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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 생명 존재의 의미
― 咸亨洙의 시세계
장춘식
1. 서 론
함형수(1914~1946)가 시작활동을 했던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까지의 10여년간을 우리는 문학사적으로 흔히 일제말 암흑기라고 부른다. 1935년의 카프 강제 해산을 전후하여 민족문학의 사회적 환경은 일제말기라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었고, 따라서 민족주의의 신장이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민족문학의 생존 자체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때 우리 시문학의 전통은 상징주의, 낭만주의, 프로시, 민요시 등 운동을 거쳐 점차 성숙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모더니즘과 생명파, 청록파, 등 여러 가지 유파와 역량 있는 시인들이 대거 출현하여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문학 전통의 성숙과 일제말기 사회환경에서의 표현의 부자유라는 모순된 상황에서 시인들의 고민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함형수라는 한 시인과 그의 시작품을 이러한 역사적 환경 속에 놓고 가늠하여보면 비록 양적으로 얼마 안 되는 시작품1)을 남기긴 하였으나 현실과 민족의 생존을 위해 고민한 모습은 다른 어떤 시인에 못지 않게 값진 것이라 여겨진다.
함형수는 1914년 함북 鏡城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함흥고보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가담, 그로 하여 퇴학당한 그는 같은 해 4월, 中央佛敎專門學校 文科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徐廷柱, 金東里 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생활이 어려워 불교전문학교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가 소학교 훈도시험에 합격하여 圖們公立白鳳優級學校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이 당선되어 정식 등단의 절차를 거치기도 하였다. 만주에서도 교원생활을 하면서 시작활동을 계속하여 ������滿洲詩人集������, ������在滿朝鮮詩人集������2) 등에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정신 착란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여타의 재만시인에 비해 함형수는 비교적 여러 사람들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3)
김광림은 함형수를 少年趣味의 典型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대부분의 시들이 5행 내외의 짧은 것들뿐이며 「해바라기의 碑銘」을 능가할만한 작품이 없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적 수준을 낮게 평가하였다. 그의 시작품에서 닫힌 세계의 이미지나 囚人意識을 읽어낸 김시태는 함형수가 인간적으로 보나 문학적으로 보나 시대의 압력에 의해 붕괴되어버린 역사의 한 상처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에게는 출발의 의미가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다. 조규익의 논의가 보다 본격적으로 개진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앞에 든 두 논자들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김시태의 관점에 편중하여 시인의 문학관을 자세히 검토한 동시에 이미지 분석을 통하여 주제적 의미를 이끌어내고 그러한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표현기법까지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함형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생명의 이미지에 담긴 보다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연구들을 참고로 하면서 선행연구에서 파악하지 못한 함형수 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좀더 세밀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2. 현실에 대한 공포와 감상주의
현재까지 함형수의 시를 논의하면서 사실상 그의 첫 작품이 되는 「오늘 생긴 일」(1932)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치한 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16세 약관의 나이로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는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프로시의 영향이 엿보여 의미를 더해준다. 어느 봄날 한 시골 마을의 진실된 생활 모습을 전경화의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첫 연은 그냥 소년의 눈에 비친 봄날의 시골 모습이 펼쳐지고 있는데, 2연과 3연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진솔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三吉이네 아버지 집이 빚 때문에 차압당했다든가, 煙草工場에 다니는 宋아저씨가 “스트라익 密謀” 때문에 ××에 들어간 모양이라 한 것이라든가, 李君이 월사금 6개월 분이 밀려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는 것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시인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송아저씨가 “스트라익 密謀” 때문에 ××에 들어간 모양이라고 한 것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조직적인 투쟁 모습도 암시되고 있다. 시적인 압축이나 승화가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전경화의 표현기법은 오히려 한 마을의 피폐상을 현장감 있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비판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면은 보이지 않는다.
