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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여 쓸모 없는것이 아니다
2018년 12월 24일 19시 00분  조회:7881  추천:1  작성자: 주청룡
 
쌓고 남은 돌이라 하여 쓸모 없는것이 아니다
흑룡강신문 //hljxinwen.dbw.cn  2018-12-17 09:03:04
 
 
 
 
 
 
 
      작성자: 주청룡
  (흑룡강신문=하얼빈) 학교에서 지도자 직에 있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 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 것이다.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인제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해 오던 내가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다. 하여 많은 고민 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것이였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다.
그러던차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방문길에 오르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국 사무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신문사, 방송사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단위 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많은 멸시와 모욕을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한다고 들어왔던 터라 그들의 실생활을 알려면 바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에 가야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한국에 가서 처음으로 일자리를 찾은 곳이 서울 교외의 한 채소농장이었다. 농장에 가보니 중국조선족들이 온 하루 비닐하우스 안이나 뙤약볕에서 쉴새없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숙소마저 채소하우스 안이어서 찜통처럼 뜨거운 환경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잠자리는 땅바닥에 널판자를 펴고 그 위에 볏집을 깔고 비닐박막을 폈는데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이였다. 농장주의 애완견은 주인과 같이 집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격적인 모욕감까지 들었다. 하여 농장주를 찾아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하는가?’ 하면서 잠자리를 개선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더니 “돈 벌러 온 사람이 이러면 됐지 무슨 요구가 그리 많은가? 실으면 가라”는 것 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격분하여 그 현장을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가더라도 당신들이 며칠 내에 일꾼들의 잠자리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언론 매체에 공개를 하겠다고 위협적인 말을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며칠 후 거기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전화로 물어봤더니 농장주가 언론에 공개될까봐 두려웠던지 아니면 가책을 받았던지 창고 한칸을 내어 침대도 너무 헐망하지 않게 잠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국에 와서 작으나마 조선족의 인권보장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뿌듯한 감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서울과 경기도의 몇몇 건설현장에 가서 현지 체험을 하였다. 건설현장에서는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안전화, 안전벨트, 안전모로 전신무장을 하고 건설현장에 나섰다. 이렇게 3무장을 한다는 자체가 현장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측면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철판으로 된 폼(模板), 강관, 철근 등 무거운 물건들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한참 일하고 나면 겨울에도 온 몸이 땀벌창이 되곤 하였다. 그래도 청부업자들은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을 해대고 있었다.
부동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 차이가 있으므로 하여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도구를 연장, 쇠줄을 반생이라고 하는데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연장’이나 ‘반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에 그 말을 알아 못 들으면 60세 이상의 고령동포들에게도 “반생도 몰라” 하며 반말을 써가며 욕하고 어떤 때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스러운 욕을 퍼붓고 있었다. 표준말을 하는데 우리가 못 알아 들으면 욕해도 무방하겠지만 ‘반생’이란 한국 국어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를 쓰면서도 우리가 알아 못 듣는다고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돈벌이 온 것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고달프게 일하는 중국동포들의 실행활을 료해하려 갔기에 쫓겨나는 것이 겁나지 않았다. 하여 고용주를 찾아 중국동포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보장여 줄 것을 제기하였다가 결국 내가 해고당하고 말았다. 합리적인 건의를 제기한 것도 고용주와 엇선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일은 격분한 일이지만 또 다른 현장에 가서 실생활을 체험하여야 했기에 나를 놓고 말하면 크게 손해를 본것은 없다고 생각되였다. 오히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건설현장에서의 실생활을 체험하였고 일부 최하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에 대하여 마구 욕을 하면서 부려 먹으며 불공정한 대우를 하는 것도 직접 목격하였기에  나에게는 큰 성적으로 되였다고 생각되였다.
  건설현장에서 해고 당하였으니 또 다른 현장에 가야 조선족들의 실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미 농장, 건설현장을 다 체험하여 봤으니 이번에는 산업현장에 가서 체험하는 것이다. 하여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찾은 것이 어느 한 조명등조립회사였다. 이 회사는 어지럽거나 위험한 일은 없었는데 노동시간이 12시간이나 되었고 어찌나 속도를 강조하는지 손에 불이 날 지경이었으며 조금만 속도가 늦어도 쌍욕을 퍼부었다. 지나치게 속도를 강조하다니 간혹 불량품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책임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부어 댔다.
