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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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47년만에 만난 담임선생님 댓글:  조회:4874  추천:2  2012-08-30
47년만에 찾은 담임선생님 주청룡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이 몇분 계시는데 그 가운데 한분이 나의 계몽스승이신 소학시절의 담인교원이신 김순애선생님이시다. 1963년 내가 소학교 4학년에 올라올 때에 공사(지금의 향)에 중심소학교가 서면서 우리 마을은 중심소학교 학구에 속하게 되여 중심소학교에 전학을 하였는데 나는 김순애선생님의 반에 편성되였다. 그때 나는 학급에서 중하급에 속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나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한 학기 지나 나는 도덕품성에서도 많은 전변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학습성적도 많은 제고를 가져왔다. 4학년 2학기에 들어서자 선생님께서는 나를 중대장에 학습위원까지 시키는것이였다. 그때 나의 어린 심령에는 중대장표식을 달고 학습위원까지 하니 뿌듯하기만 하였다. 5학년에 올라와서 전교 문예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단독으로 콰이반(快板儿)을 출연시키는것이였다. 난생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서 출연하는데다 한어로 하니 너무 긴장하여 표현효과가 선생님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니 선생님께서는 나를 쓰다듬어 주면서 잘 하였다고 칭찬을 하여 주시는것이였다. 선생님의 사랑을 떠 올리니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5학년 학기말 때에 6학년에서는 졸업식을 앞두고 졸업행사의 한가지로 룡정에 가서 영화구경을 하게 되였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에서 나를 대표로 뽑아 상급학년의 졸업행사에 참가시키셨다. 대표로 뽑히여 상급학년의 졸업행사에 참가한다는 것은 아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였다. 그때 덕신에서 기차를 타고 룡정으로 가자면 새벽 2시에 타야 했다. 아마 새벽 2시에 기차를 타기 힘든것을 고려하여 그랬던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그랬던지 상급학년의 일이라 모르겠지만 기차를 타지 않고 도보로 50리 길을 걸어 룡정에 갔다. 그렇지만 그때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지? 지금 기억에 아마 룡정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좀 지난것 같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싸고 온 도시락을 풀어놓고 나무그늘 밑에 모여 앉아 먹었는데 우리가 사는곳은 한전고장이라 도시락이라야 모두 조밥에 야채볶음, 닭알 두개씩이였다. 간혹 국가배급쌀을 타는 학생들에게는 이밥이 있었다. 우리는 오후에 영화를 구경을 하고 저녁 9시에 기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덕신(팔도하역)에 도착하니 9시 반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부모들이 마중 나오는것이 없이 3,4리 길을 모두 한 동네 아이들끼리 함께 집에 갔다. 6학년에 올라와 나의 학습성적은 더 우수하였고 도덕품성도 더욱 큰 발전을 가져와 모든 방면에서 돌출하여 우수졸업생으로 동학들이 일제히 나를 선거하였다. 나는 이렇게 우수졸업생의 상장을 않고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였다. 그 시기에는 중학교가 공영중학교와 농업중학교 두가지로 있었는데 공영중학교는 국가에서 꾸리는 전일제 중학교였고 농업중학교는 농민들이 자체로 꾸리는 반농반독의 학교였으며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을 골라 공영중학교를 한개 반을 모집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농업중학교로 가게 되였다. 공영중학교와 농업중학교의 학생모집 비례는 1:3이였다. 소학교에서 우리는 두개 반이였는데 나는 2반이였다. 중학교입학시험에서 공영중학교에 1반에서 4명이 붙고 김순애선생님이 맡은 2반에서 10명이 붙었다. 원래도 학교에서 김순애선생님에 대하여 평가가 높았지만 그번 입학성적으로 하여 학교나 사회상에서도 김순애선생님에 대하여 평가가 대단하였다. 나도 운이 좋게 김순애선생님의 반이였기에 우수한 성적으로 공영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나의 어린 생각에도 만약 내가 1반이였다면 공영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을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1반에서 공영중학교에 붙지 못한 우수한 학생간부들이 여럿이 있었으니 말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김선생님을 만나보려고 모교를 찾아갔었는데 그때는 이미 선생님께서는 부군(夫君, 선생님의 남편)님을 따라 료녕성 무순시로 조동하셨다는것이였다. 그다음으로는 더는 찾을 길이 없었다. 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원사업을 하면서 그 선생님이 더욱 그리웠다. 하여 그 선생님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아도 모두 모른다는것이였다. 몇십년이 지난 어느 때 선생님께서 부군님을 따라 도문에 오셨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단위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몰라 찾을 수 없었다. 또 여러 해 지난 다음 선생님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을 만나 물어보니 그도 그저 지금은 연길에 와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다는것이였다. 여전히 묘연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 선생님과 한 마을에서 살던 한 친구와 물어보니 자기가 그 선생님의 시집편으로 친척이 되는데 지금 그 선생님의 소식은 모르나 그 선생님의 동서를 자주 만나는데 그 분과 물어보면 알수 있다는것이였다. 아주 기쁜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하여 그에게 꼭 알아봐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더니 며칠 후 전화번호 둘을 알려주면서 하나는 그 선생님의 전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생님의 따님의 전화번호라고 하였다. 너무나도 기쁜 일이라 그 즉시로 먼저 선생님의 전화번호에 따라 전화를 걸었더니 가석하게도 空号 (빈 전화번호)라는 음성으로 들려왔다. 그다음 따님의 전화번호를 누르니 자기는 그런 선생님을 모른다는것이였다. 혹시나 하여 이튿날 다시 그 번호를 누르니 여전히 모른다는것이였다. 또 절망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다시 확인하여 보니 마지막 한 수자를 잘못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로 갈수 밖에 없지않는가? 이렇게 알만한 사람과 다 물어보아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지난 4월 14일 또 한 차례의 친구모임에서 소학교 때의 두 동창생을 만나서 물어보았더니 자기네는 그 선생님께서 도문에 계실때에 그 선생님의 집에 놀려 갔었는데 그때 이미 부군님께서는 세상을 떴더라는것이였다. 그것도 인제는 10년이 넘어서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는 것이였다. 내가 꼭 찾아야겠는 안타까움을 말하자 한 친구가 딱 찾자면 한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자기가 그 선생님의 시조카며느리를 자주 만나는데 거기를 통하면 가능하게 알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분의 전화번호를 꼭 알려달라고 또 부탁하였다. 3일 후 그 친구가 그 분의 전화번호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즉시로 그 분과 전화통화를 하였더니 그 선생님 따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것이였다. 나는 그 즉시로 그 번호에 따라 전화를 걸었더니 김순애선생님의 딸이 옳다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 “아! 끝내 찾았구나!” 하며 외치다다싶이 말하며 선생님의 문안을 하였더니 지금 병으로 도문병원에서 입원치료중이라고 하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선생님을 찾게 되니 기쁘면서도 한 방면으로는 입원치료중이라니 마음이 쓰리여 났다. 나는 한시 급히 선생님을 만나 뵈려는 생각에 도문으로 행하였다. 도문에 가 병원의 침대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나는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 한데 섞여 왈콱 쏟아져 나왔다. 47년만의 만남이였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 주청룡입니다.”라고 하니 선생님께서는 인차 나를 알아보시고 몸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못하시고 아주 똑똑한 의식과 정기도는 눈으로 나를 보시며 눈물이 글성하시였다. 말씀도 아주 힘들게 하셨다. 나는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선생님을 47년만에 만나다는것이 어쩌면 이렇게 병실서 만나는가? 어찌하여 선생님을 일찍이 찾아뵙지 못하였는가? 76세에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계셔야 할 선생님께서 너무나도 일찍이 병상에 누워계신다는 서러운 생각에 또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려 선생님의 이불우에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 옆에는 아들과 딸이 다 있었다. 나는 그들과 선생님께서 무슨 병으로 입원하였는가고 물으니 뇌위축으로 몇 년 알으셨느데 금년 1월에 또 설상가상으로 허리를 상하여 이렇게 입원치료를 한다는것이였다. 선생님의 지나간 정황에 대해서는 자기들의 아버지가 북경석유학원을 졸업하고 무순시에 배치받았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무순조선족소학교에 전근하였다는것이였다. 그 후에 아버지가 길림화학공장에 전근하시자 어머니께서는 또 길림 화학공업공사의 자제학교에 전근하셨고 후에는 도문에다 석유제련공장을 앉히게 되자 아버지께서 그 공장을 창설하는 임무를 맞고 도문에 오시게 되니 어머니가 또 아버지를 따라 도문에 오셨다는것이였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의 사업을 이어받아 직업중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후에는 학교에서 령도사업을 하다가 정령퇴직하고 지금은 글을 많이 쓴다는것을 이야기 하였더니 선생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매우 기뻐하셨다. 비록 47년만에 선생님을 찾아 평생 소원은 풀었다지만 선생님의 건강상황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것이 유감이였다. 나는 선생님께서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게 되면 선생님을 모시고 동창모임도 하면서 소학시절의 추억으로 돌아갈수 있다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랴 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이 시각도 빌고 빈다.
20    송경령릉원 댓글:  조회:6704  추천:7  2011-06-29
송경령릉원 청해 송경령릉원은 상해시 중심구에서 약간 서부인 장녕구(长宁区)의 송원로(宋园路) 21호에 자리잡고 있다. 송경령릉원은 1932년에 건립되였는데 원래는 《상해만국공동묘지(上海万国公墓)》로 명명되였었는데1981년 5월 19일 송경령이 북경에서 서거하자 그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골회를 여기에 안장하자 1982년 2월 23일 이 릉원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들었고 1984년 1월 10일 중앙의 비준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송경령릉원(中华人民共和国名誉主席宋庆龄陵园)》으로 명명되였다. 부지면적 이12헥타르로서 송경령기념시설, 명인공원묘지와 외국인공원묘지 및 소년아동활동구 등 네 개부분으로 조성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송경령 1. 송경령기념시설 송경령기념시설은 릉원의 주체 부분으로서 송경령기념비, 기념광장과 송경령 조각상, 송씨 묘지, 송경령사적진렬관으로 조성되였다. 1) 송경령 기념비 송경령릉원 입구에 들어서면 넓다란 큰 길이 있는데 그 길로 한참 걸으면 릉원 큰길 중간에는 높이 3.3메터, 너비 5메터의 화강암으로 된 송경령 기념비가 한눈에 안겨온다.   기념비에는 등소평이 쓴 “爱国主义, 民主主义, 国际主义, 共产主义的伟大战士宋庆龄同志永 垂不朽”란 30자의 금빛으로 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기념비 뒤면에는 송경령의 빛나는 일생을 적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2) 송경령 조각상 기념비 북쪽에는 면적이 2880평방메터의 큰 광장이 있는데 광장 북쪽 중간에는 송경령의 한백옥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높이는 2.52메터로서 송경령이 가장 풍채로웠던 50세 안팍의 형상을 조각한것인데 중국의 전통의상인 旗袍(중국 여성들이 입는 긴 원피스 형태의 전통의복)에 스리랑카를 방문하였을 때의 상의(上衣)를 입었고 머리는 뒤로 쪽지였으며 두손은 무릅우에 겹쳐 올리고 얼굴에는 미소를 띠여 그의 고상한 품격과 자상한 풍도를 보여 준다. 3) 송씨 묘지 송경령 조각상 뒤(북쪽)에는 송씨묘지(宋氏墓地)가 있는데 1932년에 건설당시의 면적은 145평방메터였는데 후에 그 량옆에 송경령과 리아연의 묘를 안장하면서 263평방메터로 확건되였다. 묘지 중앙에는 장방형의 화강암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송경령의 부친 송요여(宋耀如)와 모친 예계진(倪桂珍)의 합장묘가 있다. 묘는 평토로 하고 그 우에 흰 대리석을 덮었다.   송경령 부모의 묘를 중심으로 하여 량쪽에는 대칭으로 송경령의 묘와 리연아의 묘가 있다. 1981년 5월 19일 송경령이 북경에서 서거하자 그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골회를 그의 부모 합장묘 동쪽에 안장하였다. 묘는 평토로 되여 있으며 길이 1.2메터, 너비 0.6메터의 화강암 묘비가 덮여 있다. 묘비에는 세로 세줄의  “一八九三年 ~ 一九八一年 / 中华人民共和国名誉主席宋庆龄同志之墓 / 一九八一年六月四日立”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쪽에는 리연아(李燕娥)의 묘가 안치되여 있는데 묘의 위치, 규격과 모양은 송경령의 요구에 따라 송경령의 묘와 똑 같게 송경령 부모묘의 서쪽에 송경령의 묘와 대칭으로 안치되였다. 그리고 묘비에는 “李燕娥女士之墓 宋庆龄立”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리연아는 1911년생으로서 16세부터 송경령의 보모로 있었는데 그에게는 한차례의 불행한 혼인, 한차례의 국민당 특무와의 기편적 련애사가 있은 후 다시는 혼인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독신부녀로서 1981년 2월 사망할 때까지 50여년 송경령의 보모이자 가장 좋은 벗으로 있었다. 