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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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다녀보며 (안병렬)
2010년 06월 14일 08시 02분  조회:2466  추천:54  작성자: 안병렬

경주를 다녀보며


안병렬



경주는 내 고향이다.

나는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 할아버지께서도 경주에서 나시고 자라시고 사시다 경주에서 돌아가시고 경주에 묻히셨다. 나 또한 경주에서 나서 자라고 비록 지금은 타향, 아니 타국에까지 흘러 들어와 살지만 언젠가 경주로 돌아가 묻힐 것이다. 그러므로 경주는 나에게 영원한 고향인 것이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셔서 그를 안내하여 안동에 가서 하루 묵고 오늘은 경주엘 갔다. 모처럼 들르는 고향이다.

먼저 불국사엘 갔다.

아련히 지난 날이 그리워졌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가 처음 불국사에 갔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차로 금방 가지만 그때는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동방역을 지나 불국사역에 내려 약 30분을 걸어서 불국사에 닿았다. 선생님을 따라 줄을 지어 재잘거리며 갔던 것이다. 그러나 절 앞에 이르러서는 옷들을 바로 하고 조용히 하였다. 특별히 선생님이 시키신 것도 아닌데 그 분위기가 그렇게 엄숙하게 만든 것이다. 옛날엔 그 밑으로 물이 흘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청운교 백운교를 지나 사찰 경내로 들어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았다. 다보탑은 참 아름다운데 석가탑은 왜 이리도 재미없는가 여기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 탑에 얼킨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던 기억도 떠올랐다.

석굴암에 올라갔다. 그 옛날엔 쉬어 쉬면서 올랐는데 오늘은 차로 금방 올랐다. 그러나 석굴암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옛날엔 앞에 아무 것도 가리운 게 없어 석굴 안으로 바로 들어가 부처님 뒷 모습도 보았는데 지금은 앞 모습만 보게 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동 서 쪽으로 건물이 들어서서 아늑하던 풍경이 번잡스러워진 듯하여 안타까웠다. 석굴 자체를 유리로 막은 건 석불 보호 차원에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옆 건물은 좀 떨어져 지었으면 좋았으련만 왜 그렇게 바짝 다가가 지었는지 답답하였다.

내려오면서 안압지를 들르려다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지나치기로 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 안압지에의 추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이던가? 어느 봄날이었다. 세 쩨 시간인가 네 쩨 시간 수업을 마쳤는데 누군가 안압지에 처녀가 투신자살을 했는데 보러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로 하여야 하기에 쉬쉬하며 몇 몇 친구들에게만 알리었다. 우리는 네 쩨 시간을 마치자마자 뛰쳐나와 안압지로 달려갔다. 내가 다닌 경주 중고등학교는 안압지에서 직경으로 500메타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때 나는 그런 친구들 틈에 끼일 인물이 못되었는데 어떻게 끼었는지 같이 갔다. 가니 막 시체를 건진 뒤였다. 처녀라고 하여 갔는데 50대의 여자였다. 그 옆에서 땅을 치며 우는 여인이 처녀였다. 그 처녀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였다. 그래 그만 그곳엔 들어가 보기를 그만 두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안압지에의 추억

5,16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박정희 육군 소장이 정권을 잡은 뒤 경주엘 왔는데 그때 안압지를 들렀다. 나는 많은 사람들 틈새에서 뚫고 나와 바로 곁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군복을 입고 말채찍을 든 그의 모습이 참 냉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 저리도 용감하게 대중들 사이에 섞이어 있는지 그 대담함에 놀랐던 것이다.

안압지를 곁으로 지나서는 바로 박물관으로 갔다. 먼저 구내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전시실로 갔다. 하도 여러 개라 대충 보는 수밖에 없었다. 옛날 시내 중심에 목조건물로 지어진 박물관이 참 아담하고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건물도 반월성 기슭 유서 깊은 곳에 한옥처럼 지붕을 만들어 외관상 좋긴 하나 들어가면 온통 돌과 시멘트로만 입혀져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다음 곧장 대릉원으로 갔다. 이곳을 찾는 많은 분들은 다 천마총에 매료된다. 그래 이곳도 대릉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천마총이라면 다들 안다. 그래 이곳에선 천마총이 단연 인기이다. 우리도 천마총을 한참이나 구경하였다.

