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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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연변대학교의 조선-한국학연구개황 댓글:  조회:4712  추천:14  2011-08-01
                                연변대학교의 조선-한국학연구개황                                          강순화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연구중심)        1. 연변대학교에 있어서의 조선-한국학연구의 위치와 의의     연변대학교는 1949년에 중국조선족의 교육, 문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대학교이다. 해방전쟁의 포연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연변에 중국의 200만 조선족을 중심으로 중국조선족의 고급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교의 설립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로 1949년 4월에 연변대학교가 성립된 것이다.     연변대학교의 설립취지에서 대학교의 민족적 성격을 천명함과 아울러 조선-한국학연구가 가지는 중요한 위치와 의의를 밝혔다. 조선족사회의 교육, 문화 수준을 제고하고 조선족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하자면 연변대학교가 필요했고 또한 상술한 목표를 달성하자면 조선-한국학연구를 중요한 위치에 놓아야 했다. 따라서 설립초기부터 조선-한국 언어문학, 력사 등 학과는 연변대학교의 핵심적인 학과로 되었다.     특히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온 과경민족의 후예이고 연변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이웃해 있으므로 연변대학교는 다른 지역의 대학들에 비해 력사적, 지정학적 우세를 가지고 있다. 장구한 력사적 행정 속에서 중국과 조선, 중국과 한국은 서로 활발하게 문화교류를 진행해 왔다. 이 가운데서 연변대학교는 중한 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고 중국의 조선족은 자기의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풍부히 하고 발전시켜 왔다. 또한 연변은 조선족자치주로서 중국공산당의 현명한 민족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각 민족은 모두 자기 언어 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를 가지며 자기의 풍속과 습관을 보존 또는 개혁할 자유를 가진다.》는 중국공산당의 올바른 민족정책의 고무 하에 중국조선족은 일찍부터 자기의 독창적인 민족교육체계를 세우고 조선민족의 문자로 교재를 편찬하고 조선민족의 언어로 교수할 수 있었으며 자기의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여 연변대학은 중국 국내에서 조선-한국학연구를 가장 일찍 시작한 대학교로 되였다. 설립초기부터 연변대학교는 중국 국내의 우수한 조선족 문인들과 지식인들을 집결하여 교수진과 연구진을 무어 조선-한국학 관련 교수와 연구를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력사, 철학, 언어, 문학, 교육,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한국학을 중국에 전파,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오봉협, 주홍성, 박문일, 박진석, 박창욱, 방학봉, 정판룡, 권철, 최윤갑, 강맹산, 리득춘 등 학자들은 일찍 1950년대 초반부터 력사, 철학, 문학, 언어학 등 분야에서 조선-한국학연구의 총체적인 기틀을 다지는데 진력했다. 그들은《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과 같은 정치운동의 엄혹한 시련을 이겨내면서 조선-한국학 관련 학과를 개설하고 교과서를 편찬하였으며 연구소를 설립했다.     1978년부터는 조문학과에서 석, 박사 과정 대학원생을 모집하고 조선문제연구소, 조선언어문학연구소, 민족연구소, 고적연구소 등 연구소들을 설립하였으며 조선어의 규범화, 조선민족의 문학과 예술, 조선족의 민속, 고구려, 발해의 력사와 문화, 중국 경내 독립투쟁사 등 여러 면에 걸쳐 연구를 하였으며《조선족간사》,《조선고전문학사》 등 저작들을 출판하므로서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이룩했다.          현재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 학과에는 박사점 1개, 석사점 2개, 연구소(또는 연구센터) 4개가 있다. 지난 20여 년간 각 연구소에서는 도합 20여 차의 대형 국제학술회의를 가졌다. 현재 조선- 한국학 관련 교수와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는 무려 100여 명이나 된다. 20여 년간 연변대학교에서 출판한 조선-한국학 관련 학술저서는 200여권, 발표한 론문은 800여 편이다. 그중 국외에서 발표된 저서만 해도 100권에 달한다. 대체로 1980년대 이후 조선-한국학 영역에서 해마다 100여 편의 론문과 10여 권의 저서들이 나온 셈이다.     조선-한국학연구의 질과 심도면에서도 큰 제고를 가져왔다. 우선 연구의 범위에 있어서 초창기에 언어문학이나 력사에 국한되던 데로부터 점차 철학, 경제, 정치, 교육, 사회, 민속, 여성학에 이르기까지 넓혀졌다. 또한 여러 분야에 걸치는 중조일 관계사, 비교연구에서도 적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다.      2. 조선-한국학 각 학과에서의 성과     조선어,한국어연구는 대체로 1970년대 말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9년《연변조선어학회》를 출범시켰고 1981년《중국조선어학회》를 설립했다. 1981년 연변대학교에《조선언어문학연구소》를 설립한 후 동북3성과 그 산하의 여러 현,시에서도《조선어학회》와《소학교 중학교 조선어문교수 연구회》를 설립해 조선어(한국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1981년부터 2005년까지 연변대학교에서 나온 조선어학 관련 박사학위논문들은 《함경도방언음조에대한연구》(전학석1991),《조선어접미사에대한거시적연구》(강은국1991),《조선어종결사에대한거시적연구》(렴광호1995),《15세기조선어규정어결합구조에대한연구>(강보유1995),《조선어어의(語意)연구》(류은종1997),《조선어문체론수단과수법의력사적발전》(김기종1997),《조한공간개념표달형식대비연구》(최건1998),《조선운서중에반영된명청음계연구》(김기석1998),《조한수자표시어전환에대한다시각연구》(김종태1998),《남북한언어정책비교연구》(김홍식2000),《조선중세한문번역본의언어사연구》(김영수2001),《조선조운서한자음적전승과정리규범》(이승자2002),《현대한어동사어의조합관계연구》(필옥덕2003),《한국어정도부사에대한연구》(유춘희2005) 등 20 여편이 있고 127편의 석사학위론문이 나왔다.      분야 별로 보면 문법론과 어휘론 관련 론문이 다수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사회언어학, 음운론, 방언학 관련 론문이 일정한 수를 차지한다. 127편 석사학위론문가운데서 언어대비연구가 80편(63%)이다. 연변대학의 최윤갑, 리득춘, 최명식, 김진용, 허동진, 장의원, 전학석, 류은종, 최희수, 유춘희, 김기석, 최건, 김영수 등 언어학 학자들은 2005년까지 사전 70여부, 어음론 3권, 문법론 30여권, 어휘 의미론 20여권, 문체론 10여권, 방언학 10여권, 어학사 20여권, 일반 언어학 5권, 사회언어학 10여권, 조선어규범화 20여권을 출판하였다.     이미 학위를 취득한 조선-한국언어학 박사학위 취득자는 20명이고 석사학위 취득자는 64명이며 재학 중인 박사 대학원생은 18명, 석사 대학원생은 46명이다.     문학의 경우, 중국조선족과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한자(漢字)를 매개로 하는 중일한 언어문학의 밀접한 상호 교류에 착안해 자기의 독특한 연구방향을 확립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한국 한문학 관련 연구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석, 박사학위 제도가 회복되고 자유로운 학술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80년 7월 연변대학교와 북경대학교, 중국사회과학연구원의 학자 교수들을 중심으로《조선문학연구회》가 발족되었고 1982년에 제1기 조선문학 석사학위논문으로 리암의《리규보 시 연구》, 채미화의《박지원 소설의 근대적 요소 연구》가 발표되었다. 1980년대 중기에 와서는 작가, 작품 연구의 범위가 확대되고 그 내용도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이 펴낸《조선고전작가,작품연구》(1985년), 허문섭 교수의《조선문학사》(1986년)는 중국 경내 최초의 조선문학 관련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고 청년학자들을 양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는 일정한 경험과 기초를 쌓게 되었다. 연변대학의 경우, 한국문학연구에 전문 종사하는 학자만 해도 5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한국문학연구영역에서 중국학파를 형성하는데 주축이 되었다.     올해까지 한국문학을 연구해 24명의 학자가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10명이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공부하고 있는 박사연구생은 24명, 석사연구생은 71명이다. 이미 출간된 박사학위 논문들로는 다음과 같다.《조선 중세기 북학파 문학연구》(김병민 1990년),《조선 리조시기 실학파 문학관념 연구》(리암 1991년),《조선 고전소설의 서사 패턴 연구》(김관웅 1991년),《고려문학 미의식 연구》(채미화 1994년),《재만조선인문학연구》(김호웅1996년), 《조선 신화 연구》(허휘훈 1998년), 《최승희 무용예술 연구》(리애순 1999년)《조선조산수문학연구》(최웅권2000년). 특히 서동일의《리덕무 문학연구》는 2003년 중국의 100대 우수 박사학위논문으로 선정됨으로써 연변대학교 한국문학연구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이후 연변대학교 한문학 연구에서는 20여 권의 저작과 2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다. 2002년 연변대학의 조선언어문학학과는 국가급중점학과로 지정되었다.     조선-한국 력사연구는 여전히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의 중심영역으로 되고 있다. 1980년대 초 부터 석사연구생을 모집하였고 1994년에는 박사점을 쟁취하였다.세계사박사학위학과에서는이미 28명의 박사와 120명의 석사를 배양하였는데 이미 출판된 박사학위 논문들로는《7-9세기 당,신라,일본의 정치제도 비교연구》(리종훈 1998),《삼국지、위수(魏書)、고구려전 연구》(박찬규1998),《근대 중조일삼국이 간도조선인에 대한 정책연구》(정신철2003), 《조선반도평화통일문제연구》(맹경의 2001), 《조선과청나라 무역관계연구》(윤영일 2004), 《중일한삼국서학사비교연구》(리 호2004),《10-13세기송、려、일문화교류연구》(리매화2005)등 23편이 있다.석사점과 박사점의 경우, 중일한 언어에 정통한 우세를 가지고 있기에 중일한 삼국 관계사와 비교사 연구에서도 자기의 특유의 우세와 특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박진석, 방학봉, 박창욱, 박문일, 강맹산 등 로학자들은 호태왕비, 고구려사, 발해사, 민족독립운동사, 중조일관계사, 조선반도 통일문제 등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미 출판된 중요한 저서들을 보면: 《조선통사》(박진석 강맹산 1973),《조선사강의》(박진석 강맹산 1983),《리조사화》(박경수 1984), 《신라사화》(강맹산 1985), 《조선간사》(박진석 강맹산 1986), 《고려사화》(리순홍 강맹산 1987》, 《조선중세기사연구》(박진석 강맹산 1988),《조선통사》(강맹산 리춘호 1992),《호태왕비와고대조일관계연구》(박진석 1993),《중조일관계사(상)》(전춘원, 방학봉, 1994), 《중국경내고구려유지와유물연구》(박진석, 1995), 《중국정사중의조선사료(1,2)》(강맹산 류자민 김영국 1996), 《명대중조관계사》(강룡범, 류자민 1999),《종군위안부》(김성호 1999), 《중국고대문화가 조선, 한국과 일본에 대한 영향》(박문일,김구춘 ,2000),《중조일관계사(하)》(방민호 강룡범 2002), 《고구려사연구》(박찬규 2003) 등 이 있다.     박진석 김광수 강맹산등 로학자들을 위수로하는 조선문제연구소는 1978년 성립초기로 부터 학술간물들을 꾸리기 시작했는데《조선문제연구동태(총10기)》,《조선사연구(총7기)》,《조선-한국학론총(총6기)》등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조선사연구성과를 기재하는 학술간물로서 중국의 조선사연구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중한수교이래 조선-한국력사 령역에서는 무게있는 연구저서 50여권을 출판하였고 350여편의 론문들을 국내외 학술간물에 발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조선-한국 력사연구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변대학교 력사학과의 조선-한국사 관련 연구소로는 조선력사연구소, 중조한일비교사연구소, 조선문제연구소, 발해사연구소 등이 있다.   조선-한국 철학에 관한 연구는 1970년대 말까지 거의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1978년 개혁개방 후부터 한국철학연구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79년 10월 연변대학교에서는《동방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선-한국 철학 관련 연구를 하는 학자들을 조직해 정기적인 잡지《동방철학연구》(1979), 《조선연구론총》(1981), 총서《조선-한국학연구》(1997) 등 도서들을 발간하였다. 주칠성교수는 일찍 1979년에《조선봉건사회 말기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라는 론문을 발표했고 그 후에도 한국 실학사상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여 6편의 무게 있는 론문을 발표함으로써 중국 학계의 대표적인 한국실학 관련 연구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1989년에 와서 주홍성, 리홍순, 주칠성 등 학자들은 조선철학발전의 력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조선철학사상사》를 출판함으로써 학계의 공백을 메웠고 이 저서는《중국백과전서》(철학권(2002년)에 실렸다.   중일한 유학사상의 비교연구, 퇴계, 율곡 등 한국유학사상에 관한 연구 등 방면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반창화 교수의《중조일 비교철학 탐구》(1994)와 주칠성 교수의 《중국조선일본 전통철학 비교연구》(1995) 등은 중한 수교 이후 나온  비교적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성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외에도 논문《중조 실학사상 비교》(반창화 1989), 《퇴계, 율곡 철학사상 비교》(서홍위 1990),《유학이 조선에 대한 전파와 영향 및 한국 현대화에 대한 작용》(리돈구 1994), 《유학과 당대한국》(반창화 1997),《조선철학 범주사》(반창화 1998),《주희와 퇴계의 인성론 비교》(리홍군2000),《신라불교의 본토화 연구》(허명철2002),《조선 주자학적 특점》(반창화 2003),《주자와 퇴계, 율곡의 인심도심(人心道心)비교》(이빈2004) 등등 30여 편의 깊이 있는 론문들이 국내외 학술 간물에 발표되여 학계의 중시를 불러 일으켰다. 하여 국제 유학계에서도 연변대학의 조선-한국철학연구는 홀시 못할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84년에는 국가교육부로부터 동방철학사 석사 학위점을 비준 받았고 1996년에는 외국철학 석사 학위점으로 되였는데 2005년까지 도합 62명의 석사 대학원생을 배양하였다. 그중 한국철학 관련 학위 론문만 37편으로 60%이상을 차지한다. 현재 재학중인 조선-한국철학 석사 대학원생은 29명이다.      최근에 와서 중한경제교류가 활성화되고 두만강하류지역의 개발문제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자 조선-한국경제 연구 분야 역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의 경제의 현황 및 발전모델에 대한 소개 및 연구, 중한경제의 상호 보완 관계, 동북아 경제권의 개발 모텔, 그 조건과 전략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중 비교적 돌출한 성과들을 보면 《조선경제사 개론》(백봉남, 리동욱, 1988), 《남조선 십대산업》(백봉남, 1988), 《동북아 금삼각》(최룡학, 박승헌, 1991), 《박정희경제론저선》(김동훈, 최후택, 1994), 《한국경제》(백봉남, 1994), 《라진, 선봉자유경제무역구 무역투자의 가행성법률에 대한탐색》(박흥진, 송병용, 1996), 《동북아 구역경제》(최룡학, 박승헌, 1997),《조선경제》(림금숙, 2000), 《한조 경제교류의 현황과 전망》(박승헌, 2003), 《중조 경제무역 관계》(림금숙2006)등 저서들이다.     1986년부터는 조선-한국경제 석사 연구생을 모집하였는데 이미 9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 재학 중인 대학원생은 29명이다. 석사지도교수 림금숙교수는 조선-한국경제 전문가로서 중한 수교 이후 조선-한국경제에 관한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는 중한수교이래《조선과 한국의 경제협력》(1997),《한국경제의 결구성 모순 및 기업결구 정리》(1999),《IMF후 한국금융업의 조정》(2000),《조선 경제체제 개혁》(2001),《조선 개체경제의 발전 및 금후 방향》(2002),《조선 대외개방의“삼면으로 이끄는” 발전전략》(2003),《중조 변경무역》(2004) 등 20여 편의 론문과 2권의 저서를 발표하였다.      이상의 학과 외에도 동북아정치, 교육, 법률, 문화체육 등 영역에서 조선-한국학 방면으로 적지 않은 연구 성과들을 보였다.       3 . 국내외 한국학 관련 교류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의 발전은 국내외, 특히는 한반도와의 교류를 통해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연변대학교는 건교 초기 특수한 정치관계와 따뜻한 동포애에서 비롯된 김일성종합대학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연변대학교에 교과서를 제공했고 우수한 교수를 파견했으며 교수과정의 설정 등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0년대 말부터 연변대학교는 한국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1992년 중한 국교정상화는 중국 경내에 전례 없는 조선 -한국학 붐을 일으켰다. 따라서 연변대학교의 조선-한국학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국과의 학술교류는 외부와의 오랜 단절에서 비롯된 공백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극복하고 학문연구의 범위와 시야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은 계기와 동력으로 되었다. 연변대학교는 한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조선-한국학연구의 발전과정을 점검하고 진맥하여 새로운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국 국내에서 최고의 연구진과 연구실적을 자랑하는 우수한 연구기관들은 지난 10여 년간 혹은 개별 학자의 방문 형식으로, 혹은 자매결연의 형식으로 연변대학교 한국학 관련 학자들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진행하여 왔고 연변대학교의 젊은 학자들을 대학과 연구기관에 받아 가르쳐 주면서 중국 경내 한국학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중국 내에서 조선-한국 언어문학학과를 개설한 대학교로는 연변대학교, 북경대학교, 중앙민족대학교 등 3개소의 대학교밖에 없었지만 현재 중국의 연해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내륙지역까지 무려 50여개소의 대학교들에 한국언어문학학과와 연구기관들이 개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주목할 부분은 여기의 약 80%의 중견교수, 중견연구원들이 모두 연변대학교 출신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연변대학교가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연구의 전파와 발전에 준 홀시할 수 없는 기여를 말해준다.     연변대학교에서 조선-한국학분야에 경주한 다양한 노력, 이를테면 한국학에 관련되는 다양한 학과의 개설, 한국학 관련 인재 육성, 자료정보센터의 건설, 한국학 관련 프로젝트의 추진 등은 오늘날 중국 경내에서 조선족의 위상을 확립하고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나아가 중국 경내에서 조선-한국학의 전파와 진흥을 가져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최근 몇 년간 연변대학교의 한국학연구는 비단 학술연구, 인재양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교류 면에서도 큰 진전을 가져 왔으며 연변대학교의 위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시작하였다. 연변대학교는 비단 한국의 여러 대학교 연구기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여러 대학교 연구기관들과도 좋은 관계를 건립하였고 오래 동안 갈라진 남북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데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89년부터 연변대학교의 주최로 조선-한국학 국제학술토론회를 20여차 개최하였는데 한국학연구센터에서 주최한 회의만 하여도 국제학술회의 8차, 국내학술회의 10차이며 매번 참석 인수는 80-100명에 달한다. 발표 논문도 도합 500여 편에 달한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원과 여성연구센터에서는 해마다 조선력사연구소 전문가들과 조선 김일성종합대학교 학자들을 초청해 학술교류를 진행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한국의 학자들을 련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론문을 발표하고 학술논문집을 출판하였다.     조선-한국학연구센터는 전임 연변대학교 부총장 고 정판룡 교수의 령솔 하에 일찍 19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지금까지 17년간《조선학연구1-4》(조문판),《조선-한국학총서1-6》(중국어판) 등 40여 권의 학술저서를 출판하였고 1999년에는《간명한국백과전서》를 출판하여 전 중국에 널리 전파하였다. 이는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적인 연구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 많은 중, 청년 학자들이 원로 학자들의 계주봉을 이어받아 한국학 관련 연구에 종사하고 있으며 동북아연구원, 민족연구원, 중조한일비교문화연구센터, 동북아정치문화연구소, 조선문제연구소, 조선력사연구소, 중조한일비교사연구소, 동방철학연구소, 언어연구소, 조선문학연구소, 녀성연구중심 등 연구기관들이 한국학연구중심과 긴밀한 연구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알찬 영구성과들을 거두고 있다     4. 한국학연구에서의 우리의 자세     현재 연변대학교는 언어문학, 력사, 철학, 경제 등 분야를 중심으로, 학부생 과정으로부터 석사과정,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인재양성 시스템과 전문연구기관을 갖추고 있기에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연구의 중요한 력량으로 되고 있다.     연변대학교에서 조선-한국학연구는 단순히 인문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의 의미보다 훨씬 더 큰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한국학연구는 연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선두자로 될 뿐만 아니라 인재양성, 학술연구 등 방면에서 취득한 성과로 하여 대학교의 전반적인 학술수준을 향상시키고 대외적인 인지도를 향상시킴으로써 기타 학과들의 발전에 본보기로 되고 또 발전 패턴을 제공해주고 있다.      혈연적, 지연적으로 한반도와의 밀접한 관련은 연변대학교의 특점인 동시에 우세이다. 동북아시대가 열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조선-한국학연구로 학문적 특색을 살리고 그 우세를 확립하는 것은 연변대학교의 내외적 여건에 부합되는 전략으로 되고 있다.     연변대학교의 사명으로 보나 민족지성인의 량심으로 보나 한국학연구를 통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중한문화교류에 도움을 주는 것은 모두 의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저의 연변대학교는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100개 대학교로 선정되었고 민족적 특색과 지역적 특색이 선명한 우수한 종합대학교로 건설하기에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총적으로 연변대학의 한국학연구 현황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는 아직 몇 가지 주의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조선-한국학연구의 총체적인 기획이 미비하고 자발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시장경제도 일정한 국가의 통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한 학교의 학술연구도 일정한 기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조선-한국학은 연변대학으로 보면 교학, 과학연구, 교원양성 등 여러 문제와 관련되며 또 조선학 한국학 연구 자체로 보더러도 조선, 한국 및 기타 지역의 연구 동태를 부단히 장악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연구과제의 선택, 경비조달, 인원배치 등에서 사전의 주밀한 계획과 예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매개 연구영역에 있어서도 자기의 돌파중점과 도달목표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이나 한국 및 중국 경내 기타 대학교들의 연구동태를 보아 우리가 무엇을 중점적으로 해야 하는가?  당전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등이다.     인재양성 면에서도 사전 기획이 없이 자연발전에 맡겨 두니 단층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한때 흥성하던 학과가 지금은 모두 노쇠하여 계승자가 없어 비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세라고 인정하는 학과에 언제나 일정한 후비대오가 보존되게끔 계획이 있게 후진을 육성하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 연구는 반드시 중국 특색이 있어야 한다. 조선-한국학은 조선이나 한국으로 보면 국학이다.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인력과 재력이 투입된다. 그러나 우리로 보면 조선-한국학은 외국학이기에 많은 재력과 인력이 투입될 수 없다. 즉 한국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조선이나 한국에 비해 열세에 처하고 있는 것만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기타 대학교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에게는 우세가 있다. 그중 하나는 비록 외국학이지만 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같은 민족이고 또 연변대학교는 조선민족대학이기 때문에 조선, 한국에 비교적 익숙하고 학과 설치나 연구기구 설치 등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객관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고대사연구, 민족독립운동사연구, 동북아 각국 관계사연구, 비교연구 등에서 우리에게는 큰 우세가 있다.     그리고 지금 조선반도는 오래 동안 남북으로 분열되어 제각기 자기중심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는 두 쪽의 우점을 흡수하여 자기를 충실히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기 어려운 과제를 우리가 할 수 있으며 남북 학자들 간의 교량적 역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연구 립각점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남북은 장기간의 정치, 군사대립으로 하여 아직도 많은 면에서 긴장이 풀려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학술연구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 즉 어느 쪽에서나 객관적이며 공정한 립장에서 문제를 대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중국 조선족학자들은 그들과 다른 립장에 서 있으므로 객관적으로 문제를 보고 연구하는데 일정한 우월성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연변대학교, 중앙민족대학교, 북경대학교 등 몇 개의 대학들에서, 그리고 많이는 조선족 학자들 속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일부 한족학자들도 있었지만 그 수가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형세가 달라졌다. 50여개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설치되고 중점대학들에 한국학연구센터가 성립되었으며 수많은 한족 청년학자 및 학생들이 한국이나 조선에 나가 조선-한국학을 배우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며 조선-한국학연구의 새 고조가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태까지 중국에서의 조선-한국학연구의 중심이며 한국학연구 인재의 육성기지로 자처하던 우리로 놓고 보면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중점대학교들의 한국학연구는 그 학교 자체의 자질 우세와 한국 등 나라들의 중시까지 받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우리를 초과하는 일부 연구 성과들도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도전에 대응하자면 우리만의 아닌 각 민족학자들과의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공동 연구를 하며 호상 교류하는 학술 세미나를 많이 가짐으로써 여러 민족으로 조성된 진정한 중국의 조선-한국학연구 대오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50여 년간 연변대학교에서 배출한 우수한 학자들이 취득한 성과는 바로 조선-한국학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우세를 최대한 발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과 한반도는 동일한 문화권에 있으므로 비슷한 가치관, 륜리관과 문화리념을 가지고 있다. 근년에 와서는 중국에서의 “한류(韓流)”와 한국에서의 “한풍(漢風)”으로 두 나라 인민들의 문화생활에 주는 영향이 크다. 연변대학교는 지금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와 도전에 직면해있다. 천여 개 되는 중국의 대학교 중에서 평범한 대학으로 남느냐 아니면 자체적인 특성과 우세를 갖춘, 민족적 특색이 선명한 명문대학으로 발전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조선-한국학을 비롯한 연변대학교의 우세를 십분 발휘할 필요성이 한결 분명해진다.                                                                  (조선-한국학총서 6  흑룡강인민출판사  2006. 12)                                                                               