리연아가 사망한 3개월 후 송경령도 서거하였다. 4) 송경령사적진렬관 릉원길 서쪽끝에는 송경령평생사적 진렬관이 있는데 길이 137메터의 기다란 집으로서 6개의 전람청과 한 개의 록화청(录像廳)로 되여 있으며 400여 폭의 사진, 100여건의 실물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송경령의 진리를 추구한 애국청년으로부터 혁명에 몸바쳐 최후 공산주의 위대한 전사로 된 빛나는 려정을 보아낼수 있었다. 록화청에서는 송경령의 생전의 주요하게 활동한 《국지괴보(國之瑰寶)》 등 기록편들을 방영하고있다. 2. 명인공원묘지 명인공원묘지는 송경령릉원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지면적이 약 5500 평방메터로서 주로 민주혁명시기와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중대한 공헌을 한 저명한 인사 및 국내외의 널리 영향이 있는 향항, 오문, 대만지구의 저명한 애국인사와 국제상에서 위망이 있는 애국화교들을 귀장(归葬)한 곳이다   여기에는 신해혁명의 조기 활동가인 려중실(黎仲实), 원 상해시 부시장이며 중국공상계의 우수한 대표인 성비화(盛丕华), 애국인사이며 저명한 금융가인 주작민(周作民)등 사람의 묘, 그리고 이장(移葬)하여 온 항일영웅 사진원(谢晋元), 복단대학의 창시인이며 애국인사인 마상백(马相伯), 중국민권보장동맹총간사 양행불(杨杏佛), 저명한 신문공작자이며 국제문제전문가이며 원 상해시부시장인 김중화(金仲华) 등 25명 명인들의 묘가 평토로 안치되여 있고 그들의 자그마한 반신 조각상과 간단한 비문들이 새겨져있다.   3. 외국인공원묘지 외국인공원묘지는 송경령릉원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지면적은 7200평방메터로서 중국의 민주혁명과 사회주의건설사업에 지지를 주고 장기적으로 중국의 우호사업에 중대한 공헌을 한 저명한 외국적 인사와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하고 중대한 공헌을 한 외국적 전문가 밑 림시로 중국에 와서 유람, 학습, 사업하다가 서거한 각국의 저명한 인사의 묘가 있다.   그들로는 로신의 벗이며 일중우호협회리사장인 内山完造와 그의 부인, 일본 大阪府일중우호협회 창시자이며 상해와 大阪지간의 민간래왕 발기자의 한 사람인 雨宫礼三과 그의 부인, 중국복리회 고문이며 송경령 생전의 친밀한 벗이며 미국적 전문가인 경려숙(耿丽淑), 걸출한 국제주의 전사이며 루마니아 의사인 가렬란(柯列然), 제6기, 7기 전국정협위원이며 중국외문국(外文局) 로전문가 위로시(魏璐诗)등의 묘가 평토로 안치되여 있고 그들의 자그마한 반신 조각상과 간단한 비문들이 새겨져있다.   4. 상해아동박물관 상해아동박물관은 어린이들의 애국주의 교양기지로서 송경령릉원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지면적이 9000여 평방메터이고 건축면적이 4633평방메터이다. 박물관의 건축외관은 네개의 조형이 각이하고 색채가 찬란하고 알록달록한 립체 기하형으로 구성되였다. 내부 공간은 지상 3층, 지하 1층인데 지상부분은 진렬전시활동구로서 네개의 전시구역으로 설치 되였는데 “跨越距离,触摸未来”란 주제의 과학전시관, 상호탐색구, 주제전람구, 아동열독구로 구성되여 있다. 원내에는 수천평방메터되는 잔디밭이 있으며 30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토송(罗汉松), 15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계수나무(桂花树), 10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양옥란(广玉兰) 그리고 수백그루의 높다란 룡백(龙柏), 설송(雪松), 중산백(中山柏), 및 직경이 25cm 이상의  녹나무(香樟树) 천여 그루가 있어 사계절  새가 지저귀고 꽃향기 그윽한 천년식물원을 방불케 한다. 2010년 10월
19    숭엄한 중산릉(1) 댓글:  조회:8703  추천:50  2011-05-23
숭엄한 중산릉(1) 청해 우리 부부는 항주와 상해유람을 마치고 10월 7일 아침 상해에서 남경행 렬차에 올랐다. 남경역에 도착하니 8시 반이였는데 그전의 급행렬차로는 상해와 남경사이를 5시간 남짓이 달리던 것이 이번에는 고속렬차를 타니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경역에 내려서 관광뻐스에 앉아 중산릉으로 행하였다. 그전에 몇 번 남경에 다녀오면서 다른 관광명소들은 구경하였지만 시간상 관계로 중산릉은 구경 못하였기에 이번 유람에는 제일 코스가 중산릉이였다. 중산릉은 중국에서 2000 여년 지속되여 오던 봉건 황제제도를 뒤엎고 자산계급민주정권인 중화민국을 건립한 민주주의 혁명선구자 손중산 선생의 유체를 안장한 릉원이다.         중산릉은 남경시 동쪽의 자금산(紫金山)의 울창한 수림속에 위치하여 있었는데 저명한 설계사 려언직(呂彦直)이 설계하였는데 총 면적은 2000무 되며 주요 부분과 건축물을 보면 광장, 박애방, 묘도, 릉문, 비정, 층계, 제당, 묘실 등이다. 손중산 선생이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59세를 일기로 서거하여 1926년 3월부터 1929년 봄까지 시공하였는데 그해 6월 1일에 봉안(奉安)의식을 하였다고 한다. 1. 입구(入口) 중산릉의 입는 中山陵園 이라고 쓴 사주삼문(四柱三門)식의 화강암 패방(牌坊)으로 되였다. 입구(入口)   중산릉 패방으로 들어서면 화원으로 장식된 반원형의 광장이 있는데 북쪽으로 올리다 보면 중산릉의 전경이 보인다. 중산릉 전경 2. 박애방(博愛坊) 다음으로는 광장으로부터 묘도(墓道)에 들어서는 사주삼문(四柱三門)으로 되어 있는 박애방(博愛坊)이다. 가운데 문미(門眉)에 '博愛'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하여 '박애방'이라고 하는데 이는 손중산선생이 생전에 가장 즐겨 부르던 두 글자이다. 패방은 길이 17m, 높이 12m로 되였으며 패방우에는 남색의 오지기와가 얹혀져 있다. 손중산 선생은 일생을 위대한 박애정신으로 자산계급 민주혁명에 이바지하였으며 '박애' 이 둘 글자는 그의 일생에 대한 고도의 괘괄이며 가장 적절한 묘사이다.       박애방(博愛坊) 3. 묘도(墓道) 박애방으로 들어서면 릉문까지 통하는 길이 480m, 넓이 40m의 넓은 길이 있는데 곧게 세갈래로 뻗어 있었다. 가운데 길은 너비 12m의 콩크리트로 된 길바닥인데 고대의 릉묘로 통하는 길옆의 석인(石人), 석수(石獸)가 있는것과는 달리 량쪽에 두 줄의 설송나무와 네줄의 전나무가 좌우 대칭으로 줄지어 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좌우 량쪽에 4.2m의 너비의 길이 있다. (아래의 사진과 전경도를 참조) 묘도(墓道)     4. 릉문(陵門) 묘도를 다 걷고나면 앞에 단층집이 가로 앉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릉문(陵門)이다. 릉문 전체가 복건성 화강암으로 건축되였고 지붕은 단층 산봉우리식으로 남색의 오지기와로 되였으며 세 개의 아치형 문은 동을 조각하여 만들었고 중간문 우의 횡액(橫額)에는 손중산 선생의 친필로 된 “天下为公(천하위공)”란 네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뜻인즉 천하는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한 집의 천하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천하라는 뜻이다. 이 네글자가 바로 손중산 선생이 평생 분투한 목표와 리상이다. 평시에는 중간문을 열지 않고 옆의 두문으로 유람객들이 다니는데 국민당 련전(连战) 주석과 친민당 송초유(宋楚瑜)주석이 참배하러 왔을 때에는 열었다고 한다. 릉문(陵門)  
18    숭엄한 중산릉(2) 댓글:  조회:8009  추천:55  2011-05-23
숭엄한 중산릉(2) 청해 5. 비정(碑亭) 릉문으로 나오면 바로 비정(碑亭)이다. 비정은 변의 길이가 12메터, 높이 17메터 정방형의 화강암으로 된 건축물이며 네면에 모두 아치형 문이 하나씩 있고 두층의 지붕은 남색의 오지기와로 되여 있다. 비정(碑亭) 비정안에는 너비 4메터, 높이 8.1메터의 석비(石碑)가 있는데 비면에는 "中國國民黨葬 / 總理孫先生於此 /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이란 국미당 원로인 담연개(譚延闿)의 친필로 된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정안에 있는 석비(石碑) 6. 돌층계 비정에서 나와 북쪽으로 오리다 보면 멀리 제당이 보이는데 비정으로부터 제당까지는 세줄로 된 돌층계가 있는데 가운데 줄은 넓고 계단은 여러 가지 색갈의 화분으로 장식되여 화원을 이루었으며 량 옆의 돌층계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데 패방으로부터 모두 392개 계단이라고 한다. 화분으로 장식한 돌층계 7. 제당(祭堂) 392개의 돌층계를 다 오르면 바로 손중산 선생의 제당이다. 제당(祭堂)은 중국식과 서양식을 결합하여 건축하였으며 길이가 30 미터, 너비가 25 미터, 높이가 29미터로 되여 있는데 전부 대리석으로 건축하였으며 지붕에는 남색의 오지기와가 얹혀 있다. 제당 정면은 3개의 아치형 문이 있고, 문미(門眉)에는 국민당 원로 장정강(張靜江)의 친필로 된 손중산 선생이 생전에 제출하였던 삼민주의 즉 “民族(민족)”, “民生(민생)”, “民權(민권)”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중간문 제일 상단에는 손중산 선생의 친필로 된“天地正氣”라는 글자가 세로 새겨져 있다. 중산릉의 제당은 해발176메터의 높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첫 어구부터의 직선 거리고 700메터이고 상차 고도는 70메터라고 한다.   제당(祭堂)   제당내부는 흑백색의 운남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고 12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동서 량쪽 벽에는흑색대리석 바탕에 손중산 선생의 유작인 《建國大綱》 전문이 새겨져 있다. 제당 내 중앙에는 4.6메터 높이로 불란서 조각가 保羅. 朗特斯가 한백옥으로 조각한 손중산선생의 좌상(坐像)이 모셔져 있다.   손중산 선생의 좌상(坐像)   8. 묘실(墓室) 제당 뒤면에는 묘실(墓室)로 통하는 문이 있다. 묘실은 제당과 이어 지었는데 반구(半球) 모양의 봉페식 건축물로서 직경이 18메터, 높이 11메터이고 벽은 담홍색의 인조석(人造石)을 붙이였고 바닥은 백색의 대리석을 깔았다. 묘실 중앙에는 직경 4.3메터, 깊이 1.6메터의 대리석을 붙인 묘혈(墓穴)이 있는데 체코의 조각가 高琪가 조각한 중산복을 입은 손중산 선생의 한백옥 와상(臥像)이 모셔져 있다. 이 와상 밑에 적동(赤銅)관에 모신 손중산 선생의 유체가 깊이 매장되여 있다고 한다.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손중산 선생의 와상에 향해 한참 묵도를 드리고 돌아섰다. 손중산 선생의 와상(臥像) 2010년 10월
17    朱氏東國始祖의 묘소를 찾아서 댓글:  조회:7752  추천:53  2011-05-13
朱氏東國始祖의 묘소를 찾아서   주청룡   나의 오래 전부터의 소망이 조상이 누워 계시는 고국 땅을 밟아 보았으면 하였는데 이번에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고국으로 친척방문을 오게 되여 고국 땅을 밟게 되였으며 시조의 사당과 묘소도 참배하게 되여 오매에도 그리던 나의 소원을 풀게 되였다.   나는 중국에서 족보를 정리하느라 많은 자료를 찾으면서 끝내 우리 조선족(한국에서 말하는 朝鮮族과 韓族을 다 말함) 신안주씨(조선족 주씨는 일본)의 始租묘소가 전라남도 和順郡 綾州面 千德里 懷德洞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내였는데 이번에 한국에 와 보니 전국 여행지도 책에도 천덕리에 주자묘(朱子廟)가 표시 되여 있었다. 3월 15일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광주행 열차를 타고 광주에 가서 또 버스를 갈아 타고 천덕리로 갔다. 천덕리에 내리니 朱子廟 → 길안내 표시가 있었다. 길안내 표시에 따라 약간 굽이 돌아 걸으니 약 500m가량 거리에 나의 시조사당과 묘소가 한눈에 안겨 왔는데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정말 기뻤다. 아! 끝내 찾았구나. 저곳이 바로 나의 시조 할아버지가 누워계시는 곳이구나! 우리는 절반 뛰고 걸고 하면서 사당으로 향하였다. 사당에 도착하니 사당관리 일군이 우리를 보고 마중 나왔다.   우리는 사당관리일군과 인사를 나누고 찾아온 사연을 말하니 그는 우리를 반가이 맞이 하고 사당으로 안내하면서 사당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사당의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敷地面積이 2000평(6667평방메터)이고 정면에는 54개의 돌계단을 올라 崇禮門을 방불케하는 承敬門이 왼쪽에 있었고 오른쪽에는 懷德門이 있었는데 承敬門으로 곧추 들어가면 朱子廟이고 懷德門으로 곧추 들어가면 東源祠였다. 朱子廟와 東源祠는 모두 청와대처럼 청색의 기와가 얹혀진 사각으로 된 고대 건축물 모양으로 되여 있었는데 朱子廟의 건평은 21평(69.3평방메터), 東源祠의 건평은10평(33평방메터)으로서 1976년 6월 23일에 착공하여 1977년 12월 30일에 준공 하였다 한다. 담장밖에는 잘 생긴 소나무들이 옛 선비들의 자태로 서 있었다. 우리는 그의 안내 하에 먼저 사당을 참배하였다. 朱子廟는 우리 신안주씨의 一世祖上인 중국 南宋때의 저명한 정치가, 교육가, 철학가, 朱文公(1130~1200) [注解1]의 사당이고 東源祠는 우리 조선족 주씨의 시조 즉 東國始租[注解2] 청계공(淸溪公) 주잠(1194~1260) [注解3]의 사당이였다. 朱子廟 왼쪽에는 1.50m 높이의 직방체 돌 위에1.50m로 된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주문공의 銅像이 있었는데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이가 학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당에 들어 서서 우리는 속으로《第33世孫(朱熹로부터)이 조상님께 절을 올립니다.》하며   정중히 참배하였다. 사당에서의 참배를 마치고 나서 관리원의 안내 하에 청계공(주잠)의 묘소로 향하였다. 사당 왼쪽 산기슭에는 웅장한 분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朱文公의 증손이며 우리조선족 주씨의 시조인 청계공 할아버지의 묘소였다. 분묘는 60개의 돌계단을 10개씩 끊어 올라가 있었으며 돌로 울타리를 만들어 둘렀는데 고려시대에 군왕들이 무덤을 조성할 때 쓰는 방법으로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의 형상을 12방(十二方)에 새겨 넣어져 있고 좌우에는 말과 양, 그리고 사자와 장군석, 문인석 등이 도열해 있었다. 그 뒤로는 조개 껍질 마냥 능선(稜線)이 오르다가 적당한 눈 높이에서 멈췄는데 그 위로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반달모양으로 둘러 있었다. 분묘 옆에는 3.5m 높이로 된 新安朱氏東國始祖南宋翰林學士淸溪公朱濳之事績碑 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碑文略함) 우리는 여기에서 또 조상님께 정중히 절을 올렸다. 1224년 청계공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고려땅을 밟음으로 하여 오늘의 내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천백번 무릅을 꿀고 절을 하고 싶었다.     청계공의 묘소에서 아래로 내려 오면 또 문절공(1227~1287) [注 解4] 의 묘 소도 있었는데 묘소는 소박하게 가꾸 어져 있었고 묘 앞에는 2.25m로 된 高麗知都僉議府事謚文節朱公悦之墓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으며 주위는 소나무들이 둘러 서 있었다. 우리는 문절공의 묘소에 가서도 참배를 하였다. 이로서 조상들에 대한 모든 참배가 끝났다. 참배가 끝나자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사당과 묘소의 이곳 저곳을 렌즈에 담아 많은 역사자료들을 남기였다. 저녁에 사당관리일군은 우리를 열정스레 접대하였다. 