3년 후에 발표된 「마음의 斷片」(1935)에서는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작품에는 하강적, 퇴영적인 이미지로 꽉 차있다. 화자는 “山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즉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도피하지는 않고 “水晶처럼 차게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꽃 꺾으러” 갔다가는 “한줌의 샛(芒)대를 꺾어”온다. 항상 패배로 이어지는 삶이다. 그리고 뭔가를 자꾸만 잃어간다. 기러기떼는 울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배도 수평선 멀리 사라진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어디든지 헤매”는 일 뿐이다. 그래서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일생을 “울도 웃도 못하고” 이 세상을 걸어간 사람으로 규정한다. “울도 웃도 못”하는 삶이라는 이미지는 함형수의 시에서 중요한 주제의식으로 표현된다. 「詩」(1935)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은 비뚜로 붙인 “세잔느 한 폭”, “신경과민된 詩人”이 시를 그렇게 비뚜로 본다고 했으나 사실 그것은 시인이 세상을 보는 시각임을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마음의 촛불」(1935)에서 화자는 “밤 되어야 눈뜨는/가련한 이내 몸이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밤에만 자기 자신이 된다. 낮은 이때 부정의 존재다. “눈부신 아침 태양”을 화자는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화자에게 있어서 낮과 밤은 거꾸로 받아들여진다. 낮을 부정적인 현실로, 밤을 이상적인 현실로 본 것이다. “黎明을 무서워 떠는/새까만 이 내 눈동자여”에서는 현실에 대응할 수 없는 공포가 표현된다. 「손구락」, 「담뇨」 등에서도 작중의 화자는 현실에 대응할 수가 없어 늘 공포에 떨고 있다. 그리고 “납덩지처럼 무거운 침묵의 세계”를 살고 있다.
1935년을 전후하여 발표한 시들은 상당수가 습작품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위에서 분석해본 작품들도 작품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성숙을 보이지만 주제의식은 센티멘탈적인 면을 많이 노출하고 있다. 암담한 현실에 직면하여 공포에 떨면서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20년대 초반의 낭만주의 시풍을 연상케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 대하여 체념하거나 절망적으로 새로운 삶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직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울도 웃도 못”한다는 화자의 태도와 세상을 비뚜로 본다는 표현은 어느 정도의 비판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3. 생명의 예찬
흔히 시인 함형수 하면 「해바라기의 碑銘」을 떠올릴 정도로 함형수의 대표작으로 「해바라기의 碑銘」을 꼽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 한 편으로 함형수의 시사적인 위치를 규정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유가 빈약하다. 그와 같은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험들과 또 상당수의 유사 수준의 작품들이 씌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車中快走스켓치」(1935.8)의 경우 처녀작인 「오늘 생긴 일」과 비슷한 전경화의 기법을 이용하면서도 1935년 전반기의 작품들과는 크게 구별되는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말미에 “一九三五, 七七, 午後 一時 南陽到着”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남양은 당시 조선땅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러니까 화자는 咸鏡線 열차를 타고 南陽 즉 당시 조선과 만주 사이의 국경 도시에 이르기까지의 구간 눈으로 보며 체험한 에피소드를 스케치 식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1
자리를 내여주니 저춤거리다가 안즌 村각시는
될수잇는 대로 나의 視線을 피하러고 애썻다.
4
크다란 村색시 하나 부끄러워도 한하고 국다란 두다리를
잔디우에 뻐더버린채 泰然히 汽車를 처본다.
(이 亂暴하고도 無禮한 過客한테는 禮義가 必要업다고 생각한 게지)
5
논(田)두던에 쉬면서 理由모를 빙글우슴을 車窓에 던지든 얼골 싯거믄村내외.
6
넓다란 新作路를 列을 지어가는 거러지의 一群이 잇다.
7
거츠른 長崎辯의 온나는 늘나의 얼골을 도적질하여 보면서 必要以上으로 어린아이와 짓거렷다.
8
都市와는 퍽 떠러저 잇는가 보아서 바닷가에서 작난치는 계집아히나 사내아히나 샤쓰를 입은 애는 하나도 업다.
9
나어린 보통학교생이 門을 열어주어서 겨우 老人은 便所로 들어갓다.
18
오랜 절도사碑들이 쓸쓸하게 서잇는 고향山이 보인다.