14    전화상담에서 본 조선족 혼인가정의 위기현상 댓글:  조회:5645  추천:13  2011-07-30
                                         전화상담에서 본                            조선족 혼인가정의 위기현상         개혁개방은 중국사회에 전례 없는 변혁을 가져왔다. 이러한 변혁은 경제생활, 정치생활 령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가치층면에서도 뚜렷이 보여 지는바 그중 혼인가정 관념의 변화는 특히 사람들에게 주의를 일으키는 문제로 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가장 큰 영향의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념상에서 자아를 의식하도록 한 것이며 연애, 혼인 가정 중에서 자아의 가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불가피적으로 전통 관념과 현대의식지간의 격렬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전통사회의 혼인은 경제적, 정치적, 종족적, 가족적 이해관계의 각종 쇠사슬에 억매여 있는 것이라면 현대혼인은 남녀쌍방이 자기의 리상에 따라 자신의 발전을 추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장악함으로써 비교적 완미한 인생을 가꾸어 보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혼인과 가정이 오직 생아육녀(生儿育女)의 “합작사”거나 생계를 유지하는 “경제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남녀쌍방이 사상, 문화와 정감면에서 융합을 가져오고 심리상, 감정상 공명을 찾으며 공동한 행복과 동등한 권리를 추구하고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장악하려 하는 것이다. 즉 가정을 본위로 하는 전통적 혼인관은 개인생활의 행복을 본위로 하는 독립자주의 혼인관으로 대체되었고 자발적인 혼인이 자각적인 혼인으로 전변되었으며 정감적인 요구와 만족이 혼인의 주요요소로 되였다. 이는 오늘날 혼인가정질량의 새로운 갱신을 보여주고 생존방식과 생활체계의 립체적 변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류사회의 하나의 발전과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혁은 배우자선택표준, 결혼동기, 성 관념, 생육관, 리혼관 등 면에서 모두 현저한 변화를 일으켰는바 배우자선택 면에서 보아도 80년대 이전의 가정출신, 정치조건, 경제토대 등 외재적 선택을 위주로 하던데로 부터 현시대에 와서는 개인품덕, 재간, 능력, 성격 등 내재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는 선택방향으로 전이되어 애정을 기초로 하는 혼인이 기본추세를 이루고 있다.      성 관념에서 보면 80년대 이전에 실행된 육체금욕주의, 정신금욕주의는 이미 지나간 일로 되고 성문제가 사회여론에 공개적으로 나타남으로서 사람들의 성 관념도 개방 되였다. 하여 성지식의 전파, 성문제의 토론은 이미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일로 되고 있다. 혼인가정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은 물질생활과 정신생활 외에 성생활도 없어서는 안 될 인간의 기본 욕구임을 인식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의 혼인가정문제를 살펴볼 때 상술한바와 같이 시대에 발맞추는 진보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또한 홀시할 수 없는 위기현상도 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연변대학민족교육원에서 운영하고 있는《생명의 전화》는 개통되여 10여년래 사회 각 분야에서 들어오는 1000여 통의 상담전화를 받았다. 그 사례들을 통계해보니 혼인가정문제와 성문제가 58%로 반수이상을 차지했는데 그중에서도 애인문제(혹은 제3자문제)가 76%, 성문제가 24%를 차지하였다. 아래에 몇 가지로 나누어 보자.      一. 애인(情夫,情婦)현상      이 문제는 전화상담에서 가장 많이 제기된 문제로서 그것은 바로 일부사람들이 소위 부르짖는 “성 해방”, “성 자유”, “자유적 생활”, “사생활”추구의 직접적인 산물인 것이다. 개방 후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불어 온 이런 그릇된 사조는 일부 부패 타락한 인간들에 의해 모방되고 만연되어 아주 빠른 시기 내에 각양각색의 애인관계가 산생 되였다. 미혼자와 기혼자지간, 기혼자와 기혼자지간, 두 미혼자가 혼인을 기초로 하지 않는 혼외관계 등등은 순 감정의 수요, 혹은 물질욕구의 만족, 혹은 새것을 탐내고 낡은 것을 싫어하는 사상의 반영으로서 어떤 것은 가정을 파괴했고 어떤 것은 가정을 유지하면서, 공개적 혹은 은폐적으로, 장기적 혹은 잠시적으로, 정신적 정감에 치우치거나 단순 이성적 만족에 치우치는 등 각종각양의 혼외련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화상담에서 제기된 애인현상을 보면 대개 남40-50대, 녀30-40대가 가장 많았다. (상담사례들은 지면으로 공개 못함) 상담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런 혼외 량성관계나 외도행위는 혼인제도와 가정륜리도덕에 어긋날 뿐 만 아니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엄중히 파괴하고 본처나 본남편들께 심리고통을 줌으로서 자타의 생활과 사업, 나아가서는 사회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우리사회 혼인가정에서의 한개 위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이 오늘날 사회에 스스럼없이 만연되고 발전해 가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고 보는데 그중에서도 사회법제제도의 불 엄밀성, 치안관리의 방임, 돈벌이를 위한 유흥업체들과 란잡한 서비스장소 등이 객관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을 뿐 만 아니라 더욱이는 사람들의 타락되고 모호한 인식에도 그 주관원인이 있다고 본다.      애정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특유하고 신성한 정감세계로서 숭고한 정신생활이며 순결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렬거한 그런 사람들은 마치 남녀사랑은 개인일이니 그 어떤 제약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사실상 “사생활”이란 오직 상대적 함의를 가지는바 그것은 사회와 인간관계를 리탈 할 수 없으므로 결국 절대적 자유는 없는 것이다. 남녀가 일단 가정을 이루었다면 그 시각부터 쌍방은 곧 가정과 부모 및 자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애인현상은 바로 이런 책임을 무시하고 개인의 향락만 추구하는 극단적 자사자리 표현이며 가정을 파괴하는 비 도덕적 행위로서 응당 사회여론의 엄연한 질책과 법률의 무정한 제재를 받아야한다고 본다.      애인현상의 산생원인을 보면 다음의 몇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1) 시대의 발전에 따라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제고 된데서 청소년들의 성 성숙 년령이 앞당겨지고 인간의 수명이 크게 연장된데서 평생의 단일한 이성교제에 불만족을 느끼군 한다. 녀성들이 성에 관한 가치관념도 변화하여 절대 성적공구로 되지 않으려 하며 성과 사랑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기에 “사랑을 위한 성행위는 비도덕적이 아니다”라고 여긴다.      (2) 독신자녀정책으로 하여 생식문화가 다만 자녀번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 쾌락의 목적에도 있다는 관념이 날로 많은 사람들께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부 부패한 상층인물들과 돈을 물쓰듯 하는 일부 계층의 소수 사람들의 깨끗하지 못한 사생활은 주위사람들께 시범작용을 하였고 유흥업체들의 돈벌이 경쟁은 혼외련의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3) 력사적으로 조성되였던 일부사람들의 불행한 혼인은 오늘날 유족한 환경에서 보상받아 보려는 심리가 생기고 연애 없이 결혼한 사람들은 “보충(補課)”해 보려는 욕망이 생기며 “애정 없는 혼인”은 “혼인 없는 애정”을 찾으려 한다.      (4) 리혼하고 다시 가정을 이룸은 그 대가가 너무 크지만 정부를 두면 혼인의 부족 점을 미봉하면서도 가정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큰 모험이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경제수입의 증가, 주택조건의 개선, 소위 “은사권”의 불 침범 등은 혼외련 존재의 환경을 지어준다.      (5) 심리적으로 볼 때 성애는 불온정한 것으로서 결혼하였다 하여 “예쁜 것을 좋아하고” “이성이 서로 흡인”하는 규률이 소실될 수 없으며 또 동일한 성별이라 하여도 성적인 흡인력과 성욕, 성관념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부부사이 성불화로 하여 깨여진 성애는 왕왕 제3자를 찾아 만족해 보려는 욕구가 생기게 된다.      (6) 해외돈벌이 등으로 인한 부처간의 장기 분거는 제3자 차입의 공간을 만들어 주며 또 사회진출로 인한 인구류동 반경이 커가기에 이성접촉의 기회도 많아지므로 각종현상의 애인, 특히 외지에서의 “림시가족”, “현지처” 등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을 지어준다.      (7) 색정광고나 황색잡지들의 범람은 미성년들에게 저급적 취미를 가해주고 대증매체의 괴상한 보도나 지나친 과장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착오적인 영향을 준다.      二. “성 해방”현상      소위 “성 해방”이란 개념은 최초 구라파 문예부흥시기 인문주의자들이 봉건적 신학과 허위적인 금욕주의를 반대하고 인성을 주장하면서 성욕도 인간의 기타 욕망과 마찬가지로 만족을 가져야하지 압제해서는 안 된다는 론리하에 량성관계를 봉건종법의 쇠사슬에서 해방해 내려는 시도로 그 당시에는 비교적 진보적인 의의를 띠였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확립과 서방세계의 날로 엄중해지는 혼인위기에 따라 “성 해방” 론자들은 인성과 그의 적극적 의의만 주장하고 개인욕구의 만족과 자유만을 추구하면서 애정, 혼인의 엄숙한 륜리도덕성을 부정하고 이로 인해 산생되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회피한 것이다.      인류의 성행위는 동물처럼 그렇게 단순히 성숙만 되면 즉시 성욕이 산생되어 급급히 이성과의 결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성행위 본신은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회의 여러 가지 제약을 받으며 이런 제약 속의 성 행위 방식은 곧 사회의 도덕, 전통과 풍속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성행위를 사적인 일로 간주하고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는 륜리도덕은 물론 인성까지 잃어버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화상담사례는 지면에서 생략함)      그 외에도 안마방과 다방에서의 반 라체 아가씨들과의 란잡한 성관계, 중학교 녀학생들의 부끄럼 없는 류산행위, 대학생들의 미혼동거 후 결국 갈라지게 되여 죽는다 산다하는 등등 날로 열어지는 정조관념과 인간 최저의 도덕마저 무시하고 타락해 가는 어두운 구석의 이런 추잡한 성 행위는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의 심신건강을 해치고 순진한 그들의 마음에 먹칠하여 인생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능히 용기를 내여 심리자문 전화를 걸어오거나 유관 부분에 반영하는 당사인들은 그래도 도움을 받아 생의 희망을 찾고 방법을 대여 역경 속에서 뛰쳐나 다시금 새 생활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런 용기가 없는 피해자들은 그 몸서리치는 나날을 그냥 그렇게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매번 이런 성 피해의 전화를 받을 때면 우리 상담원들은 심정이 침울해지고 가슴 아프며 성 혼란이 가져다주는 우리사회 구석구석의 암흑면으로 하여 불안감을 느끼군 한다.      三. 리혼과 출국가정문제      개혁개방 전 우리나라는 줄곧 세계상에서 리혼률이 가장 낮은 국가의 하나였다. 장시기 동안 사람들은 리혼이라면 불문곡직하고 나쁜 일로만 생각해 왔기에 녀성들은 체면 때문에, 여론 때문에 또는 아이 때문에 죽어가는 혼인의 고통과 시달림 속에서도 “가정”이라는 허울을 부등켜 안고 리혼의 방식으로 새로운 행복을 쟁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사회의 변화와 녀성들의 자아의식의 제고에 따라 그들도 자신의 인격과 가치를 인식하게 되였고 모든 것에 순응하는 가부장적 의식에서 벗어나 과감히 새생활을 추구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현재 리혼소송안건 중 70%가 녀성이 원고로 된 것이며 재혼한 녀성수도 남성보다 퍽 많다고 한다. 사회는 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부부의 감정불화에서 리혼으로 혼인을 결속하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임을 인정하게 되였다.      그러나 리혼과 재혼이 사회에 모두 리로운 것은 아니다. 리혼, 재혼으로 인기되는 많은 문제들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자녀와 친속, 그리고 주위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문제로서 홀시할 수 없는 위기현상들을 나타내고 있다. (상담사례를 지면에 생략함)      이상의 사실들에서 알 수 있는바 리혼, 재혼 후 나타나는 각가지 모순, 출국바람에 가짜리혼이 진짜리혼으로 되여 파괴된 가정, 리혼 후 자녀와 생리별하여 고통에 모대기는 애아버지, 돈벌이에 가정까지 탕진되여 역경 속에서 헤매야만 하는 자녀들 …… 리혼바람 출국바람은 오늘날 우리조선족사회에 실로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외화를 벌어온다는 그 하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그야말로 홀시할 수 없는 위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정당한 리혼이던 비 정당한 리혼이던 그 결과가 빚어지는 후과는 복잡 다단한 것으로서 유관부분에서는 리혼수속시 응당 새로운 규정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리혼 분급제 같은 것이다. 그 내용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1) 자녀가 미성년인 부부는 리혼신청시 반드시 학습반에 참가하여 리혼이 자녀에게 주는 피해를 똑똑히 인식하게 해야 한다. (2) 리혼부부는 자녀의 전도를 안배할 계획서를 작성하여 법적공증을 받아야 한다. (3) 자녀가 있는 부부는 응당 가배의 신중성을 가지고 될 수록 아이가 큰 다음 갈라지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등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법률제도와 정책은 녀성의 합법적 권리와 녀성의 발전을 보증해 주고 있으며 사회변혁 중에 나타난 문제들은 부단히 연구되고 해결되며 완선화 되고 있다. 녀성과 남성은 공동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바 녀성이 전통혼인의 속박에서 벗어나 신녀성의 형상을 수립할 때 남성 역시 전통관념에 대해 재 사고하고 조정하며 함께 현대적 사유를 받아들여야하는 것이다. 즉 사회의 변혁과 가정의 변혁 중 녀성의 각성과 발전은 남성들의 승인과 존중을 받으며 부부는 서로 접수하고 서로 융합되는 과정 중에서 함께 현대형의 가정으로 전변시켜 가는 것이다. 이것이 당면 혼인가정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자세가 아닌가 싶다.                                                          (2008년 8월 연변대학여성연구중심 학술회에서 발표)  
13    80후세대 출산관념의 변화에 관하여 댓글:  조회:4745  추천:13  2011-07-26
     80후세대 출산관념의 변화에 관하여              --- 중앙인민방송국《여성시대프로》인터뷰 (7.15) 기자: 아이를 낳고 자식을 키우는것은 인생의 희사입니다. 그러나 지난세기 80년대에 출생한 젊은이들이 결혼생육년령에 들어서면서부터 새로운 생육고봉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분투중에 있는 80년대에 출생한 부부들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생육원가가 자신들의 사업과 전도에 영향줄 뿐더러 앞으로의 아이의 인생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 오늘 시간에는 80년대후에 출생한 부부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 —생육에 대해 얘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일부 젊은이들 의 생각부터 들어보겠습니다. 김1: 저는 올해 27살입니다. 여자친구와 사귄지는 2년정도 되는데요. 래년쯤 결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결혼후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대도시에 살아남을려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집도 사야 되고 주위친구들한테서 들은 얘기인데요. 결혼을 할려고 해도 돈이 엄청 든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남자이다보니 부담이 좀 큽니다. 그리고 남자면 사업에서 일정한 성과도 이루어야 하는 데 , 글쎄요. 아이가 있으면 사는게 팍팍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둘만 사는것도 사실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김2: 임신한지 3개월 반정도 된 임신부입니다. 지난해 10월에 결혼을 했거든요. 그런데 생 활원가와 양육원가를 생각하니 웬지 부담스러워 바로 아기를 갖는것이 결코 옳은 선택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는 낳기만 하면 제절로 자란다고 하지만 요즘처럼  유치원에 보내기도 힘든 세월엔 어른들의 말씀도 꼭 일리는 있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쇼핑하러 나가 보면 아이들의 옷이 어른들의 옷보다 오히려 더 비쌉니다. 아이와 관련된 물건이면 얼마나 비싼지, 그래서 남편과도 구경 아이를 낳는것이 맞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 나눠본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은 집에서 외동아들이거든요. 그래서  시부모님들이 저희보다 오히려 아기를 더 바라는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임신전 고민이  요즘엔 오히려 행복한 고민으로 바뀌였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며칠전 병원으로 검사받으러 가서 아기사진도 보고 하니 이젠 실감이 납니다. 좀 더 빨리 임신했더라면 이런 행복을 더 빨리 느낄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검사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아이를 위하는것이라고 생각하니 아깝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 겠다 는 동력도 생기는것 같습니다. 저희 또래 특히 80년대이후에 태여난 사람들은 흔히 80后라고 불리우는데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기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던데요. 제가 보기엔 낳아야 된다고 봅니다. 기자: 아이는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치렬한 경쟁속에서 자신의 설 자리조차 찾기 힘든 세월에 젊은이들은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가정 즉 팅크가정을 유지해 나가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있는 본 방송국의 선배님을 모시고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손: 아이는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해 가는 뉴대로서 없어서는 안될 구성부분이라고 봅니다.  저는 아들 둘이 있는데요. 큰 애는 13살. 둘째 애는 11살입니다. 여자아이도 아니고 남자아이 둘이여서 키우는데 힘이 배로 듭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팅크가정을 꾸려가길 바란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요. 사실 저 역시 젊었을 때엔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적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여자이니 좀 더 멋도 부리고 싶었고 또 친구사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니 아이를 낳으면 사업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을 해서 주위 친구들에 비해 애를 좀 늦게 낳은 편인데 지금에 와서 키울려니 힘들때가 많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듯이 가끔은 후회될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하루하루  커가는 아들들을 보면 행복합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무슨 일이든 후회가 되는지 않 되는지도 해봐야 알수 있다. 때문에 후회가 되더라도 아이는 낳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낳고보면 그것이 어디까지나 잠시적인 후회임을 알게 될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가진게 아무도 없고 이룬게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애를 키우겠냐고도 하던데요. 좀   더 아껴쓰고 착실히 살림을 해가노라면 아이 한명쯤은 변변히 키울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기자: 물가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아이 하나 키우는 비용도 날로 높아만 갑니다. 특히 공공봉사자원이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생육원가는 해마다 올라가는 추세입니다. 게다가 생육고봉에 태여난 아이들은《태여나서부터 줄을 서야 하는》운명에 처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그리고 취업, 결혼, 지어 양로 등 일련의 사회문제는 아이를 낳을까 말까 고민해야 하는 젊은 부부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죠. 일전에 《청년연구》에서   란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보고서에는 상해시 서회구를 전형으로 상해에서 18세까지 아 이 하나 키우는데 드는 비용을 조사했는데요. 그럼 아래에 그 수치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임신기간 비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산전엔 진단검사를 13-15차정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은 1000원정도 입니 다. 다음 9개월정도 영양품을 먹게 되는데 거기에 3000원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사방지옷 400원, 영아용품 3000원, 임산부 양성비용1000원 , 기타 3100원까지 합하면     임신기간에 1만 1500원정도의 돈이 들게 된다고 합니다.    다음 출산때에 드는 비용인데요. 입원비를 하루 50원으로 계산할때 8일로 계산하면 400 원정도가 듭니다, 그리고 순산이면 2000원정도입니다. 거기에 기타 비용까지 합하면  2700원정도가 든다고 볼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출산후부터 유치원에 가기까지 비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보모고용기간을  3년으로 볼때 한달에 600원 으로 계산하면 도합 2만 1600원이 듭니다. 그리고 기저귀 6 개월치 1800원, 분유, 영양품, 유아도서, 신체검사, 진료비 등을 합치면  4만 5100원정도의 비용을 들게 됩니다.    다음 유치원비용을 보면 학비에 식사비용. 그리고 기타 도서, 완구, 만화영화값을 합치면 도합 6만 5700원정도의 돈이 든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소학교단계에 드는 비용에 대해 봅시다. 소학교단계에서 드는 비용은 주로 학교선택비, 학잡비, 책값, 학원비, 식사비용, 교통비, 위생보건비, 사회실천활동비, 특장보도반 등으로 나눌수 있는데요  6년에 도합 10만 3780원정도의 돈이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단계에서는 학교선택비, 학비, 학잡비, 책값, 보충수업 혹은 가정교원고용비, 식사비, 위생보건비, 사회실천활동비, 교복, 복장(교복외), 학습용품, 용돈과 기타 지출 등을 합치면 6년간 16만 6154원정도의 돈이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단계는 학비, 학잡비, 책값, 용돈, 관광, 실습비용, 식사비 등을 합쳐  4년에  도합 9만 5000원정도의 비용이 들수 있다고 합니다.     이상 각 단계의 비용을 합쳐보면 약 49만원 정도의 비용이 듭니다.     말 그대로 어머어마한 비용이긴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인 부분만 고려해서 아이  낳기를 거부한다는건 구경 바람직한 일인지 …네, 연변대학 여성연구중심 강순화선생님을 모시고 여성문제 전문가로서의 그분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조언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순화:     80년대 이후, 시장경제가 몰고 오는 물질의욕의 증장, 가치관념의 변화와 생활방식의 개변에 따라 사람들은 경제적 지위, 사회적 지위를 따지게 되며 젊은이들의 자아가치 실현욕구는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多子多福》하다거나《후대잇는다》는 등의 전통적 생육관념은 이미 소실되고 새로운 생육관이 젊은세대들 속에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들은 자기 세대의 성공과 향락을 첫 자리에 놓고 아이를 낳지 않거나 혹은 낳아도 하나이상 더 키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라도 잘 키우면서 자기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가장 리상적이라는 자기중심의 관념 때문이지요. 최근에는 아예 생육을 거부하는 소위 팅크가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의 독신자녀세대는 생육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60-70년대까지 만도 우리 조선족의 출산률은 그래도 비교적 높았습니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자식 여럿을 키워온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 이후는 이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생육거부 사상은 도시로부터 농촌에까지 감염되고 있어 우리 조선족인구는 이미 90년대 초부터 20여년 간 련속 미누스장성 상태입니다. 현재 조선족 집거구인 연변만 보아도 조선족인구는 전 자치주 인구의 36.8%밖에 안됩니다. 조선족 인구가 이 상태로 계속 내려간다면 멀지 않아 20%이하로 내려가 중국의 유일한《조선족자치주》란 의미도 상실하지 않겠는가가 우려되는 것입니다.    한 에서 보면 1626세대중 두번째 아이를 낳겠다는 가정이 겨우 41세대로 2.52%밖에 안되며 121세대가 돈을 주면 두번째 아이를 낳겠다고 표시했는데 이 역시 7.4%밖에 안됩니다. 그외 90%이상 가정에서 남자애건 녀자애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해도 두번째 아이는 절대 낳지 않겠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그 리유라면 경제가 곤난하고 생활수준이 높지 못함이 45.5%, 학교 교육비용이 높아 감당못해 낳지 못함이 35.6%를 차지하였습니다. 즉 총적으로 경제적 원인이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에서도 젊은부부들이 말하다시피 집도사야하고 사업에서 성과도 내야하니 아이가 있은 후의 생활원가와 양육원가를 생각하면 부담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청년연구》에서 상해시의 양육비용을 조사했다고 하는데 제가 생각하건대 상해같은 대도시의 양육비용과 기타 중소도시의 양육비용은 그 차이가 있지 않을가 봅니다. 또한 그 비용대로 계산해 본다하여도 한 아이가 대학까지 졸업하고 취직하여 돈을 벌 때가 된다면 늦게 25세까지를 예산해 보더라도 49만이나 50만의 돈은 결국 월 평균으로 따지면 1600원좌우 밖에 되지 않으니 젊은부부가 열심히 일한다면 이만한 경제는 능히 담당할수 있지 않을가도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지혜롭게 살림을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순 경제를 따지면 이러저러하다고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선에서도 말하다시피 아이는 가정을 유지하는 사랑의 뉴대이고 부부를 행복하게 하는《금쪽》같은 존재입니다. 옛날부터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아이들만 있으면 웃음이 넘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은 젊어서는 부부만이면 다 될듯 하지만 로년에 들어서면 자식이 없는 분들만큼 처량한 처지가 없습니다. 