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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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학적 삶의 묘미 (장춘식11)
2007년 03월 11일 08시 47분  조회:1507  추천:114  작성자: 장춘식

문학적 삶의 묘미
---오늘 우리의 문학현실을 진맥해본다

장춘식 중국사회과학원 민족문학연구소 부연구원


우리의 문학, 아니 전반 중국문학은 지금 가장 어려운 력사적인 고비에 처해있다. 독서시장의 위축, 혹은 실용화 독서의 풍기는 사회적인 병폐로 만연되고있고 기성문인계층의 동면(冬眠)과 기문종상(棄文從商) 현상은 날따라 심각해지고있다. 문학은 이런 준엄한 력사적인 환경에서 갈팡질팡하고있다. 조금만 력사적인 지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현상은 우리 나라 산업화 혹은 시장경제화의 본격적인 추진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였고 또 심각해지고있다는것을 보아내기 어렵지 않을것이다. 그러니까 이 산업화 혹은 시장경제화와 문학과의 사이에는 분명히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면 그 관련의 내용은 무엇이며 또 어떤 형태로 관련되고있는것인지? 그 관계의 개선방도는 없는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것인지? 인젠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심각히 생각해보아야 할줄 안다.

머슬로라는 학자는 사람의 욕구는 다음과 같은 5단계로 발전한다고 지적하고있다. 즉 생리적 기본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애정에 대한 욕구, 존경에 대한 욕구, 자기실현에 대한 욕구 등.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 다섯가지 욕구를 크게 1차적 욕구와 2차적 욕구로 나누고있다. 1차적 욕구는 목이 마르다든지, 배가 고프다든지, 잠이 모자란다든지, 성적인 욕구를 추구한다든지 하는 생리적 욕구다. 이런 1차적인 욕구에 의하여 먹고 마시는 쾌락, 목욕같은 육체적 쾌락, 섹스같은 성적 쾌락 등 생리적인 쾌락이 탄생하게 된다. 2차적 욕구는 호기심에 의한 탐구욕구, 남들에게 인정받고싶은 욕구(명예욕과 같은), 남들과 화친하고자 하는 욕구, 남들에게 좋은 일을 베풀고싶은 욕구 등 생리적욕구가 아닌 정신적인 욕구를 뜻한다.

프롬은 이것을 소유의 욕구와 존재의 욕구로 대별하고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ꡔ산다는것ꡕ에서 사람이란 먹고 살수 있는 생리적 욕구단계에서 재산이나 지위, 권위의 소유욕구단계로 발전하고, 다시 소유는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그치고 정신적인 흡족과 즐거움을 누리려는 존재욕구로 발전하는데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의 가치는 소유인간에서 존재인간으로의 승화여야 한다고 했다.

머슬로는 이것을 다시 사회발전법칙에 련관시켜 농경사회에서는 생리적욕구가, 공업화 사회에서는 소유욕구가, 탈공업화사회에서는 존재의 욕구가 발생하게 마련이라고 분석했다. (리규태: ꡔ이내 가슴엔 수심도 많네ꡕ P89,P111 참조. 삼성출판사 1993년 초판 5쇄.)

오늘 우리 사회의 경제적발전단계는 바로 소유욕구가 무한대로 팽창되여가는 공업화사회에 처해있다. 물론 원시사회후기, 즉 신석기 시대후기로부터 사회 인간의 불평등 혹은 물질 점유의 불균형이 산생되면서부터 이 각 단계마다 그 사회내의 각 성원의 욕구표준은 상당히 큰 차별을 보이고있다. 이를테면 노예사회에서 노예주계급이나, 봉건사회에서의 지주계급의 욕구는 공업화사회의 일반인들의 욕구, 즉 소유욕구가 극도로 팽창되여있었고 공업화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물질을 고도로 소유한 소수의 사회성원은 존재의 욕구가 발생하고있다. 그리고 같은 사회상황하에서도 매개인의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욕구의 차이는 같지 않게 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문화인은 그 어떤 사회에서나를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생존욕구(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사회에서는 이런 가장 기본적인 욕구보다도 존재의 욕구, 즉 정신적인 흡족과 즐거움을 우위에 놓고있기도 하며 그래서 김시습이나 김삿갓같은 류랑문인들이 산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비현실적인것이며, 사람은 어쨌든 생명이 유지되여야 존재의 욕구를 실현하게 된다)다음에는 존재의 욕구를 삶의 가치에서 우위에 놓게 되는것이 바로 그 실례이다.

