고 연변예술학교를 선택했다. 갓 빠져든 연변음악에 대한 애착이 모든 유혹을 물리칠만큼 그를 지배하고있었던것이다. 
      그렇게 1973년에 의젓한 모습으로 연변예술학교 성악학부에 입학한 라성도는 지도교원선생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학교의 유망주로 불리웠다. 당시 예술학원 김삼진원장이 라성도를 불러놓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너는 졸업후에 학교에 남아서 우리 민족의 인재양성에 심혈을 몰부어야 할 인재이다. 행동거지와 언행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거라.”
      당시 련습실의 환경조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성도는 학교측의 특별배려로 전문련습실에서 마음껏 특장을 키워갔다. 그 덕분에 성도는 독창은 물론 중창, 대창, 무용에 이어 재담까지 멋지게 소화해낼 정도로 실력을 다졌다. 대학생활 3년내내 그는 학교의 자랑거리로 되여 각종 무대에서 뛰여난 활약을 펼쳤는바 1976년 대학교졸업식무대에서는 13개의 공연종목중 11개의 종목에 등장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장끼를 발휘했다.
      1976년, 주덕과 주은래에 이어 모주석까지 사망되는 바람에 중국전역은 전례없던 슬픔에 잠겼다. 피끓는 청년들은 졸업과 동시에 “가장 간고한 지역으로 달려가자”는 당중앙의 호소에 발맞춰 너도나도 편벽한 시골로 향했다. 예술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온실안의 화초처럼 안일한 생활에 물젖어있던 라성도 역시 가슴깊이에서 한줄기 정열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다.
      “간고함속에서 또다른 나의 자아를 찾고 꿈의 사각지대에 가려져있는 인재를 발굴해 연변의 예술계에 더 많은 인재를 수송하자!”
      뜻을 굳힌 라성도는 학교령도와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빈곤대대로 소문났던 화룡현 덕화공사 길지대대로 향했다. 우수한 인재가 자초해서 시골에 가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보도매체들에서 앞다투어 그를 취재하는데 열을 올렸고 학교측에서는 “꼭 다시 돌아오라”는 부탁과 함께 성대한 환송식까지 열어 라성도를 바래주었다. 그가 길지대대에 도착하던 날에는 마을의 남녀로소들이 길량켠에 줄느런히 늘어서서 꽃을 흔들며 연신 환영을 웨치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했다.

집체호청년의 인생역전극


      집체호생활을 시작한 라성도는 도시적인 사유와 틀을 벗어던진채 농사군의 삶에 충실했다. 서툰 솜씨로 모내기를 하느라 쩔쩔매는 그를 보고 촌민들은 껄껄 웃으며 “어이 도시총각, 힘이 부쩍 솟아나게 노래나 한곡조 뽑아주게나”라고 넌지시 노래요청을 해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라성도는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모두에게 힘을 북돋아주었다. 바지가랭이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리고 정갱이까지 푹 잠기는 장화를 신고 논밭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서서 노래를 부르는 기분은 이루다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흥이 절로 났다. 라성도의 노래가 넓은 논밭에 울려퍼지기 시작하면 촌민들은 고달픔도 잊은채 량손에 벼모를 움켜쥐고 덩싱덩실 춤판을 벌렸다. 라성도 역시 사람들틈에 끼여 노래와 함께 현란한 춤사위를 뽐내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벌렁 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찧는가 하면 미끄러운 논두렁에서 보기 좋게 대자로 벌렁 넘어지는 바람에 적막하기만 했던 시골은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문예회보공연은 시골문예대의 가장 큰 축제였다. 어느날, 라성도가 길지대대에 와서 처음 맞이하는 문예회보공연준비에 골머리를 앓고있는데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응룡시인이 가사 한수를 건네주며 넌지시 말했다.
      “자네의 재능을 믿고싶네. 이 가사에 어울릴만한 노래를 한번 만들어보게나.”
      김응룡선생의 말에 라성도의 가슴속에서는 저도모르게 창작의욕이 일어났다. 그날 집에 돌아온 라성도는 김응룡시인이 건네준 시를 수십번, 수백번 되새기면서 자신만의 창작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며칠후 라성도가 건네준 악보를 받아들고 한동안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김응룡시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해에 있은 문예회보공연에서 라성도는 생애 첫 창작곡인 녀성중창 《흥겨운 모내기》로 창작 2등상의 영예를 받아안게 되였다. 그번 수상을 계기로 라성도는 가요창작의 묘미에 흠뻑 취해버렸고 집체호에서 생활한 2년동안 근 10여수에 달하는 가요들을 창작했다. 라성도가 이끈 마을선전대는 해마다 각종 문예콩클에서 우수한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라성도는 생애 가장 값진 인생체험을 경험할수 있었다. 2년후에 화룡현예술단측의 요청으로 예술단 업무부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라성도는 애티나던 “도시총각”에서 어언 다부진 사내대장부로 훌쩍 변해있었다.