지금 선진국에서도 많은 독거로인들이 아파트 빈 집에서 숨을 거두고 처참히 시체로 발견되는 사례를 종종 볼수가 있지 않습니까... ...?    그러니 자식은 꼭 있어야 하고 그 자식들에게 형제가 있으면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좀더 아끼고 계획적으로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자신들과 같은 독신자녀로만 만들지 않는다면 그애들은 앞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부모에게도 함께 효성할수 있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 70년대 부모들은 대부분이 두자녀 가정이여서 지금 60이 넘으니 우선 아들딸이 산같이 큰 의지가 되고 또 정신상이나 물질상에서도 자식의 덕을 많이 보고 있는듯 하여 이 이상 큰 행복이 또 어디에 있냐 싶습니다.        가정경제기능, 자녀양육기능, 양로기능 등 면에서 이렇게 인구가 방대한 하고 발전중인 중국으로 놓고 볼때 여전히 부모 자식을 위주로 하는 가족자체의 힘이 중요하지 모두를 국가의 부담이나 사회의 복지로 대체되기는 아직도 한 세대는 지나가야 실현될런지 하는 기나긴 시간이 수요될 것으로 보아집니다.      중국정부에서는 일찍 우리 200만 조선족을 비롯한 인구 천만이하의 상당한 수의 소수민족들에게 아이를 둘씩 낳을 수 있다고 허용하였습니다. 이는 중국 민족정책의 훌륭한 체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는 오늘의 위기를 예견 못했고 70년대 후부터는 산아제한 정책을《좌》적으로 집행하여 산아제한의 모범자치주로 정부의《표창》은 받았지만 결국 오늘의 현실은 우리 민족의《량적쇠퇴》라는 엄중한 후과를 빚어내게 되였습니다. 만일 이렇게 지속된다면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56개 민족가운데서 약소민족으로 전락되여 사회적 지위가 보잘것 없게 될 것은 물론, 조선족자치주라는 독립적 군체의 존재마저 상실하지 않겠는가가 우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으려는 생육관념은 급작스레 닥친 시장경제 속에서 엄청난 소비지출과 낮은 수입간의 모순격차로 하여 경제부담이 과중해진데서 생겨난 것이 사실입니다. 인제는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중시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자치주주장이 직접 책임지고 계획출산지도소조를 내오고 계획출산 목표를 제정하고 있습니다.    그 규정들을 보면 확실히 여러 가지 실제적인 우대조치들을 취하여 조선족 인구 증장에 커다란 지지와 고무를 주고 있습니다. 상세한 조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1)부부 쌍방이 모두 농민이고 변경 향진에 거주하며 두 아이가 모두 딸애일 때: (2)재혼부부가 재혼 전 각기 아이 하나가 있을 때: (3)재혼부부가 재혼 전 일방에 두 아이가 있고 다른 일방은 25주세가 넘었지만 아이가 없을 때: (4)두 아이 중 하나가 비 유전성 질병이 있어 정상적인 노동력으로 성장될 수 없을 때 등 조건에서 다시 아이를 가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이미《독신자녀부모광영증》을 타고 다시 출산할 때 원래 받은 장례금은 물리지 않으며 두 번째 아이의 출생으로부터 16세까지 탁아비 ,입학금, 치료비 등을 독신자녀와 동등한 대우로 합니다. 산모의 산가(産仮)는 30일 증가하며 남편도 7일의 호리가를 주고 호리기간의 공자와 장금은 그대로 발급합니다《희망 공정》,《봄 우뢰》등 빈곤지구 아이들을 돕는 장례 계획은 2태호를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등입니다.    나라의 민족정책과 산아제한정책이 이럴 듯 소수 민족의 출산을 부추겨주고 있으나 우리민족의 출산관념은 아직도 쉽게 개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종 매체와 민간단체들에서는 민족의 번영장성을 위하여 힘을 내야할 때가 되었다고 홍보하며 우리 민족 자손만대의 흥성을 위하여 시대와 민족이 부여한 이 력사적이고 성스러운 사업을 위하여 우리는 힘껏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물론 아직도 여러 가지 애로가 크지만 물질적 기초가 점차 제고되고 사회적 조치들이 따라가며 사람들의 관념과 인식이 바꿔지면 많은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거나 또 아이를 하나 더 키우려 할 것입니다. 이미 행동에 옮긴 가정들도 적지 않게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대학의 젊은 녀성교원들은 매년 한 두명씩 륙속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첫애가 커가고 두 부부가 재미없을 때 둘째 애가 생기니 애 엄마는 물론, 남편까지도 애가 귀여워 어쩔줄 모르며 퇴근하면 집에 일찍 오고 외돌이를 적게 하며 집에 마음을 붙혔고 큰 애도 저절로 섬을 차려 형 노릇을 잘하니 가정에는 항상 웃음꽃이 만발하다고 합니다.    사회에서의 각종 우대정책은 물론 직장에서도 부모에게 장례금을 주고 긴 휴가도 주면서 봉금은 그대로 발급하며 학교에서는 둘째가 있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조선족의 두 번째 아이 출산은 환영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점차 출산관념을 바꾸어 간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밝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행위문화로서의 혼인, 가정은 물질문화 제도문화 그리고 정신문화의 복잡한 역동관계 속에서 부단히 변해왔음을 볼수 있습니다. 력사의 부단한 발전에 따라 세상만물도 천변만화 하듯이 젊은이들의 생육관념도 부단히 움직이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개혁개방의 성숙기에 들어서는 21세기의 중국의 발전 속도로 보아 그 변화가 더욱 놀라울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이며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몇십년 안에 새 물결이 올 것이다. 그 물결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 심지어 투쟁하는 방식까지 모두 바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명의 변환이라고 할 수 있다... ... 앞으로의 세상은 산업혁명 이전처럼 가정의 기능이 중요해지며 그와 함께 녀성들의 능력과 몴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제3의 물결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힘이 아니라 감성과 두뇌가 중요한 생산요소로 되면서 녀성능력이 남성과 동일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따라서 21세기 부부쌍방은 평등하게 가사로동을 분담하게 될 것이며 경제적 책임도 평등하게 될 것입니다. 발달한 선진국처럼 국가의 복지가 매 가정에 락실될 때면 지어 육아도 더는 가정의 부담으로 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인생의 향수가 되어 부부마다 쟁취하고 그 복을 누리는 사랑의 열매로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다 넓고 멀리보는 개방된 심리상태로 생육과 양육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해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2    연변의 과학기술과 녀성교육 댓글:  조회:4523  추천:40  2010-12-07
          연변의 과학기술과 녀성교육                    중국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강순화             一. 연변지구와 연변의 과학기술    연변은 중국조선족의 주요 집거구이며 조선족인민들이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하고 있는 지방이다. 근로 용감하고 지혜로운 200만 연변인민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 땅에서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며 세세대대로 살아 왔다. 지금 자치주의 총인구는 217만7126명인데 그중 녀성인구는 109만2343명으로 전주 총인구의 50.17%를 차지한다. 전 자치주의 조선족인구는 37.69% (82.0481만명), 한족 59.29% (129.0868만명), 만족 2.6% (5.6523만명), 회족 0.3% (6633명), 몽고족 0.09% (1935명)기타소수민족 0.031% (686명) 등이 있다. (2005년 연변통계년감 자료) 자치주에는 6개시와 두개 현이 있는데 총 면적은 42700km로서 중국 길림성의1/4, 대만성의1.2배, 한국(99393.81km)의 약 43%가 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력사는 유구한바 일찍 26000년 이전 구석기 말기에 연변에는 이미《안도인》이 생존하고 있었고《연변》이라는 명칭은 1920년 전후 이 땅이 3국교제의 변연에 있고 또 연길변무공서 관할에 있다고 하여 연변이라고 하였다 한다. 1930년대 중기에 일제와 괴뢰만주국이 연길시에 세운《간도성 전농 모범장》이 당시 연변지구에 있어서 처음으로 되는 과학연구기구로 칠수 있었지만 기술일군은 겨우 12명밖에 안 되었다. 이밖에 몇 개의 중요한 공장, 광산에 그저 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분석실 혹은 실험실을 설치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한 후 연변에는 인민정권이 건립 되였으며 간도성 정부를 설립하였다. 1952년9월3일에는 민주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성립했으며 1955년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이름을 고쳤다.     해방 후 특히는 건국이후 공 농업 생산과 문화교육사업이 발전됨에 따라 과학기술사업도 상응하게 제고되고 발전 되였다. 연변의 과학기술사업은 농업과학실험으로부터 시작 되었는데 일찍 룡정, 연길 등지에 세운 연변수전실험장, 연변수토류실방지실험소, 수리관개실험소들에서는 농업과학기술을 널리 보급 시켰으며 1956년 10월에 이르러서는 1200여명의 과학기술보급 선전원을 가지고 있는 연변과학기술보급협회가 정식으로 성립 되였다. 1958년 초에 연변과학기술협회로 개칭하고 그 산하에 농학, 수리학, 림학, 화학, 지질지리 등 14개 학회를 두었는데 회원 5000명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50년대 이후에 와서는《민간전문가》들이 나타나고 중요한 과학성과들이 이룩 되였는데 안도현 농촌 귀향지식청년 류창은은 장백고산지대에 알맞은《만보11호》,《만보21호》벼 우량종을 배육하여 벼농사 산량을 2-3할(20-30%) 증산할 수 있었고 연길시 장백향의 최죽송은 벼 다수확기술을 모색해 냈는데 그 경험은 전국에 보급 되여 그 본인은 중국농업과학원 특별 초빙연구원으로 초빙 되였다. 조선족 농민 김상욱, 최일선이 길러낸 연변《사과배》는 그 맛과 향기로 전국에 소문을 놓았다.    과학기술보급사업이 생기발랄하게 발전함에 따라 전문과학연구기구가 련이여 세워졌는데 1959년 자치주의 첫 과학연구기구-연변농업과학연구소(과학연구일군 249명, 조선족 74명, 9개 연구실 한개 과학정보실)가 설립 되였고 뒤이어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연변잠업연구소(연구일군62명, 조선족30명), 연변림업과학연구소(연구일군34명, 조선족27명), 연변농업기계연구소(연구일군55명, 조선족41명), 연변과학기술정보연구소(연구일군21명, 조선족19명) 연변과학기술연구소(연구일군38명, 조선족34명)등 32개 자연과학연구소가 세워졌으며 1963년부터 연변조선민족언어연구소, 연변력사연구소 등 10여개 사회과학 연구기구들도 잇달아 설립 되였다. 1978년 3월 북경에서 소집된 전국과학대회에서 연변의 13가지 과학연구성과가 영예롭게 우수성과상을 탔으며 두 개 단위가 전국 과학기술 선진단위로 평의 되였다.    개혁개방 이후 나라의 사업 중점이 경제건설에로 옮겨지면서 연변의 과학기술사업은 우후죽순마냥 생기를 띠게 되였다. 1991년에는《과학기술로 자치주를 진흥 시킨다》는 전략적 지도사상을 세우고 과학기술 진보와 로동자소질 제고에 의거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침을 실천하였다. 자치주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대오를 확대하고 과학연구 환경을 개선했으며 공헌이 있는 과학기술 일군들을 장례하는 등 정책을 실시함으로서 광범한 과학자들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불러 일으켰다. 각항, 각 전업의 과학연구기구들도 육속 보충 건립 되였는데 농업기계, 장백산 특산(인삼, 모기버섯, 더덕 등의 규모화 기지건립), 야생동물, 민족의학, 식품과학, 림업 양봉, 응용과학 등 21개 전민소유의 자연과학 연구기구들을 건립하였고 력사, 문학, 예술 등 사회과학 연구기구들도 새롭게 세워졌다. 목전 전 자치주 8개 시현에 모두 과학기술 부현장、시장이 있고 55개 향정부와 97개 향진에 과학기술 부향장、진장, 과학기술조리 등을 배치하였다.     연변대학교를 위수로 한 각 고등학교들에서도 1957년부터 육속 과학연구실을 설립하였는데 현재 사회과학분야에만 50여개 연구소와 20여개 연구실에 1000여명의 전직 연구일군들을 두었다. 연변의과대학에는 천연약물연구소、생물면역연구소、기생충연구소、환경의학연구소、식품건강연구소、심혈관、유전우생(遺傳優生)、소화생리、종양생화、유기물、간염、약물제조(藥物製劑)등 연구소와 연구실이 있는데 전직 연구원만 250여명이 있다.    중앙 11기 3차 전원회의(1978년)이후 연변에서는 여러 가지 형식의 과학연구 도급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과학연구 기구와 과학연구일군을 합리하게 이동시키는 것으로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의 결합을 다그쳐 나갔다. 인재 이동 체제를 개혁한 후 국가의 분배에 의해 피동적 운명에 순종하던 낡은 관념은 환영받는 인재로 되려고 분투하는 새 관념으로 전환 되였다. 1986년부터 1987년 2년 사이 전문기술일군 이동수는 4259명에 달하였다. 민영과학연구기구들도 과감히 성급과 국가급 연구항목 70여개를 맡아 나섰는데 그중 4개 항목이 성급 감정에 통과 되였고 13개 항목이 국가 전매특허권을 신청하였다.     연변의 과학기술발전과 경제건설을 위하여 자치주 정부에서는 과감히 외지 인재들을 청해 들였는데 지금까지 2300여명의 과학기술일군들이 연변에 초빙되여  국외의 자금을 들여오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 우세를 이용하여 새 특산품종을 개발하는 등 좋은 성과들을 거두어왔다. 인재의 합리적 이동은 공장과 농촌의 과학연구사업에 새로운 진척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자치주 내의 30여개 기업에 과학연구기구들을 세웠는데 이는 기술의 인입, 소화, 흡수 및 기술개조와 내부기술 발굴 등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다.      농촌의 과학기술사업도 초보적인 체계를 이루었다. 전 자치주에 이미 인삼, 모기버섯, 포도, 잎담배 등에 대한 연구기구가 81개 있으며 그 연구인원은 만여명에 달한다.     지금 자치주는 전국의 38개 대중도시, 80여개 대학 전문학교, 140여개 과학연구단위, 300여개 기업들과 경제기술 협조관계를 맺고 200여가지 새 제품과 새 기술을 들여오고 있으며 국외의 10여 가지 항목의 새 기술도 받아들이고 있다. 건국 이래 자치주에서 거둔 과학기술연구성과는 885개 항목이 되며 그중 42개 항목은 세계선진수준에 도달하였고 130개항목은 국가급 표준에 이르렀으며 253개 항목의 성과는 성내 선진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모든 연구 성과 가운데서 85%는 이미 생산에 투입되여 경제적 효과를 거둠으로서 연변경제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전 전 자치주 과학기술일군은 도합 109052명(자연과학-63563명, 사회과학-45489명)인데 이는 전 자치주 총 인구의 5%로서 전국 평균 수평 (중국과학기술협회의 통계에 의하면 목전 중국의 과학기술인원은 도합 2639만명으로 전국 총 인구의 2.12%를 점한다.) 인 2.12%보다 훨씬 높다. 광범한 기술 일군들은 각 분야의 과학연구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과학기술을 보급 제고하고 공 농업 생산의 발전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역할을 놀고 있다. 전 자치주에 민반 과학기구도 83개소가 있으며 각종 민반 과학협회, 학회, 연구회는 80여개소가 있고 향급 과학보급협회 105개소, 공장광산기업의 과학협회 조직도 34개소가 있어 성시와 향촌이 결합되고 전업성과 군중성이 결합 되였으며 연구와 보급추광이 결합된 과학기술 체계를 이루어 비교적 강대한 과학기술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二. 중국의 과학기술 정책과 연변의 경제문화    중국 개혁개방의 통수이시며 총 설계사였던 등소평동지는 일찍《과학기술은 제일생산력이다》,《과학기술과 교육으로 나라를 부강시켜야 한다.》라고 호소 하셨다. 중공중앙、국무원의 과학기술진보를 가속화 할 데 관한 결정에는 과학기술은 경제와 사회발전의 우선적인 추동 역량이며 국가 강성(强盛)의 결정적인 인소라고 했으며 또한 과학기술 실력은 이미 국가 종합국력의 강약과 국제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늠하는 중요한 인소라고 강조 하였다.     2006년에 공포한《중화인민공화국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1차5개년(2006-2010)계획요강》에도《과학기술과 교육에 의한 국가진흥전략과 인재에 의한 강국전략을 실시한다》고 공포하였다.《과학기술의 진보와 혁신을 경제와 사회발전의 중요한 추진력으로 삼고 교육의 발전과 재덕을 겸비한 자질 높은 인재의 양성을 보다 두드러진 전략적 위치에 두고 체제개혁을 심화하고 투자를 늘이며 과학기술과 교육의 발전을 가속화하여 혁신형 국가와 인적자원 강국건설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이다.   《계획요강》에는 또《국가 중、장기 과학기술발전계획을 실시하여 자주적 혁신과 중점적 도약 발전후원, 미래지향의 방침에 따라 국가 혁신체계를 서둘러 구축하고 기업의 혁신능력을 끊임없이 높이며 과학기술의 경제 및 교육과의 긴밀한 결합을 강화함으로서 과학기술의 총체적 실력과 산업기술수준을 전면적으로 높인다》고 강조하였다.     2002년 6월 29일《중화인민공화국 과학기술 보급법》이 정식으로 반포되여 중국의 과학기술보급사업은 법제화 건설과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전 사회적으로 과학을 지향하고 사랑하며 과학을 배우고 활용하는 새로운 풍기를 형성했으며 매년 9월의 세번째 공휴일을《전국 과학기술 보급일》로 정하고 전국 방방곳곳에서 과학정신을 선양하고 과학지식을 전파하며 과학 발전관을 수립하는 유익하고 다채로운 활동들을 활발히 벌리고 있다.     2004년 7월 북경 중국과학기술관에서는《인류와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편--대자연의 경보와 깨우침》이라는 전람회를 열었는데 이 전람은 인류와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을 중점으로《록색GDP》,《순환경제》,《절약형 농업》과《록색 제조업》등 새로운 관념에 치중하였다. 이번 전람을 통하여 전국 인민들이 자연생태환경 보호의식을 한층 높이고 순환경제, 절약형 농업과 록색제조업을 추진해 인류와 대자연의 조화로운 발전을 진일보 추진하였다.          지난 2006년 1월 중국과학원사 사무국에서는 570명 중국과학원 원사와 중국공정원 원사들이 투표형식으로 중국과학기술 발전의 10대 뉴스를 평의 하였는데 그 항목에는 : 1. 신주호 탑인 우주비행선 우주비행성공  2. 청장철로 전부개통  3. 64위 고성능 통용 CPU칩(芯片) 고안  4. 중국과학고찰대 첫번째로 남국 최고점에 도달  5. 기록된 종류가 세계에서 제일 많은《중국식물지》출판  6. 첫번째 단분자자선태(單分子自旋態)의 통제를 실현  7. 쵸몰랑마봉의 해발 새 높이 8844.33메터를 측정  8. 중국 대륙 과학시추가 지하 5158메터까지 뚫고 들어감  9. 혈관속에서 운행하는 미형《나미약물분자운수차》를 연구제조  10. 분별률이 최고로되는《중국 디지털 남1호》가 탄생 등을 선택하였다.           과학기술의 제고와 더불어 연변의 경제상황도 많은 발전을 보였는데 2004년 자치주생산총치는 194.3억원으로 연속10년간 10%이상 속도로 상승하였고 일인당 생산총치는 8906원으로 처음으로 인당 GDP가 1000달러를 초과하였다. 2004년 전 자치주 재정수입은 24.3억원으로 전해만 16.1%나 증장하였다.         문화교육사업도 커다란 발전을 보이고 있는데 지금 주내에는 19개 학원을 가진 종합대학교인 연변대학교(학생수는 2만2458만명)가 있고, 9개 중등전업학교가 있으며(학생수는6280명), 중학교와 고등학교 193개소(학생수14만3481명), 그중 조선족학교 74개소(5만1109명), 초등학교 407개소(12만7511명), 그중 조선족학교 183개소(5만2164명), 유아원 455개소(3만4972명), 그중 조선족유아원 261개소(1만5319명) 등이 있으며 기타학교도 41개소가 있다.  전 자치주 학령아동 입학률은 99.9%이다.     자치주에는 8개의 예술표연단체와 4개의 박물관, 8개의 문화관, 70개의 문화짬과 9개의 도서관이 있으며 8개소의 라디오방송국과 9개소의 텔레비방송국이 있다. 이런 문화기구에서 현재 사업하고 있는 일군은 도합 2200여명이다. 전 자치주에서 한해(2004년)에 출판되는 도서는 2020종(조문-740종), 3012만책(조문-4931만책)이며 잡지는 21가지(조문-12종 56만책)종류로 66만책, 신문 11가지 종류로(조문-6종 7444만부) 도합 31108만부를 발행하고 있다.          三. 연변지구 녀성교육의 기본상황    《2005년 연변통계년감》자료에 의하면 전주 총인구는 217만7126명인데 그중 녀성인구는 109만2343명으로 전주 총인구의 50.17%를 차지한다. 전 자치주 인구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녀성군체를 볼 때 다수의 녀성들이 개혁개방의 동풍을 빌어 과감히 사회에 진출하고 있으면 사회 제 분야에서 홀시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사회의 변천은 부단히 사람들에게 압력과 도전을 가하고 있지만 녀성들은 이속에서도 재능을 늘이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연변지구 녀성들의 문화정도를 보면 대학, 전문학교와 고중, 중등전업 및 초중이상 수준에 도달한 숫자가 매천명당 각각 22명, 224명, 332명으로서 전국평균수준 보다 (전국은 각각 14명, 79명, 233명) 훨씬 높다. 이 외에도 각종 성인교육과 직업교육의 녀성수는 남성을 초과한다. 이는 우리 연변녀성들이 문화교육을 중시하고 힘써 배우는 교육전통, 교육열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녀성의 교육수준은 사회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능력, 수입수준, 생활정황의 중요한 요소로 되며 여성의 사회지위를 결정하는데 있어 관건적인 역할을 한다.     2000년 말까지의 연변지구 녀성의 평균 교육년한은 10.8년으로 1995년의 6.8년보다 58.8% 제고되었으며 2004년말에 와서는 11.3년으로 2000년보다도 4.6% 제고되었다. 녀자애들의 소학교 입학률이 99.94%에 달하여 남자애들과 동등한 교육기회를 향수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중, 고등교육의 비율이 점차 제고되고 있는바 전주 보통고등학교의 재학 녀학생은 1,566명으로 총 학생수의 52.1%를 차지한다. 상세한 정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연변 조선족 녀학생 재학상황   학교별     학생수 1990년 1996년 2002년 소학교 학생 총수(명) 80.762 67.384 36.122 녀학생수(명) 39.595 33.330 18.154 녀학생비례(%) 49.03 49.46 50.26 초급중학교 학생 총수 30.441 30.442 32.868 녀학생수 15.072 15.145 16.710 녀학생비례 49.51 49.75 50.84 고급중학교 학생 총수 10.189 9.001 12.555 녀학생수 4.823 4.005 6.424 녀학생비례 47.34 44.50 51.17 중등전문학교 학생 총수 4.957 7.968 7.477 녀학생수 3.028 5.051 4.666 녀학생비례 61.09 63.39 62.40 대학교 학생 총수 5.621 7.172 5.229 녀학생수 2.547 3.553 2.795 녀학생비례 45.31 49.54 53.45 합계 학생 총수 132.129 121.966 94.321 녀학생수 65.065 61.144 48.749 녀학생비례 49.24 50.13 51.68   최근 10년간 녀학생 재학인수는 기복이 있지만 전체 학생수에서 차지하는 비례는 지속적인 상승선을 긋고 있었다. 1990년에 유독 중등전문학교만 녀학생비례가 61.09%로 절반을 넘었고 그 외 소학교, 중학교와 대학교의 녀학생 비례는 모두 반수가 못 되었다. 하지만 2002년에 와서는 소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녀학생의 비례가 모두 50%이상을 차지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족 녀학생 재학 상황이 말해주다시피 현재 조선족 녀성의 교육은 초등학교는 물론 고중, 심지어 대학교를 포함한 고등교육에서의 남녀차이를 줄이고 큰 발전을 가져왔음을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전국의 평균수준과 비교해볼 때 2002년 전국의 년말통계를 보면, 전국의 녀학생의 재학인수는 평균 학생총수의 47.45%를 차지하지만 조선족의 경우, 평균 51.68%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녀교원의 비례도 많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현행 국가교육체제에서 녀성이 차지하는 지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지표이다.   표2 연변 조선족녀성 교원의 재직상황 학교별   1990년 1996년 2002년 소학교 교원총수(명) 3.720 3.988 3.052 녀교원수(명) 2.568 2.964 2.247 녀교원비례(%) 69.03 74.32 73.62 초급중학교 교원총수(명) 2.455 2.320 2.245 녀교원수(명) 996 1.308 1.321 녀교원비례(%) 40.57 56.38 58.84 고급중학교 교원총수(명) 953 832 933 녀교원수(명) 334 336 457 녀교원비례(%) 35.05 40.38 48.98 중등전문학교 교원총수(명) 477 612 ― 녀교원수(명) 201 301 ― 녀교원비례(%) 42.14 49.18 ― 대학교 교원총수(명) 1.346 1.453 1.510 녀교원수(명) 286 379 552 녀교원비례(%) 21.25 26.08 36.56 합계 교원총수(명) 8.951 9.181 7.740 녀교원수(명) 4.385 5.270 4.577 녀교원비례(%) 48.99 57.40 59.13    소학교의 경우 1990년에 이미 녀교원의 비례가 69.03%를 차지하였고 1996년과 2002년에는 74.32%와 73.62%로 늘어나 현재 소학교의 교원은 거의 대부분이 녀성교원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등전문학교와 사범학교에 녀학생이 대부분을 차지한 상황을 보면 금후에도 소학교의 녀교원수는 계속 증가될 것으로 예산된다.  고등교육에서의 녀교원의 수도 부단히 늘어나고 있으며 평균년령도 점차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고등교육에서의 녀대생의 증가, 특히는 녀 연구생수의 지속적인 증가에 있다. 고등학교 녀교원수와 그 차지하는 비례는 녀성들이 고등교육에 참여하는 정황을 장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표중의 하나이다. 표2에서 볼 수 있듯이 1990년에는 대학교의 녀교원 비례가 21.25%로 5분의1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2002년에는 36.56%로 15.3%나 증가되었다. 녀교원들은 실제교학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교학심리에 비교적 높은 교학능력을 가지고 있어 학생들과 조화로운 교류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四. 연변의 녀성교육에 존재하는 문제점   상기의 표1과 표2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교육에서의 녀성의 지위는 전시기에 비해 많은 제고를 가져왔다. 하지만 질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교에서의 녀교원비례가 상승하였다 하여 순수하게 교학과 학술방면에서의 녀성들의 우세로만 볼 수 없으며 새로운 형세하에 남성교원들의 유실 등 여러 가지 원인들도 배제할 수 없다. 녀대생들의 취업난도 엄중한 문제로 나서고 있는데 국가에서 남녀평등을 원칙으로 제정한 국가정책이 실시과정에서 일부 남성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가게 되여 결국 녀성들에게 더욱 많은 곤난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녀성 지식인들에게 존재하는 돌출한 문제는:  1) 높은 차원의 교육일수록 녀성이 적은 것이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발달과 사회의 보편적인 정신문화수준의 향상은 녀성의 교육수준도 따라서 높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술한 녀성의 절대적 교육수준과 문화소질의 제고보다도 남성과의 비교에서 본 상대적 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의 제고가 더욱 중요하다. 고등교육이 귀족(精英)교육으로부터 대중화한 교육으로 전변된 후 대학교 교육도 사회보급교육으로 전변되어 대학모집인수는 대대적으로 확대되였다. 이 기회를 빌어 녀학생들에게도 많은 고등교육의 기회가 제공되었으며 녀대생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로 보인다. 상기의 표1, 표2에서 보다시피 대학교에서 차지하는 녀학생 비례가 53.45%로 남학생수를 훨씬 초과하였다. 하지만 교육의 차원이 높아질수록 녀학생수가 점차 감소되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데 석사, 박사 등 높은 학력에서의 녀학생 비례는 상대적으로 낮으며 대학교 녀교원의 비례도 절반을 차지하지 못한다. 특히 대학교 녀교원의 경우, 교수나 박사생 지도교사와 같이 높은 직함을 가진 녀성학자나 녀성전문가는 10%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녀학생이 적은 리공과류의 전업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녀성간부의 참정, 의정 수준은 45.8%로 제고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층간부이고 지(地), 청(厅)급 등 고위급의 녀성간부는 겨우 5명 정도밖에 안되며 그나마도 “남정녀부(男正女副)”의 경우가 보편적인 현상이다. 2) 과학문화소질방면에서 녀성과 남성의 차이가 크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부분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었는데 대학교의 경우, 전공분야에 따라 남성과 녀성의 차이가 뚜렷하다. 문과류의 전업은 한 개 반에 1,2명의 남학생을 제외하고는 절대다수가 녀학생이지만 리공과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다. 교원들도 마찬가지로 리공과는 남성교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문과류는 녀교원이 상대적으로 많은 양상을 보인다. 주요한 원인은 아직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낡은 관념과 선입견에 있다. 