다시 존재의 욕구란 쉬운 말로 정신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욕구라고 할수 있다. 문학활동은 바로 이 존재의 욕구에 의해 진행되는 인간의 행위라고 할수 있다. 즉 창작자로 말하면 창조의 정신적 욕구(자기 실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행위요, 독자로 말하면 그 창조된 가치의 향유를 통해 정신적인 만족 혹은 풍요를 실현하는 행위인것이다.

문학이란 창작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창작과 수용을 순차적으로 말하면 창작이 먼저다. 구전문학이 인류 최초의 문학이라면 민요는 부른 사람이 창작자이고 듣는 사람이 수용자일것인데 부르는 사람이 없으면 듣는다는 행위가 존재할수 없게 된다. 신화나 설화도 상황은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수용자가 없다면 그 창작은 무의미해지기때문에 창작 자체도 없어지게 된다. 이런 창작과 수용의 상호 영향으로 문학은 발전해왔다. 수용이 창작에 주는 영향이 어느 정도 큰가는 최근 몇년간 우리 문학의 현실을 보아도 알수 있다. 문학은 아니지만 주로 가벼운 소일에 리용되는 읽을거리들이나 상식적인 읽을거리들이 독자의 인기를 끄니까 ꡔ청년생활ꡕ이나 ꡔ연변녀성ꡕ과 같은 잡지들이 잘 팔리게 되고 추리소설이나 전기문학들, 특히는 모택동이나 주덕, 주은래 등 인물들의 인물전기들이 잘 팔리니까 각 잡지들에서는 그런 류형의 글들을 앞다투어 게재하고있다. 동시에 순수문학작품들이 독자군을 잃어가니까 기성작가들, 특히 젊은 작가들은 창작의 욕망을 잃어간 나머지 기문종상의 길을 선택(물론 기문종상 현상이 생기게 된 원인은 이것 한가지가 아니다)하게 된것이다. 현대는 순수문학을 수요하지 않는다는 오해때문에. 영화관들마다 ꡔ우!아!야!ꡕ 소리가 요란한 무협이나 총격영화들이 관중의 인기를 모으는 원인도 대개는 여기에 있을것이다. 치렬한 생존경쟁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진맥진해있는 오늘의 관중이나 독자들은 상당한 지식과 사고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순수문학, 순수예술작품에 대해서는 취미를 덜 가진다. 그대신 별 부담감이나 수고로움이 없이 가볍게 피곤한 신경을 어루만져줄수 있는 통속문학, 통속예술들이 사회의 인기를 끄는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방임해두고 문학예술 전반이 통속화에 흐르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의 문명은 퇴보하고 인간도 무지몽매해지게 될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공업화사회, 혹은 산업사회의 문화를 나는 ꡔ콩크리트문화ꡕ라는 개념으로 표현한적이 있는데 물질적 소유욕구의 무한대적인 팽창을 거쳐, 혹은 그 욕구의 만족을 위해 진행되는 격심한 경쟁을 거쳐 형성되는 인간의 소외의식을 지칭한것이다. 그것을 인위적인 구조물인 콩크리트의 견고함과 비인간성 내지는 따가울 때마저도 차가운 느낌을 주는 속성, 그 구조물 자체의 격리(隔離)의 용도 등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인간은 소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격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이 경쟁의 결과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인간 대 인간의 느긋하고 온후(溫厚)한 감정을 파괴시키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물질적인 부를 많이 소유할수록 따뜻한 인간의 정을 그리워할수밖에 없게 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산업사회의 소유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유중독(所有中毒)에 걸려본다음에야 다시 이미 파괴되여버린 전통적인 인정을 그리게 되고 또 어떻게 뜻있게 사느냐 하는 존재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는 말이 되겠다.