식사 후 나와 사당관리일군[注解5]은 신안주씨에 대하여 흥미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도 중국에 있을 때 새로 족보를 정리하면서 많은 자료를 보았기에 이 방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 아는 것이 퍽 많아 그날 저녁 그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적지 않은 력사자료들을 수집하였다. 1224년 청계공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고려땅을 밟아서부터 784년 후 그이로부터 30세손인 내가 오늘 또 다시 고국땅을 밟아 조상님들을 참배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호감을 느끼게 되였으며 오매에도 그리던 소원을 풀게 되였고 또 적지 않은 력사자료들을 얻은 것으로 하여 무등 기뻤다. 이제 나의 후세에서 누가 다시 고국에 와서 조상님들을 참배할는지? (우리 후대들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문장격식과 편폭의 제한으로 하여 이 글에 올리지 못하므로 앞으로 다른 책으로 편찬할 예정이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다시 한번 사당과 묘소를 돌아 보고 아쉬운 심정으로 리대우씨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능주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돌아 왔다.   [주해] [1]  朱文公은 諡號로서 임금이 追贈한 이름이고 字는 元晦, 號는 晦庵, 이름은 熹이며 중국 남송때에 복건성 尤溪에서 출생, 漢族, 性理學을 集大成한 孔子, 孟子 다음의 大儒學者로서 그의 사상이 봉건통치계급의 수요에 적응 되였으므로 宋, 元, 明, 淸 시기를 내려 오면서 統治理念으로 승화 되였으며 조선과 일본에도 전파 되여 官學으로 되였다.     [2] 朱熹 앞의 8대 조상인 朱瑰를 신안주씨의 元始祖로, 朱熹를 一世租로, 주잠을 東國始租로하고 있다. 東國始租란 중국에서 동방의 나라 高麗로 처음 온 조상이란 뜻임       [3] 朱濳은 주문공의 증손으로서 1220년, 남송때에 浙江 烏程의 縣令으로 있다가 杭州로 옮겼다. 그때 몽고가 침입해 들어오자 조정의 대신들은 主和論과 투항주의를 주장하자 나라를 구하려는 그이는 그들과 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니 1224년, 고려 고종11년에 고려로 망명하여 全羅道羅州에 정착하여 조선족 신안주씨의 시조로 되였다.   [4] 文節公은 고려 충열왕이 追贈한 諡號고 청계공의 장손이며 이름은 열(悦), 자는 이화(而和), 호는 죽수(竹樹)며 충열왕에게 글을 가르친 스승이시였고 고려가 元나라의 지배를 받아 해마다 많은 금과 軍船을 바치는 무거운 부담을 가져 임금이 원나라 황제에게 부담을 덜어 달라고 몇 차례 간청하였으나 해결을 못 보아 나라가 곤경에 빠졌을 때 문절공이 원나라와 교섭하여 금과 軍船을 바치는 것을 취소하여 나라를 구한 救國大臣이다.   [5] 사당 관리는 주자의 제27世孫 朱炳演(71세)과 李大雨(56세) 두분이 한는데 주병연은 그날 서울로 가시고 리대우씨(56세)가 우리를 안내 하였는데 그는 비록 주씨성은 아니지만 주자학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자원봉사로 여기에 와서 관리를 한다는 것이였다.    
16    아름다운 월미도 댓글:  조회:8062  추천:39  2011-05-13
아름다운 월미도 주청룡 4월13일 일요일 우리 일가 친족일행 8명(나의 처제 한명만 한국적이고 모두 중국적)은 장모님을 모시고 택시 두대로 월미도로 바다 구경을 떠났다. 택시요금도 비싸지 않았다. 인천서구 가좌3동에서 떠났는데 한대에 요금 7500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 흐리고 비가 내리던던 날씨도 그날따라 구름 한점 없는 쾌청한 맑은 날씨였다. 택시가 월미도부두에 도착하자 푸른 바다가 한눈에 안겨왔다. 나의 장모님은 80고령이 되도록 평생 중국 연변에서 살다나니 바다구경 한번 해보지 못하다가 오늘 처음 바다를 보는지라 매우 흡족한 마음이였다. 오늘 우리가 월미도로 유람을 온 것도 장모님께 바다구경을 시켜 생전 바다구경을 한번 해봤으면 하는 평생소원을 풀려는 데서였다 1.  월미도 명칭의 유래와 약력 월미도란 이름은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모양처럼 휘어졌다 하여 달月자에 꼬리尾자, 그리고 섬島자를 써서 월미도라 하였다 한다. 원래는 인천역에서 서쪽으로 1km 거리에 있는 둘레 4km, 면적이 0.66㎢의 섬이었으나, 1920년대 초 돌축대를 쌓아 내륙과 연결되다 한다. 8.15광복후 미군의 "해양경찰대"기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시 인천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이 되였고,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여 개방되기까지 50여년 동안 시민의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2001년9월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인수하고 도시자연 공원으로 결정한 후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되였다 한다. 2.  문화의 거리 부두에서 바다를 내다 보니 영종도와 작약도가 보였고 갈매기들이 끼륵 끼륵하며 푸른 바다위를 날아예고 여러가지 선박들이 오가고 있었다. 월미도부두 남쪽켠은 문화의 거리로 되여 있었는데 우리는 문화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바다와 문화의 거리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렌즈에 담아 많은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1200m의 짧은 문화의 거리는 거리 오른편으로는 바다가, 왼편에는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게 늘어 섰는데 어떤 간판들은 괴이하게도 있었다. “곧 망할 집”, “허벌나게 많이 드립니다”, “돈 내지 맙시다.” 정말 곧 망하게 되거나 돈을 받지 않고 공짜로 손님을 대접하려고 이런 간판을 걸 수야 없지 않는가? 아마 판촉수단이겠지, 판촉경쟁이라 별이 별 수단이 다 있는가 보다.   문화의 거리에는 해변을 따라350m 구간에 높이 10m, 직경이0.8m로 된 15개 조명탑 형식의 '빛의 열주(列柱, 줄지어 늘어선 기둥)’ 가 23m의 간격으로 마치 사열 하듯 세워져 있었는데 밤이면 바다와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고 한다. 10여 m 높 이의 오색분수까지 설치돼 있어 마치 하늘에서 빛을 받아 물과 땅으로 내려주는 듯한 모습이란다. 우리는 낮에 갔기에 오색영롱한 야경은 불 수 없었지만 줄지어 선 기둥과 무색의 분수는 볼 수 있었기에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은 찍을 수 있었다. 3. 코스모스호 유람선 문화의 거리를 다 산책 하고나니 11시가 좀 넘었다. 그다음으로는 코스모스호 유람선을 타는 것이였기에 우리는 배에 올랐다. 11시30분이 되니 코스모스호는 서서히 출항하기 시작하였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스피커에서는 유람객들에게 인사의 말을 하고나서 코스모스호 유람선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는데 1,500톤급 코스모스호는 선장 74m, 선폭 13m, 높이 14m, 4층으로서 – 승선인원이 954명 이며 1, 2층은 공연장으로서 각국 공연단의 열정적인 공연과 연주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날은 우크라이나의 전문 발레공연단과 중국곡예단의 선상공연이 있었다.   3층은 각종 이벤트, 결혼식, 회갑연, 돌잔치, 가족모임, 친목모임 등의 특별한 모임을 할 수 있는 장소였는데 그날은 몇몇 가정들에서 유람삼아 가족모임을 가진겄 같았다.     4층은 갑판 전부가 전망대로서 바다와 섬, 륙지의 월미산 등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할수 있었다. 우리는 1,2층에서 하는 공연에는 그닥 흥취가 없었고 목적이 바다 구경이였기에 4층 갑판 전망대에서 시원한 바다바람을 쏘이면서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하였다. 코스모스호는 지금 한창 건설중인 인천대교까지 갔다 오는 것이였기에 월미산, 작약도, 영종도, 건설중인 인천대교를 구경할수 있었다. 배가 떠날 때 륙지를 바라보니 월미산이 바라보였는데 산에는 가지각색의 꽃들이 울긋불긋 피여 있어 아름다운 봄경치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영종도는 비교적 큰 섬이였기에 섬의 전체를 다 구경할수 없어 어떻다하게 묘사할 수 없었지만 작약도는 륙지와 영종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였는데 스피커에서 소개한데 의하면 둘레의 길이 1.5km, 면적이 0.065평방키로미터로서 섬모양이 작약의 꽃봉오리(작약꽃을 우리 연변에서는 함박꽃이라고 한다.)와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정말로 함박꽃봉오리 같았다. 배에서 그 작은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가 좋았다. 4층 전망대에서는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하며 유람선을 에돌면서 날아 예는 것이 한결 더 기분을 돋구었다. 아이들이 새우깡을 뿌리면 새우깡이 떨어지기전에 갈매기들이 날아 와서 문다. 아이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새우깡을 하나씩 뿌리면 갈매기들이 서로 제가 먼저 먹겠다고 몰려 드는데 아마 약삭 빠른놈이 먼저 받아 무는 것 같았다. 이때면 유람객들은 서로 다투어 갈매기가 모여드는 것을 배경으로 사진기 샤타를 찰칵, 찰칵 누르고 있었다. 우리도 갈매기들이 몰려드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빠른 동작으로 포즈를 잡아 카메라렌즈에 담았다. . 배가 한창 건설중인 인천대교쪽으로 거의 다달을 때 스피거에서는 인천대교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는데 송도 신도시와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인천대교는 총길이 21.48km(해상구간만12.3km)로서 한국에서 가장 길며, 세계에서도 5번째로(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대교는 금년 5월1일에 개통된 상해와 절강성 녕파를 이어 놓은 중국 항주만대교인데 총 36킬로메터로서 그중 32킬로메터는 바다에 건설되였다.) 긴 다리가 되는데 2009년 10월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대교는 그리 웅위(웅장)로와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가장 길고 세계에서 5번째로 되는 해상대교라는데서 유람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코스모스호가 인천대교까지 갔다 돌아 오는데 1시간20분이 걸렸다. 4.  신비스러운 생회 월미도에 와서 회를 맛못면 유감이라 한다. 우리는 유람선에서 내려 한 회집을 찾아 점심식사하려 들어 갔다. 식탁에는 여러가지 해산물회가 많이 올랐는데 거기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것은 낙지다리(촉수)를 토막내여 회를 한것이였는데 산것처럼(아마 촉수신경이 죽지 않은 모양이다.)꿈틀거렸으며 어떤 것은 접시밖에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이런것은 난생 처음으로 보는것이였다ㅣ 여성들은 무서워서 한저가락도 집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남성들은 용기를 내여 소주 한잔에 그것을 하니씩 입에 넣었다. 아마 정신자극이겠지 배안에서까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5.    월미놀이공원 점심식사 후 우리는 월미 놀이공웜으로 향하였다. 놀이공원에는 여러가지 놀이기구들이 많고도 많았는데 그가운데서 가장 인끼를 끄는 것은 바이킹과 아폴로디스코였다. 바이킹은 조각달과 같은 쪽배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앉으면 30 여 m 높이까지 그네타는 모양으로 왕복운동을 하는 놀이기구였는데 왼쪽으로 75도, 오른 쪽으로 75도의 각도로 왔다갔다하며 진자운동을 하였다. 이때 움직이는 속도는 시속 40~50km라고 한다. 이 기구는 늙은이들은 아예 탈 엄두를 못내고 젊은층들은 “전국 에서 가장 짜릿하기로 소문난 바이킹, 월미도에 왔다 바이킹을 못 타고 돌아가 면 후회막급”이라는 DJ(라디오방송이나 디스코텍에서 레코트를 틀어 주고 그 사이 사 이에 짧은 해설이나 즉흥적인 화제 등을 곁들어 이야기 하는 담당자.)의 말에 귀가 솔 깃하여 한번 타볼 충동을 느낀다. 우리 일행에서도 젊은이들은 그것은 탔다. 정말 짜릿 하단다.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에는 엉덩이가 완전 들리고 가슴 이내앉는 무서운 감을 느낀단다.  또 아폴로 디스코 역시 그러하다. “아폴로 디스코를 모르면 당신은 원시인”이라는 입담 걸쭉한 DJ의 유머가 섞인 구술이 젊은이들의 마음 을 끌었다. 우리 일행에서도 “월미도에 왔다 원시인이라는 말을 듣겠나.”하며 아폴로디 스코에 올랐다. 이놀이 기구는 둥근 체모양으로 되여 있었는데 체바퀴 안에 몇십명이 앉을수 있었는데 쌀을 체로 치듯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을 탄 사람들은 너무 무서워 체바퀴모양의 손잡이를 꼭 잡아 쥐였지만 둬자 높이로 엉뎅이를 들추어 놓는 것는 면 치 못하였다. 더욱 바빠난 것은 짧은 치마를 입은녀성들이였다.   6, 월미공원 월미공원은 아직 건설중에 있었는데 최근에 개방을 한 월미산(해발 108m)을 중심 으로 공원을 한다고 하는데 공원 앞쪽은 아직 조성중이지만, 월미산과 전망대는 이미 개방되였었다. 월미산은 50년 이상 주둔한 군부대가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였기에 서 해안의 생태계 특징이 온전히 잘 보전돼 있었다. 우리가 간 때는 3월 중순 백화가 만 발한 한창의 계절이여서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였는데 그 많고도 많은 꽃들 가운데서 아는 것이 고작해야 벚꽃, 개나리꽃, 진달래꽃 등 몇가지 뿐이였다. 여하튼 이름모를 여러가지 꽃들이지만 하도 예쁘기에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는 참말로 좋은 기분이였다. 산책도로를 따라 정상으로 올라 가면서 보니 생태환경이 아주 잘 보존된 산이라 나무가지에 얹혀있는 새둥지들을 수두룩히 볼수 있었으며 여러가지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 소리는 생태공원의 아름다운 멜로디로 되여 우리들의 기분을 한결 더 돋구었다. 정상에 이르니 유리전망대가보이였는데 2005. 10월 준공되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었다., 전망대는 25m 높이의 철제와 투명유리로 건립되였는데 바닥면적 150㎡, 건축면적 450㎡, 라고 한다. 라선형의 계단(장애인들을 위한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여 있었다.)을 걸어 3층에 오르니 인천항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었고 영종도, 작약도, 시내가 시야에 들어 왔는데 전망대의 망원경으로 영종도를 보니 아주 똑똑이 보이였다. 전망대에서 사면팔방을 다 둘러본 우리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오늘의 관광을 마치고 산책길을 따라 내려와서 택시를 잡아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월미도 전망대   
15    중국동포와 함께 하는 BM우드의 즐거운 야유회 댓글:  조회:6138  추천:36  2011-05-13