차창 안팎의 전경은 곧 당시 조선 사회의 진실한 모습이다. 윗통을 홀딱 벗은 남녀 아이들, 다리를 퍼더버린 촌색시, 다정한 촌부부 등 차창 밖의 풍경은 자유롭고 고단하나마 생명력을 지닌 조선적 모습이다. “나”의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 부끄럼 잘 타는 村각시, 보통학교생의 도움으로 변소에 가는 노인도 조금은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역시 조선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넓다란 新作路를 列을 지어가는 거러지의 一群은 조선 사회의 피폐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차창밖의 세계와 차 속의 세계가 상당히 대조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문명사회와 비문명사회의 대조로 볼 수 있다고 하면 기차 속의 촌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두려워하고 부자연스러운 반면 차창밖의 촌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보다 자연 친화적이다. 그리고 이때 문명사회가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 사회라는 사실이 밑바탕에 깔려있어 보다 부정적인 것이 된다. 거기에 어딘가 경박해 보이는 온나(일본 여인?)의 거동이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총체적인 이미지는 자연 친화적인, 혹은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생명력이다. 거기에 조선적인 분위기가 가미되면서 민족의 생명력이라는 주제의식이 감지되는 것이다.
1) 소년의 천진무구한 이미지
이 「車中快走스켓치」를 시작으로, 혹은 이 작품을 전후하여 시인은 유사 작품을 많이 창작하고 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이 소년의 천진무구한 이미지이다.
내만 집에 있으면 그애는 배재밖 電信ㅅ대에 기댄채 종시 드러오질 몯하였다. 바삐 바삐 쌔하얀 운동복을 가라닙고 내가 웃방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야 그애는 우리집에 드러갔다. 인제는 그애가 갔을쯤 할때 내가 가만히 집으로 드러가 얼골을 붉히고 어머니에게 무르면 그애는 어머니가 권하는 고기도 안넣은 시라지 장물에 풋콩 조밥을 마러 맛있게 먹고 갔다고 한다. 오랫 만에 한번 식 저의 어머니의 신부럼으로 우리 집에 오든 그애는 우리집에 오는 것이 조왔나? 나뻤나? 퉁퉁한 얼골에 말이 없든 애--- 그애의 일흠은 무에라고 불렀더라?(「그 애--少年行抄」(������시인부락������ 1집, 1936.11.)
「그애: 少年行抄」(������시인부락������ 1집, 1936.11)의 전문이다. 사춘기 소년의 아리송한 연정이 차분히 그려진 산문시이다. 여기서 특히 가난하지만 천진무구한 소녀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명이 숨쉬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간난이는어머니의잔등에업혀찬란한星座를향하여단풍잎같은양손을내어저었고어두운后園에서늙은할머니가경건히合掌하고來生을믿었다. (「星座」)
어머니의 잔등에 업힌 간난이와 星座, 後園에서 경건히 合掌하고 來生의 평안을 비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다분히 조선 서민의 삶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꿈을 안고 길을 떠나는 소년들의 이미지(「求花行」), 사춘기 소년의 눈에 비친 소녀의 이미지(「橋上의 少女」), 활기차게 자전거를 타는 소년의 이미지(「自轉車上의 少年」), 반딧불을 쫓아다니는 소년의 이미지(「螢火」), 빨간 복숭아의 속살을 먹는 소년의 이미지(「紅桃」) 등은 모두 같은 유형에 속한다. 아직 때묻지 않은 소년 소녀들의 천진무구한 이미지는 어쩌면 암울했던 당시 사회의 현실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서민적인 삶이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정체성은 지켜질 수 있다고 할 때, “少年行抄” 계열의 작품을 시인의 자폐적 혹은 퇴행적 의식의 반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2) 해바라기의 碑銘
제목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죽음을 주제로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무덤 앞”이나 “나의 무덤 주위”라는 이미지가 “碑ㅅ돌”이라는 이미지와 연관되면 당연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죽음은 현재의 죽음이 아니라 미래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죽음은 오히려 보다 강한 생명력의 반어적 표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래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래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 없난 보리 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래기는 늘 太陽 같이 太陽같이 하던 華麗한 나의 사랑 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 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나러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해바라기의 碑銘: 靑年畵家L을爲하야」(������시인부락������ 1집, 1936.11)
“차거운 碑ㅅ돌”을 거절하고 선택한 “노오란 해바래기”와 “해바래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 없난 보리 밭”, “푸른 보리 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 등 모두 밝고 싱싱한 생명의 존재들이다. 해바라기는 이름 그대로 태양과 직접 닿아있는 생명의 이미지이고, 보리밭은 다분히 한국적인 생명 상징이다. 푸른 작물이라는 일반적인 식물로서의 생명력 외에도 “보릿고개”라는 말도 있듯이 직접적으로 한국인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특수한 존재가 바로 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는 화자 개인의 꿈, 즉 擴張力을 가진 생명의 상징이다. 거기에 앞에서도 언급했던 “차거운 碑ㅅ돌”로 상징되는 죽음(생명의 다른 형태)의 이미지가 곁들여지면서 생명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신시 75년사상 한 편의 시 때문에(그것도 고작 5행짜리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히 시인이라 불리고 또 시인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사람으로서 咸亨洙를 들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시로 상기 「해바래기의 碑銘」을 들고 있다.4) 그러나 작품이 알려지고 그 작품의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저자에 대한 연구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얘기일 뿐이다. 다음, 시만 알려지고 시인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 말의 이면에는 그 시인에게 그 작품 외에 이렇다 할만한 작품이 별로 없다는 의미도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함형수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앞 절의 분석에서 이미 생명력을 지닌 소년의 이미지에 대해 살펴보았거니와 그러한 소년의 이미지에는 원시 상태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다음 항에서 살펴볼 현실과의 대결을 통하여 어려운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확인된다.