즉 녀성은 전업성이 강한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남성보다 못하다는 관념이 아직도 많은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더욱 엄중한 것은 이러한 낡은 고정관념의 지배하에 녀성 스스로가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력은 비슷하지만 과학문화소질방면에서의 남녀차이가 현저하다. 전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과학소질에 대한 조사연구를 보면 2001년과 2003년에 거쳐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모두 녀성은 과학지식, 과학방법, 과학과 사회의 관계 등 방면에 대한 요해가 남성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나타나고 있다. 2001년의 조사연구에 따르면 남성이 과학기술, 체육, 정치, 경제 등 분야의 뉴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녀성은 새로운 영화거나 드라마에 대하여 더욱 큰 흥취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2003년의 조사는 또 새로운 과학기술 발견에 대한 흥취도는 남성이 녀성보다 6%좌우나 높으며 녀성이 새로운 과학발견에 대한 흥취는 보통이라거나 흥취가 없는 경우가 남성보다 16.5%가 높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과학소질의 제고는 경제, 사회, 문화수준의 제고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교육권리와 기회에 대한 향유정도가 어떠한가, 그리고 과학정보자원과 휴가시간을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아직도 조선족녀성들은 전통적 관념의 지배하에 대부분의 가사일과 자녀교육을 맡고 있기 때문에 직업과 가사가 주는 이중부담으로 인해 자신에게만 속하는 휴식시간을 자유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녀성들, 특히는 결혼하여 아이가 있는 녀성들은 학교에서의 정상적인 교육을 마친 후 재교육에 대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적으며 시간을 들여 과학기술에 관한 정보나 지식을 습득할 여유는 더구나 적다. 그 외 일부 녀성들은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학습하거나 기술을 습득하는데 별 흥취가 없고 그저 초등교육을 받은 정황 하에서 기초적인 직업을 선택하려고 하는데서 그 의식이거나 취향이 남성들과 많이 다르게 나타난다.  상술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전통사회에서 형성된 남녀성별의 배역과 역할에 대한 고루한 관념이 녀성의 진일보 발전과 제고를 엄중하게 저애하고 있는데서 그 주요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2004년 10월 인터넷을 통해 진행한 성별기대(性別期待)에 대한 조사를 보면 아직도 상당한 부분의 사람들이 성별의 형상과 역할에 대한 경직된 전통 관념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70%나 되는 사람들이 “남편의 수입은 반드시 아내의 수입보다 많아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반면에 “아내의 수입이 남편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는 항목에 대해서는 896명의 조사대상중  한명도 선택한 사람이 없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녀성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사회 환경과 사회여론의 지지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 환경과 낡은 관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녀성자신의 자비의식과 심리장애 및 이러한 것들로 기인된 경쟁의식의 결핍이다. 법률상 제정된 남녀평등방침과 책략은 단지 녀성들에게 평등한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고 녀성들이 정상적인 발전을 가져오도록 유리한 환경과 가능성을 마련해줄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녀성들의 발전은 오직 자신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五 . 연변지구 녀성들의 변화와 전망    개혁개방이래 연변지구 녀성들의 현황을 고찰하면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시대적인 변화특점을 보아 낼수 있다.      첫째는 녀성들의 자아위주의 사상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현대녀성들의 자아가치 척도는 과거의 자아희생으로 부터 현재의 자아성취에로 전변되였다. 그리하여 단순 취직형으로부터 사업형으로 전변되고 녀성들은 과감히 자신의 개성적 특징을 발휘하여 창발적으로 사업을 벌리며 아이를 적게 낳고 가정부담을 감소하는 것으로 자아의 성취를 이룩하며 자신의 인생가치를 높히려 한다. 이런 녀성들에게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항상 노력 분투하므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에서의 성공률도 높다. 이것이 최근 10여년간 녀기업가, 녀장원, 녀박사, 녀교수 등이 용솟음쳐 나오게 된 내재적 원인이다.     둘째는 다방면적 추구다. 현대 녀성들의 애호는 광범하며 그 추구도 다양하다. 그들은 가정에서 경제상의 평등은 물론 정신상의 평등도 추구하여 부부가 인격상 호상 존중하고 가정의무를 공동히 부담하고 책임질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복잡한 환경에도 아주 잘 적응하며 대담히 시장경제의 충격에 뛰여들어 경쟁을 벌리고 능력을 비기며 어려움을 두려워 하지 않고 분발 노력하며 악전고투한다. 자기가 맡은 일은 전력을 다 하며 똑 부러지게 해내려 한다.《지금 세상에는 게으른 놈이 못산다》는 것이 그들 생계의 좌우명이다.    셋째는 녀성들의 미에 대한 표준이 변한 것이다. 오랜 시기를 두고 여성매력의 표준은 오직 예쁘고 온순하며 선량한데 두었다. 그러나 현시대는 독특한 개성이 있고 품위가 있으며 현대감각이 나는 녀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녀성들은 지식을 부단히 넓히고 문화수양을 제고함으로서 자신의 인격과 품위를 높혀 내적인 미를 살리려 한다. 최근 몇 년 간 우리학교와 사회 각지 녀성학원의 새로운 학습 붐은 이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시대적 변혁에 적응하는 현대인의 심미가치의 변화라고 본다.   넷째는 감정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다. 현대녀성들은 경제상독립은 물론 인격상에서도 독립하려한다. 오늘날 지식녀성들은 자신이 우선 사회의 한 성원임을 인식하였기에 가사나 자녀양육보다 더욱 광범하고 더욱 중요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게 되였다.  이리하여 《독신귀족》이나《두사람의 세계》현상이 늘고 또 가정에서 과거 감정상 남편이나 자식에게만 의뢰하던 것이 현재는 광범한 사회적 교제를 벌리고 집단활동을 즐기며 사업의 성공에 취미를 붙이면서 감정상 독립하려 한다.     다섯째 지식인 녀성들의 새로운 번뇌이다. 고층차의 지식인 녀성일수록 남성과의 동등한 목표를 추구하려 한다. 그들은 사업의 성과로 사회의 승인을 받으려면 모든 면에서 남성들과의 거리를 단축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을 자연적 녀성에서 사회적 녀성에로 변화시키려 하기에 사업성공의 기쁨 뒤에는 다방면으로부터 오는 생활의 억제감과 감정의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사실상 녀성의 남성화로 남녀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력사적 착오인 것이다.    위에서 렬거한  연변녀성들의 변화특징과 문제점들은 일정한 의식형태의 발전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녀성자신이 자신을 해방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부단히 제고 하려면 목전에는 우선 아래의 몇 가지에 그 착안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필자는 인정한다.    첫째로 녀성 자신의 문화자질을 재빨리 제고 하여야한다. 녀성교육을 중시하여 고학력층의 녀성수 증가는 물론 전반 녀성의 문화적 자질을 높히는 여러가지 도경을 부단히 창출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교육부문과 각 학교의 구체조치도 있어야 하거니와 더욱이는 녀성자신의 자각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로 녀성자신이 자기의 약점을 알고 적극적으로 극복해나가야 한다. 중국녀성들이 장기간 습관되여 온 국가와 직장에 대한 의뢰성, 남성보다 못하다는 나약성, 큰일을 할수 없다는 자비감 그리고 또 일부 녀성들의 현 상태에 만족하고 분발상승하려 하지 않는 등 단점들은 왕왕 자신들의 전진을 저애하고 있음으로 제때에 인식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는 사회적으로 제3산업을 계속 발전시켜 가사 로동의 사회화를 실현함으로서 녀성들의 이중부담을 경감하고 그들이 사회생활에서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고무 추동하여야 한다. 법적으로 남녀가 공평하게 취업하는 권리를 제정하고 보장해 주어야 하며 생육보상 제도를 건립하고 생육의 사회성을 승인하여야 한다.     넷째로 녀성권리의 법적보증을 강화해야 한다. 나라의 헌법으로부터 혼인법, 상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및 로동법 등 기본 법률법규에 모두 남녀평등과 부녀의 합법적 권리를 보호하는 규정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아직 구체화, 완선화 되지 못했다. 우선 기본적인 부녀법이 없으며 부녀를 보호하는 일부 법률과 원칙적 규정일 뿐 구체조치가 적다. 이는 부녀립법의 새 과제로 보아진다.      다섯째, 녀성자신부터 전통사회에서 형성된 성별 역할과 형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낡은 관념이 녀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차례진 기회와 권리를 충분히 이용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인재를 판단하는 기준은 “제2의 성”이 없으며 녀성이 사회발전의 수요에 부합되는 우수한 인재로 되자면 자주의식, 경쟁의식, 진취의식, 독창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강자의 심태(心態)로 자아를 초월하여 자신의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한다고 본다.         나가면서    이상으로 연변의 과학기술 현황과 녀성교육을 중심으로 한 연변 녀성들의 현황을 검토하고 존재하는 문제점과 원인을 분석하여 보았다. 목전 중국 조선민족은 출생률의 하강과 청장년인재의 유실 등 문제로 인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는 글로벌시대에 직면한 발전도상 나라들의 필연적인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격변하는 시대에 녀성들이 진정 자신이 처한 환경과 도전하여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고 녀성의 발전을 이룩하려면 자신의 교육수준과 과학문화소질 양성에 모든 마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현시대 녀성들이 꿋꿋이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이 틀림없다.         맑스께서는 일찍 사회의 진보는 녀성의 사회적 지위여하로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류의 반수을 차지하는 녀성의 문제는 곧 천가만호의 사회적 문제이므로 온 사회가 공동히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야할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녀성자신의 정신면모를 크게 개변시켰으며 녀성들의 개성특징을 완선화 하고 그들의 진취심을 불러 일으켜 각항, 각 업종에서의 녀성들의 무궁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 하였다. 이런 역사적 변혁은 녀성군체의 존재와 그 사회적 지위에 대하여 다시금 새로운 시대적 평가를 내리게 할 것이며 사회의 부단한 진보와 물질문명의 발전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가치관의 진보 및 완선화에 따라 시대적 특성을 띤 녀성문제들도 점차 해결될 것으로 보아진다.                                            (한국전남대학교《녀성과학자네트워크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론문 2008.8)    참고문헌     1.《오늘의 연변》  왕정원 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8월   2.《중화인민공화국 국민경제와 사회 발전 제11차5개년계획 요강(초안)》길림일보(조문판)    2006년 4월 29일   3.《연변통계년감》  연변주통계국 편   길림인민출판사   2005년 8월   4.《동북과학기술신문》(조문판)   2005년 1월--12월    5.《중국조선족여성 현황 연구》 채미화  <여성과 조화로운 사회 학술론문집>     2006년 1월   6.《연변조선족 녀성형황》 강순화   <중국조선족 문화와 녀성문제 연구>  한국 학술정보 출판  2005년 1월     7.《연변통계년감》  연변주통계국 편   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8월   
11    조선족과 남한 녀대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비교연구 댓글:  조회:5098  추천:67  2010-11-01
           중국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녀대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비교연구         지식화, 정보화와 세계화의 새 시대에 들어서면서 세상은 크게 변하였고 사회가 녀성의 능력수준에 대한 요구도 부단한 제고를 가져왔는바 따라서 녀성의 고등교육참여 수준도 그 량이나 질적으로 모두 놀라운 상승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고등교육사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녀성자신의 교육에 대한 욕구는 고등학교 녀학생들의 비례를 부단히 증가시키고 있는데 통계자료에 의하면 중국소수민족 대학생들 가운데서 녀학생의 비례는 40%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조선족 녀대생들은 근 50%를 차지하고 있어 전국의 평균수준을 훨신 초과하고 있다.       남한녀대생들의 대학진학률도 80년대의 22.5%에서 90년대 말에는 61.6%로 크게 증가하였다. 남한의 남학생 대학진학률이 66.4%인데 비하면 남한의 남녀진학률 차이가 4.8%밖에 되지 않았다. 석사학위나 박사학위수준까지를 원하는 녀학생의 비률도 48%로서 남학생비률 50%에 비해 별반 차이가 없었다. 2000년 서울이화여대 졸업생 현황조사에 의하면 전체 졸업생 3229명중 22.8%가 취업대신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는 남한녀대생들의 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분히 설명한다.      상술한 사실들은 녀성들의 고등교육 참여 기회가 두나라 교육체제에서 기본상 남성들과 평등한 조건을 부여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녀대생이라는 이 특정된 군체는 모두 고등학교입시의 간고한 관문을 통과하였고 일정한 지식축적과 신분에 따르는 사고방식 및 가치표준을 가진 청년중기의 성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에서 한 성인으로 성장되고 사회구성의 일원으로 되는 준비단계에 처해 있으며 인생관과 개인적 가치체계를 나름대로 확립해 나가는 사회화의 과정에 처해 있다. 비록 심신발전이 아직 미숙 되고 실천경험이 결핍하며 사회적응능력이 약하지만 다른 한 면에 그들은 일정한 독립사고 능력과 분석능력이 있으므로 이 특정된 사회화 단계에서 현대의식에 따르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시절은 한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관건적 시기에 처해 있기에 인생로정의 전환적인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의 사회화 과정과 그 특징을 비교하고 연구하는 것은 녀성교육연구에 일정한 자료적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대한 리해까지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의 현실적인 의의가 있다고 본다.      본 문에서는 중국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녀대생들의 심신발전 특점에 근거하여 그 실태의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조사연구의 방법을 취하였다. 조사의 대상은 연변대학 3개 학원, 10개 전업의 1학년부터 3학년사이 194명 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의 서울과 각 대도시, 소도시에 분포한 녀자대학, 남녀공학, 전문대의 부분적 녀대생으로서 지역별과 학급별로 골고루 표집한 통계자료와 직접적인 면담자료 등이다.      본문에서 제기된 문제들로는 녀대생들의 인생관, 직업관, 련애관, 대학생활과 동아리활동 등이다. 정체분층표본법(整體分抽樣法)을 채용하여 임의로 선택한 대상으로서 각 학교 각 전업을 골고루 고려하였으므로 조사결과는 일정한 대표성을 띠였고 가히 두나라 녀대생들의 현시대 사회화과정 현황을 기본상 반영하였다고 생각한다.     一. 녀대생들의 인생관 문제     조선족녀대생들에게 당신의 생활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을 주었을 때 48.97%의 학생들이 사업의 성공을 첫 자리에 놓았고 다음으로 원만한 가정(28.35%), 사회에 유익한 인간(11.86%), 경제가 부유하기 위해(5.67%),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5.15%)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로부터 우리는 조선족녀대생들의 자아가치에 대한 긍정성을 보아낼 수 있고 또한 사회와 가정, 현대의식과 전통 관념간의 모순충돌도 보아낼 수 있다.      남한녀대생들의 경우를 보면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함이 32.5%, 좋은 직업의 선택이 30.4%로 제일 많은 수를 나타내였고 학문연구도 14.0%로 적지 않은 수자를 보여주었다. 한 지방대학의 조사에서 앞으로의 교육진로를 묻는 질문에서도 석사학위나 박사학위수준까지를 원하는 녀학생비률이 4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남한녀대생들의 교육에 대한 특수한 욕구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즉 남성과 가족, 사회에만 의존하던 예전의 전통 관념과는 달리 자신의 내적 성숙과 전문성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개개인의 개성과 재능을 파악하여 자신의 미래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나감을 볼 수 있다.       二. 녀대생들의 직업관 문제     설문조사에서 “만약 국가에서 배치하여 주지 않고 학생들 자체로 취업하라고 하면 리상적인 직업을 찾는데 대한 동무의 신심은 어떠합니까?” 하는 물음에 76.8%에 달하는 조선족녀대생들이 매우 신심이 있거나 비교적 신심이 있다고 하였고 “취직에 따르는 외적 압력에 대해 동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95.36%를 차지하는 녀대생들이 더욱 노력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과감히 경쟁에 뛰어들겠다고 하였다. “당신이 직업을 찾는 방법은?”라는 물음도 60.3%를 차지하는 녀대생들이 자기능력으로 면접시험 등 직접적인 형식으로 채용자 측의 인정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조선족녀대생들이 사회개혁의 엄준한 시련에 직면하였어도 여전히 특유한 자신심과 성숙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장경제의 변화된 체제에 적응하는 자아의식과 취업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22.26%를 차지하는 조선족녀대생들이 치열한 경쟁에 충분한 인식과 신심이 없고 부모와 친척관계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보여 진다. 이는 직업관 형성에서의 독립성과 의뢰성 간의 모순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직업모험의식에서 보면 수입이 높고 사업이 긴장하고 잘하지 못하면 해고당하는 직업에 52.58%로 제일 많이 선택되였고 다음으로 수입이 비교적 높고 사업이 비교적 긴장하나 노력하지 않으면 실업당하는 직업에 43.81%가 선택하였으며 수입이 낮으나 사업이 수월하고 실업할 우려가 없는 직업에는 2.09%밖에 선택하지 않았다. 또 조사대상의 57.22%에 달하는 녀대생들이 개인의 우세와 특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첫 자리에 놓았다.      상술한 사실은 조선족녀대생들의 현시기 경제발전 수요에 적응하는 경쟁의식, 주체의식과 모험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던데로부터 개인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는 직업, 그리고 지위나 성망보다 경제수입의 다소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실제문제로의 전환현상을 보여준다.      남한녀대생들을 볼 때 이들은 비교적 장시기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생활해 온것 만큼 취업경쟁의식에서 조선족녀대생들에 비해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국가 철밥통”에 대한 미련은 기본상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IMF이후 한국여성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이 고려하는 것은 직업의 안정성(42.3%)이고 그 다음으로 수입(31.4%)이였다. 각 대학 녀대생들의 직업선택 기준을 조사해 볼 때 서울녀자대학교에서는 첫째가 적성개발 가능성(48.5%)이고 그 다음으로 안정성(39.0%)이였고 경기신구대학에서는 자신의 취미와 소질을 살릴 수 있는 직업(42.7%), 안정성(24.1%), 보수(13.0%)의 순으로 나타났다. 즉 그들의 직업선택 기준은 자신의 적성과 맞는지의 여부가 제일 중요하였으며 안정성은 두 번째로 고려되고 그 다음 수입도 중요한 기준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적성개발 가능성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모습에서 녀대생들의 자아발전욕구가 강함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녀성의 수가 갈수록 늘어가는 사회분위기를 잘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녀대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홀로서기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낀다고 하는데 저급 학년 때의 다소 랑만적이고 추상적인 계획이 고급 학년에가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에로 변함에 따라 직업의 안정성이 소질개발에 못지 않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들이 비록 강하게 취업을 원하지만 취업에 대한 자신감은 약하다고 한다. 2000년 이화여자대학교 졸업생 취업상황을 보면 총 취업률이 72.0%였다. 학과별로 보면 약학대학이 92.45%로 제일 높고 그 다음으로 간호과학대학 89.5%, 의과대학 88.9%, 가정과학대학 84.7%, 공과대학 77.5%, 경영대학 77.5%, 인문과학대학 73.1%, 조형예술대학 73.1%, 음악대학 72.1% 등의 취업률로 모두 총 취업률의 평균치(72.0%)를 초과하나, 사회과학대학(69.3%), 사범대학(67.9%), 자연과학대학(62.5%)등은 평균수치에도 이르지 못하고 특히 법과대학 같은 곳은 근근히 19.1%가 취업한 외 대부분이 계속 진학하거나 대학원고시준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는 법학전업에 대한 사회의 질적 요구가 높아졌고 그 경쟁률도 치열함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三. 녀대생들의 련애관 문제      조선족녀대생들의 련애동기를 볼 때 “좋아하는 이성과 같이 서로 방조하고 리해할 수 있다”가 69.47%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대학기간에 련애하는 것이 제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 시기는 감정이 진실하고 순결하며 세속의 방해를 적게 받으며 또한 공동한 학습생활가운데서 서로 료해하고 서로 방조하며 서로 관심하고 서로 추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른 한면 “혼인은 인생의 중요한 과제이며 련애는 혼인을 위한 준비이다”가 22.63%로서 그 다음의 수를 나타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련애혼인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리상적이며 명확함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학습이 긴장하기에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감정위탁을 찾는다(4.21%)든지, 때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2.11%)등 원인이 일부 녀대생들의 련애동기로 나타나고 있었다.      배우자 선택표준을 보면 설문조사에서; 능력이 29.69%, 사상품질이 22.4%, 흥취와 성격이 13.2%, 학력이 10.94%, 경제조건이 9.9%, 용모가 6.25%, 총명이 3.65%, 가정상황이 2.6%, 년령이 1.56%등 순위로 나타났다.      위의 수치에서 우리는 조선족녀대생들의 배우자 선택에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특점을 종합해 볼 수 있다.      첫째, 배우자의 능력, 품질, 흥취, 성격 등 개성적 특징을 비교적 중시하고 용모, 년령, 가정조건, 등 외적인 요소를 상대적으로 경시한다. 이는 그들이 련애를 감각적 만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감정적인 일치에 보다 중요한 자리를 놓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품질, 성격 같은 정신적 요소를 경제조건과 같은 물질적 요소보다 더 중히 여긴다. 이는 그들의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을 과시하는 동시에 개혁개방이래 사회문화 가치체계의 새로운 변천을 반영한다.      셋째, 대상자의 능력, 품질, 학식 등 내적인 미를 그들의 용모, 년령 등 외적인 미보다 더 중시함을 볼 수 있다. 이는 현대 녀대생들의 올바른 련애, 혼인관으로서 평생의 동반자를 잘 선택하여 함께 진정 행복한 생활을 창조해 가려는 념원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애정과 사업사이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조사대상 94.21%에 달하는 녀대생들이 훌륭한 사업과 원만한 가정을 동시에 가지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는 당대 녀성지성인들의 이중배역의 리상형 목표로서 노력하여 실천해 보려는 결심과 희망을 표달한 것이다.      남한의 녀대생들을 볼 때 이성교제가 사회적 관계망을 확충하거나 개인적인 안정감을 주는 등의 장점을 가진다(69.64%)고 보는 반면에 또 이성교제가 경제적 부담을 주고 학업에 지장을 초래한다(30.36%)는 등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다(경남: 진주 산업대 면담사례). 한 지방 남녀공학 2학년 녀대생은 말하기를: “이성교제로 하여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서 좋은 것 같다. 지금 사귀고 있는 오빠가 대인관계가 좋아서 오빠의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 ... 그냥 되게 좋다.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단점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시간랑비, 돈 랑비, 마음고생, 괜히 의심하게 돼서 사람이 치졸해지기도하고 공부라던가 동아리활동에 지장을 주고, 또 녀학생들은 대체로 남자친구에 더 신경을 쓰기에 심각해지면 대인관계가 협소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헤어지게 되면 서로에게 타격이 크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면담에서 한국 녀대생들의 련애동기와 그 장단점이 조선족녀대생들과는 어느정도 다름을 쉽게 보아낼 수 있다.      이성친구를 선택하는 조건으로는 대화의 가능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53.6%), 인간성(34.7%), 성격(29.6%), 경제력(24.6%), 성실성(16.8%), 사랑(16.3%)등 순으로 선택되였는데 보다싶이 상대방과의 공통한 언어, 품질과 성격적 요인을 가장 중요시 하고 있었다. 한 지방 남녀공학의 2학년 녀대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키는 180이상, 근육질은 싫지만 몸집은 좀 있으면 좋겠다. 안경 안 끼고, 눈 크고 잘생기고 깔끔한 인상이 좋다. 유머감각도 있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돈도 많으면 좋고 하지만 외모보다는 성격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리상적인 남성상에서 성격이나 외모가 주로 언급된 반면 리상적인 녀성상에 대한 질문에서는 직업적 성취가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었다. 