중국동포와 함께 하는 BM우드의 즐거운 야유회       인천서구의 가구 생산회사인‘BM우드’는 5월 30일 장봉도 야유회를 조직하였다. 기자는 중국동포들과 함께하는 BM우드의 야유회에 동행하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영종도 부두에 도착하자 사람을 실은 그대로 유람선에 들어 섰다. 유람선에는 장봉도로 가는 크고 작은 차량들이 30여대나 들어 서 있었다. 10시가 되여 유람선은 출발을 알리는 고동을 울리더니 장봉도를 향해 떠 났다. 관광객들은 모두 3층 갑판에 올라 바다와 주위의 많은 섬들을 구경하며 유람의 즐거움을 느꼈다.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하며 유람선을 에 돌면서 날아 예는 것이 한결 더 기분을 돋구었다. 아이들이 새우깡을 뿌리면 새우깡이 떨어지기전에 갈매기들이 날아 와서 물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새우깡을 하나씩 뿌리면 갈매기들이 서로 제가 먼저 먹겠다고 몰려 드는데 아마 약삭빠른 놈이 먼저 받아 무는 것 같았다. 어떤 애들은 손에 새우깡을 쥐고 높이 쳐들고 있으면 그것을 납작 집어 가기도 했다 이때면 유람객들은 서로 다투어 갈매기가 모여드는 것을 배경으로 사진기 샤타를 찰칵, 찰칵 누르고 있었다. 우리도 갈매기들이 몰려드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빠른 동작으로 포즈를 잡아 카메라렌즈에 담았다. 배가 출항하여 거의 40분 되여 장봉도에 도착하였다. 장봉도(長峯島)는 인천에서 서쪽으로 21km, 강화도(江華島)에서 남쪽으로 6.3km 해상에 위치해 있으며 섬이 길게 뻗어 있고 봉우리가 많이 있다고 해서 장봉도라고 한다. 섬은 전체적으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면적 6.68㎢, 해안선 길이 26.9㎞, 인구 810, 가구 297(2003년 통계). 주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여 하고 있으며 지금은 1박 2일 휴가를 보내려 오는 사람들이 많이 흘러 들어 많은 민박들을 꾸려 놓아 민박업도 하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유람선에서 내려 관광코스를 따라 한바퀴 돌았기에 장봉도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할수 있었다. 선착장에 내리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인어동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어부가 그물을 낚았는데, 인어 한 마리가 그물에 걸려 나왔다고 한다. 어부는 인어를 측은히 여겨 산채로 바다에 넣어주었는데, 그 후에 그곳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봉도는 소나무숲이 무성하고 옹암해수욕장, 한들해수욕장, 진촌해수욕장 등 이름 있는 해수욕장이 있었고 썰물 때 드러난 갯벌에서는 낙지와 조개, 굴, 등을 잡을 수 있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랑부리백로와 괭이갈매기가 집단 서식하는 곳이며 많은 낙시터가 있어 관광보다는 여름철 휴가를 보내기 좋은 곳이였다. 점심때 되여 회사 전체 직원들은 한자리에 단란이 모여 앉아 돼지고기 삼겹살이며 낙지 등 가지각색의 맛나는 음식들을 차려놓고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중국 근로자들은 중국에서 가지고 온 몇 가지 명주도 내놓았다. 점심 식사는 윤도현 사장의 “이번 야유회는 회사 사원들이 휴일의 하루를 즐기며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의 마음의 소통으로 되는 좋은 기회이므로 단결 우의 증진을 위하여 건배”의 제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은 서로 돌아가며 술을 부으며 건배를 하였다. 음식상에서 중국인들에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낙지를 산 것을 통채로 먹는것이였다. 8가닥의 다리(촉수)가 너불거리는 것을 먹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안아 칼로 토막을 내였는데 토막을 낸 촉수도 산 것처럼 꿈지럭거리였는데 어떤 것은 접시밖에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이런것은 난생 처음으로 보는지라 여성들은 무서워서 한저가락도 집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남성들은 용기를 내여 소주 한잔에 그것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아마 정신자극이겠지. 배 안에서까지 꿈틀거리는 것같았다. 술좌석에 이어 노래와 춤판이 벌어졌는데 한국가요, 중국가요, 연변가요, 등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였는데 그야말로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의 마음의 소통의 장으로 되였다. 오락회를 마치고 갯벌에 내려가 조개 줏기를 하였는데 이미 다 주은 뒤여서 눈에 띄우는 것이 얼마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 둘씩 줏는 것도 재미였다. 금방까지 갯벌이던 것이 오후 두시가 넘으니 밀물이 들어오면서 갯벌이 바다로 되였다. 조개줏기를 하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밀물에 쫓겨 륙지로 올라오는수 밖에 없었다. 장봉도에서 일몰이 가장 유명한 곳은 진촌해수욕장 이라고 한다. 1박2일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은 일몰을 볼수 있었으나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해가지기 전에 돌아 왔으므로 저녁노을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으로 되였다. 버스가 돌아오는 유람선에 들어서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이 함께하는 BM우드의 즐거운 야유회는 막을 내리였다. /주청룡 기자 2009년 6월 5일 한민족신문
14    단풍여행 -대둔산으로 댓글:  조회:6402  추천:19  2011-05-13
단풍여행 -대둔산으로   10월26일 중국동포타운신문사 여행동호회는 두 대의 버스로 가을 단풍여행을 대둔산으로 떠났다. 3일 연속 이따금씩 억수로 퍼붓던 비가 이날은 우리 동포들의 심정을 알아 주기나 하듯이 맑게 개인 하늘 높은 가을 날씨였다. 고속도로에서 그렇게 씽씽 달리던 버스가 대둔산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속도가 느리여지더니 입구 몇 킬로미터 전부터는 거부기 걸음을 하였다. 여행버스가 어찌나 길게 줄지어 늘어 섰는지 앞뒤 끝이 보이지 않게 객차바곤을 두 줄로 한데 이어 놓은 것 같았다. 버스에 앉아 가기보다 걸어 가는 것이 많이 빨랐다. 하여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30여분 정도 걸어서 대둔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대둔산(大芚山)은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 진산면. 논산시 벌곡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878m의 산이라고 한다. 지금은 한창의 단풍계절이라 관광객이 어찌나 많은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여러가지 옷색갈로 하여 사람이 단풍과 함께 울긋불긋 산을 물들였다   입구에서 대둔산을 올리다 보니 나뭇잎들이 단풍이 들어 가을단풍이라는 경치를 감상할 수는 있었지만 소문과 인터넷에 오른 사진처럼 그렇게는 화려 하지는 않았다. 북경 향산공원의 가을단풍처럼 울긋불긋 화려하리라고 생각 하였는데 그렇지 못하니 우리들의 마음을 좀 서운하게 하였다. 관리일군과 무었때문에 소문과 이렇게 다른가 물으니 올해는 늦더위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비가 자주 뿌리면서 날씨가 얼어 붙은 날이 많았기 때문에 단풍이 왕년처럼 그렇게 잘 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본래 산의 경치는 봉마다 기암 절벽이요, 돌마다 괴석으로 병풍을 이루었으며 임금바위와 입석대 사이에 80여m높이로 허공에 걸려있는 금강구름다리, 삼선바위를 톱아 오르는 계단식 삼선구름다리, 해발 878m로 하늘을 만질 수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마천대(摩天臺)에 세워진 마천대개척탑, 허공에서 산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등은 그야말로 절경이였는데 호남의 소금강이라고도 하였다.    878m로 해발고도는 그리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대고도는 대단히 높았다. 하여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려 하였는데 관광객이 어찌나 많은지 케이블카가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황이여서 우리에게는 차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걸어서 등산하여야 했다. 케이블카를 타면 허공에서 대둔산의 괴암괴석의 절경과 울긋불긋 물든 단풍의 경치를 내려다 보는 재미도 있었으 랴마는 걸어서 산을 오르는 것도 등산의 딴 의미가 있어 우리의 마음을 유쾌히 하였다. 등산길은 계곡을 따라 가파로운 돌계단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래 도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 나요”란 노래를 부르면서 톱아 올랐다. 계곡의 등산길은 오르내리는 관광객들로 붐비여 계곡으로 물이 흐르다기보다 사람이 흐른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산의 상대고도가 높고 너무 가파로와 산중턱까지 올라서 몸이 허약한 사람은 더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신체가 좋은 사람들은 조선시대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 라.”란 시구를 읊으면서 절정에 톱아 올랐다. 대둔산 초입에는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내려올 때 그 비문을 상세히 읽어 보았다. 비문을 간추리면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에 패해 퇴각하게 되였다. 이때 최공우가 인솔한 농민군부대는 대둔산에 들어 와서 항전을 계속하였는데 대둔산 근거지는 이듬해인 1895년 2월 18일 새벽안개를 틈탄 일본군의 기습에 의해 함락되였다. 이때 김석순은 한살난 어린애를 안고 150m의 절 벽을 뛰여 내려 장렬한 최후를 맞혔고 전사한 농민군 25명 가운데는 20대 후반의 임산부도 있었다.”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된 렬사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전적비를 배경으로 너도 나도 기념사진 찍었다.     산을 내려와 식탁에 모여 앉아 모두 오늘의 즐거운 여행으로 웃음꽃을 피웠는데 절정에 오른 사람들은 “마천대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진로’를 한잔 두잔 더 굽을 냈지만 절정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졸장부라 더 무슨 할말이 있으랴. 하지만 절정에는 오르지 못 하였지만 대둔산의 절경들을 다 올리다 볼 수 있었기에 큰 유감은 없었다. 중국동포들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하루의 즐거운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리우고 귀경길에 올랐다.   청해 2008년 11월 16일 중국도포타운신문 138호에 게재  
13    제1차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 댓글:  조회:6171  추천:13  2011-05-13
제1차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   -제2회 your옥천포도축제로  주청룡   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同好會)는 이미 35명의 회원을 갖고 있으며 7월20일 제1차로 제2회your옥천포도축제 떠났다. 우리 회원들은 모두 중국동포타운신문사에 집결하여 8시30분에 관광버스로 떠났는데 여행동호회 회원들은 연변, 길림, 흑룡강, 료녕 등 중국의 방방곳곳에서 온 동포들이였다. 달리는 버스에서 목단강에서 온 안영학 선생님의 사회로 오락판이 벌어졌는데 비록 서로 면목을 모르는 사이지만 도두 중국동포라는 이 공통점이 한 가족성원으로 융합시켜 서먹서먹한 분위기 없이 너도나도 흥겹게 노래와 춤을 추면서 오랫동안 쌓인 피곤과 스트레스를 해소 하였다. 버스는 2시간반 달려 11시에 포도축제현장인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금강유원지(금강2교 옆)에 도착하였다. 갈매기호 태풍의 영향으로 전날부터 아침에 서울에서 떠날 때까지도 지궂게 내리던 비가 충천도에 들어서면서 맑은 날씨를 보이더니 목적지에 도착하니 햇빛 쨍쨍 내리 쪼이는 완전 맑은 날씨였다. (그날 서울은 온 하루 폭우가 쏟아졌다한다.)  이것은 아마 하느님이 우리동포들의 즐거운 여행을 축하하여 내린 선물이라겠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 일행은 포도축제현장을 배경으로 영원한 추억으로 될 여행동호회회원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옥천군은 경치 좋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끼고 있어 그야말로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이였다. 옥천군과 이웃인 영동군은 모두 포도의 주 생산기지인데 영동군에서는 로지(露地)포도 재배를 주로 하고 옥천군에서는 시설(施設)포도재배를 많이 하여 포도가 일찍이 시장으로 나간다고 한다. 우리 관광객들도 주위의 비닐하우스안에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보랏빛포도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의 토지와 기후조건은 포도재배에 적합하여 색상이 좋고 당도가 높아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옥천군은 시설 포도 재배면적이 전국 제2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축제현장에는 포도 품종 비교전시판매, 포도가공식품, 와인 및 포도원액 시식(試食)-시음(試飮) 및 전시판매 되였다. 관광객들은 시식, 시음도하고 아주 맛이 좋다며 여러가지 전시품들을 기념으로 샀다. 옥천군 포도축제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한 2008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진행되는 포도축제의 주제는 “보랏빛 향기 찾아 떠나는 여름여행”이고 주요행사들로는 포도관련 레그리에이션(포도 빨리 먹기, 포도 알 수 알아맞히기, 포도무게 알아맞히기, 포도품종 알아맞히기, 포도당도 알아맞히기, 포도 관련 즉석 OX퀴즈.), 제2회옥천포도가요제, 제2회옥천군향토음식경연대회, 청소년 페스티벌, 전자현악, 즉석노래방 등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는데 레그리에이션은 매일 중복되는 행사였으며 여러가지 행사가운데서 우리동포들이 참여할 수 있는 항목이 즉석노래방이여서 동포 몇이 노래장끼를 부리였는데 연길에서 온 채영화씨가 2등, 상금 5만원(1등 1명,10만원, 2등2명 5만원 3등 3명 3만원)을 타는 행운을 지니였다. 우리 동포들은 한결같은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오후5시반이 되여 우리 일행은 귀로에 올랐는데 버스가 시동을 걸자 올때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노래와 춤판벌어졌는데 8시, 신문사에 도착할 때까지 버스안이 들끓었다. 이렇게 우리는 즐거운 하루를 뜻깊게 보내고 9월에 있게되는 제2차 여행을 기대하면서 그때 다시 만나요. 빠이. 빠이 하면서 헤여졌다.   후기     중국동포타운신문사 여행부의 조직으로 된 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는 이미 35명의 회원을 갖고 있으며 7월20일 제1차로 제2회your옥천포도축제 떠났다. 고된 로동에 지치면서 일만 할것 아니라 동포들의 여행동호회에 참가하여 두달에 한번씩 고국의 금수강산을 돌아보고 여러가지 지역축제도 보면서 고국의 력사와 문화를 터득하는 문화적 생활을 하는 것도 한국생활에서 한낱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본다. 매달에 회비 13,000원을 내는 것도 우리들의 조직생활을 의미하며 2달에 한번 26,000원의 회비로 한국의 여러곳을 유람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에게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지 않는가 생각하며 우리 동포여행동호회가 더 확대되여 앞으로는 두대, 세대의 버스로 함께 출발하여 우리 동포여행 대군체를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이였다.   《 중국동포타운신문》2008년8월5일 132호 제10면에 게재