이곳은 정말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바로 이 대릉원 안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우리 집은 경주 시내 중심에서 북으로 40리 떨어진 호명이란 곳이었으나 해방이 되자 아버님이 밤마다 찾아드는 빨치산도 무섭고 또 우리 형제 공부 잘 시킨다고 경주로 이사를 하신 것이다. 그래 촌의 집과 논을 팔아 덩그런 기와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이 대릉원 안이었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으니 1946년인가 지금으로부터 60년도 지난 세월이다.

그러나 아직 내 눈에는 그 집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위치는 지금의 대릉원의 북서쪽 끝이고 집 오른 편에 좁은 골목길 건너 봉황대가 하나 있었고 집 앞으로 한 집 건너 봉황대인지 얕으막한 산이 하나 있으며 산 위에는 소나무 두어 그루가 있었다. 그런데 집 오른 쪽의 봉황대가 지금의 천마총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동쪽으로 두 세집 건너서 몇 메터 가면 어불랑 봉황대 -혹은 어불랑 능이라고도 불렀는데 우리는 여기 올라가 미끌어져 내려오는 놀이를 즐겼다.-가 있었다. 집은 기와 담장으로 둘려져 있고 집안 서쪽에 우물이 있으며 동쪽에는 변소가 있고 앞 마당 가에는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대릉원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 감나무가 그대로 있어 참 반갑더니 나중 가니 그만 없어지고 지금은 그 위치도 어딘지 아리숭하여졌다. 집은 4간으로 방 두 개 대청 하나 부엌 하나였다. 또 집 앞 툇마루 앞에는 길고 큰 돌들로 축담을 이루었는데 나중 알았지만 그 돌들은 다 옛날 사찰이나 왕궁의 주춧돌들이었던 것이다. 집은 상당히 넓어 동쪽으로 채전을 일구고도 앞마당이 제법 되었다. 이 집에서 2년인가 3년 사는 동안 나는 서쪽에 난 골목길로 황남국민학교를 다녔다. 이 집에 정이 들어 이 집을 팔 때 무척 섭섭하였던 기억이 난다.