그밖에 현대 공업문명은 서방에서부터 형성되였고 그러므로 총체적으로는 서방문명이며 그것은 기독교문화와 과학문화에 기반을 두고있다. 이런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합리주의의 사고방식이다. 동방의 도덕적, 윤리적 혹은 의리(義理), 인정적인 사고방식과는 크게 구별되는 이런 문명은 산업문명의 인입과 함께 우리 동방사람에게도 이식되고 영향을 일으키게 되였다. 심지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속담도 있는것처럼 오히려 우리의 전통적인 문명을 상실케 한다. 게다가 본세기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선구자들로부터 서방의 문명은 무조건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문명이라 여겨지면서 그것을 우리 원래의 문명보다 훨씬 선호하여 받아들였(물론 봉건사회 전통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인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바람직한것이였으며, 또 그런 과정에서 생성된 부작용은 어쩌면 피면할수 없는것인지도 모른다)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우리 원유의 문명을 배척, 파괴하게 되였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문명이든 다 자기의 장점과 에너지를 가지고있기 마련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상실하게 될 때, 더구나 오늘과 같이 서방문명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문명의 진공감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인간의 가치의식에는 위기가 도래하게 된다. 이점은 동방 선진국인 일본이나 아세아 4소룡(四小龍)의 전례에서 이미 립증되고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곡절적인 길을 한참 걸어보고나서야 다시 되돌아서서 자신의 문명전통을 관심하고 연구하게 된것이다. 이미 이런 전례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그들의 옛길을 걸을수는 없을것이다.

사회의 엘리트들이라 불리는 문화인들, 특히 문학인들은 이때 력사적인, 민족적인 사명감을 재확인해보아야 한다.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점을 명심해야 할줄 안다. 이것은 문학인 자신만의 일이 아니다. 사회의 지성으로서 이것을 민중에게 일깨워줄 의무가 있다. 이것이 곧 력사가, 사회가 지성인에게 부여한 력사적인 사명이라는것일것이다.

여러해전에 어디서인가 국제 펜클럽에서 세계 각국 저명 작가들에게 ꡔ당신은 무엇때문에 문학창작을 하는가?ꡕ라는 설문을 제기하여 그 대답의 내용을 게재한 신문을 읽은적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 그 전부의 내용을 여기에 적을수는 없지만 대개는 사명감때문이다, 명예를 위해서다, 원고료를 위해서다, 단순히 쓰고싶기때문이다, 그것이 직업이기때문이다, 아무런 원인도 없다, 등으로 다양하였지만 그중에서도 창조적의욕과 엘리트로서의 사회적인 책임감이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 되고있는것 같다. 오늘 우리의 문학인에게 왜서 창작을 하느냐고 물으면 거개는 의욕과 사명감때문이라고 말한다. 제한되여있는 생명에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창조욕, 꼭 비난받을바는 아닌듯싶은 명예욕(범은 죽어 껍질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성인들의 말을 상기해보자), 보잘것 없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생활에 보탬이 되고있는 경제적인 수입 즉 원고료(물론 베스트셀러 작가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다르다), 이것을 무슨 욕구라 한다면 곧 물욕이 될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혜와 재질, 누구나가 다 가지고있는것이 아닌 창조적인 감성과 력사적인 혜안으로써 그 재질과 지혜를 부여해준 이 땅과 민중에게 정신적인 재부를 창조해줘야 한다는 사회적, 혹은 력사적인 사명감...이것은 창작자의 창작을 키질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정신적 원인 혹은 원동력일것이다.

여기에서 창조욕과 명예욕 그리고 사명감에 대해서는 거개가 시인하고있지만 물욕 즉 원고료문제에 한해서만은 얼마간의 이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한것은 우리의 원고료가 너무나도 보잘것 없고 그래서 원고료의 창작자에 대한 매력에 대해서는 간단히 부정해버릴 소산이 전혀 없지 않기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보잘것 없는 원고료라고 하여도 저마다 박봉인 문학인에 대해 말한다면 어느 정도는 생활상 보탬이 되는것이고 하다못해 담배값이라도 되는게 사실이며, 또 생활상 일정한 정도로 여유가 있는 작가라 하더라도 우리 선조들이 유전을 통해 보존해온 선비정신의 영향때문에 이 창조적인 로동이 가져다준 보수를 다른 경로를 통해 얻은 보수보다 갑절 귀중히 여길것도 사실(물론 옛날의 선비들이 돈을 초개같이 여긴것은 그 극단이라고 볼수 있다)이다. 요즘 들어 무슨 무슨 현상작품모집이요 하여 여러 신문, 잡지들에서 벌리고있는 활동들에 보이고있는 문학인들의 열정만 보더라도 이점은 금방 실증이 된다. 거기에는 물론 문학상 자체가 내포하고있는 명예면의 유혹도 있겠지만 현상금의 액수가 높을수록 투고량이 많아지고있는 현실은 이 문학행위에서 얻어지는 보수가 우리의 문인들에게 일으키고있는 영향력을 가히 짐작해볼수 있게 한다. 그리고 요즘 들어 모두들 입버릇처럼 말하고있는, 시장경제법칙이 문단에도 영향주어 오늘의 원고료문제는 전보다도 더 절실히 문학활동에 영향주고있음도 부정할수가 없다.