또한 굳이 직업적인 성취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는 초인적인 녀성의 모습을 본받고 싶은 방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20대 고학력 녀성들에게는 남성과 녀성의 구별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 리유라면 이사회는 남녀가 공동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우선 “한 인간”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남녀를 구분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타당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녀대생들은 자신이 녀성이라는 사실에 그다지 불리함을 느끼지 않았으며 성별보다는 능력에 의해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는 적어도 대학교에서의 성별차별은 어느 정도 극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한 녀대생들의 역할모형조사에서 보면 자신이 선호하는 리상형 녀성상에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계속적으로 직업적인 성공을 이루어내는 녀성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는 녀대생들의 완벽함에 대한 추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성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용모역시 성공을 빛내게 하는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외에 력사속의 인물이나 주변의 인물을 역할모형으로 꼽는 현상은 녀대생들이 사회나 대중적으로 제시하는 가치기준보다는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더 높이 고려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방향을 결정해 나간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四. 녀대생들의 대학생활과 동아리 활동      청소년 시기의 량호한 가정환경과 그 분위기는 자녀들의 사회화로 하여금 적극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년령 증가에 따라 가정의 교육과 정보는 그들의 성장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가정이 자녀들의 사회화에 주는 영향은 점차적으로 감소되고 있다. 조사에 의하면 76.6%를 차지하는 녀대생들이 “현재 부모가 자기에게 주는 영향이 동배군체(同辈群体)가 주는 영향보다 적다.”고 하였다. 즉 청년기에 이르러 동배군체 및 대중전파매개물 등의 사회적 인소영향이 점차적으로 가정적 영향을 초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배군체는 하나의 중요한 사회화인소로서, 그들 사이는 언어 심리가 잘 통하고 쉽게 각종 수효를 만족시킬 수 있어 충분한 자유권리를 향수할 수 있고 개성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년령의 증가와 교제범위의 확대는 이런 영향을 더욱더 심화하고 있다.      대학생활에서 조선족 녀대생들이 동아리 활동에 참가하는 동기를 보면 66.32%가 자신의 능력을 단련하기 위함이고 21.58%가 자신의 학습과 생활을 조절하기 위한데 있다고 하였다. 즉 그들의 행위목표는 명확하며 주동성과 실천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류형의 활동을 즐기는가 하는 물음에는 42.19%가 실천형, 18.75%가 오락형, 15.1%가 문화형, 6.77%가 체육형, 6.25%가 전업형, 복무형 등으로 나타났다. 그 특점을 볼 때 도시나 농촌으로 진출하는 자원봉사단 등의 실천성이 강한 사회활동을 즐기며 또 문화학습 오락활동과 각종 사회문제토론에 광범한 흥취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반면에 정치활동 참여 열정은 점차 하강되고 있었는데 조사에 의하면 당, 단조직의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매우 원하는 학생들이 13.2%밖에 안 되며 대세에 순응하거나 이런 활동을 원하지 않는 학생이 27.6%나 차지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적 활동에 참가하는 학생은 59.38%로서 비교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조선족 녀대생들이 가정교사나 각종취업기능양성 등 경제활동에는 신경을 쓰나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각종문제를 가지고 벌리는 집체토론이나 강좌, 좌담 등은 매우 적은 형편이다.      남한 녀대생들이 대학생활에서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인간관계(32.9%), 취업진로(27.7%), 학문전공(26.1%)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대학생활 중 가장 큰 걱정거리는 진로문제(59.4%), 인생관과 가치관적립문제(16.8%), 학업문제(10.7%)로 꼽고 있었다.      동아리 활동에서도 녀학생들의 참여목적은 친목도모가 44.5%로 가장 높은 빈도를 나타내고 그 다음으로 취미활동(18.6%), 다양한 경험축적(17.0%)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의 경우 남학생들의 61.6%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녀학생들은 73.2%가 동아리 활동에 참가하고 있어 참여의 적극성이 더 높게 나타났다. 그들이 많이 참가하는 활동은 예술동아리(22.7%), 취미교양(22.0%), 사회과학(14.4%), 학술부분(11.5%) 등으로 나타났다. 그들의(서울여대 2학년) 말에 의하면 “동아리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고 이런 경험은 매우 독특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침목 도모에도 좋다.”고 하였다. 한 지방 남녀공학 2학년생은 “현재 정치, 경제에 관한 토론 모임에 종종 참여하고 있다. 발표능력을 키우고 싶었고 지식도 늘일 수 있어서 좋다. 자료를 찾는 것이 좀 벅차지만 토론을 위해 공부하게 되고 상식도 느는 것 같아서 좋다.”라고 하였다.      대학의 동아리 활동은 그들의 흥취와 능력을 키우고 자기가 관심하는 분야의 지식을 늘이며 금후 사회에 독립적인 주체로 서기 위한 준비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리 활동에서 녀학생이 리더가 되는 경우 남학생들은 거부감을 나타내고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역할이 부각되도록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남존녀비사상이 비쳐짐을 볼 수 있다. 남성이든 녀성이든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이 필요하며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키워나가야 앞으로 사회의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五. 요약 및 론의     총적으로 볼 때 중국조선족 녀대생들의 사회화 과정은 아래와 같은 특성을 볼 수 있다.     1. 자아가치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높아 자신의 분투를 통해 인생가치를 실현하려는 신심이 있는 한편 아직도 남강 녀약의 전통 관념이 존재하고 있다.     2. 직업관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왔는바 직업의 사회적 지위와 성망을 추구하며 안전한 철밥통을 선호하던 취업관이 현시대에 와서는 비교적 도전적이고 창발적이며 모험적인 취업관으로 대체되었다.     3. 청춘기 성의식의 각성은 심리상의 미묘한 변화를 일으켜 련애문제가 그들의 학습생활에 침투되었으며 배우자 선택표준이 물질형으로부터 정신형으로 전변되었다.     4. 대학생활에서의 동아리활동은 서책에 머물던 과거와 달리 사회진출의 실천성으로 전변되고 능력배양 추구를 중요시하였다. 그 규모와 성질은 다양하나 구체문제를 가지고 해결하는 강좌나 연구토론 등 학술활동이 결핍하다.     남한녀대생들의 성별사회화 특징을 보면 보편적으로 교육에 대한 욕구가 높고 졸업 후의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직업을 선호하며 이성 친구를 사귈 때 성격적인 측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의 가치기준을 정립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이나 투자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 남한녀대생들이 교육에 대한 요구는 남학생들과 거의 차이가 없으며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가정이나 사회도 이런 추세에 긍정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2. 남한녀대생들의 이성교제는 상당히 자유로움을 보여주는데 그 리유가 결혼을 위한 준비나 탐색이라는 것과는 달리 폭넓은 친구관계나 대인관계 경험을 위해서, 대학생활의 활력소, 생활의 안정감 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리상적인 남성상은 성격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였고 녀성상에서는 “현처량모”는 아니고 자신의 직업성취를 중요하게 꼽고 있었으며 적어도 대학생활에서 남녀 성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있었다.     3. 졸업 후 직업에 대한 전망에서도 녀대생 반수이상이 취업을 요구하였는데 남학생인 경우 졸업 후 취업은 필수사항이라는 점에 비해 녀학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현대적 교육을 받는 녀대생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가정의 전통관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고 이러한 생각은 다시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요소와 충돌하게 되어 결국 녀대생들에게 완벽한 능력을 가진 초인간적 리상형 녀성에로의 환상을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환상은 대학졸업 후 직장에서 깨어지게 되고 또 일부는 결혼 후 직장과 가정의 실질적인 도전을 받게 된다. 즉 결혼 후 자신의 역할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어 양자에서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남한에서는 빈번한 것이다. 물론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이나 교육 분담이 많이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초인이 아니면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중국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녀대생들의 성별사회화를 료해하기 위하여 가능한 대표적인 표본을 대상으로 삼으려 노력하였지만 조사 자료의 수집 중 특정한 학교의 자료에 국한된 경우가 많으므로 그 결과를 일반화하기에는 신중을 가하여야함을 밝히고 싶다. 그리고 본 연구는 녀대생들의 사회화 실태에 대한 자료분석을 중심으로 현상파악에 그쳤지만 앞으로의 연구는 보다 광범하고 대표적인 표본들을 조사 연구하여 두 사회 녀대생들의 사회화과정을 좀더 깊이 있게 조사연구하고 또한 어떻게 이와 같은 형태로 녀대생들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는가하는 그 과정에 대한 분석이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운남소수민족대학에서 열린 전국녀성학학술회 발표론문 2008.5)                      《少数民族女性学学科建设与妇女发展》(中文版)                                         --- 云南民族出版社 出版 2008.8
10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독립정신 드높인 의사 윤봉길 댓글:  조회:4872  추천:75  2010-04-02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독립정신 드높인 의사 윤봉길 윤봉길의사 "상해홍구공원의거"78주년을 기념하여 연변대학 한국학연구중심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뜨락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력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있던 숨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력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 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뒤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여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였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여난 집안은 몰락한 량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살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살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여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력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련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수 있었다.     1926년 19세되던 해《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력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리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례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리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였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리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여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 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리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우기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량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림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리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림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림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것을 맹세하였다.     《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앞 》      력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래왕하면서 듣고 본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 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래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죽일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것이나 숲속에 자고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래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것을 나는 확신하고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것과 똑같은 리치이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여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시위를 펼치고저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프랑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렬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여나가 지니고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였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채 13년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우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들어 짐짝처럼 차 뒤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팔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륙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륙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 되였음.     처형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것이니 지금에 림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였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였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력사속에서 살아숨쉬고있다.     안중근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만큼 호전되였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림시정부에 대한 물심 량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꼬, 꾸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림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리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땅을 밟게 된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림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난 어린이가 깊은 련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락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것이다.     상해의거로 림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림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림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림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였다. 독립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력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림시정부에 의한 의렬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림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림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림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림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련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만보산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련합전선이 형성되였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만큼 상해전쟁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량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림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락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림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림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없는 외교적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세계의 각광을 받은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세계가 놀랐다. 림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립증하고 과시한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성과는 가히 짐작될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래동안 친일로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림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령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것이라고 해석한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후 첫 국민장이 엄수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음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력사적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력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력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였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량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량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량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대를 세운 렬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력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켤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력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한국명인연구》에 수록                                             연변인민출판사    2007년 7월 출판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제279페지-제281페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 백범일지 김구 저 제289페지-제294페지 서문당 출판. 3. 윤봉길의사 상해의거의 력사적의의 신용하 백범 김구기념관. 4. 윤봉길의사의 출생과 가정환경 윤남의 홈페지 자료. 5. 선구적인 농민운동가 윤봉길 한호선 농협중앙회. 6.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륙군성 극비문서 월간조선 2002년 5월호. 7. 선구적인 개혁운동가 윤봉길 한호선 농협중앙회. 8.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와 가나자와순국의 의의 윤병섭. 9. 광복의 력사인물 제260페지-제263페지. 조동걸 한국 국민대학교. 10. 윤봉길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 신용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9    우리민족 녀성형상의 시대적 변천 댓글:  조회:3947  추천:66  2010-03-20
                 우리민족 녀성형상의 시대적 변천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연구원  강 순 화     머리말     력사상 그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시대의 영웅이나 사회의 전형으로 내 세우는 녀성 역할모델로서의 녀성형상(女性像)은 한개 특정한 사회현존문화의 한 부분으로 그 사회에서의 녀성지위와 작용을 반영하며 또한 그 사회의 발전수준과 문명정도 그리고 그 사회의 주류로 되고 있는 가치관념과 전통의식 및 사회적 심리를 반영한다. 때문에 녀성형상은 줄곧 문학, 사회학, 민속학, 녀성학 등 여러 분야에서 중시되고 탐구되여 온 주제의 하나였다.     녀성형상의 특점 및 그 변천에 대하여 분석 정리하고 계통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학 각도로부터 우리나라 각 력사시기의 거대한 변천을 인식하고 그 시대의 정치환경, 경제발전, 문화풍토 등 부동한 사회현실속에서 용솟음쳐 나온 녀성형상들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인정하는 면에서 홀시 못할 하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연구방법    주요하게 근, 당대 중국조선족 녀성 영웅형상과 사회주의건설시기, 개혁개방시기 녀성형상에 대한 문헌연구와 조사의 방법을 결부하여 통계학적인 분석을 위주로 하였다. 총체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현실사회 생활 중 녀성들에게 공유한 주류형상과 그 특징을 인식하고 묘술하자면 량적 방면의 대량적인 통계와 개괄이 수요된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사회발전의 각 력사시기에 각종 도서출판물과 신문매체들을 통해 전파되고 홍보되여 온 녀성역할 모델들은 바로 그 시기 녀성형상을 대표하는 한면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 시기에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또한 선택, 추대된 그들은 바로 그 시대 주류문화의 가치관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 사회에서의 리상적인 녀성형상을 대표할 수 있다고 본다.    본 론문에서 탐구해 보려는 것은 항일전쟁시기인 1930년대로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한 8-90년대와 근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의 녀성형상은 어떤 것이였는가? 이런 형상들은 어떤 력사적 특점을 가졌었는가? 그후 각 시기 녀성형상은 대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녀성형상의 변화발전 중 우리는 사회의 어떤 변천을 보아낼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시대가 요구하는 녀성형상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필자는 70만자에 달하는《당대중국조선족녀걸》상,하집에 수록된 112명 녀걸(女杰)과 2000년대 연변조선족 10대 녀걸에 대하여 년령, 직업, 정치면모, 문화정도, 사적(事績)상황 등을 조사통계하고 30년대부터 건국 이전, 건국 이후부터 문화혁명 이전, 문화혁명 이후부터 개혁개방 이전, 개혁개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네개 시기를 나누어 녀성형상의 몇가지 특점을 분석연구해 보려 시도하였다.      1. 년령구조특점 : 매 부동한 시기의 년령 특점을 따져보니 30년대부터 건국이전까지의 녀성형상에는 20세미만이 38%, 20세 이상이 62%로 그 평균년령은 21세밖에 안되는 젊은 녀성들이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15-16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혁명에 뛰쳐 나선 독립의용군전사, 항일투사, 학생운동가와 토지개혁시기 농촌 부녀간부들이였는데 여기에는 항일련군 지도자 리조린장군의 부인이며 항일투사인 김백문, 조선의용군전사이며 2등영예군인인 리화림, 전국 농업로력모범 김명성, 청춘을 후방 근거지 창설에 바친 40년대 료녕성 특등로력모범 최룡실 등 녀성 인물들이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는바 건국 전 중국사회에서의 조선족 녀성형상은 기본상 청년녀성들이였다.    건국 후 문화혁명이전까지의 녀성형상에는 20세 이하가 16%밖에 안되고 20세 이상이 84%나 되며 그 평균 년령은 25세로 나타났는데 전 시기보다 평균 4세 증가된 셈이다. 이 시기 녀성형상에는 청년의 비례가 하강되였고 대신 중년의 비례가 많이 증가되였다. 여기에는 고아 넷을 키워 인재로 만든 1등 영예군인 한향옥, 광명을 안겨주는 천사로 불리우는 연변병원 안과주임이며 전국 3.8붉은기수인 심옥진교수, 겨레의 구슬로 불리우는 국가일급안무가이며 길림성로력모범인 최옥주, 시간과 경쟁하는 녀인으로 불리는 연변고무공장 제화공이며 전국로력모범인 석순희 등이 있었는데 당시 인구보편조사결과와 대비할 때 이 시기 녀성인구와 녀성형상의 년령분포는 비교적 합리하게 분포되여 있었다.   《문화혁명》이후부터 1978년까지의 녀성형상에는 20세 좌우가 33%이고 30세 이상이 67%나 차지하여 그 평균 년령이 31세로 증가되였다. 즉 이 시기에 와서는 청년녀성의 비례가 진일보 내려가고 중년녀성의 비례가 현저히 상승되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고객의 참된 벗으로 불리는 길림성 로력모범 고순옥, 광산의 딸인 전국<5.1>로력모범메달 수상자 김경혜, 모든 지혜와 힘을 후대양성에 바친 전국 우수소년아동사업일군 박순덕, 서안에 핀 진달래-섬서성 로력모범 정숙자 등이 있다. 이 시기의 년령구조를 보면 녀성청년 년령이 진일보 내려가고 중년 녀성 년령비례가 현저히 상승되였음을 볼 수 있다.    1978년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의 조선족 녀성형상에는 20대가 16%뿐이고 30대가 25%이며 40-50대가 59%나 차지하여 그 평균년령은 39세로 올라갔고 2000년에 와서는 녀성형상의 평균년령이 44세까지 올라갔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바 녀성형상은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와 중로년 녀성의 비례가 다섯 시기 중 최고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시기 녀성형상에는 우리말 교수연구의 개척자인 흑룡강성의 김순희, 강소성 민족단결모범이며 중학고급교원인 류연, 버림받은 생령들의 천사로 불리는 전국특수교육모범 리계영, 하늘과 인연을 맺은 녀인- 중국우주항공연구소 고급공정사 장정자, 농민기술원 왕진영, 연출가 방미선, 로인들을 친 부모처럼 모신 광영원 부원장 김신옥, 백화점의 총경리 원수월 등이 있었다.    녀성형상의 년령변화는 일정한 정도에서 중국의 사회적 변천을 반영한다.  건국 전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와 국내 통치자들의 압박착취하에 짓밟히고 억눌린 조선족녀성들은 사회의 최하층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므로 과감히 사회에 뛰쳐나오기 매우 힘들었다. 물론 일부 글이나 좀 읽은 신 녀성들이나 독립군 후대들이 가정울타리를 벗어나 용감히 혁명활동에 참가하였지만 필경 소수였으며 그 년령도 어리였다.     건국 직후는 신,구 두 사회의 거대한 변혁시기였다. 수백년래 억압당하였던 광대한 녀성들은 해방을 받아 나라의 주인으로 되었으며 한피 또 한피의 젊은 녀성들이 륙속 새중국 건설의 선줄군으로 나섰다. 그들은 부녀해방의 앞길을 대표하였고 나라건설에 있어어도 홀시 할수 없는 력량으로 되었다. 특히 사회주의건설이 생기발랄하게 전개되고 있은 50-60년대에 와서 각종 년령층차의 취업 부녀수는 모두 대대적으로 증가되였고 그들이 각 전선에서 취득한 성과도 뚜렷하였다.   《문화혁명》이후부터 1978년 이전까지의 상황은 중국《문화혁명》영향의 직접적 실례로 되고 있다. 