12    정선기행 댓글:  조회:6847  추천:10  2011-05-13
정선기행  4월26일 토요일 우리는(우리 가족 3명과 중국 할빈에서 온 남현복 부부) 중국동포타운신문  여행사업부에서 조직한 정선관광을 하게되였다.     우리는 아침 7시10분에 서울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가는 관광열차르 타고 정선여행길에 올랐는데 기차는 용산역으로부터 중앙선을 달렸는데 서빙고로부터 한남, 옥수, 응봉등 한강유역을 지났기에 한강과 한강양안의 아름다운 경치, 그리고 한강 위에 가로 놓인 한강대교들을 기꺼이 볼 수 있었고 기차는 청량리 역을 지나 다시 덕소로부터 양평까지 한강유역으로 달려 또 다시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는데 특히 팔당역을 지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는 곳에 수축한 팔당땜과 팔당호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나와 남현복씨는 카메라를 들고 팔당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곳 빼놓을세라 렌즈에 잡아 넣으면서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철도 연선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강원도는 산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예미로부터 증산으로 달리는 구간 기차가 산 중턱으로 달렸기에 산밑 골짜기로 다리는 자동차들을 보니 비행기에 앉아서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기차는 5시간 남짓이 달려서 12시 15분 열차종착역인 아우라지역에 도착하였다 1. 아름다운 전설이야기 아우라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야기가 있었다. 이곳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의 대표적인 발상지로서 오대산에서 발원되어 흐르는 송천과 임계 중봉산에서 발원되는 골지천이 합류(어우러지다.어우러지다가 점차적으로 아울러지다로 번저져)되여 흐른다 하여 아우라지로 불리웠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적인 배경에서 송천을 양수(陰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부르며 여름 철에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전설이 전해지 기도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었다. 서로 결혼을 약속한 처녀 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떼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결혼하기로 다짐을 하고, 큰 물에 떼를 띄우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그 총각은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 그 총각은 동강 어디엔가의 드센 여울에서 뗏목이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 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차 절망으로 변했다. 아우라지 나루에서  “님 언제 오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하며 매일 총각을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강에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하고 말았다.  1983년경, 이곳 사람들은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이 처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처녀상을 세웠다. 한편, 이 처녀상에 얼킨 또 다른 실제 이야기도 있었다. 한 처녀가 시집을 가기 위해 가마를 탄채  이 배에 오르게 되었다. 배에는 하객들 과 친척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줄배가 무게 중심을 잃고 뒤집히는 바람에 가마에 탄 처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 후로는 해마다. 아우라지에서 는 두 세명씩의 익사 사고가 생겼다. 아마 억울하게 죽은 처녀가 사람들의 목숨을 앗 아간다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 처녀상을 세운 이 후로는 신기하게도 익사 사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여 이곳은 예로부터 남녀의 애환이 담긴 "정선아리랑"의 주요 발상지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지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강건너에 아우라지 비, 처녀상, 정자(여송정)를 세워 님을 기다리는 애절한 사연을 지금도 아리랑 가락에 담아 유유히 오가고 있는 유서깊은 곳,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전하고 있다 2. 신나는 풍경여행 레일바이크  레일바이크란 처음 미국서부지역에서 폐선된 철도를 버리기는 아쉬워 페달을 밟아 철로 위를 달리는 네바퀴 자전거를 레포츠에 이용한 것으로서 철도와 자전거의 약칭을 합친 말로 미국과 유럽의 산악관광지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다. 오늘 우리의 첫 관광코스가 바로 레일바이크를 타는 것이였다. 레일바이크는 바로 구절리역과 아우라지역사이의 폐선된 철도를 이용하여 탑승객이 페달을 이용하여 철도레일 위를 시속 15~20km의 속도로 운행할 수 있도록 제작한 철로자전거로서 가족과 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레저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철길 따라 레일바이크는 달리고 풍경은 흐르고 있었다. 총 7.2km 구간을 4,50분간 운행하는 레일바이크는 기차길과 함께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의 향기 만끽할 수 있는데 계곡의 강을 건너고 �아 지른 절벽 아래를 달리고 그림 같은 산골 마을을 지나고 세개의 터널을 지나는데 두번째 터널을 지날때에는 구슬픈 정선 아리랑 음악이 은은히 흘러 나온다. 아이들은 너무 흥겨워 자지러지듯 괴성을 지르며 좋아하고 레일바이크가 철도와 도로 교차로를 지날때에는 교통지휘 일군이 붉은기를 들고 오가는 자동차와 행인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비록 인력자전거이지만 철도 위로 달리는 것 만큼 그야말로 철도의 교통우세를 향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절리에는 폐객차를 개조하여 2마리의 여치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카페 ‘여치의 꿈(1층/스파게티 전문점, 2층/카페)과 아우라지역 동에는 천연기념물 제 259호로 지정된 어름치가 산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카페 ‘어름치 유혹(패스트 푸드점)이 관광객을 맞이하였다. 3. 정선의 특산물과 향토음식 오전 관광은 이로서 끝나고 2시에 정선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점심식사는 올챙이국수, 콧등치기 메밀국수, 곤드레밥 등 당지의 향토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난다음 우리는 전국에서도 이름있는 정선5일(2, 7, 12, 17, 22, 27일)장이라는 장마당을 구경하였는데 우리가 간날은 26일기에 평일장이여서 그리 흥성하지는 않았지만 당지에서 나는 곤드레를 비롯한 산나물, 악초, 옥수수, 메밀 등 당지 특산품들은 구경하거나 살 수 있었다. 4. 화암8경     다음으로는 화암8경을 구경하는 것이였다. 제1경으로는 화암약수(畵岩約水)는1913년 9슬동(九瑟洞)마을에 살던 문명무(文命武)란 사람이 꿈속에 원(院)터의 동자(童子)바위아래에 청룡과 황룡이 서로 얽히고 설키여 서광(瑞光)을 발하며 하늘높이 날아 올라감으로 황홀감에 놀라 깨여보니 꿈인지라 아침 일찍 이곳을 찾아 땅을 파헤치니 붉은 물줄기가 솟아 두 손으로 받아 마시니 혀가 짜릿하고 시원하여 온 몸에 힘이 솟아 이를 온 세상에 알리니 신비한 맛과 함께 산화철탄산수로서 탄산이온, 철, 칼슘, 불소 외에 9가지 필수원소가 함유되여 톡 쏘는 맛을 내며 위장병, 피부병, 빈혈. 눈병 등에 매우 영험스런 효능을 나타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의 다른 곳은 벚꽃이 이미 다 떨어졌지만 정선의 화암 약수터에는 벚꽃이 한창의 계절이였다. 우리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제2경으로는 거북바위인데 깎아 찌른듯한 절벽 위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북바위는 이 고장의 수호신적 존재로 정성껏 지성을 드리면 무병장수하고 그해의 액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제3경으로는 용마소로서 조선 중엽 김씨라는 여인이 옥동자를 낳은지 사흘만에 아기가 이곳저곳을 날듯이 뛰여노는 것을 보며 장수가 태여났다 하여 잘못되면 일족이 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그후 용마가 나타나 주인을 찾아 다니다 주인이 죽은 것을 알고 이 소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용마소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여 있었다. 제4경으로는 화암(금강)동굴이였는데 화암동굴은 1922년부터1945년까 지 연간 순금 22,904g을 생산했던 천포광산으로 금광을 파던중 발견된 종유 굴과 금광갱도를 활용하여 테마형 동굴로 조성되여 대석순과 석주, 갖가지 형상의 종유석이 신비로왔다. 총 1,803m의 관광구간은 5개(역사의 장, 금맥 따라365, 동화의 나라, 금의 세계, 천연동굴광장)테마공간으로 구성되였다. 제5경으로는 화표주인데 화암리에서 화표동 입구 삼거리 우측으로 약 30m앞(소금강 경광 도로입구)절벽위에 뾰족하게 우뚝 솟은 두 개의 돌기둥을 화표주라 하였는데 예날 신선듣이 이 곳에서 신틀을 걸고 짚신을 삼았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제6경으로서는 소금강이였는데 화표주를 지나 물운대를 가기 전까지 펼쳐지는 수십미터의 기암절벽과 숲이 펼쳐져 있어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장관을 연출하여 소금강이라고 하며 특히 겨울철 설경이 아름다워 설암이라고도 하였다. 제7경으로는 몰운대인데 커다란 암석이 층층이 형성되여 있는 이곳은 광활한 반석이 있었으며 몰운리와 하천변 계곡의 아름다움을 관광할 수 있어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제8경으로는 광대곡이였는데 하늘과 구름과 땅이 맞붙은 신비의 계곡으로 옛날 심마니(산삼캐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산신께 기도를 드리면서 산삼을 캔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심마니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웰컴투동막골’ 촬영지,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아라리민속마을 등 광광명소들이 많지만 1일 관광으로는 시간이 안되는 것만큼 아쉬운 심정으로 오늘의 관광을 맡이고  돌아 오는길에 나는 정선은 정말 산이 많고 산세가 높고 물 맑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전설 많은 곳이여서 정말 관광명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2008년 5월 6일 중국동포타운신문,  2009년 4울 10일 한민족신문  에게재
11    제주도 기행 댓글:  조회:5454  추천:10  2011-05-13
제주도 기행 주청룡    1.    제주도에 도착 나의 오래전부터의 소망이 조상이 누워 계시는 고국땅을 밟아 보았으면 하였는데 이번에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오게 되여 조상의 영전에 절을 올려 오매에도 그리던 나의 소원을 풀게되였으며 우리 부부는 이번에 또《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김용필 편집국장님과 이성주 전무님의 알선으로 제주도 유람을 하게 되였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1월 20일 오후 1시 55분에 김포공항에서 이륙하여 50분간 날아 2시 55분에 제주공항에 착륙하였는데 비행기가 착륙할 때 제주도를 내려다 보니 산과 들, 집 그리고 거리에서 달리는 자동차들이 모두 한눈에 안겨 왔는데 나무와 풀들이 모두 푸른색 그대로이고 어떤 채소밭은 노란색 꽃이 온 밭을 덮었고 집은 남색, 붉은색 지붕으로 되여 있어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이 서로 조화되여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대합실에는 “주청룡”이라고 쓴 패쪽을 든 안내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밖에는 우리를 호텔로 안내하는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용차에 앉아 호텔로 가면서 밖을 내다 보니 귤나무에 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겨울에 이런것을 보고  너무도 신기하여 운전기사한테 물으니 이 귤은 겨울에 이대로 오렌지 색갈로 있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푸른색으로 변했다가 가을이면 또 다시 오렌지 색갈로 변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그러면 어느때에 떨어지는가고 물으니 그것은 실험하지 않아 모르겠다고 하였다. 달리는 승용차에 않아 길옆을 내다 보니 나무들이 푸른색 그대로였고 어떤 나무에는 꽃과 빨간 열매들이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그리고 밭에는 배추, 무우, 시금치, 마늘 등 채소들이 푸르싱싱 자랐고 유채밭은 새노란 꽃이 밭을 덮고 있었다. 참으로 우리 중국 연변과는 딴 세상이였다. 나는 이 모든것을 관찰 하면서 너무도 신기스러워 제주도의 유람은 겨울에 하는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고장은 겨울에 소나무를 내 놓고는 푸른색 식물을 하나도 볼수 없는데 래일이 大寒인데도 이곳은 식물들이 푸른색 그대로이고 빨간색, 노란색 꽃과 열매들을 볼수 있으니 여름철 관광보다 더 신비한 감을 느끼였다. 