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조선민족의 무용대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2일 15시31분    조회:747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승희

[길신 2011-12-02 종합]최승희는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 공연한 최초의 인물로 8.15해방이전의 한국무용계를 주도했다.

1911년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두번이나 월반하여 1925년 숙명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숙명여고에 다닐 때 졸업후 동경[東京] 음악학교에 진학할 생각이였으나 년령 미달로 좌절되고 사범대학도 같은 이유로 불합격되였다. 그러던중 큰오빠 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 《수인 囚人》을 보고 감명받아 무용에 입문하기로 하고 이시이 바쿠와 함께 동경으로 떠났다.

1927년 가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공연할 때 한병용과 함께 출연했고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귀국하여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였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 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공연을 했고 1931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인 안막(安漠:본명은 안필승)과 결혼했다.

결혼후 경성에서는 창작여건이 어려워 1933년 이시이에게 되돌아갔다. 일본에서 이시이의 공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1934년 9월 일본 청년회관에서 그녀의 첫 무용발표회가 열렸는데 이때 발표한 《거친 들판에 가다》,《칼춤》,《승무》 등은 조선의 정취를 담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최승희는 순회공연을 하고 학용품》화장품 광고에도 출연했다.또 신흥영화사에서 만든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舞姬)》에서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누렸다. 최승희는 이런 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창작에 전념할수 있게 되였다.

1937년 12월 미국을 거쳐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네덜란드 등을 순회공연을 했다. 해외공연후 많은 평론가들은 《동양의 무희》라고 극찬했고, 벨기에에서는 제2회 국제무용콩쿠르대회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가부키극장에서 공연했는데 내용은 대개 조선무용이였고 반주는 조선에서 데리고 간 악사들이 맡았다.

그러던중 일본총독부의 요구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떠났다. 1942년 16일간 24회의 련속되는 독무공연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세계 무용계 최초의 장기독무로 평가된다. 해방후 일본군 위문공연이 친일경력으로 평가되여 활동이 여의치않은데다 안막이 먼저 월북하자 그녀도 1947년 4월 월북했다.

월북후 조선무용계를 선도하여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창작에 힘썼다. 1948년 김구 환영공연과 무용극 《해방의 노래》,《춘향전》 등을 발표했다. 1950년 쏘련 순회공연을 했고 중국무용을 연구하여 《조선의 어머니》,《거친 파도를 헤쳐》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였고 무용극 《맑은 하늘아래서》를 발표했으며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였다.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을 펴냈고 1966년 《문학신문》에 《조선무용 동작과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을 발표했다. 2003년 2월 조선에서는 최승희가 문인 한설야, 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였다고 발표했고  최승희의 묘비에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것으로 기록되였다.

우리 민족 신무용의 개척자였던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민족주의적》국제주의적 성향이 섞여있다. 그녀는 장기공연과 지속된 순회공연을 통해 대중의 인기를 모음으로써 당시 춤작품의 류통구조에 신기원을 열었다. 최승희는 음악과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과 함께 무대위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강렬한 눈빛과 몸동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44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20)   - 연변대학 미술학원 사진교연실 김광영주임 인터뷰     생존을 위한 개인적 영역 개척 필요 지난것을 보충, 거꾸로 갈수도 있어 재미있고 의미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이켜보면 변화가 가장 많은 부분이 오락이고 그중 단연 노래방이...
  • 2012-11-05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10) "붉은해 변강 비추네" 예술총감 박춘선을 만나   수년전 연변에는 두개 명함장이 있다는 말이 돌았다. 하나는 연변오동팀이고 다른 하나는 연변가무단이다. 오동팀은 최은택을 모시고 중국축구갑A리그 4강이란 위엄을 토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오동팀은 강급의 강력후보였...
  • 2012-10-26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4) 장익선  연변대학예술학원 장익선 음악학박사를 찾아서       음악 혹은 노래라함은 우리가 그림자처럼 늘 곁에 두고 함께 지내는 삶의  동반자와 다름이 없다. 특히 한많고 설음많은 우리민족에게 노래는 정서의 표현이요 심미의 발상이며 삶의 기록이라 하겠다. 머나...
  • 2012-10-22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2) 최룡국 부끄럼이 없어요 연변가무단 전임 악대 지휘 최룡국선생을 만나       오전 9시반경, 령하 13도… 립춘이 코앞까지 굴러왔는데도 마냥 포복행진을 하고 있는 날씨다. 하남가‘주부가원(州府嘉 )’정문에 들어서자바람 6동 아빠트를 찾아 좌우로 고개를 뽑...
  • 2012-10-22
  • (흑룡강신문=하얼빈) 리수봉 박영만기자 = 흑룡강성 오상출신인 청도대학 음대 성악과 박주연교수는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전파하는 동시에 음악을 통한 나눔을 실천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있다.   박 교수는 상해음악대학에서 수학하고, 서울대학 음대 대학원을 졸업한 성악계의 재원이다. 서울대학 대학원 졸...
  • 2012-10-19
  • 국가1급무대미술설계사 김태홍화백의 작품세계   연변의 두번째 한락연 민족의 전통을 업그레이드 시킨 작품 생활은 모든 작품의 원천   김태홍화백 략력 1943년 흑룡강성 녕안 출생 1967년 중앙희극학원 무대미술설계학과 졸업 1967년~현재 중앙발레무극단 무대미술설계사 1984년 일본대학예술부희극연구소 특별...
  • 2012-10-18
  • http://hljxinwen.dbw.cn   2012-08-10 11:08:43             미국남가주대학 피아노학부 석사연구생 김은희의 이야기   (흑룡강신문=연변) 김명록 연변 지사장 = 지난 7월 초 , 미국남가주대학 피아노학부 석사연구생 김은희양을 인터뷰했다. 취재시에 김은희부모님들도 동석하여 김은희 ...
  • 2012-08-10
  • “장백산촬영가” 한영을 만나다 “사진작품은 유감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30년간 장백산을 촬영했지만 내놓을만한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장백산을 소재로 한 개인사진전을 열고 사진작품집 《격정의 장백산》을 펴냈으며 연변촬영가협회 주석 등 직을 지낸 한영선생이지만 겸손한 자세로 기...
  • 2012-08-09
  •   -서예학박사 조선족 서영근교수의 잊지못할 “통신학습”   지난 20세기 90년대초 한글서예로는 불모지대와 다름없는 연변에 서예에 심취해서 침식을 잊은 20대의 청년이 있었다. 굶주린 사람이 빵을 먹듯 서예에 대한 집착과 여러 대회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되는 등 천부적인 소질로 주위의 이목을...
  • 2012-07-26
  •   공식석상에서 늘 빛갈고운 한복차림이였던것과는 대조적으로 인터뷰시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은 함순녀(48세)한테서는 차분한 카리스마가 풍겼다. 현재 연변가무단 부단장이자 연변무용가협회 주석인 함순녀는 오로...
  • 2012-07-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