돌고 도는 인생길


      1978년에 화룡현예술단의 배우 겸 성악지도교사로 특별초빙된 라성도는 직접 부른 《모아산의 소나무》와 《울려라 나의 기타여》라는 두 수의 노래가 륙속 《매주일가》를 통해 방송되면서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심어주었으며 너나없이 따라부르는 류행가열조를 불러일으켰다.  1993년에 정식으로 예술단 단장으로 승급한 라성도는 독창가수라는 신분을 잊은채 오로지 창작활동과 예술사업에 모든것을 바쳤다. 1년중 대부분의 공연은 극장공연이 아닌 “온돌공연”이였는데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모든 이동은 두발로 움직여야 했다. 여름에는 겨불내를 확확 풍길 정도의 무더위를 무릅쓰고 겨울에는 손발이 꽁꽁 얼어드는 혹한에 시달려야 하는 공연길이였지만 배우들중에 원망하거나 힘든 내색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제대로 된 무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공연을 반겨주는 관람객들이 있는 곳이면 아무리 먼곳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평균 20~30여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 마을에 도착할 때면 온몸이 팅팅 붓기고 군데군데 피멍이 드는가 하면 긁히고 상처입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손바닥이 얼얼해질 정도로 박수갈채를 쏟아내는 관중들때문에 아픔도 고달픔도 가뭇없이 사라지군 했다.
      1995년, 전 주 제7차 당대표대회에 화룡시대표로 참석한 라성도는 이듬해에는 화룡측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마다하고 연변장애자예술단 단장으로 전근했다. 이미 정상궤도를 달리고있는 화룡예술단의 단장직을 포기하고 고생이 뻔히 보이는 장애자예술단으로 옮긴 그를 보고 “바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라성도에게 그것은 새로운 목표에 도전장을 내미는 의미있는 선택이였다.
      처음 장애자배우들과 만나던 날, 라성도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무언의 희망을 기탁하는 장애자들의 표정에서 간절함을 읽었다. 그날이후로 라성도는 연변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홍보에 열을 올렸다. 하루종일 자전거페달을 밟다보니 허벅지안쪽이 까지고 물집이 생겨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한번이라도 더 무대에 설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보려는 일념으로 애써 통증을 견뎌냈다. 그의 열정덕분에 장애자예술단의 공연활동은 전례없던 성황을 이루었으며 장애자들의 삶의 열정 또한 날로 높아갔다. 라성도가 바야흐로 장애자공연을 세계화에로 밀고나가기 위해 전국각지를 누비고다닐 때 뜻밖의 사정이 그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중앙선전부로부터 “일체 장애인예술단의 영업성적인 공연을 금지”한다는 문건이 전달됐던것이다. 급한 마음에서 공연지표를 얻으러 오금에 불이 나도록 뛰여다녔지만 헛수고였다. 그후 얼마 안되여 장애자예술단은 해체되였고 라성도는 뒤늦게야 모교에 돌아갈 준비를 다그쳤다. 결국 1997년 9월에 졸업한지 22년만에 드디여 모교에 돌아온 라성도는 그로부터 장장 15년간 예술학원 성악학부에서 후대양성사업에 심혈을 몰부어왔다. 현재 이딸리아 로스니아음악학원에서 석사연구생으로 재학중인 애제자 차해룡을 비롯해 세계각국에서 가수, 음악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있는 제자들이 있어 라성도는 마음만은 늘 부자라고 한다.