물론 모든 식물이 다 푸른것은 아니였다. 단풍나무, 벗나무, 팽나무 등 낙엽수들은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고 갈대, 잔디풀같은 것은 얼지 않아도 말라든다고 한다. 차가 달릴때 바다가를 내다 볼수 있었는데 바다가의 돌과 바위들은 모두 검은색이고 구멍이 숭숭 난 것이여서 운전기사와 왜 이렇게 검은가고 물으니 제주도는 화산폭발로 하여 생긴 섬이기에 그것들이 모두 玄(검을 현)武 岩이여서 그렇게 검다는 것이였다. 밖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하는사이에 차는 어느덧 에뜨왈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성주 전무님이 우리가 간다고 미리 전화를 하였기에 호텔 책임자가 나와서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 하였다. 에뜨왈호텔은 바다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호텔밑이 곧바로 바다여서 침대에 누워서도 푸르른 바다를 내다 볼수 있었다. 이전무님의 알선으로 비행기도 기창옆의 제일 좋은 자리였고 호텔도 바다가의 제일 좋은 곳이였다. 우리는 호텔방에 행장을 풀어 놓고 호텔 책임자와 잠간 이야기를 나누고나서 바다가를 산책하였다. 우리 고장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바다가를 산책하는것도 별멋이였다. 더구나 나의 마누라는  50살을 넘어 먹으면서 바다구경이 처음이라 더욱 흡족해 하였다.   2.    서부관광 오늘은 24절기 가운데서 가장 춥다는 大寒이다. 우리 고장은 지금 모든것이 꽁꽁 얼어 붙어 붙어 있을터인데 제주도는 비가 구질구질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수 없이 2만원 주고 우산 두개를 삿다. 유람길에 비가 내리여 서운하긴 하였지만 또 대한날에 비를 맞는것도 별멋이였다.     버스가 관광지를 향해 달리는 사이에 가이드는 제주도의 개황을 소개하였다. 나는 노트를 꺼내여 질문도 들이 대면서 빠질세라 하나 하나 적어 넣었다.     제주도는 화산폭발로 형성된 섬인데 한국에서 가장큰 섬으로서 남북의 길이는 41km, 동서의 길이는 73km의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해안선의 길이는 254km. 총면적은 1,825평방키로메터 라고 한다. 제주도의 인구는 현재 54만명이며 나라에서는 2006년 7월 1일에 제주도를 특별자치도로 규정하였다고 한다. 제주도는 暖帶성 해양성 기후로서 한국에서 가장 덮고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라고 한다. 또 한라산(해발 1950m)을 사이두고 하루에도 동, 서, 남, 북의 날씨가 다르다고 한다. 제주도의 지표면은 화산에 의해 분출된 침수성이 강한 현무암층으로 덮여 있어 비가 많이 와도 모두 스며들어 건천(乾川)이 많아 논농사보다는 귤농사와 밭농사가 주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 관광의 첫 코스로는 龍頭岩을 보는것인데 龍頭岩은 그 형상이 마치 하늘로 날아 오르려다 굳어진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용의 머리 높이는 10m정도, 바닷속으로 잠긴 몸의 길이는30m쯤되는 바위인데 가만히 보면 정말 용이 살아 꿈틀거리는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전설에 의하면 용이 승천하면서 한라산 산신령의 옥구슬을 입에 물고 날아 나려할 때 노한 신령의 화살에 맞아 바다에 떨어졌는데 몸은 바다에 잠기고 머리는 울부짖는 모습으로 물위에 솟았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한라수목원을 구경하는 것이였다. 한라수목원은 면적이 5만여 평이였는데 제주도 자생수종(自生樹種)과 아열대식물 등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는데 만목(덩굴로뻗어 나가는 나무)원,화목(꽃나무)원, 도외수종원, 죽림(竹林)원 초본원, 수생식물원,삼림욕장 등으로되여 있었는데 야자수, 빠나나나무 등을 보니 마치 열대, 아열대에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번째로는 해피타운(중국기예쇼)를 관람하는 것이였다. 우리는 중국에서 많은 곡예를 보았으므로 이번 관람은 그리 찬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7.8살되는 여자애의 몸 굴리기 표현은 그야말로 그림영화와도 같았으며 오토바이쇼는 직경이 7m밖에 안되는 지구모양의 쇠그물로된 구안에서 7대의 오토바이가 서로 교차를 하면서 타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였고 초인간적인 기예였다. 너무 아찔아찔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심장을 꼭쥐고 숨을 죽여 가며 구경하게 하였다. 이런것은 이전에 텔레비에서만 볼수 있었던 것을 오늘 직접 코앞에서 보니 정말 기뻤다. 다음은 버스가 남으로 계속 달려 소인국테마파크를 관람하는것이였는데 소인국은 세계각국의 이름있는 건물들(이들테면 북경의 만리장성, 파리의 에페르철탑, 이딸리아의 피사탑,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등 50여개의 명물을 그모양으로 축소해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미리어처인데 북경의 세계공원과 비슷하였는데 세계각국의 대도시와 명승지를 여행하는 감을 느끼게 된다. 소인국을 떠나 버스는 계속하여 남으로 향하여 제주도의 남해안 서귀포시에 이르렀다. 서귀포시는 제주시(북해안에 위치)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었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깨끗한 감을 주었다. 서귀포에 오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정말 가이드의 말과 같이 하루에도 남북의 날씨가 달랏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는 유람선을 탓는데 유람선을 타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을 바라볼수 있었고 정방폭포도 보았는데 세갈래의 물줄기가 비단필을 내리 드리운듯 산에서 바다로떨어졌는데 마치도 우리 연변의 장백산폭포와 딱 같아 보이였다. 다만 그 락차가 장백산 폭포(68m)보다 낮을 뿐이였다. 만약 정방폭포를 찍은 사진을 연변사람들에게 보이면 모두 장백산 폭포라고 할것이다. 정방폭포(23m)는 천지연폭포(22m), 천제연폭포(22m)와 더불어 제주도의 3대 폭포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서귀포 남쪽바다에는 형제처럼 이웃한 3개의 수려한 섬이 사이 좋게 나란히 떠 있었는데 그 섬들로는 문섭, 섶섬, 범섬이였다. 우리 유람선은 범섬을 한바퀴 돌았는데 마치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습과도 같다하여 범섬이라고 한다. 범섬에는 두개의 동굴이 있는데 설화속에 등장하는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을 베개로 삼아 누울때 뻗은 두발이 굴을 뚤었다는 재미있는 전설과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의 마지막 세력인 목호(牧胡)들이 난을 잃으켰을 때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완전히 섬멸시킴으로써 몽고지배 백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이야기도 있었다, 다음으로 여행사의 배치에 따라 식당에 들어가 중식을 하였는데 점심상에는 우리가 먹어보지 못한 해산물들이 여러가지 올라 입맛을 한결 돋구었다. 중식이 끝나고 잠수함을 타 보는것이였는데 이전에 나는 잠수함은 해군들만 탈수 있는 것아라고 생각하였는데 제주도에 와서 고래와 같은 잠수함을 타고 바다밑의 신비한 셰계를 경험할수 있었다.  해저 10m대에서는 나풀거리는 해초류, 20m대에서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노는  모습,  30m대에서는 형형색색의 진귀한 산호초들을 볼수 있어 나의 마음은 바다밑 세계에서 여행한다는 긍지를 느끼였다. 그다음으로는 바위기둥 외돌개를 보는 것이였는데 서귀포 해안가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기둥바위 외돌개는 육지와 떨어져 바다가운데 외롭게 있다하여 외돌개라 부른단다. 높이 20m의 기둥바위 외돌개는 약 150만년전 화산활동이 한창일 때 생성되였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바위 위에는 몇 그루의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바위뒤로는 범섬이 한눈에 들어 왔다. 외돌개에는 역사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데 고려말 최영 장군이 제주도를 강점하였던 牧胡의 난을 토벌할 때 외돌개 뒤에 있는 범섬이 최후의 격전지였는데 전술상 외돌개에 치장하여 거대한 장수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본 목호들은 진짜로 장군이 진을 친것으로 오인해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장군석”이라고 한다. 이곳은 또《대장금》촬영지여서 유람객들의 발목을 더 끌었다. 다음으로  귤농장을 참관하는것인였는데 귤농장에 이르니 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는데 새파란 잎과 오렌지 색갈의 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유람객들의 마음을 한결 더 끌었다. 가이드는 우리더러 직접 귤을 따 먹어 보라고 하여 하나 따 먹어 보았더니 귤맛도 별 맛이였지만 大寒날에 직접 귤을 따 먹으면서 귤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별 멋이였다. 귤은 밀감 종류만 하여도 45종인데 심어서 4~5년이면 열매가 열리는데 15개월이면 따는데 큰것을 따면 작은 것들이 연달아 자라나기에 1년 내내 딴다고 한다. 어제 운전기사와 물어 해결 못한 의문을 오늘 해결 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니 동백나무에는 동백꽃이 새빨갛게 피여 있었고  멋나무에는 오미자와 같은 새빨간 열매들이 어찌나 많이 열렸는지 온 나무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채소밭에는 여러가지 채소들이 새파랗게 자라고 있었는데 겨울에 제주도를 유람 온데 대하여 더욱 흡족한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분재예술원(盆栽藝術園)을 참괌하는 것이였다. 분재예술원에는 30년에서 250년에 달하는 희귀한 수목 100여 종과 정교하게 다루어진 2천여 점의 분재들이 제주 특유의 돌담, 연못, 돌다리, 야자나무, 인공폭포 등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으로 첫날의 서부관광은 끝났다. 여행사의 관광일정표에는 서부관광이라지만 기실 오늘 관광코스를 보면 제주 북해안의 용두암, 서부의 소인국 테마파크, 서귀포 남해안의 유람선까지 하면 북, 서, 남부를 다 돌았다.   3.    동부관광 이튿날 우리는 제주도의 동부관광을 시작하였다. 이날 첫코스로는 도깨비도로를 지나는 것이였는데 내리막에서 차의 시동을 끄고 정차하면 차가 저절로 올리막길을 향하여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도로 바닥에 캔이나 병을 굴려 보거나 물을 쏟아 보면  그것들이 올리막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이 도깨비도로의 길이는 약 100m 정도였는데 실제는 경사도가 약한 내리막길이다. 나의 생각에는 뒤는 경사도가 강한 올리막 길이고 앞은 경사도가 강한 내리막길 사이에 이 100m 정도의 경사도가 약한 내리막길이 있어 경사도의 상대적 차이로 하여 시각적으로 올리막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나지 않는가하는 것이다. 아무튼 전문가들이 측량기로 측량한 결과 올리막인 것이 아니라 경사도가 약한 내리막이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코끼리랜드를 관람하는 것이였다. 9마리의 코끼리가 라오스인의 조련사와 함께 20여 가지 각종 묘기와 재롱을 부리였는데 몸집이 육중한 코끼리가 국기를 계양하는가하면 볼링핀을 코로 줍고 붓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코리가 정성껏 그린 그림은 화가 못지않게 그려 냈다. 그리고 코끼리가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잡고 걸어 가는가하면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위로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지나가는 모습, 코끼리가 몸위를 지나면 일년 내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해설원의 말에 일부 광광객들은 너도나도 들어 누웠다. 그리고 코끼리의 외나무다리 건느기, 하모니카 불기, 코위에 사람 태우기, 관관객이 수비를 하는축구문대에 발로 슛하기 등의 묘기를 볼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승마장에 가서 승마체험을 하는 것이였는데 우리 부부는 나이 60을 거의 먹으면서 처음 말우에 올라 앉아 보았다. 처음 말을 탓지만 이미 훈련을 거친 말이여서 마구 행패를 부리지 않았기에 매우 안전 하였다. 겁이 있는 사람은 말을 걸기고 좀 담이 있는 사람들은 채찍질을 하여 달리게 하였다. 나도 채찍질을 하여 뛰게 하였는데 말이 세게 뛸 때에는 약간 겁이 들었다. 그러나 말안장을 꼭 붙잡고 두발을 힘있게 내리 디디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면 위험성은 없었다. 그다음 우리는 중식을 하였는데 어제와는 달리 제주도의 특이한 요리 흑돼지고기 구이였는데 그것도 특이한 맛이였는데 거기에 소주 한잔씩 하니 더욱 감칠맛이 났다. 중식이 끝난다음 성읍민속마을을 참관하였는데 이 마을에는 유형문화유산으로는 300여 채의 초가집 군락을 비롯하여 鄕校(향교란 시골에 文廟와 거기에 부속되여 과있는 官立 학교), 정의현청의 일관헌, 돌하르방(제주도 도민들이 수호신으로 믿는 석상), 성터, 연자매 등이 있엇으며 무형의 문화유산으로는 민속놀이, 향토음식 등이 있었다. 이 민속마을 참관하면 제주의 옛 민속문화를 다 알수 있었는데 제주도에는 거지, 도적, 대문이 없는 3무의 섬이라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자립심이 강해 거지가 없고 성품이 정직해 도적이 없으며 도적이 없으니 대문이 필요없었다. 대신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구멍이 세개 뚫어진 돌기둥(정주먹)을 양옆에 놓아 거기에 나무장대를 길게 3대 걸쳐 놓아는데 이것을 정낭이라고 한다. 정낭은 가축이 집안으로 들어 가는것을 막기도 하고 밭에 나가거나 외출을 할때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정낭 하나를 걸쳐 놓으면 집주인이 잠시 이웃에 갓다는 것을 표시하고 두개를 걸쳐 놓으면 아이들이 있으며 어른은 저녁때 집에 들어 온다는 것이고 세개를 걸쳐 놓으면 집안에 사람이 없거나 출타 중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정낭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습과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마을의 집은 모두 흙을 이개여 현무암을 쌓아 올렸거나 나무기둥에 흙과 짚을 한데 이개여서 바른 흙집이였으며 지붕은 모두 초가로 되여 있었고 유리창문이 없이 모두 창호지로 된 문이였다. 이곳 풍속은 한집에서 부모와 아들며느리가 서로 딴 세간으로 살고 있는데 며느리는 시부모가 늙어 죽을 때까지 밥을 해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밥을 해 드리면 시부모들을 빨리 죽으라는 뜻으로 된다고 한다. 