이 시기에 성장된 한 세대의 청년들 한테는 불가피적으로 시대가 조성한 일부 부족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젊은 녀성들이 녀성역할 모형에 오름이 극히 적었고 50-60년대의 젊은이였던 한피의 중로년녀성들이 다시금 녀성형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청년녀성 년령비례가 하강되고 중로년녀성 년령비례가 증가된 국면을 초래한 기본 원인이다. 10여년이나 지속되였던 중국사회의 대 동란은 이곳에서도 깊은 상처를 남겨놓은 것이다.    1980년대 이후부터 활발해진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사회적 환경은 천백만 조선족녀성들이 마음껏 재간을 피울 수 있는 광활한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아울러 항창 사업의 황금시기에 들어선 중년녀성들은 각개 령역에서 눈부신 성과를 따내여 그들로 하여금 이 시기 녀성형상의 명실에 부합되는 대표인물로 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녀성형상의 년령 구조가 최대로 높아간 기본 원인이라고 본다.    2. 정치신분특점 : 정치신분은 주요하게 녀성형상 중 중국의 집정당인 공산당원의 비례와 정계인물의 비례로부터 통계하고 분석하여 보았다. 정치적 비례가 가장 높은 시기는 건국 이전으로서 100%의 공산당원에 92%의 정치활동가였다. 건국 후《문화혁명》이전까지를 보면 그래도 81%의 당원에 16%의 정계인물이였는데《문화혁명》이후부터는 그 비례가 신속히 하강되였다. 그후 두 시기 녀성형상 중 중공당원의 비례는 각각 50%, 52%밖에 안되고 정계의 인물은 8%, 7%밖에 안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아 낼수 있는바 사회풍운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도 변화하고 있으며 정치색채도 급속히 약화되고 있은 것이다. 이는 바로《문화혁명》이후 사람들이 정치투쟁이라던가 정치운동에 랭담해지고 렴오를 느끼는 사회적 심리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녀성형상에 대한 가치척도도 정치제일로부터 사회적인 정신문명과 물질문명 창조에로 옮겨진 것과도 련관되는 것이다. 따라서 녀성형상의 정치적 내용도 점차적으로 감소되고 있는 객관현실로 보여졌다. 그런데 2000년의 연변10대 녀걸에는 정계인물은 없지만 90%가 당원으로서 사회풍기가 경제제일로부터 어느 정도 다시금 정치신분을 중요시 하는데로 전화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듯 하였다.     3. 직업결구특점 : 직업은 녀성형상의 중요한 사회적 내용이다. 중국조선족 녀성형상의 직업결구를 보면 30년대부터 건국이전 까지는 77%가 정계(政界) 인물이였고 15%가 기층부녀간부 였으며 나머지 8%가 의료위생사업 일군이였다. 건국후《문화혁명》이전까지는 문예체육계가 23%, 공업상업계 19%, 의료위생계 16%, 교육계 13% 등 각 분야에 골고루 분포되여 있었다. 《문화대혁명》이후부터 개혁개방 이전 까지는 체육계가 29%로 제일 높고 다음 공상(工商)계가 16%였다.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는 주요하게 교육계가 32%로 제일 높고, 과학기술계가 18%이며 문예체육계, 공상계, 의료 위생계가  각각11%였고 정계는 7%밖에 안 되였다.    이와 같이 부동한 력사시기 녀성형상들의 직업 비중은 부동하였으며 모두 일정한 변화를 표현하였다. 즉 건국이전에는 정계가 위주였다면 50-60년대에 와서는 문체, 공상, 정계, 교육위생계가 모두 자기들의 녀성형상을 내세웠으며《문화혁명》후에는 비교적 집중적으로 교육계, 공상계에서 녀성형상이 나타났고 개혁개방 이후엔 더욱 큰 변화를 가져와서 교육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계가 뚜렷이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기업계에서 녀성강자들이 두각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7%)  2000년 연변 10대 녀걸을 보면 상업과 복무업종에 50%, 과학연구와 문화교육이 30%, 농업 목축업이 20%로서 개혁개방 후 시장경제체제의 주류 흐름에 따른 녀성형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보다시피 각 시기 녀성형상들의 직업분포는 그 시기의 특점을 나타내고 있는데 건국 전 항일투쟁과 조국해방투쟁에서의 녀성영웅들의 혁명활동과 건국 후 나라건설시기 녀성선줄군들의 역할은 모두 중국의 신,구사회 모습의 진실한 재조명 이였다. 특히 개혁개방이래 나라적으로 사업의 중점이 경제건설로 옮겨진 후 전 사회에서는 교육을 중시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이런 사회적 변천은 녀성형상의 직업결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교육계, 과학기술계의 비례가 신속히 제1위로 상승한 것이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고위지식층의 녀성형상이 놀라울 정도로 많아졌으며 동시에 녀성기업가와 전업기술 골간 인물들이 륙속 나타났다. 즉 지식형, 전업형, 관리형의 직업형상이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2000년의 녀성상에서 나타난 상업위주 농업위부의 사실은 경제개혁에 따른 사회적 변천에 의해 산생된 녀성형상의 변화를 보여주며 더 깊이 있게 분석해 볼 때 녀성형상의 직업소질의 제고와 녀성형상을 평가하는 사회가치관, 사회심리가 진일보 전업성, 경영성에 돌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문화소질특점 : 문화정도 혹은 지식수준은 한 인간의 소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표지의 하나이며 또한 녀성형상 중 홀시 할 수 없는 한가지 내용이다. 부동한 시기 녀성형상의 문화적 소질을 고찰해 본 결과 30년대부터 건국 이전까지는 중학이상의 문화정도가 38%, 소학이하가 62%였다. 이는 해방 전 우리 조선족녀성들의 문화정도가 보편적으로 낮았던 객관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이 시기에는 문화지식이 녀성형상 내용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건국 후 각종 교육제도의 신속한 보급과 제고는 녀성들의 문화소질을 재빨리 제고시켰다. 특히 교육을 중시하는 조선족들로 말할 때 그 발전속도는 매우 놀라웠다. 녀성형상 중 중학이상의 문화정도가 건국 후《문화대혁명》전까지 71%로부터 그후 두시기 모두 100%로 상승되였으며 대학문화정도도 건국 전 15%로부터 그후 세 시기 각각 26%, 48%, 52%로 제고 되었다. 개혁개방 후 녀성형상 중 반수이상이 대학졸업생이라는 이 수자적 사실은 중국 현실사회에서 광대한 조선족 녀성들의 문화소질이 질적인 제고를 가져왔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중국사회도 날이 갈수록 지식인을 중시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는 녀성형상의 지식화 과정이며 전 사회의 현대화 과정인 것이다.    5. 사적(事績)특점 : 낡은 사회의 전통문화에 따르면 녀성에게는 사회의 사업이 없고 녀성의 존재의의는 오직 가정에만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녀성의 역할이란 오직 안해, 며느리나 어머니로 만이면 다였다. 새 중국 건립 후 낡은 전통관념에 의존되던 사회기초는 점차 타파되고 한세대 또 한세대의 신 녀성들이 부단히 자신의 사업을 개척하고 창조하여 왔고 허다한 감동적인 사적들을 엮어 왔으며 각 력사시기 녀성형상의 사적특점도 부동하였다.    건국 이전에는 혁명활동가들의 사적형상이 위주였는데 주요하게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싸워 온 가렬처절한 환경속에서 육성된 전쟁마당의 영웅사적들이였다. 건국후《문화혁명》이전까지는 복구건설에서 공훈을 세우고 각 령역에서 업적을 창조한 사적들이였으며 인민을 위하여 전심전의로 복무하는 사적 등이 절대적 우세였다. 이는 새중국의 신 녀성들이 나라건설사업에 떨쳐나선 후 표현된 거대한 로동열정과 숭고한 정신면모를 반영하였다. 소박한 사상감정, 자기를 잃고 가정을 잃고 사회에 나서서 일심으로 사업하는 정신은 이 시기 직업녀성들의 주선률이였다.   《문화혁명》이후의 정황은 점차 변화를 가져와 본 전업에 노력하고 업적을 창조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기는 하지만 50-60년대에 비하여 어느 정도 하강되고 반면에 고심연찬하여 과학성과를 따내고 후대양성사업에서 공훈을 세운 등 사적형상이 상승되였다. 특히 개혁개방이래 과학기술전선과 고등교육령역에서 고급지식인들이 악전고투하여 놀라운 연구성과를 취득한 사적이 주요한 형상으로 상승되고 기업계의 녀성강자들과 문체계의 세계급 명장들의 사적형상이 돌출히 나타났다. 2000년 연변 10대 녀걸도 반수이상이 과학기술과 문화교육 및 전업성이 강한 사업중의 선줄군들이였다. 이러한 결과는 바로 시대와 사회의 발전 과정 중 우리 녀성도 점차 생산로동형으로 부터 전업형, 개인성과형과 전면발전형으로 전화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총적으로 볼 때 상술한 다섯개 방면의 결과는 비교적 높은 일치성을 보여 주는데 개괄해 보면: 건국 이전에는 젊고, 낮은 문화층의 정계인물로서 당원과 기층간부의 혁명활동 사적을 위주로 하는 녀성형상이였다면 건국 후 50-60년대에 와서는 중등문화정도의 젊은층의 로동모범, 생산능수의 업적이였고 70년대 말부터는 중년녀성으로 비교적 높은 문화층의 문교, 과학 의료일군 위주의 개인성과형, 복무형 등 다종다양한 형상이 특징으로 되였다. 80년대 이후부터 2000년에 이르러서는 높은 문화층의 중로년 과학일군을 대표로 전업에서의 성취나 녀성강자식 사업업적이 주요특징으로 되고 있었다. 녀성형상의 이러한 특점은 부동한 측면에서 중국 각 력사시기 사회의 풍모와 거대한 변화를 보여 준다.    당대 중국 조선족 녀성형상들의 수년간 알찬 노력과 눈물겨운 사적들은 그야말로 감격 없이는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토록 정열에 넘쳤으며 그토록 간고분투하였고 또한 저마다 녀성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혁명선배들의 피어린 발자취는 물론이거니와 건국초기 혁명렬사안해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 발벗고 나선 그 장거, 조국건설에서의 특등 로력모범, 백의전사, 광산의 딸과 개혁개방이래 뛰여난 성과를 올린 녀과학일군, 훌륭한 명문대 학부장, 녀기업가들의 감격적인 사적들은 그야말로 남성이 할수 없는 녀성들로서의 특유한 기백과 재능, 노력과 분투의 결실들이였다.     리상적인 녀성상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의 개혁개방시기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녀성형상은 어떤 것이여야 하는가?  아래에 몇가지를 나렬하여 보자.    첫째, 녀성형상은 응당 사업형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랜시기 사회의 공인을 받아왔고 또 역할 모형으로 내 세워왔던 방향인물들이다. 마치 사업은 공적이고 생활은 사적이므로 공(公)을 위해서라면 사(私)는 영원히 희생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렬거한 중국조선족 녀성형상들도 그 대부분이 사업을 위하여 가정을 잊었고 지어 사업 때문에 자식을 종신 불구로 만들어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어머니도 있었다.     녀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모든 조건이 주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 시기 사회생활 조건 하에서 이런 단순 사업형은 녀성들에 대한 불공평한 요구이며 오직 가정의 희생으로만이 사업의 성과를 취득할 수 있다는데 그치게 된다.    둘째 관점은 녀성이라면 우선 현처량모의 생활형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남성들한테서 나오는 견해인데 그들은 녀성들이 관념상 심리상에서 더욱 전통화할 것을 희망하며 녀성은 응당 남성을 받들고 남성에 의뢰하며 가정에만 발을 붙혀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남성청년들의 배우자 선택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업형이거나 개성이 강한 녀성강자는 싫어하며 반대로 온순하고 순종하며 믿음직하고 가사일을 잘하는 녀성을 더 좋아한다. 이런 남녀 녀성관의 차이로 하여 녀성 대학졸업생이나 녀성 석, 박사연구생들이 저학력 처녀들보다 배우자를 찾기 힘든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부류 사람들의 요구나 평가는 시대의 발전에 뒤떨어짐은 물론 사회와 녀성들의 인정도 받을 수 없다. 광활한 사회적 무대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음을 인식한 현시대 녀성들의 추구는 오직 한 남편과 자녀 그리고 자기가정 뿐인 것이 아니라 한개 완정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사업형이여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생활형이여야 가장 완미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런《전면형》의 녀성형상은 녀성자신들의 자아실현의 요구이며 또한 사회발전의 필연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사회에서의 중국부녀들은 바로 사상, 도덕, 관념상 갱신되고 심미관념이 진일보 승화되는 계단에 처해 있으므로 이런《전면형》의 추구는 녀성발전의 요구이며 새로운 심미리상인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현대 중국녀대생의 76%가 이런 전면형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녀성의 내재적 소질에 더욱 높은 요구를 제출함으로서 녀성 자신은 문화, 정치, 도덕, 업무 등 면에서의 완벽화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가사로동의 현대화와 사회화를 완전히 실현하지 못한 현시대 중국의 실정에서 이런 이중 부담의 리상적 욕망은 실현하기 퍽 힘든 것이다. 이런 사업의 강자와 가사로동의 능수는 확실히 비범한 재능과 뛰여난 정력이 안받침 되어야 하며 또한 리상적인 혼인과 행복한 가정이 겸비 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완전완미한 환경과 능력은 사실상 녀성들만의 추구와 노력으로 모두 쉽게 실현될 수 있는 일은 아닌것이다.    그렇다면 당전 어떤 녀성형상이 가장 실제적인 추구로 될 수 있는가?    《전면형》의 추구는 바로 녀성들의 자아실현의 추향을 반영하고 있음으로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문명에 따라 점차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녀성들은 사업의 주인으로 되려하며 또한 현숙한 안해, 따사로운 어머니로 되려 한다. 녀성해방의 과정이 바로 녀성자신을 부단히 완선화하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데 인구가 많고 생산력발전이 불 평형한 중국실제의 복잡한 사회조건과 녀성자신의 소질차이는 녀성형상을 한 모형에 맞추어 넣을 수 없다. 즉 부동한 류형에 따라 사회와 가정이 수요하는 다층차, 다류형의 형상을 수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가정에 남편을 초과하는 녀성과학자가 나올 수 있고 반면에 남편의 성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안해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안해들의 희생과 전업주부현상이 보편적인 것으로 되고 있지만 중국사회에서는 아직 소수의 형태이다. 가히 말해 우리가 추구하는 녀성형상에는 동량형, 기초돌형, 작은풀잎형이 동시에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힘의 강약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그들 모두가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과 자주권이 있으며 부동한 위치에서도 사회의 발전과 녀성들의 진보에 공동하게 공헌하고 있으므로서 모두가 그 특유의 존재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의 녀성의 취업과 사회활동의 증가는 녀성의 사회지위를 크게 제고하였고 녀성들은 이로부터 전통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평등한 사회성원이 되었다. 현실사회에서 녀성에 대한 평가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남편은 안해가 마음속의 벗처럼 사상을 교류하고 상호 리해하며 상호 방조할 것을 수요하며 아이들은 어머니가 먹고 입는 것 뿐이 아닌 자기들의 환상과 의문을 해답해 줄 것을 바란다. 또 모든 가정성원들은 모두 다 더욱 풍부하고 취미있는 업여생활의 향수를 추구한다.   《현처량모》의 전통표준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녀성들은 오직 착실한 지식, 능란한 기능만이 사업과 생활의 경쟁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공고케 할 수 있는 것이다. 녀성들은 자신의 문화소질 제고에 따라 더욱더 사업상 자강하고 감정상 독립하며 혼인상 자주를 요구하게 된다. 결과로 녀성들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지위는 진일보 제고되고 시간과 정력은 합리한 분배를 얻게 된다. 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대 성시들에서 부부쌍방의 가사로동 공동 담당수는 조사수의 89%라고 하였다. 이는 녀성들의 가사로동 부담을 경감하고 더 많은 시간과 정력으로 사회와 직장에 진출하여 자신의 총명재질로 인생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 주고 있는 것이다.      맺으면서      문명한 사회는 문명한 인간을 요구하듯이 사회가 발달하고 인간의 정신면모가 밝아질수록 녀성형상에 대한 시대적 요구차원도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녀성들에 대한 한차례 도전이며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 사회의 획기적 발전은 녀성형상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또한 녀성형상에 부단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해 준다.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대륙의 놀라운 발전은 녀성형상의 다양한 역할과 진보에 훌륭한 조건을 지어주고 있다.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허영심과 맹목성을 버리고 자만하거나 자비하지 않으며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고 자기의 개성에 따라 인생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 녀성들이 걸어야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녀성형상은 력사와 시대의 흐름속에서 더욱 풍부화되고 완미화되여 나갈 것이다.                                                     (2004년 한국이화여대여성연구원에서의 발표론문)    
8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5) 댓글:  조회:3897  추천:57  2010-01-17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5)        五. 조선족교육에 관한 몇 가지 건의     상술한 조선족교육의 엄중한 실태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민족교육의 개혁과 발전에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아래와 같은 몇 가지에 중시를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고 짚어 보고 싶다.     1. 조선족 중소학교 교사대오의 건설을 가강하여 교사의 소질과 수양을 한층 제고하여야 한다. 학교교육에서 교사의 작용은 관건적인 것이다. 교사는 학생의 교육자, 조직자이며 관리자이다. 응당 량호한 사회수양과 연박한 지식 및 풍부한 교육관리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목전 상황을 볼 때 교사대오가 불 온정하고 그 분포가 불균형하며 교사대오의 질이 떨어지는 등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결손가정 자녀가 근 반수를 차지하는 현 상태에서 학교의 교육은 더욱 중요한 이중의 짐을 떠메야 하기에 교사대오의 온정과 질 제고는 급선무에 놓이고 있는 것이다. 교사는 응당 현실에 립각하여 글을 잘 배워줌과 동시에 부동한 가정환경의 학생들을 잘 리해해 주고 관심해 주며 그들 심리속의 공백을 메워주어야 할 것이다. 교사는 교육가이며 심리전문가요, 건강한 인격을 키우는 설계사이고 보호자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지식을 얻을 뿐 아니라 인격의 존중도 받게 하여야 하며 친인들의 사랑도 받으면서 심리와 사상이 건강하게 성숙되고 발전되게 하여야 한다. 하기에 교사대오의 자질 제고는 학교교육에서의 중점 과제인 것이다.     2. 각급 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의 실제 정황을 잘 조사하고 중시하며 제때에 상급에 반영하여 정부 유관 부분의 지지와 협조를 받아야 한다. 특히 학교교육은 학생들의 성장을 끝까지 책임지는 분위기를 형성하여야 한다고 본다. 당전 적지 않은 중소학 학생들이 안정된 학습 환경이 없기에 여러 가지 심리적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안정감을 상실하고 자포자기하며 정상적인 인격 발전에 장애를 가져오고 있다. 학교와 정부 교육부분에서는 응당 이 문제를 중시하고 시급한 조치를 내와야 할 것이다. 례하면 국가적으로《전탁학교》를 많이 꾸려 통일적인 관리를 한다던지, 학교에《사랑의 집》을 마련하거나 결손 애들을 집숙하여 그들의 학습과 생활을 직접적으로 관심하는 등 오직 정부, 학교, 가정 이 삼자가 결합하여 노력해야 만이 조선족교육의 문제들은 점차 해결 되여 나갈 것이다.     3. 청소년들을 정확하게 인도하고 방조하여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것은 민족교육의 발전방향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전 사회는 일떠나 이 문제를 관심하고 그 해결책을 연구하며 청소년학생들의 신심건강에 유리한 사회 환경을 형성하여야 한다고 본다. 목전 전 자치주 조선족학생의 절반을 넘는 결손자녀들은 사회의 관심과 사랑을 정녕 바라고 있으며 특수한 교육방식을 수요하고 절실하고 효과적인 실제 조치들을 박절히 요구하고 있다. 례하면 교원이나 가장들이 심리상담을 통하여 그들의 아픔을 제때에 해결해 준다던지 결손자녀 가장학습반을 꾸려 정확한 자녀 교육방법을 가르치고 가정의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강좌를 조직하며, 학생들의 과외 사회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각가지 실천경험들이 이미 많은 학교들에서 모색되고 있는데 이 면에서 계속 연구되고 개혁 되여야 할 것 같다.     맺는 말     교육의 핵심 목표는 학생들의 전면적인 발전을 촉진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수요에 부합되는 인재로 양성되게 하는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교육열과 교육수준이 가장 높고 자녀의 교육에 가장 헌신적인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낮은 출산률의 원인의 하나로 흔히 자녀교육에 대한 높은 기대가 꼽히는 리유도 여기에 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 갈수록 부모의 교육비 부담은 더 늘어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교육비 부담 급증은 학부모들이 돈벌이를 위한 해외와 외지에로의 대거 이동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조선족사회에 보편화 된 부모자식간의 별거는 도리여 조선족 교육에 심각한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학생수의 감소로 인한 학교 폐쇄 및 조선족 학교 교육의 부실화는 민족 언어를 기초로 하고 있는 조선족 정체성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교육의 어려움은 새로 형성되는 코리아타운인 대도시의 조선족에게 더욱 심각하다. 그곳에는 조선족학교가 없거나 있어도 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민족교육문제는 조선족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이며 우리민족공동체의 생사존망에 관계되는 문제인 것이다.     상술한 민족교육에서의 문제들이 시급한 해결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청소년들의 신심 건강과 학습 성적은 물론 우리 민족사회의 조화와 안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되며 학생들을 덕, 지, 체, 미가 전면 발전한 나라의 건설일군으로 배양함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각급 교육 부문과 유관조직들에서는 응당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하며 모든 사업의 의사일정에 올려놓고 학교교육에서 나타나는 엄중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21세기는 우리 조선족사회에 무한한 희망과 기회를 부여해 주고 있다. 그러나 기회 자체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도전과 천혜의 기회를 성공으로 이끌려면 현 사회 제반분야에 대한 적시적인 반성과 검토, 특히는 경쟁시대에 대비하는 전략차원에서의 인재양성 기반인 민족교육에 올바른 자세정립이 절실히 요청된다. 교육은 민족의 삶의 표현이자 민족 존재의 기준이다. 때문에 조선족 교육은 반드시 후대교육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차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 되여야 할 것이다.                                                                  (2007년8월 학술회발표론문)
7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4) 댓글:  조회:3532  추천:52  2010-01-17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4)   四. 조선족 중소학 학생들의 주요문제    연변자치주 조선족 중소학 학생현황 3%선택조사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문제들을 보아냈다.   첫째, 조선족학생 다수가정의 학습 환경이 온정하지 못했다.    전 자치주 조선족학교들에서 소학 학부모 출국률은 40.2%에 달했고, 중학 학부모 출국률은 39,2%, 고중 학부모 출국률은 32.4%였다. 도시와 농촌으로 갈라 보니 도시 학부모 출국률은 39.2%, 농촌 학부모 출국률은 28.7%였다. 가정생활이 안정하다고 하는 학생은 절반(50.8%)밖에 안 되는데 그중 소학생은 43.7%, 중학생은55.3%, 고중생은 61.7%였다. (2004년 사회조사자료) 즉 도시소학교의 저급학년일 수록 부모 출국률이 더 높고 가정도 안정되지 못하였다. 어린이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처음부터 제때에 학습기초를 잘 닦지 못한다면 성적을 높이기는 어려운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학교, 가정, 사회가 결합된 완정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신심이 건강한 나라의 건설일군으로 배양됨은 어려운 일인  것이다.   둘째, 다수 조선족학생들의 학습 성적이 높지 못하다.    고등학교 입시 기회의 확대와 학생수의 감소로 인한 진학 경쟁의 약화는 학교교육의 질도 떨어지는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산자녀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인구 감소가 급속한 조선족의 경우 더욱 심각하게 표현 된다. 선택조사에서 밝혀진데 의하면 조선족 중소학 학생들 중 학습 성적이 비교적 좋다고 자부하는 학생이 21.5%밖에 안 되며 중등수평이라고 하는 학생이 35.9%, 성적이 차하다고 자백한 학생이 42.6%나 되였다. 학습 성적이 차한 원인은 다방면인데 주요하게 가정환경, 경제압력, 학습곤난, 부모의 장기분거와 가정불화, 사회압력, 동학지간의 모순 등등으로 나누어 졌다. 엄중한 것은 소학생의 9.2%가 동학지간의 모순으로 밝혀졌고 중학생의 8.9%가 공부보다 인터넷 게임에 더 흥취를 가진다는 것이다.  일부 결손 자녀들은 가정에 안착하지 않고 공부에는 싫증내며 심지어 가출까지 하여 몇 날씩 PC방에서 날을 새는 현상까지 비일비재라고 한다.   셋째, 중소학 학생들의 돌출한 문제는 가정교육의 결핍이다.    학생은 학교에서의 정규적인 덕, 지, 체, 미의 전면적 교육 외에 부모의 가정교육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조사에 의하면 집에 돌아가 부모와 대화한다는 학생은 79.5%로서 20%이상의 학생은 가정의 따뜻한 사랑은 물론 집식구와 대화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부모가 다 떠나가고 항상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생활하는 애들은 하학하여 집에 가도 별로 말할 상대가 없다고 한다. 모 중학교 반주임의 말에 의하면 반급에서 학부모회의를 열면《독보조》회의가 되고 말며 회의 끝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구동성으로《우리 손자(손녀)를 선생님에게 맡깁니다.》하는 말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가정교육이란 먹이고 입히고 공부하라는 소리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선택조사 수치에서 보면 27.8%나 되는 가장들이 돈벌이만 생각하고 자녀의 성장에는 무관심하며 35.8%의 가장들이 자식들의 먹고 입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즉 1/3이 넘는 가정들에서 학부모의 낮은 가정교양 수평으로 하여 학생들의 학습과 올바른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넷째, 학생들의 학습목적과 리상에 문제가 있었다.    교육은 리상사회를 실현하는 전략적 조치이며 교육의 주요 임무는 나라를 건설할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조사에 의하면 조선족 중소학생의 21.7%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공부한다고 하고 34.3%가 부모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공부한다고 하니 결국 반수이상 학생들의 학습목적이 불명확한 것이다. 그외 장래에 큰 인물이 되고 싶다는 학생은18.8%, 좋은 건설일군이 되겠다는 학생은 겨우 5.9%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족 중소학생의 70여%가 독신 자녀인데 이들은 온 가정에서 꼬마황제, 꼬마공주로 받들려 자랐으므로 항상 자기밖에 모르며 남에게 양보하려는 정신이 거의 없고 남을 도우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이런 성장환경은 자연히 자사자리정신만 키워 왔으므로 공부를 하여도 결국에는 자기나 자기 가족만을 위할 생각 뿐인 것이다.                   (위의 %수자들은 모두 2004년 사회조사자료임)