3) 탈출을 시도하는 소년의 이미지
찢어진문풍지로쏘아들어오는차디찬바람에남폿불은몇번이고으스러졌다가는다시살아나고.어두운불빛아래소년은몇번이고눈을감고는창백한과거를그리고암담한미래를낮고부수려애썼다.어지로운四壁은괴롭다괴로운침묵속에잠기고.반이나열려진채힘없는숨을쉬는어머니의입술.소년의얼굴은고통으로가득찼었고.소년의두눈은殺氣를띠고빛났다.아아하룻동안의고달픈노동의피로는그래도어머니에게不自然한熟睡를가져왔으며.가엾은어머니의간난이는지금은시들어버린어머니의젖꼭지도잊어버리고귀여운꿈가운데서천진한그얼굴에기뻤던일슬펐던일두나절光景을쫓고있었다.(「回想의 房」 전문)
이 작품의 이미지는 “어지러운四壁은괴롭디괴로운침묵속에잠기고”를 경계로 하여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즉 앞부분에서는 “창백한과거”와 “암담한미래” 그리고 “차디찬바람에” “몇번이고으스러졌다가는다시살아나”는 현실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그 다음은 그런 암담한 현실과 미래 속을 살면서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견디며 절망하지 않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현실이 암담하고 부정적이지만 서민은 살아있고, 따라서 민족도 살아있다는, 그래서 절망할 수는 없다는 시인의 처절한 믿음이 표현되었다고나 할까.
「무서운 밤」에서는 그러한 시인의 믿음이 현실 부정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사나운몸부림치며밤내하누바람은연약한바람벽을뒤흔들고.미친듣우름치며긴긴밤을눈보라는가난한볏짚이영에모라쳤으나.굳게굳게다치운憎惡의窓에밤은깊어도깊어도한그루의붉은純情의燈불이꺼질줄을모르고.무서웁게어두운밖앝을노려보는날카로운적---은눈동자들이빛났다. (「무서운 밤」)
보다시피 이 작품에서는 띄어쓰기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시작품은 대체로 시인이 <少年行>을 쓰던 1936-1937년경에 보여준 창작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발표연대가 밝혀진 이 유형의 작품은 1937년 1월의 「父親後日譚」이 최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대를 잡아보면 이 시기 시인은 소년시절의 추억을 통하여 어두운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서운 밤」에서 화자는 닫힌 공간에 갇혀있다. 그러나 “하누바람”, “눈보라”, “어두운밖앝” 등 화자를 위협하는 이미지들이 아무리 무시무시하더라도 “한그루의붉은純情의燈불”은 꺼지지 않고 “날카로운적-은눈동자”들을 빛내며 “무서웁게어두운밖앝을노려보”고 있다. 화자는 “굳게굳게” “憎惡의窓”을 닫고 있기는 하지만 체념하지 않고, 실망도 하지 않으며, 더구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며 증오하며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父親後日譚」에서는 그러한 현실 부정이 보다 적극적인 탈출의 시도를 암시하고 있다.