밥을 하는 칸은 따로 있엇는데 한칸에 네개의 가마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는데 두개는 시부모들이 쓰는것이고 두개는 아들며느리가 쓰는 가마였으며 구새가 없이 네개의 돌우에 걸쳐 놓여 있었다. 방구들을 덮이는 부엌은 따로 있었다. 이전에는 이 마을에 물이 없어 산에 가서 길어 왔으므로 물이 귀하여 동백나무 밑에 물독을 놓고 나무와 물독사이에 짚을 실하게 타래 쳐 놓았는데 비가오면 나무에 떨어진 비물이 모두 짚을 따라 독안에 흘러 드는것을 받아 먹었다고 한다. 그 짚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비물을 받는 작용도 하지만 려과작용도 한다고 한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는 좀먹지 않는다는 속담을 빌어 물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산 개구리를 그 안에 넣는다고 한다. 그러면 개구리의 운동으로 하여 물이 썩지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와 이런것을 쓰지 않지만 유람객들을 위하여 그대로 놓아 두고 있었다. 이 마을의 변소(화장실)는 돌을 1m정도 높이로 쌓아 올리고 그우에 앉아서 대변을 보는데 그밑은 돼지굴과 통화여 똥돼지라고 하는 그지방 돼지들이 그것을 받아 먹는다고 한다. 대변을 볼때에는 쌓아 올린 돌우에서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보므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볼수 있는데 그것을 관계치 않는다고 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런 변소를 사용하지 않지만 노인들은 습관상 그냥 그런 변소를 사용한다고 한다.  제주도의 언어를 보면 표준말과는 완전히 달리 사용되고 있어는데 “고생 많았습니다”는 “폭삭속았수다”로, “별말씀은요”는 “소구멍 말멍했수다”로, “가까이 오십시오”는 “좃끝에 옵서”로, “바지런히 따라 오십시오”는 “보질보질 따라옵소”로 쓰이였는데 그지방 사람들끼리 말하는것은 우리는 한마디도 알아 들을수 없었다. 이 마을를 참관하면서 언어로부터 그 지방의 민속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주 원시적어라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삼무는 선진적 문화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발전과 더불어 정부에서 이 지방을 개방하고 많이 발전기켜 백성의 생활이 많이 개선되였지만 이 민속마을만은 유람객들을 위하여 정부에서 이 마을 사람들에게 생계비를 주면서 제주도의 민속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의 민속문화가 그렇게 원시적이고 내륙과 차이가 많은 것은 아마 외딴 섬에서 외지와의 연계가 극히 드물게 생활한 것과 관계 된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어떤 노인들은 이 섬에서 태여나서 지금까지 이 섬외의 다른 땅을 디디여 본적이 없다고 한다. 한평생 1,825평방킬로메의 이 작은 섬에 같혀 산 셈이다. 지금은 내륙과의 연계가 아주 밀접하고 김포와 제주도사이에 비행기가 하루에 왕복 66차 날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외지의 선진적 문화들이 많이들어 온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하루 빨리 선진적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 이지방 사람들도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였다. 그다음은 미천굴을 보는 것이였는데 미천굴은 두대의 자동차가 서로 마주 달릴수 있는 터널과 같았는데 지금 개방한데까지는 365m이고 아직 위험하여 개방하지 않은 것이 17km나 된다고 한다.참말로 기이한 굴이였다. 지질학자들의 탐사에 의하면 이 굴은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 내리면서 외부는 식고 내부는 계속 흐르다가 차츰 식으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 굴은 현무암으로 된 굴이여서 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주도에는 이외에도 길이가 13.422km되는 만장굴도 있다고 한다. 그다음으로는 섭지코지를 보는것인데 코지는 코끝처럼 바닷가로 툭 튀여 나온 땅이라는 의미의 제주도 방언이라고 한다. 언덕 위에는 왜적의 침임때 불을 피워 마을의 위급함을 알렷다는 연대, 용왕의 아들이 선녀에게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돌이 됐다는 슬픈 전설을 담은 바위, 삼성혈에서 나온 삼신인과 혼례를 올린 세공주가 목함을 타고 도착했다는 황금알을 볼수있었다. 마직막으로 동복리 해녀촌은 보는 것이였는데 우리가 그곳에 갓을때는 저녘무렵이여 마침 잠수복은 입은 해녀들이 해삼, 전복, 미역같은것을 건져 가지고 바다에서 올라 오고 있었다. 바다의 잠수업이 힘들다보니 해녀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해녀들은  모두 노년층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해녀촌에서 해녀들이 하는 음식점에 들어 가서 여러가지 해산물로된 음식을 석식으로 하고 공항길에 올랐다. 이렇게 하면 제주도의 2박3일 유람은 끝난셈이다. 이번 제주도 관광에 대하여 매우 흡족하면서도 유감스러운점이 두가지있었다. 하나는 제주도는 유람지가 100여 곳이 넘어서 이틀이란 시간이 너무짧아 그것을 다 구경하지 못한것이고 다른하나는 날씨가 흐리여 한국의 대표적 산인 한라산을 올리다 보지못한 것이였다. 앞으로 어떤 기회를 찾아 또 다시 제주도에 와서 이번에 보지 못한 곳을 보려는 마음이다. 공항에 와서 가이드가 주는 항공권을 가지고 가이드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여졌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8시 30분에 탑승이기에 1시간 좀더기다려 비행기에 올랏다. 마침 이번에도 우리의 자리는 기창옆이여서 비행기가 이륙할 때에 제주시의 야경을 볼수있었는데 오색영롱한 형광등 불빛이 온 제주시를 물들이였다. 나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이틀반의 제주도의 유람으로하여 흡족한 마음으로 제주여 안녕히! 잘있으라 제주여! 하며 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인사가 끝나자 비행기도 구름속르로 날아들었다.  2008년 1월 23일  중국동포타운신문 제120~126호에 련재
10    태산에 오른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10) 댓글:  조회:10060  추천:21  2010-12-29
태산에 오른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10) 주청룡 다음 우리는 호텔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태산 천가(天街)의 상가(商街)를 거닐면서  여러가지 관광상품들을 구경도 하고 기념으로 될만한것들을 사면서 남천문까지 왔다. 케이블카를 타고 태산의 전경을 구경하는것도 또 다른 멋이라 내려올 때에는 도보로 하산하지 않고 케이블카를 타기로 하였다.    케이블카 남대문역 케이블카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마침 10월 한창의 단풍계절이여서 태산의 경치는 울긋불긋 한폭의 그림과도 같이 자못 아름다웠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태산 중천문에서 도보로 남천문까지 오르는데 네시간이 거의 걸렸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니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중천문 케이블카 표지석    중천문 뻐스정류소 중천문에서 다시 셔틀뻐스를 타고 천외천(天外村)으로 내려오면서 보니 경사도가 너무 강하여 갈지(之)자를 이루며 내려왔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도보로 등산할때에는 남천문까찌 7시간 더 걸렸지만 내려올 때에는 케이블카와 셔틀뻐스를 타니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태산려행을 기꺼이 다 마친 우리는 태산역에 와서 다시 북경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끝                          
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9) 댓글:  조회:10004  추천:23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9) 주청룡   태산의 저녁노을까지 흔상 하였으니 이제는 숙소를 잡는것이였다. 태산에는 대묘로부터 시작하여 일천문, 중천문, 남천문, 천가, 옥항정, 일관봉 등 곳에 여러 개의 호텔들이 있었는데 신계호텔(神憩賓館)은 태산극정에서 유일한 3성급 대외개방 호텔이였다. 신계호텔은 벽하사(碧霞祀)를 앞에 두고 옥황정(玉皇頂)을 뒤로 하고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일관봉(日觀峰) 있다. 호텔은 태산벽하원군(泰山 碧霞元君)의 후침궁(后寢宮)인 신계궁 (神憩宮) 원래의 위치에 건축하였다하여 신계호텔(神憩賓館) 이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주숙처를 신계호텔에 잡았다.    신계호텔(神憩賓館) 호텔복도에는 일출시각표를 커다랗게 붙여 놓았는데 10월 10일의 일출시간은 6시 6분이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일출시간을 놓칠세라 명심하여 일어났는데 시간을 보니 5시가 좀 넘었다. 신계호텔에서 일관봉까지는 걸어서 몇분 정도의 거리기에 우리는 천천히 일관봉으로 향하였다. 일관봉에는 일출을 구경하려 나온 유람객들로 붐비였는데 10월의 태산의 새벽 기온이 너무 차기에 모두 호텔에서 빌려주는 초록색 솜외투를 입고 일제히 동녘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6시가 거의 될 무렵 동녘하늘이 훤히 밝아 오더니 차츰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남색 등 여러가지 색깔로 바뀌면서 하늘을 물들였다. 텔레비죤에서만 감상할수 있었던 아름다운 장면을 오늘 대자연에서 직접 감상하게 되였다. 이 시각 나는 미리 주비하였던 카메라로 이 아름다운 정경을 렌즈에 담았다.     태산의 려명 6시 6분이 되여 해님이 구름속으로부터 서서히 얼굴을 올리 밀기 시작하자 남색, 보라색은 다 사라지고 붉은색, 귤색, 황색으로 동녘 하늘을 물들였으며 우리의 발 밑은 잔잔하게 파도 이는 망망대해로 변하였다. 마침 마술사가 요술은 피우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될수 있는 이 장면을 영원한 기념으로 남기려고 사진촬영사와 미리 약속이 있었는지라 사진사는 우리를 촬영 하기 좋은 위치에 세워놓고 찰각찰각 샤타를 눌렀다. 몇분 후에 사진이 나왔는데 참 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였다. 태산의 일출 태산의 일출은 바다의 일출과 매우 흡사하였는데 다른 점이라면 바다의 일출은 노을 빛이 바다물에 빛껴 대칭으로 물들어 똑 같은 영상이 수평선의 아래 우에 나타나는데 태산의 일출은 대칭영상이 없었다. 우리의 이번 태산려행은 참 운수가 좋았다. 태산 일군들의 말을 들으면 태산에서 이런 아름다운 일출을 보기는 드물다고 한다. 태산의 기상조건을 보면 높은 산이여서 구름이 많거나 흐린 날씨가 많기에 가시거리가 작아 태산유람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가는 유람객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헌데 우리의 려행은 10월의 가을날씨여서 그런지 모든 기상조건 다 우리의 요구를 만족 시키였다. 참으로 행운인 것 같았다.   일출구경을 나온 유람객들   려명을 맞은 옥황정 태산의 일출까지 흔상하고 보면 우리의 태산려행은 원만히 결속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이번 태산려행이 우리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옥황정에 올라 천하를 내려다 보고싶은 생각을 억제할수 없었다. 하여 우리는 다시 옥황정에 올라 태산의 정경을 다시 한번 흔상하였는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유람객들도 우리와 마찬가지 심정으로 태산의 일출을 구경한다음 다시 옥황정에 올랐다.   일출을 구경한 유람객들 옥황정에 오르다 다음호에 계속
8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8) 댓글:  조회:9553  추천:19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8) 주청룡 공자묘에서 다시 벽하사까지 내려와서 동쪽으로 좀 가면 해돋이를 본다는 일 관봉(日觀峰)이 있다. 일관봉으로 가는 길 왼쪽에 雄峙天東(웅치천동, 즉 떳떳하 게 하늘 동쪽에 우뚝 솟았다 란 뜻이겠다.)란 비석과 함께 孔子小天下處 란 비석이 있었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 登泰山而小天下(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공자가 이런 말을 한데 대하여 지금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는 거의 비슷하였다. 즉 공자가 당시 자기의 사상과 포부를 세상에 떨쳐 보이고 싶었지만 그것을 받아줄 군왕이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태산에 올라서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하였단다. 즉 너희들이 권력으로 천하를 지배하지만 내 보기에는 그저 고만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군왕을 비하하며 자신을 위로 하였다고 한다.   공자소천하(孔子小天下處) 이곳에서 동쪽으로 좀 더 가면 일관봉이며 일관봉에는 태산기상관측소, 8.1호텔, 일관봉호텔이 있었다. 일관봉(日觀峰) 일관봉에 있는 태산기상관측소 일관봉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망망대해였다. 즉 구름이 태산의 중턱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일관봉에서 내려다 본 운해(雲海) 일관봉에서 태산기상관측소, 태산의 운해까지 구경하고 나니 해님이 옥황정 서쪽에서 얼굴은 가리우기 시작하였다. 좀 지나 해가 구름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서쪽하늘이 여러가지 색갈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카메라를 들고 이 아름다운 경치를 렌즈에 닮았다. 저녁노을에 비낀 옥황정과 송신탑 다음호에 계속
7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7) 댓글:  조회:9743  추천:23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7) 주청룡 태산이 높다하는것은 그의 해발고도가 높아서 높다는것이 아니다. 태산의 주봉 인 옥황정의 해발고도는 1,524m 이지만 장백산주봉인 백두봉의 해발고도는 2,749m 로서 태산의 해발고도보다 1,225m나 더 높다. 장백산은 절대고도는 높지만 상대고도가 태산에 비해 그리 높지 않기에 중국 동북과 조선반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지만 우리의 시각으로는 매우 높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예로부터 무엇을 높이에 비길때 태산에 비하지 장백산에 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태산은 해발50m이하의 화북 평원에서 해발 1,524m 의 높이로 우뚝솟아 절대고도는 높지 않지만 상대고도가 높기에 아주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옥황전 서북쪽에는 송신탑과 방송국 호텔이 있었다.     방송국호텔(電臺賓館)   정상일대와 천가에 줄줄이 늘어선 호텔과 상가들 정상 옥황정 바로 밑에 공등암(孔登岩)이란 석각이 있다. 공자가 태산 정상을 오른 것을 기념한 표지석이다.   공등암(孔登岩) 옥황전 바로 밑에는 또 공자묘(孔子廟)가 있었다. 우리는 옥황정에서 천하절승경 개를 마음껏 흔상한다음 내려오면서 공자묘를 들러 보았다. 공자묘 입구에는 “공자묘”라고 쓴 커다란 패방(牌坊)이 있었다 .공자묘 패방(孔子廟牌坊) 패방에 들어서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공자묘이다. 공자묘(孔子廟) 묘안에는 공자의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다.   공자소상(孔子塑像) 다음호에 계속