6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3) 댓글:  조회:3359  추천:47  2010-01-16
     조선족의 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3)      3. 가족 분산과 자녀교육          10여년 전만해도 조선족사회에서 류학생이라면 부러움의 대상이였다. 농촌에서는 우수한 학생만이 도시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들 다수가 일반학생은 가기 힘든 고중과 대학에 진학한다. 다시 말해 외지로의 류학은 우수학생, 모범학생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요지음 외지 학생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농촌학교의 폐쇄로 각급 도시 주변의 조선족 학교들에는 외지학생의 비률이 급속히 증가되였고 또 많은 학교들에서 학교재정과 관련하여 외지학생 유치활동을 벌리였다. 그런데 가정과 부모를 떨어져 지내는 외지 학생들은 흔히 문제학생 또는 불량학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중소학 학생현황 선택조사(2004년)에서 보면 전 자치주의 조선족학생 중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학생이 겨우 46.8%를 차지하였고 부모가 출국한 가정이 38.7%, 부모가 리혼한 가정이 7.9%, 부모가 사망(단방 혹은 쌍방)한 가정이 1.65% 하여 이 세가지가 48.25%나 차지하였다. 여기에다 부모가 관내 타지방에 나가 취업하고 있는 가정을 포함하면 반수이상의 학생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어 가정의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연길시 조선족소학생 부모의 출국률은 43.4%, 리혼률은10.8%, 부모 사망률은 1.5%하여 55.7%의 학생들이 단친(單親),무친(无親)자녀로 되고 있으며 부모와 함께 있는 학생은 겨우 41.1%밖에 되지 않았다. (2004년 후에도 계속 증가추세를 보였음) 어떤 반급은 심지어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학생이 1/4도 되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학생들은 부모와 가정의 사랑을 잃었기에 자비감으로 하여 정서가 불안하고 반항심리로 하여 쉽게 불만을 토로하며 또 부모 단속의 결여로 일탈행위와 학습성적 하락을 보여주고 있다. 외지 부모들은 자식에게 미안해 그 보상심리로 돈을 풍족하게 보내주면 애들은 오히려 PC방과 같은 바깥 유혹에 빠지기 쉽고 돈을 망탕 써버리는 등 경향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애들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니며, 부부 별거의 결과로 부모가 리혼하게 되면 학생은 더욱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혹 부모의 리혼이나 또 다른 리유로 돈도 보내지 않을 경우에는 그 학생은 절망하게 되고 지어는 범죄의 길로 나가는 현상까지 발생한다.      가령 부모가 “나는 너를 위해 한국에 돈벌려 왔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은 불법과 위장으로 리혼, 재결혼을 해 한국에 가 놓고 나보고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라거나 “내가 필요할 땐 내 곁에 없어 놓고 나를 사랑한다는 건 말이 되는가?.” 하는 응답이 거침없이 나온다고 한다. 5-6년 7-8년씩 부모가 외국에 나간 애들은 엄마아빠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하간 학생과 부모의 별거는 당면 조선족중소학교의 중요한 문제거리로 등장하였다.      많은 학교들에서는 그 해결 조치로 학생 대상의 심리자문실을 설치하여 경상적인 상담을 하고 있으며 문제가 비교적 많은 반급은 특수반으로 정해 특별교육을 진행하고 또 결손자녀들을 조직하여 여러 가지 사회교육과 야외활동을 벌리는 등 사회와 학교, 교원과 동학들 지간의 사랑모임으로 결손 애들의 부모사랑을 미봉해 주는 동아리 활동들을 벌리고 있었다. 일부학교에서는 또 방학 기간을 리용하여 이런 결손 학생들의 한국단체 방문을 조직하여 오래 동안 갈라졌던 부모들을 만나 보도록 하였다. 한국방문을 통하여 많은 학생들이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직접보고 자기들이 편안하게 공부하고 있는 것이 부모의 희생과 바꾸어 오는 것임을 느끼면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고 한다. 이런 활동은 오래 동안 부모와의 별거로 인해 학습생활에 어려움을 격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지도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 방문 후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고 우울감과 소외감에서 벗어나 생기롭고 진취적으로 바뀌는 학생이 많아진다고 한다.
5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2) 댓글:  조회:3408  추천:54  2010-01-16
조선족의 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2) 2. 조선족교육의 환경변화 주로 농촌에 마을을 형성하여 벼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던 조선족농민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영향으로 인한 자신들 생활의 실제적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년 내내 땀 흘려 농사한 수입이 생산비용을 떼고 나면 도시에서의 두석 달 로임보다 못하고 외국에서의 한달 로임도 되지 않으니 아예 땅을 버리고 농사를 뿌리치며 외지에 가서 일거리를 찾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게다가 1992년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로 인한 “한국 풍”의 거세찬 물결은 조선족의 생활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수십 년간 삶의 근거지로 가꾸어 왔던 농촌 촌락의 해체는 산골 마을에서 시작 되여 점차 도시에서 가까운 농촌과 조선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자치현에 까지 이르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데 의하면 연변에서도 괜찮은 농업기지였던 안도현 석문진 모 촌에는 원래 70여 호의 인가가 오붓이 살았었고 150여명의 감농군 로동력이 있었는데 90년 이후로 련속하여 젊은층들이 도시로 빠지거나 해외에 로무송출로 나가고 지금은 겨우 7-8호의 인가가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농사짓는 로동력은 20명도 되지 않는데 그것도 대부분 60좌우의 로인들로서 일년 농사를 지어 겨우 민식이나 해결하고 있는 편이였다. 버려진 땅은 관내 한족들이 몰려와서 도맡아 농사를 짓고 있으니 조선족들은 마을도 땅도 다 빼앗겨 가는, 농촌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2002년부터 조선족사회 지성인들은 각종 매체와 세미나들을 통해 “조선족 집중 촌을 건설” 할 데 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선족은 교육을 중시하고 부모들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술한 조선족사회의 환경 변화는 오늘날 조선족교육에 엄중한 후과를 만들고 있다. 저 출산률과 인구이동으로 인한 학생수의 감소는 농촌학교의 폐교와 가족의 분산을 조성하고 나아가서는 가족과 민족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진다. 2000년 인구조사 보고서에서 계산한 인구 추이표에 의하면 2003년 초를 기준으로 소학생에 해당되는 집단(4-10세)의 규모는 그 이전의 소학생 집단(10-15세)에 비해 절반도 못 미치는 형편이다. 1988년생이 소학교에 입학하는 1994년부터 학생수의 급격한 감소가 명확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추세를 그대로 연장하면 조선족 초중은 2000년부터, 그리고 고중에서는 2003년부터 급격한 학생수 감소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고 이미 그렇게 표현되고 있었다. 연길과 룡정사이에 있는 모 촌에서는 1997년에서 1999년에 걸쳐 두 단계로 소학교의 폐쇄가 이루어 졌고 연길시 외각 모 진에서는 7개 마을의 7개중학교가 한개 중학교로 통합되였으며 소학교도 7개가 하나로 통합되였다. 3000여호의 조선족들이 모여 살던 룡정시 지신향은 현재 1000호의 인가도 되나마나하게 줄었고 지난해 소학입학생은 한명 밖에 안 되여 하는 수 없이 이듬해에 입학할 두 학생을 앞당겨 합하여 세명의 입학생으로 한개 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족 학생수가 감소됨에 따라 조선문 교과서나 학습자료의 인쇄부수가 줄어들어 책값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농촌교육은 더 큰 곤혹을 겪어야 한다. 원래 기초가 박약하고 교원대오 수준이 낮은 농촌교육이 경제난으로 수업에 필요한 서적까지 구매할 수 없어 교수질은 내리막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교수실험의기나 컴프터 등 현대화 교수시설을 갖출 수가 없어 도시와 농촌의 교수질 차이는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조선족 학생수의 감소에 뒤따른 학급수와 교원의 감축도 불가피하므로 교원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고 교육 진지를 버리고 다른 업종을 찾는 교원들이 놀라운 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조사에 의하면 연길시 중점 소학교들에서 근 10년간 매 학교 평균 4-50명의 골간 교원들이 직을 버리고 국외나 관내로 나가거나 또 다른 기업에 취직했다고 하는데 전 자치주의 조선족 중소학교를 통합하면 최근 10년간 도합 4200여명 교원들이 출국, 이동 혹은《하해》하였다 한다. 자치주 교육학원의 한 설문조사에서《당신은 한평생 학교에서 사업하기를 원하는가?》하는 물음에 46%의 교원들이《조건이 허락되면 학교를 떠나겠다》고 하였고 그중 훈춘시는 그 수가 63%나 되였다 한다. 이렇게 불 온정한 심리 상태로 사업하는 교원 대부분이 젊은층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이미 대도시 조선족 중소학교에 까지 확산되고 있으니 그 영향이 종국에는 전반 조선족교육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현대화 계획에 따른 고등교육기회의 확대와 학생수의 감소로 인한 상급학교 진학의 경쟁이 약화되므로 하여 교육의 질도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한편 교육질의 저하는 도시 조선족학생들의 한족학교 선호를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어 자녀를 한족학교에 보내는 부모들도 부쩍 늘고 있다. 그들의 리유라면 중국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그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한어 실력인데 조선족학교에서는 고급한어 실력을 갖추기가 어렵고 또한 앞으로의 디지털시대에서 영어가 성공의 필수 조건인데 조선족학교에서는 대부분 외국어과로 일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시대는 민족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 보다 넓은 중국 사회에서 주체 민족과 경쟁하면서 살아야하는데 이러한 실용적 측면에서 조선족 학교 교육의 적절성에 문제가 제기 되는 것이다. 반대로 한족의 경우 한국과 중국의 경제교류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이를 담당할 한국어를 아는 한족 인력이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따라서 한족들이 조선족학교를 졸업함은 좋은 취직기회의 보장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려 하는 것이다. 연변대학 인문학원 조선어학부 학생(한족)들의 졸업분배에서도 보다시피 전반 학생들 대부분이 졸업 한 학기 전에 벌써 대외무역국, 해관, 세무소, 변방부대, 외사처, 번역국과 외자기업 등 좋은 직장들에서 취직요청을 받군 한다. 특히 한국기업들이 조선족보다 한족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고 중국정부도 한국어 전문인재를 선택함에 있어서 조선족보다 한족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한족의 조선족학교 선호도 동시에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두가지 경향은 조선족 교육의 새로운 방향 모색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현상으로 판단된다. 동북삼성을 넘어 보다 넓은 지역에 사는 조선족들에게는 자녀의 학교선택 여지가 별로 없이 거의 대부분이 한족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이래 산해관을 넘어 남쪽 연해지구로 돈벌이를 나간 사람들이 20여만을 넘는다고 추정하고 있으니 그 자녀들의 교육문제는 확실히 실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외지에 가서 돈벌이를 하게 되니 집에 남겨 놓은 애들도 문제거니와 데리고 간 자녀들을 교육하려면 기숙학교인 외지 조선족 학교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비용 문제가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되고 있다. 여하간 조선족의 지역적 분산은 조선족의 민족교육에 많은 새로운 문제점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4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1) 댓글:  조회:3558  추천:51  2010-01-16
  조선족의 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1)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중심 강 순 화      1. 조선족과 민족교육    조선반도 밖에서 살고 있는 500여만 우리민족 동포사회에서 근 200만이나 차지하는 중국조선족은 그 특성 또는 정체성의 특징으로 민족 언어와 문자, 민족전통, 민족의식, 그리고 높은 교육열을 꼽을 수 있다. 자녀 교육을 천직으로 간주하여 온 우리 민족은 이주초기 극빈의 상황에서도 마을만 이루면 우선 서당부터 세워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또한 일찍 새 중국의 창립과 더불어 중국의 그 어느 민족에 앞서 조선민족 집거지인 연변 땅에 자신의 민족대학을 세웠다.     조선족의 교육수준은 줄곧 중국 56개 민족 중 그 어느 민족보다 높다는 점에서 조선족이 교육에 대한 중시는 쉽게 확인될 수 있다. 13억 인구를 포용하고 있는 거대한 중국 땅에서 200만이란 조선족은 그야말로 창해일속의 미세한 존재이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는 교육수준이 높고 문화소질이 높은 민족으로 널리 알려져 줄곧 우량한 우리 민족교육의 우수한 전통을 자랑해 왔고 또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발전시켜 온 것이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계몽과 발전은 초기 이주민가운데의 선각자들이 직접적인 교육의 조직자이고 담당자였던 것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지만 그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은 한반도에서 이어 온 유교문화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족은 세세대대로 교육이야말로 사회적 위세와 인간의 존경을 가져다주는 근본으로 보아 왔기에《먹물을 먹어야 사람이 된다》,《글을 읽어야 출세한다》던가《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등 관념들이 가슴에 배인 좌우명으로 되고 있었다. 때문에 개혁개방 이후 음식점이나 다방 혹은 장사거리 등 개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조선족 부모들은 자식이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교육을 많이 받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종사하기를 더 바라는 것이 보편적 현상 이였다.    조선족교육의 또 하나의 특징은 민족교육에 대한 강조이다. 그것은 조선족의 집거현상과 연관된다. 거대한 중화대국의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한 소수민족으로서 기나긴 세월동안 자기민족 공동체의 기본적 존립을 지켜온 것도 바로 끈질긴 민족교육의 결과이며 교육의 장인 학교가 그 매개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84만이 넘는 조선족인구가 집거해 있어 삼백여개의 조선족중소학과 민족종합대학까지의 교육체계가 완결되어져 있다. 이런 민족교육의 기회는 바로 중국의 올바른 소수민족정책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집거지에 조선족학교가 세워져 집거지의 발전에 촉진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민족교육의 강화는 또한 독특한 문화의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였다.    민족교육이 집중거주의 요인이 되였다면 거주 집중의 약화는 자연히 민족교육의 약화를 불러 오게 된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조선족의 낮은 출산율로 인한 인구의 마이너스성장과 “한국 열”, “도시 열”로 표현된 인구 이동의 거대한 물결은 90년대 중반이후부터 시작하여 농촌학교 학생수의 급감을 불러 왔고 이로 인한 농촌학교의 폐쇄가 잇달게 되였다. 학생 래원은 고갈되고 그 파장은 점차 초중 고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선족 학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였다.     중국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연변에서 조선족학교의 신입생수 및 재학생수는 전체적으로 하강선을 긋고 있는데 그중 농촌의 경우가 특히 심각하다. 2001년 연변지역 농촌학교의 학생모집수는 도합 421명으로 1995년의 모집 수에 비해 82%나 줄어들었으며 재학생수는 1995년에 비해 67%나 감소 되였다고 한다. 중국조선족의 집거구가 농촌위주이고 조선족이 아직도 농경위주인 점을 감안할 때 농촌교육의 위축과 황폐는 전반 조선족 교육과 조선족 사회의 발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3    유태인 자녀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 댓글:  조회:4821  추천:62  2009-11-22
유태인 자녀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                                   강 순 화     흔히들《유태인은 우수하다》고 말한다. 력사상에 이름을 남긴 각계의 1인자만 들어도 위대한 사상가 칼 맑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스타인, 에디슨, 심리학자 프로이드, 작가 토마스 만을 비롯하여 로스 차일드와 같은 미국의 재벌이나 경제인, 키신저 전 국무장관,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매들린 울브라잇 전 국무장관, 마이클 블럼버그 뉴욕시장 등 유태계 출신 지도급 인사들을 꼽으려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죠셉 리버만 등 미국 상원의원의 10%가 유태계라고 하니 크게 성공한 유태인은 놀랄만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현재 미국에서 유태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률은 2%(약600만)에 불과하지만 미국의 심장인 뉴욕과 워싱턴의 유명 법률회사 변호사의 40%가 유태인이며 아이비리그 대학교수의 60%가 유태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50대 기업중 17개가 유태인이 경영하는 것이며 세계 7대 메이저 석유회사 중 6개가 유태계 소유이다. 노벨경제수상자의 41%가 유태인이며 전체 수상자의 30%가 유태인이라고 한다.   유태계가 이처럼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유는 일찍부터 유태계가 정치, 금융, 법조계, 학계는 물론 언론계에 이르기 까지 사회 각 분야에서 이미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태인의 이런 특유한 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가? 유태인의 두뇌가 처음부터 우수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만약 민족에 따라 선천적으로 우렬이 있다면 아득한 옛날에 이미 머리가 특히 뛰여난 단일민족에 의해 세계는 지배되였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되풀이 되는 인류의 력사는 인종이나 민족간의 유전학적 우렬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물며 유태인의 5000년 력사는 그 대부분이 박해의 력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태인은 오래동안 조국을 갖지 못한 방랑민이였다. 토지도 돈도 지위도 없는 민족으로 오직 의지할 수 있은 것은 자신의 머리 속에 축적할 수 있는 지혜나 지식 뿐이였다.    사회학자들은 유태인의 파워는 모계사회에서 비록되였으며 유태어머니들의 교육열을 우선으로 꼽는다. 교육열이라 하면 우리민족도 둘째가기 서러워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 유태인과 같은 걸출한 인재가 적은것은 무었때문인가? 우리의 교육이 유태인의 교육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심사숙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지식이다》라는 것은 유태인의 격언이다. 여기에 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숫한 부자들이 호화한 기선을 타고 서로 돈자랑을하면서 세계일주를 떠나다가 그만 해적에게 랍치되여 모든 재산을 다 잃었다. 그런데 몸에 아무것도 없는 한 선비만은 뺏길것도 없이 그냥 한 부두에 내려졌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그곳에서 서당을 차려 크게 번성했다는 것이다.   우리 조선민족도 세세대대로 교육을 중히 여기며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그 어느 민족에 비해 높다고 자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의 교육방법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게 된다. 례를 들어 입시위주의 교육방법이라던가 부모위주의 교육방법, 교원위주의 교육방법 등에서 유태인들의 교육방법과 확연히 다른 점들을 보이고 있다.   아이 본위의 가정교육, 자유롭고 개성이 넘치는 교육방법은 확실히 우리부모들이 배우고 갖추어야 할 자녀교양 상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유태인의 자녀교육은 어떠한 것일가?  《남보다 뛰여나라》가 아니라 《남과 다르게 되라》고 가르친다.   유태인의 어머니는 례외없이《교육열이 있는 어머니》이다. 때문에 유태어머니(Jewish mother)란 말에는 아이에게 학문의 필요성을 귀 아프게 들려주는 어머니라는 뜻이 포함되였다고 한다.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 우리 부모들은 거의 동일하게《학교에 가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태인의 엄마들은 반대로 아이한테《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많이 질문하여라》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인 것이다. 교사가 혼자서 강의하고 학생들은 말없이 듣고만 있다면 많은 앵무새를 기르는 결과이므로 학생은 교사 강의에 질문을 하여야 교사와 학생 간에 대화가 활발해 지면서 교육효과는 상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집에서 피아노를 배우면 우리 애도 배워야 하고 또 모두가 일류 대학을 지망하니 우리 애도 일류대학에 가야 한다하는 생각은 유태인 부모들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리유라면 아이들에게는 제각기 개성이 있는것 만큼 어느 아이나 획일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에 따라 발전시켜야 하며 우렬을 다투면 승자는 항상 소수에 그치지만 누구나 타인과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유태인의 어머니들은 자녀가 다른 아이들과 어디가 다르다는 것을 일찍 발견하고 그것을 육성하는데 정력을 몰붓는다고 한다.《너 문학을 잘하니 이제 수학만 잘하면 일류대학에 들어갈 수 있겠다 》하는 말들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성을 충분히 살리고 머리로 구사하고 두뇌를 충분히 발휘하여 일을 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것은 그들 생활 전반에 스며있는 자연스런 교육적 태도였다. 그런데 같은 머리를 쓰는 방법에도 지식 그 자체를 가르치는 것과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 유태인의 속담에《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수 있지만 물고기를 어떻게 잡는가를 가르치면 평생을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지식을 학생의 머릿속에 옮겨 넣어 어쨌든 시험에 합격하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은 물고기 한 마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체계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하는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배우는 방법을 터득하여 그 방법을 학문에 응용하면 배움의 흥미가 증대되고 따라서 더 깊은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태인은 모든 기회를 통하여 아이의 머리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자녀를 자라게 하는 것이다.   《지식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질수 없다》고 가르친다.    유태인의 격언에는《만약 당신이 살아남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운동하고 일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오직 지식을 갖는 것으로만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력사가 시작되여서 부터 늘 박해에 시달려 온 유태인에게 머리속에 축적된 지혜와 지식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례하면 중세기 유럽에서는 유태인에게 토지의 소유가 금지되었고 직능별 조합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유태인이 가질수 있는 직업이란 의사와 방랑자 뿐이였는데 교육을 받아 의사로 정착하거나 아니면 어느 고장에 수요되는 재간을 익혀 그곳을 돌아다니며 머리를 써서 장사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유태인의 유일한 재산은 지혜라고 한다.   지혜가 결여된 자는 모든 것이 결여되고 지혜를 가진자는 모든것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례를 든다면 19세기 초 유럽의 유태인들은 미국에로의 이주운동이 일어났다. 독일의 바비리아에 페니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는 아이들을 어떻게든지 자유롭지 못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여 미국으로 이주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장남인 조셉을 대학에 입학시키려고 다짐하였다. 로동자로 생계를 꾸려가던 남편은 그런 돈이 어데 있느냐며 반대하였지만 페니는 남편 몰래 조금씩 모은 돈으로 아직 열살인 조셉을 에르랑겐대학에 입학시켰다. 대학에서 조셉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이스어, 헤브라이어 등 6개 나라의 언어를 정통하고 졸업 후 17세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어머니가 준 지페 100달러 한 장 뿐이였다. 지혜를 가진 자에게 신대륙인 미국땅은 장래가 약속된다고 모자는 생각한 것이다. 그후 그는 형제들을 불러 뉴욕에서 은행을 설립하고 자신의 어학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국제 금융시장을 좌우지 하였으며 무수한 이민자 중에서 우수한 인재로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싫으면 하지 말라, 하려면 최선을 다하라》고가르친다.    우리는 보통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여 박사, 교수, 의사, 공정사, 작가, 법관, 경영인 등등 큰 인물이 되라고 말한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해 공부를 잘하라고 강요하며 업여 시간에는 여러 가지 학원에 다니며 재간을 배우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유태인은 커서 무엇이 되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며 장래에 대한 선택은 아이들 자신의 행복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부모의 욕심에 의해 좌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때문에 공부외의 취미활동에 대해 절대 강요하지 않으며 피아노이건 바이올린이건 아이가 배우고 싶다면 배우게 하고 싫다면 그만두게 하는 것이 옳으며 무엇인가는 아이에게 시켜야하겠다는 것은 금물이라고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여야 할 말은《싫으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려거든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힘껏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진해서 하고 싶다고 한다면 거기에 후회없는 노력을 하도록 가능한 충고를 하는 것이다. 자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가 마음대로 선택하여 억지로 하게 한다면 그 효과는 정반대로 될것이다.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그들 스스로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하며 공부하는 분야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힘으로 키워나가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좋은 례가 바로 유명한 정신의학자 프로이드이다. 