금전은 만능이 아니지만 없어서는 또 절대 안된다. 그러므로 시장화사회에서는 경제적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수는 없다손쳐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욕망과 사명감에서 많은것이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선 명예욕이 시야의 확대와 더불어 심한 타격을 받는다. 적지 않은 작가, 시인들이 좁은 독자군의 상태에서 벗어나보려고 중국문단에 힘겹게 돌진을 시도하다가 별로 시원치가 않게 되자 다음으로 한국문단에의 돌진을 시도해보았지만 그것도 썩 순탄치는 않다. 특히 문단인으로서의 자신의 왜소함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시도들이 생기를 잃기 시작했다. 범이 없는 골의 삵의 노릇(그러나 삵의 노릇도 할 사람이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력사와 인생체험과 희로애락을 우리 민족의 작가들만큼 정확히, 그리고 절실히 리해하고 기록하고 표현할수 있는 사람은 우리 민족의 작가들밖에 더 없는것이다)을 해왔다고 느끼기 시작한것이다. 문단인으로서의 명예의 한계성을 발견했다고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다시 말하면 명예욕의 만족이 인젠 거의 불가능해진셈이다. 거기에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원고료수입때문에 물욕의 만족도 불가능해지자 이제 남은것은 창조욕과 사명감뿐인데 홍수와 같은 시장경제사회가 도래하자 그것은 너무나도 창백한 유혹이 되여버렸다. 우리 문학인의 기문종상(棄文從商)현상은 바로 이런 상황(이밖에 오늘 우리 문학창작의 불황현상은 상당부분 작가들의 가치의식의 혼란에서 기인된다고 보여진다. 갑작스런 가치관념의 변화에 적응되기까지는, 그리고 그것을 자신있는 관점으로 문학에 표현할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것이다. 작가들은 지금 그런 모색의 괴로움을 겪고있다. 그러나 본론에서는 그것이 중심론제가 아니므로 다른 기회로 미룰수밖에 없다)에서 시작된것이다. 물론 이것은 산업화사회 초기단계의 현상으로서 어쩌면 필연적인것인지도 모를것이지만 어쨌든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인것만은 부정할수 없다.