조-그만房안에가친채시껌은눈섭밑으로눈시울을異常하게번뜩이시며아버지는每日몬테크리스트라는길다-- 란小說을읽으셨다.먼-- 放浪의路程에서받은것은무서운疲勞와깨여진神經과그리고어두운追憶.갈곧도맞날사람도인제는없었다.(父親後日譚」, ������시인부락������ 2집, 1937.1)
이 작품에 관련하여 徐廷柱의 회고는 큰 참고가 된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스무살짜리로 그도 나처럼 소년시절에 咸北 鏡城의 고향에서 學生事件에 主謀하여 감옥 구경을 한 뒤였으며, 그는 또 그와 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獄死했다는 그 아버지의 遺書를 그 洋服 저고리 한쪽 안 포켙에 실로 密封해 지니고 있다고 내게 告白해 주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에게도 보일 수는 없다고 해 내게도 그건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5)
아버지는 “눈시울을異常하게번뜩이시며” “몬테크리스트”를 읽는다. 이 소설은 외딴 섬에 갇혔던 억울한 “수인”의 탈출 이야기다.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방랑으로 피로해지고 깨여진 신경, 어두운 추억만을 가진 “아버지”의 탈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위의 서정주의 회고 내용과 관련시켜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탈출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라는 현실에 대한 부정임을 알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화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화자와 아버지의 탈출 시도가 일치한다는 말이 된다. 단순한 현실 부정이 아니라 탈출을 염두에 둔, 탈출을 꿈꾸는 현실 부정이어서 적극적이다.
앞에서도 띄어쓰기가 무시된 작품을 살펴보았지만 발표 년대가 분명한 작품으로서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띄어쓰기와 행, 연, 단의 구분을 전혀 하지 않은 작품들을 많이 발표한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은 대체로 산문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문체적 의미에서 보면 띄어쓰기의 포기는 시에서의 분명한 표현을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희미한, 몽롱한 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독자의 측면에서 1937년이라는 시점에서 일제의 강력한 문화통제 하에서 보다 강한 현실부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몽롱한 표현을 의식적으로 이용했으리라는 점과 시인의 몽롱한 현실인식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요컨대 함형수는 「해바래기의 碑銘」을 전후하여 인간의 생명의식을 시의 주제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한 생명의식은 이른바 조선정조라고 하는 민족적 생명력과 연관되면서 암울한 시대 한민족의 끈질긴 생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의 생존 확인은 현실 부정과 현실에서의 탈출이라는 적극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지면서 이 시인의 시사적 가치를 인정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4. 암울한 현실과 민족 생존
함형수가 정확히 어느 해에 만주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家族」이라는 시를 ������滿鮮日報������ 1940년 3월 1일부에 발표한 것을 보면 이때에는 이미 만주에 정착한 뒤인 것 같다. 같은 해에 발표한 「正午의 모랄」(������滿鮮日報������, 1940.6.30)은 그 이전의 작품들과는 뚜렷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이전의 작품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유파의 영향이 감지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는 자동기술법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화자에게 있어 모랄은 이제 도덕이 아니다. 어디에도 있고 그래서 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파편같은 이미지들이 난무하며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다. “모-랄은 웃는다 모-든 눈물뒤에서/모-랄은 운다 모-든 웃음뒤에서” 했을 때 모랄은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행동의 기준으로서의 모랄이 아니다. 자동기술법에 의해 기술된 무질서 속에서 총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설과 풍자와 불만의 정서다. “모-랄은 계란속의 都市計劃/―계란을 삼킨 D孃의 주동아리” 했을 때 모랄은 풍자의 대상이다. “어디에서도/무수히 무수히/ 지절거리고/不平하고/싸히고/밀려드는/모-랄 모-랄……”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불만과 비판의 정서이다. 거기에 나의 “그라쓰컵속에서” 우는 “시름꼿”과 떠도는 “구름”이 어울리면 시인이 늘 가지고 있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세계에 대한 인식이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아미와 같이」(������人文評論������, 1940.10)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작품에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다분히 느낄 수 있다. 연결된 의식이나 개념의 파악이 아닌, 이미지의 파편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총체적인 이미지의 느낌은 불만이고 역설이다. 「개아미와 같이」라는 표제는 아스팔트에 넘쳐나는 사람이라는 비유로 쓰인 외에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 다음 나열된 이미지들은 그 개아미와 같이 많은 인간 속의 사연들이다. 「나의 神은」(������만주시인집������, 1942.9)도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역설과 풍자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하나의 손바닥 우에」 오면 왜서 시인이 현실을 역설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나는 하나의 피투성이된 손바닥밋테 숨은 天使를보앗다
時間의 魔術이여 物質이여 몬지 갓튼 感傷이여
天使가 깨여나면 찟어진 空間을 내음새가 돈다
아름다운 皮膚의 湖水여 노래의 忘却者여 깨라
眞理의 빗(光)치여 어두운 寢床이여 돌(石)이여 눈물이여
나는 하나의피투성이된 손바닥우에 異常스러운 天使를 보앗다.