대릉원을 나와서는 바로 앞의 첨성대로 갔다. 첨성대 또한 나에게는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다. 어릴 때 그곳에 가서 논 기억이 많은 것이다. 더러 친구들은 그 돌을 딛고 올라가기도 하였는데 겁이 많은 나는 쳐다보기만 할 뿐 오르고자 도전하지는 못하였다. 이 첨성대를 보면 또 하나 잊혀지지 않은 일이 있다. 6,25사변 때다. 그 해 9월 5일이라 기억하는데 기어이 경주 시내도 피란을 가게 되었다. 정부에서 철수하라고 한 것이다. 보퉁이들을 이고 지고 혹은 소에 싣고 남쪽을 향하여 무작정 피란을 가는데 가는 길에 첨성대를 지나가게 되었다. 저 첨성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비감이 들었다. 그래 물끄러미 보는데 옆으로 중학교의 지리 선생님이 지나가고 계셨다. 나는 인사를 하고 “선생님, 저 첨성대는 어떻게 되지요?” 하고 여쭈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 그렇게 기운이 팔팔하시던 이 선생님 왈 “이놈아, 지금 그걸 물을 때냐?” 하시며 지나가시는 것이다. 그때의 그 허망하고 아득하고 답답하고 처량한 느낌, 그때 그 느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첨성대를 바라보며 내 조국이 이대로 이 첨성대를 지켰음에 감사를 하며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첨성대를 잘 보존하려고 국도까지 바꾼 그 누구의 배려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첨성대를 보고는 시내로 들어와 황남빵을 사려고 찾아갔다. 황남빵은 또 나하고 인연이 깊은 것인다. 원래 황남빵은 지금의 대릉원 동쪽 큰 길 가에 있었다. 그러니 우리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조그만 가게에 아저씨가 한 분 빵을 만들어 쟁반에 담아가지고는 밖에다 견본으로 내어 놓고 안에서 파는데 어찌나 비싼지 좀체 사먹기가 힘들었다. 늘 지나가며 침만 흘렸다. 그러다가도 용돈을 모아 모아 한 번씩 사먹는데 그렇게 맛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 뒤에도 언제나 그 맛을 잊지 못하여 경주에 들를 때면 꼭 그 빵을 조금 사갔던 것이다. 지금은 그 빵이 유명하여져 전국적으로 분점이 있긴 하나 그래도 바로 그 집에서 직접 바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찾아가 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 빵을 사러 갔는데 웬걸 사람들이 10여명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아닌가? 그만 포기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가 보아야 할 곳이 많으나 이제 시간이 없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경주의 관광을 마치는 수밖에 없었다. 죽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의 유적이며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의 묘, 그리고 박혁거세의 왕릉, 분황사에 또 남산의 이곳 저곳 등 아직 얼마나 갈 곳이 많은가? 그러나 그보다 나는 내가 가고픈 곳도 많았다. 옛날의 추억이 서린 곳이 그리운 것이다. 조금의 시간만 더 허락된다면 6,25동란 기간 학교는 미군에게 징발당하고 학생들은 갈 곳이 없어 계림 숲에서도 돌을 깔고 앉아 수업하고 저 서악서원에 가서도 공부하고 계림 앞의 향교에 가서도 하였는데 그런 곳도 다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남산 동 쪽 기슭 지금 화랑원이 있는 그 계곡의 옥류암에도 가 보고 싶었다. 그 계곡을 보고픈 사연이 있는 것이다. 동란 때 우리집 옆 방에 세 들었던 처녀가 있었는데 이북에서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왔다고 하였다. 얼굴은 못난 편이나 마음씨가 참 고왔다. 나를 무척 귀여워 하였다. 나는 누나, 누나 하며 잘 따랐다. 이 처녀가 심심하여 자주 옥류암 쪽으로 놀러 가더니 어느 날 그만 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사랑하던 애인은 일선으로 간 뒤 소식은 없고 먹고 살 길은 막막하여 신세타령이 심하였는데 저녁 늦게까지 오지 않으니 나는 크게 걱정이 되었다. 언젠가 함께 놀러가서는 이런 곳에 묻혔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던 터이라 옥류암 근처 어딘가에서 자살을 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되어 온 밤 그 산을 헤매며 찾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넘어 조심 조심 들어오니 그녀는 오히려 재미있다며 방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어찌 그리 얄밉던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데 그 골짜기는 그대로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걸 어쩌랴? 소님도 명년에 꼭 다시 더 와서 보겠단다. 안동도 더 보아야 하고 경주는 더욱 더 보아야 하겠단다. 그렇다. 인생이란 당장 한 시간 앞의 일도 기약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늘 이렇게 내일을 기약하는 설레임에 즐거움을 느끼는 게 아니던가? 나 또한 70살도 한참 넘은 고령이건만 내일에 기대를 걸며 오늘을 접어두는 것이다. 그게 또한 사람 사는 맛이리라.

2010. 1. 20.

주:요즘엔 게을러져서 글도 쓰지 않고 지났습니다.그러다 오늘 우연히 지난 글들을 점검하다 이 글을 드리고 싶어졌습니다.내 고향 경주를 알리고 싶어요. 자랑하고 싶어서요.행여 보시고 경주에 가고픈 분 계시면 제가 안내를 약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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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한태익
날자:2010-06-17 09:07:59
1990년에 경주에 가서 하루밤 묵고 첨성대랑은 보았지만 박사님 글에 담긴 수많은곳을 못가보앗습니다. 그때 불국사가보고 싶었는데 로모를 모시고 간몸인지라 또 다른 고장 제천으로 이동하면서 보지를 못해 많은 아쉬움 남았습니다. 언제 다시 경주게 가면 이글 보며 돌아보고 싶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1   작성자 : 지킴이
날자:2010-06-16 10:15:41
항상 건강하십시요. 경주 가보고 싶습니다. 이십년후에요.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가이드 부탁드리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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