문학은 크게 본격문학 혹은 순문학과 대중문학 혹은 통속문학 두가지로 나뉘여진다. 그걸 한어에서는 엄숙문학(嚴肅文學) 혹은 순문학(純文學)과 대중화문학(大衆化文學) 혹은 통속문학(通俗文學)이라고 부른다. 혹은 고아문학(高雅文學)과 속문학(俗文學)이라고도 한다. 모택동은 이것을 설중송탄(雪中送炭)과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표현하였다. 고대에는 시와 희곡만을 문학이라 여겼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므로 문학을 시학(詩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문예부흥시기 보카치오의 ꡔ데카메론ꡕ이나 쎄르반떼스의 ꡔ돈끼호테ꡕ에 와서야 소설도 본격문학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ꡔ수호전ꡕ이나 ꡔ삼국연의ꡕ, ꡔ서유기ꡕ 심지어 ꡔ홍루몽ꡕ마저 그것이 본격문학의 지위를 획득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하기야 ꡔ수호전ꡕ이나 ꡔ삼국연의ꡕ같은 소설들은 통속소설에서 발전된것이지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대중문학 혹은 통속문학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이 아니라고 보면서 ꡔ읽을거리ꡕ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하는데 조금은 지나친 표현이지만 어쨌든 이 두가지 문학이 상당히 뚜렷한 구별을 가지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가지 문학은 각자 저마다의 존재적 가치를 가지고있으며 혹은 저급과 고급의 단계적인 차이가 있을뿐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사람들은 순수소설이 통속소설보다는 우위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기꺼이 읽으려는 사람은 그리 많치 못하다. 통속소설보다 순수소설을 더 즐겨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왔기때문에 순수소설을 우위로 보는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들이 좋다고 여기는것과 즐겨 읽는것과의 이러한 모순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치 순수소설의 좋은점은 즐거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순수소설이 기쁨을 주기보다는 설교처럼 우리에게 뭔가 가치있는것을 가르쳐주며, 인격적수양에 리롭기때문에 좋은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순수소설도 기쁨을 줄수 있고 또 주어야 한다. 혹은 통속소설보다 한급 높은 차원에서 기쁨을 준다. 독자는 소설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소설 그 자체의 재미때문에 읽는것이다. 어렵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어떻게 하여 즐길수 있을가? 그점에 관한한 우리는 복잡하고 배우기 어려우며 지식과 면밀한 주의력과 분석이 요구되는 브리지(bridge, 즉 橋牌)와 간단한 카드놀이(「주패」와 같은)간의 취미적인 차별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수 있다. 분명히 브리지와 같은 게임들은 복잡하다. 그러나 바로 그 복잡성이 어떤 하나의 명료한 목표와 관련되여있을 때 흥미를 유발시켜주며 의미를 띠는것이다. 순수소설의 흥미도 이것과 비슷한데가 있다. 즉 어떤 중심목표와 생각에 복잡한 구조의 세부적 사건을 엮어가고있는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순수소설은 정독과 재정독을 요구한다. 문학작품을 즐긴다는것과 리해한다는것은 병행하는것이며 적어도 그것을 두번이상 읽지 않고서는 좋은 스토리를 완전하게 리해하기 어렵다. 이점에서는 음악, 특히는 고전음악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여러번 들어야 한다는점을 생각해볼수 있다. 어떤 곡의 처음부분을 들을 때의 즐거움은 어느 정도는 그 곡의 후반부의 전개와 그 전체의 흐름을 알고있는데에 근거하고있다. 때로는 스토리만을 다시 읽는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스토리가 가지고있는 전체적효과를 감지하기전에 루차 생각해보고 분석해보아야 한다.

순수소설이 담고있는 복잡한 인식, 교양적 가치를 동반한 깊은 사상만을 리유로 순수소설의 어려움을 정당화시켜주지는 못한다. 그점은 소설외에서도 충분히 발견할수 있기때문이다. 순수소설의 리유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순수소설의 주요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경험을 상상케 하고 리해하도록 하려는데에 있다. 이러한 목적이 왜 난해성과 복잡성을 수반해야 하는가 하는점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경험이 단지 일련의 관련된 사건들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사건을 겪는 사람에게 느껴지는바로서의 사건들이라는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똑같은 사실에서도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경험들을 갖게 된다는것을 우리는 안다. 매개인이 그 사실들에 부여하는 감정, 기준, 통찰력이 각이함에 따라 그 사실이 개인에 대하여 갖는 의미는 같지 않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의 경험을 적절히 묘사하려면 사실들과 그 사실들에 부여된 의미가 포함되여야 한다.

그리고 순수소설은 진실해야 한다. 인간의 력사이래 루적된 인간의 경험은 문학속에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상력이 충만한 인간의 경험은 우리들에게 더할수 없는 통찰력을 줄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디데로는 “가장 진실한 력사는 잘못으로 충만해있는 반면에 그(리처드슨)의 소설은 진실로 가득차있다”고 말할수 있었던것이다. 물론 순수문학작품 모두가 이처럼 인간의 력사적인 경험을 진실하게, 투철하게 묘사했다고 말할수는 없다. 한해에도 수없이 쏟아져나오는 문학작품에 비하면 명작은 언제나 소수다. 그러나 순수소설은 그런 력사적인 경험의 기술을 목적으로 하기때문에 그 취득한 성과는 각이하겠지만 독자에게 진실을 밝혀주려는 노력만은 한결같다.