17세에 비인대학에 입학했을때 아버지의 희망으로 의학학부에 들어갔지만 결국 의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13년간 연구실에 머물으면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의학연구에 몰두하여 종래의 심리학적 수준을 훨씬 릉가한 정신분석 학설을 세상에 내 놓게 된 것이다.     《배움을 중단하면 20년에 걸쳐 배운 것도 2년만에 잊게 된다》   《사람은 평생 배우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유태인이 가진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며 신념이기도 하다. 아무리 재간있는 사람일지라도 배움을 중단하면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배워 온 것을 급속도로 잃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현인”이나 “바보”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있느냐“ ”배우고 있지 않느냐“의 구별밖에 없다고 한다.   유태인은 옛날부터 <책의 민족>이라고 불려 왔다. 그들에게는《돈을 빌려 달라는 것은 거절해도 좋으나 책을 빌려 달라는 것은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속담이 있다. 다른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도 바로 유태민족이 책으로 지혜를 얻어 내여 정의를 끝까지 주장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한다. 평생을 두고도 다 읽을 수 없는 책이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유태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에 비길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한다. 이처럼 학문의 정열을 평생동안 가진다는 것은 대단한 긍지이다. 동양인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배움을 포기하기 일수이며 배운다는 것도 직업이나 결혼을 위한 방패로 삼으며 결혼하여 엄마 아빠가 된 후에는 학문과 인연을 끊고 배우지 않으면 애써 수년간 배워 온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며 이런 부모는 적어도 아이들한테 장차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는 가정교육에서의 중요한 일환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단절은 이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미국에서의 통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갖는 시간은 하루 평균 3분간이라고 한다. 현재의 우리 사회 젊은 아빠들도 크게 례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근하랴 술을 마시랴 2차 3차를 다니느랴 한 밤중에 집에 오면 애는 자버리고 아침에는 서로 제갈 길이 바쁘다 나니 이야기 할 새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유태인 가정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자녀는 어릴때부터 아버지를 일가의 중심으로 존경하고 아버지 역시 구심점다운 행동을 취하고 자녀들은 아버지를 모방하면서 자라는데 공부하는 습관도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배우는 것이 상례라 한다. 평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집에 일찍 들어오며 휴식일이면 아버지는 아이들과 일주일간의 공부에 관한 것과 일주간 일어났던 일들을 빠짐없이 보고하게 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서 아이들에게는 가정의 주인으로서의 아버지 형상이 분명하게 새겨진다. 대화의 시간은 30분 정도이지만 어린이에게는 일주일간의 총 정리를 하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유태인 철학자인 칼 맑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간파하면서 그의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늘 걱정하여 항상 아들에게:《이성을 잃지 말라. 행동을 조심하라, 교양을 쌓도록 하라, 은혜 베푼 사람을 공경하라, 반항적이며 비 사회적으로 흐르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한다. 이것은 유태인으로 말하면 극히 평균적인 아버지상이라 한다.       《세계는 배우는 것과 일하는 것, 그리고 자선을 바탕으로 성립되여 있다》    위의 말 역시 유태인의 속담이다. 제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일을 잘해도 “자선”을 잊으면 세계는 설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태인은 어릴 때부터 작은 저금통을 만들어 주어 “자선용”으로 돈을 모이도록 가르친다. 가난한 사람에게 물건이나 돈을 보내는 “자선”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주입되는 사회교육이다. 물론 어른이 되어도 이 습관은 계속 되는데 풍부한 사람은 수입의 5분의 1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10분의 1을 “자선”으로 돌린다고 한다. “자선”은 라틴어로 <베푼다>는 말인데 유태인은 “자선”은 정의(正義) 그 자체라고 한다. 아이들은 작은 저금통을 매개체로 하여 자신의 생활이 항시 사회와 결부되여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성장해 간다. 때문에 유태인은 남에게 선물하기를 좋아 하는데 그것은 자선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영위해 가는데 당연한 행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지능개발에만 급급하기 보다는 사회에 눈을 돌릴 동기를 마련하는 것이 결국은 건실한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데 기초를 닦아 주는 것이다.    정해진 일은 정해진 시간내에 해내는 습관을 기른다    어린이들에게 습관 속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 까지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오시면 가족 전원이 저녘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하며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며 유효적절한 가족의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이와같이 정해진 일은 정해진 시간내에 마치는 훌련을 항상 철저히 받고 있는 것이 유태인의 자녀들이라고 한다. 또 금요일에는 방과 후 서둘러 집에 돌아 와서 숙제를 마친다음 목욕을 하고 지체없이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모든 일들은 일몰과 함께 어머니가 촛불을 켜 놓을 때 까지 마쳐야 한다는 “규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정된 시간내에 해내는 습관을 자연히 익혀가고 있다.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는데 그때의 선물은 시계를 줌으로서 시간을 랑비하지 않는 인간으로 자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식사는 30분 이내에 하고 아침에는 텔레비를 보지 않으며 기상, 세수, 식사, 옷을 갈아 입는 시간을 정하므로서 시간의 효률을 높이도록 습관한다. 이렇게 어릴때부터 습관되여 오는 시간 관리는 앞날의 능률적인 학습방법을 가지는데 기초로 되고 있다.   유태인에게 시간은 삶의 모든 것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유태인은 불교나 그리스도교처럼 재생이나 윤회(輪廻)를 믿지 않는다. 즉 다시 태여난다는 것을 믿지 않으므로 이 짦은 생애를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는가에 항상 고심하는 것이다.     신체를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이나 외모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들은 몸이 깨끗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고 한다.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할때 맨 먼저가 량호한 위생 습관이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는다던지 항상 자신의 몸을 단정히 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하나의 의무로 되고 있다. 물론 조선족도 청결을 중시하지만 유태인과 다른 점이라면《손을 씻으면 마음도 개운해지고 맑아진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씻으라고만 강요하면 어린이의 마음속 깊이 호소되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유태인이 깨끗한 것을 좋아 하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라고 하는데 중세의 유럽에서 페스트란 전염병이 떠돌아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지만 유태인만은 한사람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인해 오히려 유태인이 페스트균을 우물에 넣었다는 요언이 떠돌아 오히려 박해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위생과 건강에 관한 생활의 지혜가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리도록 유도하므로 이런 습관은 그들이 단정한 태도,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배양할 수 있었다.    로인을 존중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주는 유산이다    로인은 전통의 메신저라 한다. “늙은이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신이 늙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는 격언이 있다시피 인생을 아는 늙은이와 인생을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 세대 간 차이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 부모와 아이들의 두 세대 가족으로 변해가는 문명사회에서 로인들이 푸대접 받거나 문화전통을 잃어버리는 경향들이 보이는 것이다. 가족제도의 붕괴로 로인들이 자녀의 버림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는데 늙은이가 혼자서 쓸쓸히 죽어 한달 만에 발견되였다는 기사도 보인다.    유태인들에게는 문화적 전통을 공기와 물처럼 소중히 여기고 로인들은 전통의 메신저로 생각하고 절때 푸대접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로인을 박대함은 전통을 무시하는 자로 오히려 멸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로인이란 <육체>가 아니라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정신>이라는 사고방식이 확립되였기에 로인을 련민의 대상도 아니며 버려둘 사람도 아닌, 자녀들이 살아가는데 지혜와 충고를 주는 사람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로인들의 오랜 경험과 지혜는 후세에 전하고 젊은이들은 로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려 유태 5000년 력사를 일관하는 삶의 방법을 터득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기회만 있으면 민족의 긍지를 익혀가게 한다    과학, 예술, 문화, 정치, 경제, 금융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태인들은 활약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유태인이야” 하고 기회만 있으면 애들게 가르쳐 준다고 한다. 때문에 유태인계에 위인이 나오면 아이들은 강한 민족감, 친밀감을 보여 주는 동시에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민족이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자랑하듯이 오래동안 조국을 갖지 못한 민족으로서 다만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도우려 하고 튼튼히 뭉쳐지며 두터운 친밀감을 가진다. 또한 우수한 유태인들을 안다는 것으로도 확고한 자신감을 갖게 되며 장래를 위한 격려가 되기도 한다.    우리민족 역시 우수한 민족이지만 우리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 심지어 자기 민족의 언어 문자를 뒤로 하고 앞으로 대륙에서 살아가려면 대국의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우리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므로 그들이 세계에서 이룩한 업적들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너와 같은 성장과정을 거친 조선민족이 해 놓은 업적이라는 우수한 민족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감이 부족하다. 사실 이는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도 사회활동에서의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임을 망각하고 있다.     이상으로 유태인의 자녀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를 살펴보았다. 이 글이 자녀를 키우고 있는 우리민족 부모들에게 저그마한 도움이라도 될수 있다면 그에 만족할 따름이다.             
2    행복한 가정 만들기 댓글:  조회:4053  추천:52  2009-11-10
                                 행복한 가정 만들기                                                                                강순화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가? 어떤 사람은 재물이라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명예라고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가정이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들이 모두 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정은 우리의 피곤한 육체가 안정을 가지고 새 힘을 얻는 휴식터이고 부부간이나 가족 간에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며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재충전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그런데 최근년간 우리 민족사회의 가정들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 시장경제의 충격과 외국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사람들의 도덕관이 흐트러지면서 더 흔들리며 또 서로간의 신뢰가 옅어지면서도 흔들리고 있다.    세상을 둘러보면 국력이 튼튼하고 번영이 따를 때에는 어김없이 가정들이 튼튼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할 때였다. 그러나 가정이 무너질 때에는 나라도 쇠락케 되었음을 력사가 보여 준다. 고대 에집트가 그러 하였고 그리스나 로마같은 사회의 흥망성쇠에서도 이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 어느 시대에서나 가정들이 건강하여야 사회가 건강하기 마련이고 가정들이 흔들리게 되고 허물어지게 되면 사회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튼튼한 가정을 세우고 행복한 가정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한 가정의 문제 일 뿐 아니라 사회전체의 문제요, 나라 전체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 알라바마(Alabama)대학교수인 스티닛부부(Nick & Nancy Stinnet)는 가정들이 해체되고 많은 가정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들은 역시 많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토록 갈라지지 않고 멋지게 잘 살고 있는 가정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25년간에 걸쳐 미국의 50개주 뿐 만 아니라 25개 국가의 무려 일만사천여 가정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고 연구하여《환상적인 가족 만들기(Fantastic Families)》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 이야기 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비결”에 관해 필자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가족 성원들 호상간의 헌신적인 정신이였다.    헌신적 정신은 튼튼한 가정을 세워나감에 필요한 다른 모든 요소들의 토대가 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튼튼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족을 돌보는 일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 하였던 사람들이였음이 발견되였다. 가정에서의 헌신적 정신은 부부간의 헌신을 바탕으로 하여 자식들에 대한 헌신, 부모님에 대한 헌신 그리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헌신으로 넓혀 간다. 가족들은 서로의 헌신적 행동에서 신뢰와 안정감을 얻고 그를 바탕으로 삼아 시련과 실패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이런 가정에 속한 가족들은 자신의 약한 감정이나 약한 모습을 가족에게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 각자의 습관이나 버릇을 서로 인정하고 사랑해 주며 실패나 착오 라 할지라도 모두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둘째는 가족 서로가 감사와 애정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또는 부모와 자식 지간에 형제자매지간에 항상 감사를 표시하고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는 데에 적극적인 가족이 바로 행복을 누리고 있는 튼튼한 가정의 성원들이라는 지적이다. 흔히 우리 조선민족은 “대범하다”는 구실로 감사한 마음과 애정의 표시를 잘 하지 않는다. 사실 가족들 간에 사소한 일에서도 서로 고마움을 말로 드러내고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할 때 서로 간에는 큰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    아래에 한 어머니가 시집간 딸이 아이를 낳고 보내온 편지를 읽고 너무 행복해 한 대목을 보자.  《딸이 아기를 낳고 나한테 편지를 썼어요.〈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정말 기분이 최고로 좋았어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표현할 수 조차 없어요》   엄마는 그 딸을 길러 시집보낼 때 까지 숫한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 한구절에 그렇게 행복해 한 것이다. 언듯 보기엔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이런 작은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 튼튼한 가정의 기초로 되는 것이다.     셋째는 가족 서로 간에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과의 긍정적인 대화는 그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토록 아버지로부터《잘했다》,《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다》는 등의 말을 들어 보지 못하고 자랐던 한 아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도 아버지로 된 후 아버지 무덤에 앞에 앉아 이런 말을 하였다 한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용서했어요. 하지만 아버지처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의 그 같은 양육방식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진정 느끼게 되었어요.》   그는 가정을 이룬 후 가족끼리 서로 사랑의 마음과 감사의 뜻을 표현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항상 서로를 인정해 줌을 명심하며 그렇게 실천하여 그의 가족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넷째는 될수록 시간을 내여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은 꼭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 일주일에 한번 씩은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 미래를 위해 대화를 나누며 가족들의 사소한 기념일이라도 기억하고 서로 축하하여 줌으로서 가정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가족모임이나 들놀이 여행 등 여가시간을 자주 만들어 가족간의 교류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걱정과 불만과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며 절대로 아이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잘하고 있는 것을 부모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켜만 보아 주어도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스트레스와 위기를 대처하는 능력이다.    인생살이란 절대 평탄할 수 없다. 사느라면 가족간에도 여러 가지 골치꺼리가 생길수 있고 생활난에 부딪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이를 정시하고 극복해 나가는가가 삶의 지혜인 것이다.《소리를 지르는 일이 효과적이고 필수적인 때란 오직 집에 불이 났을 때 외엔 없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인내성을 갖추어야 함을 비유한 것이리라. 사랑은 나누면 커지고 불행은 나누면 작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매사에 희망을 가지고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꾸어 가며 가족간 서로 지지하고 고무 격려해 가는 적극적인 분위기라면 생활의 압력은 동력으로 전환될 것이요 스트레스는 저절로 해소되여 갈 것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The Art of Loving)은《사랑은 즐거운 감정만이 아니라 인격이 뒷받침 되는 기술이며 사랑은 받는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주는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랑에 대한 바른 이해가 사랑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일에서의 첫걸음이 된다. 우리 모두가 사랑을 알고 가족 모두에게 사랑을 주며 온 가정에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보자.  세상에 이 이상 더 신나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1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 (강순화2) 댓글:  조회:3578  추천:145  2007-06-02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강순화 연변대학 여성연구중심 연구원           조선족녀성발전추진회 회장세상을 움직이는 손은 바로 요람을 움직이는 손이라고도 한다. 가난하고 말끔한 집안일지라도 오직 그곳에 정직하고 선량하며 근신하고 락관적인 어머니만 있다면 그 가정은 곧 마음의 성당이고 아이들 성장의 락원이다. 녀성은 약자이지만 어머니는 강자라 하지 않는가! 어머니가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은 일생을 이어가는 명줄이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힘이다.    어머니의 손길은 갓 태여난 애에게 온기를 주고 그 온기는 태양과 더불어 자라는 애에게 따스함과 편안함을 안겨준다. 어머니의 미소와 격려는 상처를 치유하는 명약이요, 어머니의 자애로움은 하냥 봄날의 단비마냥 아이들 마음을 적셔 주며 그들이 건실히 자라도록 밀어주는 동력이다. 어머니가 가르키는 옳고 그름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배우게 하며 그들의 정신과 령혼을 맑게해 주어 아름다운 품성과 인생의 가치를 키워준다.      어머니의 기대와 사랑은 이 사회 청소년들의 도덕 질서와 가치체계를 수호하고 있으며 그들이 고상한 품질과 성공적 인생을 만들어 가는 기반이다. 세계적인 위대한 과학자 에디슨어머니의 기대와 사랑을 보자.     학교에서 항상 “하나에 하나를 합하면 왜 둘이냐?” 하는 따위의 괴상한 물음만 들이대는 에디슨을 남들은 정신이상이 아니냐고 하였다. 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아버지는 교장선생을 찾아가《우리애가 장래 무슨 직업을 하면 출세할수 있을가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교장선생의 대답은《당신의 아이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똑같이 출세할 수 없을거요.》라는 것이였다. 이럴듯 어릴때 부터 사람들한테서 이상한 애로 불리여 온 아들을 사랑과 기대의 힘으로 성공의 길에 이끈 것이 곧 그의 어머니였다.    한번은 에디슨의 어머니가 친구들과 함께 애를 데리고 교외에 놀러 갔다. 다른 친구의 아이들은 모두다 강에서 자맥질하고 산에 오르고 하면서 뛰노는데 유독 에디슨만은 강가에 묵묵히 앉아 강물만 응시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가만히 에디슨어머니를 보고《쟤는 왜 강물만 쳐다보고 앉아 있어요? 신경에 문제가 있지 않나요? 어서 병원에 가서 보이세요.》라고 하였다.《우리 에디슨은 아무런 모병이 없어요. 당신들은 몰라서 그래요. 지금 쟤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거얘요. 앞으로 꼭 훌륭한 대학교수로 될 거예요.》에디슨 어머니의 대답 이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구불멸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 그리고 사심없는 방조는 아이를 분발노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이처럼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가 없었다면 에디슨은 훗날 그같이 위대한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사랑과 기대 속에서 성장한다. 기대는 언제나 아이의 특점에 부합되여야 하며 또한 아이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아이에 대한 적당하고 열정적이며 진정한 기대는 바로 성공의 길로 이끌어주는 힘이다. 에디슨의 어머니가 위대함은 바로 그가 자식에 대한 올바른 기대를 시종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들이 출세 못한다고, 쓸모없는 애라고 할때도 그러했고 애가 힘들어 할 때엔 더욱 그러했다.    기대에 넘치는 눈길로 사랑스럽게 애를 바라보는 것은 어머니가 애한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 아이의 성공을 기대하고 인재가 되는것을 기대한다면 인정과 사랑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아이들에게 항상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하며 그들의 흥취와 애호에 따라 자신심을 배양하고 재간을 키우도록 열심히 밀어 주어야 한다.    국외 전문가들의 연구는 부모의 기대가 아이들의 심리발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고 있음을 표명하였다. 성장적 기대는 아이들에 대한 찬상(贊賞)과 격려, 지지와 보살핌이다. 부모와 가정의 이런 적극적인 성원의 분위기는 아이들에게 압력이 아닌 동력으로 된다.    아이들은 조국의 미래이며 부모들의 희망이다. 그 희망은 다양한바 어떤어머니들은 항상 아이의 성적이 높을것을 기대하며 장차 대학을 졸업하고 학술상 성과를 가져올 것을 바란다. 또는 애한테 경영자의 두뇌가 있어서 장래 큰 돈도 벌수 있기를 바란다. 또 일부는 아이의 흥취를 보아 신체가 건장하고 체육을 잘하며 기록을 돌파하기를 기대하기도 하며 또 어떤 부모는 연약한 아이가 그저 건강하고 평안하게 일생을 보내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많은 경우 어머니의 절박한 기대는 아이가 분발상진하는 동력이 되지만 실제를 탈리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무거운 압력이 될수도 있으므로 그들의 성장에 불리하다. 지나친 기대는 또한 실망도 가져올수 있으며 어머니의 실망적인 감정은 아이들의 정상적인 실수도 큰 문제로 보여지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가 자신이 좀 더 뛰기만 하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때에는 자각적으로 그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는 오히려《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락심하게 되고 신심을 잃게 된다. 때문에 부모는 자신의 욕심에만 의하고 아이들의 실제에는 맞지 않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적인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때 우선 아이의 지력특점과 흥취 애호, 및 개성 특징을 평가해 보고 애들과 함께 그들의 우세는 무엇이고 부족한 점은 어느 면인지를 분석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너무 낮은 기대는 동력을 상실케하고 지나친 기대는 신심을 잃게 만든다. 오직 아이의 실제에 맞게 리성적으로 적당한 분투목표를 제출해야 아이들은 신심가득히 자신의 예정 목표를 향해 분발노력하여 성공의 령마루에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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