《보고싶었소 듣고싶었소》


      1995년, 라성도가 화룡시예술단 단장으로 있을 때 1996년 연변TV 음력설야회무대에 올릴 화룡시추천프로그램의 제작준비때문에 몇명 전문일군들이 한자리에 앉게 되였다. 연변 최고의 무대에 올려야 하는만큼 뭔가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싶은것이 모두의 하나같은 생각이였다. 게다가 시기는 바로 연변장애자예술단으로 전근을 앞두고있는 시기였기에 라성도에게는 더욱더 의미가 깊은 일이였다. 라성도는 자신의 모순된 심리를 곁에 앉은 김문회선생에게 털어놓았다.
      “타향에 간 사람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수 있는 방법이 없을가요?”
      순간 곁에 있던 김문회선생이 무릎을 철썩 치면서 환성을 질렀다.
      “그래, 바로 그거요. 잠간만 기다려보오. 뭔가 감이 오는것 같소!”
      흥분을 감추지 못한 김문회선생은 즉석에서 목책에 열심히 무언가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불과 몇분이 채 안돼 김문회선생은 즉석에서 지은 가사를 라성도의 손에 쥐여주었다. 단숨에 가사를 읽어본 라성도의 가슴속에 세찬 파도가 일었다. 그로서 일주일후에 김문회 작사, 라성도 작곡으로 된 노래 《보고싶었소 듣고싶었소》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라성도는 심사숙고끝에 당시 무명가수나 다름없던 송경철을 가수로 지목했다. 그렇게 고향에 대한 절절한 향수가 송경철가수의 건드러진 음색과 어우러지면서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노래는 하루밤사이에 대중애창가요로 떠올랐을뿐더러 라성도가 화룡시에 두고온 최고의 선물로 남겨졌다.

아들딸에게 바쳐온 눈물젖은 부성애


      1984년 여름, 지인의 소개로 당시 화룡시 팔가자진백화점에서 영업원으로 있던 25살 박정식씨를 만나 반년의 련애끝에 부부연분을 맺은 리성도는 이듬해에 떡판같은 아들까지 얻으며 세상에 부러울것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학교다닐 때에는 남다른 가창력으로 “꼬마가수”라 불리우던 아들이 혹여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인의 삶을 시작하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무리하게 성대를 혹사한탓에 아들애의 성대는 변성기를 지나면서 엄중한 손상을 입었고 결국 1년전에는 성대결절수술까지 받았다. 가수꿈을 접고 현재 광주에서 친구와 함께 창업을 시작한 아들 라진국이 라성도에게는 더없는 자랑거리이고 마음의 의탁이라고 한다. 그런 라성도에게는 또 한명의 가슴으로 낳은 딸이 있다. 1999년, 안해가 한국로무길에 오르자 외토리로 남아버린 라성도는 훈춘시에 살고있는 부모를 집에 모셔왔다. 어린 나이에 일찍 집을 떠나 생활하면서 부모와 따뜻한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보지 못한것이 내심 아쉬웠던 나머지 늦게나마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고싶은 마음에서였다. 당시 부모는 작은딸이 리혼후 출국길에 나서는 바람에 어린 외손녀를 돌보며 살고있었다. 부모의 리혼으로 의기소침해진 조카딸이 내심 안스러웠던 라성도는 결국 부모와 녀동생과 상의하고 조카딸의 이름을 라령령이라 바꾼 뒤 법적절차를 통해 정식으로 입양딸로 들였다.
      게다가 귀국후 북경에서 작은 민박집을 운영하던 녀동생이 몇년전에는 3기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직접 북경에 가서 녀동생을 집에 데려온후 얼마 안되는 저금은 물론 다달이 로임을 깡그리 동생의 수술비와 치료비에 밀어넣었지만 라성도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녀동생은 결국 저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그후로 라성도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깡그리 동생이 남기고 간 유일한 혈육인 라령령이한테 쏟아부었다. 그렇게 라성도의 딸로 산 10여년간 라령령은 아버지와 각별한 부녀애를 쌓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연변예술학교에서 민족악기인 장새납을 전공한후 한국에 류학을 가서 현재 수시로 아버지에게 안부전화를 걸어온단다.
      가수가 아닌 창작의 삶을 선택한데 대해 후회한적은 없었냐는 기자의 물음에 라성도는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후회하고있는지도 모릅니다. 창작자로서의 내가 만들어가고있는 노래들도 어쩌면 가수로서의 내가 무대우에서 부르고싶었던 노래들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후회보다는 자부심이 훨씬 더 큽니다. 그만큼 내 삶이 보람찬 삶이라는 무언의 증거인셈이죠.”
      바야흐로 퇴직을 앞두고있는 지금, 새일대를 양성하는 한길에 변함없이 정성을 바쳐가는 한편 진심을 담은 노래들을 많이 창작할거라는 희망만은 변함이 없단다. 

       연변라지오TV신문   박홍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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