요컨대 순수소설을 읽는 재미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재미이며 그러므로 그런 재미를 즐길수 있다는것은 인간의식의 진보와 성숙을 의미한다. 즉 인간경험의 깊은 의미(사회와 력사를 인식하고 인생의 깊은 사상을 깨우치는것까지 포함하여)를 재미로 즐길수 있다는것은 인간이 성숙되였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순수소설의 목적은 인간의 경험을 묘사하는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실, 주제, 문학적장치들을 사용하며 소설을 즐기고 리해하기 위해서 독자는 때로 이런 부분들을 분석하고 서로 어떻게 관련되여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통속소설의 경우도 외견상으로는 역시 인간의 경험을 묘사하나 초보적인 취미신경의 발동을 위해서는 그런 목적에 적합한 인간의 행위들이나 사실들을 최대한 단순하고 명료하게 엮어놓는다(사실상 인간의 행위나 목적, 사실들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할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테면 김용(金庸)의 무협소설들에서처럼 무술을 통하여, 경요(瓊瑤)의 연정소설들에서처럼 사랑을 통하여, 김성종의 추리소설들에서처럼 서스펜스나 스릴을 통하여 사랑, 복수(의리나 보은도 포함), 재부, 질병, 죽음과 같은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관심거리들을 명료하게 펼쳐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즉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관심거리들, 서스펜스(사실 서스펜스 자체도 인간의 초보적인 관심거리다)를 끊임없이 제조해내기 위해서는 사실들의 진실성이나 현실성마저 희생시킨다. 례를 들면 한동안 많은 관심을 모았던 ꡔ갈망(渴望)ꡕ이나 대만, 메히코의 TV련속극들에서처럼 “다음에는 어떻게 될가?”라는 서스펜스를 만들어서 풀어나가다가 그것이 다 풀릴듯싶으면 억지(교묘하게 수긍이 가도록 만들면 물론 더 좋겠지만)로라도 또 다른 서스펜스를 만들어서 관심의 끈을 이어놓는것이다. 이런 극들에서는 한결같이 사랑(애정에 대한 관심)이나 질병(건강에 대한 관심, 대체로 불치의 병이다)이나 돈(재부에 대한 관심), 죽음(생명에 대한 관심)과 같이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관심거리를 주요 라인으로 다룬다. 그리고 이런 련속극들에서는 어떤 복잡한 분석이나 면밀한 주의를 요구하는것이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통속성이 상실되기때문이다.

누구나 한두편쯤은 다 보았음직싶은 미국의 서부영화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형적인 서부극이 되는 사실들(배경, 인물, 플로트)은 이런 명료성을 위해서 무척 틀에 박혀있다. 사건은 개발시기 미국 서부의 목장마을(혹은 자그마한 鎭)과 그 주변에서 전개된다. 대개 등장인물들은 카우보이(牛仔)들, 보안관, 술집주인, 그리고 은행가나 신문 편집인 등이다. 한편은 악한으로서 목장, 광산, 황금수송마차나 미국 기병대가 쓸 탄약을 털려고 음모를 꾸미고있다. 그에 대항하는 인물은 주인공으로서 흔히 뚜렷한 직업이 없는 인물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여러차례의 주먹싸움, 총싸움, 중심가에서 적어도 한번의 속사결투를 치룬다음에 주인공은 악당을 물리친다. 우리 고전소설에 늘 나오는 권선징악, 고진감래식의 내용들이다.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도 결국은 거의 언제나 관중이 바라는바대로 결말을 맺는다. 이것이 주제와 사건의 통속성이 될것이다. 그리고 보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는 인물의 형상을 최대한 개념화한다. 주인공은 의리, 동정심은 물론이려니와 용모에서부터 옷차림까지 가시적인 ꡔ선인(善人)ꡕ으로, ꡔ악한(惡漢)ꡕ은 그 반대로 나타난다. 인물의 통속성이다. 서부영화는 이런 장치와 방법으로 관중이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관심거리가 그들이 바라는바대로 발생, 발전, 결론지어지게 함으로써 부담없이 가볍게 즐길수 있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리유때문에 순수소설보다 통속소설을 더 좋아한다는것은 브리지가 아니라 간단한 카드놀이(주패같은것)를 더 좋아하는것과 같은것이다.