(「나는 하나의 손바닥 우에」 전문, ������만주시인집������, 1942.9)
여기서 天使는 眞理의 상징이다. 현실세계가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이라고 할 때, 부조리에 파묻혔던 진리가 깨어나면 “찢어진 空間”에는 냄새가 돈다. “노래의 忘却者”라고 할 때 진리는 그런 난투장 같은 현실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화자는 비분강개한다. 그리고 불합리한 현실세계 속에서 진리는 이상스러워 보인다. 현실이 너무도 참혹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인은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白衣詞」와 「高麗磁器頌」이 그 증거이다. “白衣”가 백의동포 즉 한민족의 상징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현실세계의 모든 것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백의는 그저 “고요한 관념 속에서/침착한 思慮를 돌이킬 뿐”이다. 그리고 늘 반성하고 淨潔을 고집한다. 그것이 민족정신일 것이다. 무서운 혼란과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고귀한 정신, 거기에 정숙한 예절과 차디찬 觀照가 잠겨 있다고 했으니 현실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정신만은 아직도 정히 살아 있음을 시인이 믿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高麗磁器頌」도 마찬가지다. 곡선과 색채를 통해 감지해낸 고려자기에 대한 시인의 극찬은 바로 한민족의 생명력에 대한 확인임에 다름 아니다. “고귀한 思念”이요, “不死의 靈氣”라고 한데서 우리는 그러한 민족적 정기에 대한 암시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민족의 역사와 예술혼에 대한 경도는 곧 민족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놀란 듯 쫓긴 듯 黃昏의 江畔에
옹송그리는 우아한 무리
오오 높다라히 울지도 못하고
검은 땅만 파헤치며
구슬피 코울음 운다.
노을진 핏빛 하늘에
貴로운 뿔 고추들어 사슴아
저무는 아리나리 江畔에
눈 내리감고 초조를 눌러라.
아아 江畔에 해는 깜박 저물었다.
연약한 네 다리
자꾸만 구르지 말고 사슴아
아득한 역사의 흐름에 귀 기울여라.
(「黃昏의 아리나리曲」 전문, 권철교수의 기록에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사슴이다. 황혼의 아리나리라는 강반에서 사슴은 “높다라히 울지도 못하고/검은 땅만 파헤치며/구슬피 코울음 운다” 그래서 화자는 “저무는 아리나리 江畔에/눈 내리감고 초조를 눌러라”고 위안하고는 이제 깜박 저문 후에 “아득한 역사의 흐름에 귀 기울여라”고 한다. 역사는 길며 그 역사에 귀 기울이면, 즉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사회는 섭리에 따라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시인의 믿음일 것이다. 이것을 시인이 살았던(작품의 창작 연도가 밝혀지지 않아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식민지 시대 말기의 현실과 관련시켜 생각해보면 시인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 역사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5. 결 론
함형수는 일제말 암흑기에 시단에 나타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체험하며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시인이다. 당시의 시인들이 대개가 그러하지만 그는 너무도 짧은 삶을 살았고 남겨놓은 작품 또한 매우 적다. 그러나 작품이 적다고 「해바래기의 碑銘」 한 편만을 남긴 시인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해바래기의 碑銘」을 전후하여 그는 적잖은 유사 작품을 창작 발표하고 있다. 천진무구한 소년의 이미지를 통해 생명의 원시적 상태를 보여주었고 「회상의 방」, 「부친후일담」 등 작품을 통해서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 부정적인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언제나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실이었고 비뚜로 혹은 거꾸로 된 현실이었다. 그래서 「정오의 모랄」이나 「개아미와 같이」 등을 통해서는 역설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였으나 민족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적극적이었고 역사 속에 민족은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은 잃지 않았다.
요컨대 함형수는 어두운 시대 생명 존재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면서 생명에 대한 예찬으로 민족의 생존을 확인하였고 그것을 통해 역사의 공정성을 믿었던 시인으로 우리 시사에 의미있는 자취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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