6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6) 댓글:  조회:10390  추천:26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6)                      주청룡 6536개의 돌층계를 톱아 드디여 태산의 극정 옥황정(玉皇頂)에 올랐다. 중국 력대의 제왕들이 봉신(封神)했다는 곳이다. 옥황정은 태산의 주봉인데 도교의 옥황상제를 모시는 사당이다. 정상에 옥황묘가 있다하여 이름을 옥황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태산의 극정에 있는 옥황전(極頂玉皇殿) 사당 중앙에는 옥황대제의 동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며 모든 것이 자의의 뜻대로 되여 줄것을 빌었다. 그리고 옥황상제의 왼쪽엔 관음보살, 오른쪽엔 재물을 부르는 재신(財神)을 모시고 있었다.   옥황대제(玉皇大帝)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재신(財神) 정원에는 泰山極頂(태산극정) 1545米라고 새겨진 표지석(標識石)이 있었다. 신 화사전이나 지금의 중국지도에는 모두 태산의 해발고도가 1524 m로 되여 있는데 표지석의 1545 m는 어느 때에 측량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의 측량수준으로 1545 m였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태산의 극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구름과 뭇 산봉우리들이 발 밑에 있었고 소박한 감정으로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 나는 이 시각 가습 뿌듯이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만 높다 하더라.” 란 시구를 다시 한번 읊었다. 오악독존의 절정에 오른 그 마음 어찌 흐뭇하지 않으랴. 그 흐뭇한 마음의 표현을 “不到长城 非好汉”(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란 모택동의 시구로써 하늘 높이웨치고 또 “不登泰山 非好汉!” “태산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 하며 하늘 높이 웨치고 또 웨치였다. 옥황전(玉皇殿) 1545m 극정석 주위에는 붉은 리본들이 매여 있었는데 온 가족에 복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고 헤아릴수 없는 자물쇠들이 잠겨 있는것은 옥황상제에 빈 복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말라는 뜻이란다. 붉은 리본을 매고 누른 자물쇠를 잠그어 놓은것이 이곳뿐만 아니라 태산의 모든 사당에 다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온 가족에 복을 가져온다는 붉은 리본 다음호에 계속
5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5) 댓글:  조회:10265  추천:19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5)  주청룡 천가를 거닐면서 보면 상가들이 많거니와 여러 문인(文人), 묵객(墨客)들이 남겨 놓은 글들이 많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주은래 동지의 부인이며 생전 전국정협상회의 주석 등영초(鄧颕超) 동지가 80고령에 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 (태산에 올라 조국강산 보니 장려하여라!)란 시구도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 시구를 보면서 당시 등영초 동지의 심정이 태산에 올라 조국의 강산을 내려다 보니 중국 혁명의 성공에 흡족하는 듯한 심정이 아니였게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도 그런 마음에서 그 시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등영초동지의 시구 천가의 끝쪽에는 중국고대문화의 대표로 볼 수 있는 고대 건축 군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이 碧霞祠이다. 벽하사에 오르는 유람객들 벽하사(碧霞祠) 벽하사는 옥황상제의 딸이자 태산의 녀신 벽하원군(碧霞元君: 도가의 학설에는 남자가 신선이 되면 ‘眞人’이라 하고, 여자가 신선이 되면 ‘元君’이라 한다.) 을 모시는 사원으로서 이 녀신은 태산을 지배하는 태산할머니라고도 한다. 태산할머니께 아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하거나 사업에 성공하게 해 달라고 하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 지는데 소원이 이루어 지면 그것을 보답해야 한다고 한다. 보답하는 방법은 태산에 나무를 심거나 사당을 증축하라고 기금을 하거나 간판을 선물하거나 향을 태우며 제를 지내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정성을 다하여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리념으로 하여 많은 관광객들은 벽하원군에게 마음속 깊은 곳의 소망을 빌기도 한다.  벽하원군(碧霞元君) 벽하사를 나와 북쪽으로 좀 올라가면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바위 절벽을 볼수 있다. 절벽의 이름은 대관봉(大观峰)으로 각 시대별로 조성된 석각 비문이 있다. 가장 유명한 석각비문은 세로 12.3 m 가로 5.3 m의 바위에 한 행에 51자씩 24행에 총 1008자가 새겨져 있는 당마애(唐磨崖: 당마애란 당나라때 갈아 만든 절벽이라는 뜻으로 리해된다.)라고 하는데 당나라 현종이 태산에서 봉선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당마애(唐磨崖) 당마애에서 태산의 정상인 옥황봉까지 도보로 몇분 거리에 불과한데 극정에 거의 오를 때에 五岳独尊(오악독존)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있다. 오악은 그 지리적 위치에 따라 동악, 산동성의 태산(泰山1,524m), 서악, 섬서성의 화산(華山 2,160m), 남악, 호남성의 형산(衡山1,290m), 북악, 산서성 항산(恒山 2,052m), 중악 하남성의 숭산(嵩山 1,512m)을 말한다. 오악독존은 오악 중 태산이 최고라는 의미로 된다.   오악독존(五嶽獨尊) 다음호에 계속
4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4) 댓글:  조회:9346  추천:20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4)  주청룡 오대부송 북쪽에는 오송정(五松亭)이 있는데 정자 앞에 오대부송이 있는것으로 하여 오송정이라고 한다. 오송정(五松亭) 오송정을 지나면 태산의 등산로에서 제일 험준한 구간이 18반(十八盤)이다. 이 구간은 0.8km의 거리이지만 수직 높이는 400 m이고 1600여개의 돌계단으로 되였으며 량옆에는 손잡이 란간이 있었고 경사도는 70~80도는 되는 것 같았는데 정말 사다리를 놓고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때에 조선시대의 문신(文臣)이며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 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 만 높다 하더라”란 시구를 읊고 또 읊으면서 이 가파로운 돌층계를 한층 한층 톱아 올랐다. 이 시구는 우리에게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하늘 아래에 있는 산에 지나지 않는 한 그것을 기어이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씩 톱아 올라간다면 틀림없이 절정에 올라가 세상을 굽어보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하였다. 십팔반(十八盤) 오르고 또 오르니 드디여 남천문에 이르렀다. 남천문은 일천문, 중천문에 이어 삼천문이라고도 하는데 해발 1,460메터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중천문에서 오른 케이블카의 종점인 월관봉(月觀峰)에서 온 유람객, 북천문(北天門)으로 오른 유람객, 돌층계를 따라 올라온 유람객들이 합류하는 곳이다.   여러 갈래로 올라 온 등산객들이 남천문에서 합류하다 남천문에 오르면 험한 지세는 다 오르고 여기로부터는 평탄한 길도 있고 층계가 있어도 많지 않거니와 가파롭지도 않았다.   남천문 남천문에서 동쪽으로 벽하사(碧霞祠)까지 0.6 km정도의 구간은 넓고 평탄한 곳인데 이구간을 천가(天街)가라고 한다. 즉 하늘거리 또는 하늘시가(市街)라는 뜻이겠다. 천가(天街)   천가에 들어서면 호텔, 상가(商家)들이 줄줄이 늘어섰는데 여러가지 공예품, 려행기념품들이 진렬되여 있었고 크고 작은 향(香)도 있었는데 어떤것은 삽자루만큼 큰것도 있었다.     천가에 줄줄이 늘어선 상가들 다음호에 계속
3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3) 댓글:  조회:9501  추천:21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3)                      주청룡 중천문에서 800 m쯤 걷다 보면 운보교(云步桥)가 나온다. 이 돌다리는 길이가 12.2m, 넓이가 4.35m, 높이가 6.1m로서 깊은 개울을 동서로 걸쳐져 있다. 안개가 자욱한 날 산우에서 바라보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마치 구름 우로 걷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운교보(雲步橋)   태산에서는 물을 보기 힘든데 계곡을 따라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운보교 북쪽에서 몇 갈래의 가느다란 물줄기의 폭포로 되여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가을이여서 물량이 더 적은 것 같았다. 비록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폭포라고 그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이 계곡에는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붐비여 계곡으로 물이 흐른다기보다 사람이 흐른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보운보교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여름철 우기에는 폭포의 물량이 더 많다고 한다.   운보교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나니 배가 촐촐한 감이 나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도시락을 풀어놓고 점심을 먹었는데 둘이서 먹자니 술을 마이면서 태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는 너무 조용하여 흥이 나지 않았다. 하여 옆에서 식사를 하는 등산객들을 불러 인사를 나누고 같이 술을 마이면서 이야기 나누었다. 폭포의 물보라를 맞으면서 태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니 기분이 더욱 좋았고 여럿이 모여서 술을 마이면서 식사를 하니 흥이 났고 맛도 더 좋았다.   폭포의 물보라를 맞으며 식사를 하다    운보교에서 400 m정도 더 가면 오대부송(五大夫松)이 있다. 진시황이 태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곳이다. 당시 진시황제이 고마움의 표시로 이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고대 벼슬직위 의 하로서 24작위 (爵位) 중 9번째의 작위이다.) 작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 다 한다.  오대부송은 아무리 소나무일지라도 2천년 이상은 살 수 없음으로 지금 있는 3그루의 소나무는 청의 옹정(雍正) 황제 8년(1730년)에 보식된 것이라고 한다.      오대부송(五大夫松) 다음호에 계속
2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2) 댓글:  조회:9693  추천:19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2)                        주청룡 만선루에서 1Km 좀 더 오르면 오른쪽에 두모궁(斗母宫)이 있다.                                   두모궁(斗母宮) 두모궁은 태산을 수호한다는 불교의 북두칠성 어머니인 두모 녀신을 모신 도교 사원(寺院)으로서 예전에는 녀자 도사들만 머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사원 안에는 8개의 팔을 가진 금빛의 두모 녀신상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향을 피우며 절을 하고, 소원이 새겨진 자물쇠를 걸어 소망을 빌고 있다.    두모낭낭(斗母娘娘)   두모궁에서 층계를 따라 곧게 중천문으로 오르는 길과 동북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동북쪽으로 약500 m쯤 골짜기를 따라가면 3000여 평방메터에 달하는 평평한 돌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경석욕(經石峪)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당승이 황제를 따라 태산에 왔다가 도중에 큰 비가 내려서 불경이 비에 젖자 비가 그친 후 이 돌판에서 불경을 말리웠다고 한다. 돌판 우에는 1,400여년전의 "金剛般若波羅蜜經"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金剛般若波羅蜜經"은 신도가 지혜롭게 모든 고뇌를 벗어버리고 극락세계에로 갈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제시한 글이라고 한다. 글자의 크기는 약 50cm쯤 되며 원래 25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1067자 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협곡을 경석욕(經石峪) 이라고 한다. 이는 태산의 불교문화와 석각예술의 진기한 보물이다.      돌판우에 새겨진 경서 투모궁에서 계속 1.8 km 정도 직진하면 호천각(壶天阁)이 나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라 말 그대로 마치 항아리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호천각(壺天閣) 호천각에서 700 m정도 올라가면 중천문(中天門)인데 해발 847 m라고 한다. 중천문은 말그대로 태산을 오르는 하늘중간의 문으로서 대종방으로부터 돌계단을 걸어 오는 길과 천외천에서 뻐스를 타고 종점에 올라와 만나는 곳이며 남천문으 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의 시발점이다.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계속하여 돌계단을 로 도보로 등산할수도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 등산할수도 있는 곳이다.    중천문(中天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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