그러면 통속소설을 더 즐기는데 무슨 잘못이 있는가고 물을 사람이 있을것이다. 사실 잘못이라곤 없다. 다만 가치있는 어떤것을 빠뜨리고있을뿐이다. 독자가 요구하는바가 각기 다르기때문에 소설은 여러 수준에서 읽을수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여가를 유쾌하게 보내도록 해주며 낯선곳과 모험을 상상케 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적 경험을 나눠갖도록 해주며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륜리적 또는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지를 보여주고 작가의 솜씨를 관찰하는것을 즐기도록 해주며 자기 자신의것과는 다른 원칙과 철학에 립각하여 인생을 바라보도록 해준다. 만일 어떤 독자가 이러한 요구조건들중 처음 두세가지만 요구하고 나머지의것들을 무시해버린다면 그는 자신을 통속소설에 한정시키고말것이다. 주제면에 있어서 그는 만족감을, 다시 말하면 안전, 사치, 섹스, 그리고 폭력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어려움이나 죄책감없이 상상속에서 간접적으로 만족될수 있는 종합적 백일몽을 요구하거나 또는 확인을, 다시 말하면 그가 믿고싶어하는것이 옳다라는 느낌을 요구할것이다. 그러나 순수소설은 앞에서 렬거한 사항들을 거의 모두 요구하는 독자들을 위해 씌여진다. 마치 브리지놀이를 즐기는 취향이 간단한 카드놀이를 싱겁게 만들어버리듯이 그러한 그의 요구는 통속소설을 재미없게 느끼도록 만들어버린다. 읽기 쉽게 하기 위해 통속소설은 인생의 무한한 다양성을 반영하는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등장인물, 상황, 그리고 주제로 그 자체를 국한해야 하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한부분에서 판에 박힌 류형을 고수하기 위해 통속소설은 이야기의 다른 부분의 개연성이나 완전성을 희생시켜야만 한다. 즉 진실성을 희생해야 한다. 주제(권선징악, 고진감래 등)를 완성시키기 위해 모든 서부영화의 주인공은 반드시 서부에서 제일 빠른 총잡이가 되여야 한다(형상의 개념화).

순수문학작품을 읽으려면 상당한 문학적 지식과 수양과 노력이 수요된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이런 지식과 수양을 키우기 위해서는 문학적인 리론지식의 전수와 함께 시기마다 발표되는 작품에 대한 해설과 안내가 필요할줄로 안다.

현재 우리 문단에서 ꡔ문학과 예술ꡕ지의 평론이나 연구론문들, 그리고 각 문예지들에서 간혹 게재하는 문학평론들이 이런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보다 알기 쉽고 적시적인 작품월평이 활발히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절대 지면랑비가 아니다. 이점에서는 ꡔ한국문학ꡕ이나 ꡔ현대문학ꡕ지의 형식을 참고하는것이 바람직할것이다. 작품에 대한 예리한 민감성을 갖춘 문단의 권위 작가, 평론가들을 발동하여 최근 발표된 작품중 우수작이나 문제작에 대해 해제식의 설명과 평가를 진행하는것이다. 이런 월평이나 격월평은 한편으로는 특정 작품에 대한 우리 독자들의 의문점을 풀어주거나 작품에 대한 취미를 발동시킬수 있고 동시에 작품의 내재적인 가능성을 최대한 독자들에게 전달시키는데 유익할줄 안다. 이런 끈질긴 노력이 열매를 맺을 때, 우리 독자들의 감상수준은 틀림없이 한차원 높아질것이며 그렇게 독자들의 문학적수양이 높아져서 독자량이 늘어나면 자연히 작가들의 창작적극성을 부추길수 있을것이고 창작이 왕성해지면 역으로 독자량이 늘어날것인데 이런 량성순환이 계속되면 우리 문학도 오늘과 같은 불황에서 탈출할수 있을줄 안다.

이제 본론의 론제를 해제하면서 이 글을 끝맺도록 해보자.

문학적삶의 묘미는 창작(작가)과 감상(독자)의 묘미로 나눠볼수 있는데 창작의 묘미는 앞에서 이미 분석한바와 같이 욕구와 사명감으로부터 생성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사명감도 자기 실현의 일종이다)만큼 멋있고 절실한 욕구는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을 실현할 때 느끼는것만큼 충분한 만족감도 따로 없을것이다. 이때 생명의 의미는 가장 높은 차원에서 실현되게 되는것이다. 문학작품이라는것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의 미학적인 의도에 따라 설계하고 구축해놓은 하나의 소우주(小宇宙)이다. 따라서 한편의 잘 씌여진 문학작품을 읽을 때 감상자는 그 잘 구조된 우주속을 려행하게 되며 그 우주속에서 자기실현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좋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즉 수많은 소우주속을 려행하면서 제한되여있는 자신의 인생경험을 보충, 충실히 하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통속문학이 아니라 순수문학에서만이 가능한것이며 인간은 이렇게 순수문학작품에서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를 얻게 될 때 보다 의미깊은 삶을 영위하게 되는것이다.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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