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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있다. 공부만 잘하면 어련히 높은 대접을 받을줄 알았는데 기대치가 허물어져나온 한탄 비슷한 소리라 하겠다. 꼭 같은 품을 들이고도 한 사람은 와신상담의 쓴맛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청운의 뜻을 이룬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가, 책갈피 번지는 일도 공부겠지만 어떤 생각을 갖고 번지느냐가 더 큰 공부다.
요즘 세상은 글로벌 시대이다. 길거리, 차안에서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아이, 어른 모두 핸드폰을 꺼내 들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찾으며 분주히 보낸다. 손바닥만한 핸드폰에 그처럼 넓은 세상이 담겨져 있고 또 손쉽게 그 지식을 공유한다니 신비스럽기만 한데 후날 학생이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세상이 될가봐 걱정스럽다. 갈고닦고를 반복하는 과정이 없이 값진 보석을 얻으려는 성급함은 조장발묘와 일맥 상통한 짓일 뿐이다. 통설 인간을 3차원의 존재라고 일컫지만 체통에 령혼을 불어넣으면 곧장 4차원 존재로 업그레이드한다.
그렇다면 타인과 구별되는 나만의 령혼은 구경 어떤 모양새일가, 둥글가 모날가 아니면 그릇의 형태에 따라 변하는 무변무각의 존재일가. 자신의 넋을 다듬지 않고 남의 태도나 행위를 흉내내는 우습강스런 인간은 아닌지 가끔 자신의 이마를 짚어본다.
혹시 잔꾀를 부려 여기저기 홈페이지 내용물을 둘러맞춰 자신의 것처럼 버젓이 내놓고 자랑하지 않았는지 또는 세상사 삐뚤어지게 해석하여 타인의 빈축을 사지 않았는지를 증삼이 하루 세번 성찰하듯 자주 거울에 비춰본다.
공부란 텅빈 머리속에 한점두점 금싸락을 집어넣는 공정이다. 금방 뭍에 올라와 펄떡펄떡 뛰는 생선같은 싱싱한 령혼이 창조물의 골격을 이루고 살을 붙여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형성한다. 무한정한 의식공간중심에 항상 엄숙한 철학이 기둥처럼 인간의 령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삼국연의》를 세번 읽어본 사람과 말을 걸지 말라는 설이 있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아는 총명보다 한가지를 투철하고 풍부하게 알고 있는 확신성이 풍운조화를 헤아리는 영웅의 지략을 낳았기때문에 그 앞에서 언감생심을 론하랴. 호반처럼 넓고 깊은 사색은 생명력이 왕성한 리론을 숙성한다. 오늘 굳잠에서 깨여난 사자의 표효가 중화민족의 우렁찬 함성이라면 시대의 부름앞에 어떤 자세로 다가 설 것인가가 우리 매개인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인생교과서에 어설픈 생략부호를 찍는 일이 없이 글줄마다 시종일관하게 꾸준히 참답게 탐구하는 사람이 멋진 답장을 써낼 것이고 오로지 자신의 령혼을 무르익힐 줄 아는 사람만이 풍요로운 가을언덕에 올라 향긋한 열매를 움켜쥐고 환히 웃는 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길림신문 201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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