중국조선족들이 일하는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보면 어떤 현장에서는 일을 하고도 청부업자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몇 달씩 일하고도 삯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일부러 불법체류자를 쓰면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도 불법체류자이기에 어디 가 신고를 하지 못하는 약점을 쥐고 일년 넘도록 월급을 주지 않는 악덕 고용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많고도 많았다. 나의 한 친척도 한국의 한 자그마한 건설현장에서 반년간 일하였는데 청부업자가 다음 달, 그 다음 달 하며 차일피일 미루며 월급을 주지 않다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반년 노동 대가를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른 일자리로 옮겨 돼지 사양장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하루 아침 돼지사양장에 불이 나자 그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자아희생적으로 불끄려 들어갔다가 돈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온 몸이 새까마게 재가 되여 그 자리에서 화장되여 나왔다. 잘 살아보려고 이국땅에 돈벌려 나갔다가 일한 노동공가도 못 받고 한줌의 재가 되여 고향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통탄한 일인가?
  이렇게 한국에 와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중국에서 듣던 바와 같이 일부 최하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려 먹는 현상과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 가정부를 종으로 여기며 최저 한도의 인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현상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다.
  우리가 한국으로 돈벌러 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것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인격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하고 인권은 보장되여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재한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그들이 인격적 무시를 당하지 말고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 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은 문화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조선족은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예의바르고 깨끗하고 문명한 민족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고 하여 소외당하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한겨레의 나라 한국에 와서 일부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나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여러 신문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3D업종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또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나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다.
  KBS-1 라디오방송에서는 내가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고 하며 나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청하였다. 나는 그 프로에 출연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혜택으로 하여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가 우리 동포들에 준 사랑이다. 나는 우리를 보내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 준 한국정부의 사랑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3D업종에서 재한조선족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2009년 1월에 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한국기업인과 재한조선족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나도 그 간담회에 초대되었다. 그 회의에서 나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정책에 힘입어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돈을 벌고 있는 한편 한국의 경제건설에서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내가 직접 목격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의 일부 악덕 고용주들은 재한 중국조선족을 멸시, 모욕하면서 마구 부려먹는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간담회의 현장녹화가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어 온 지구촌에 전파되었고 이로 하여 한국사회의 중시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중국동포의 많은 절찬을 받았다.
  그렇게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실생활을 조사하고 한국과 재한 중국조선족단체에서 공동 주최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하면서 한국사회와 재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재한조선족들 자신에게도 찾아 봐야 할 부족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어기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고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재한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하여 나는 "재한 중국조선족들 자각적으로 준법의식을 높이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2010년 한국에서 돌아와서 연변의 많은 농촌마을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고찰하고 2014년도에는 "농가"잡지 주필 홍천룡 선생과 함께 20여 일간 헤이룽장 농촌의 조선족 마을들을 고찰하면서 개혁개방후의 농촌조선족사회의 변화를 고찰하였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특히는 한국 노무송출이 조선족농민들과 도시 저소득층 조선족들에게서는 국내 다른 민족에 비해 짧은 시간내에 많은 돈을 버는 아주 좋은 기회였으며 빈곤해탈의 지름길이 될 수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로 하여 많은 조선족들이 빈곤에서 해탈될 수 있었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부 농민들은 도시에 아파트를 사놓고 안락한 도시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농민들은 한국에서 일하는 기간 축산농장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선진적인 사육기술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축산농장을 경영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고 있으며 어떤 농민들은 한국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선진적인 유기농법(예하면 표준화 육모관리, 오리농법)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무당산량을 제고할 뿐만 아니라 유기농입쌀을 명브랜드로 하여 높은 값으로 쌀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도시에 한식점을 꾸리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의 선진기술을 배워가지고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귀향창업을 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빈곤에서 해탈하고 한국의 선진기술을 배워 고향에 돌아와서 새로운 창업을 하는 사례들은 우리가 한국노무송출을 통해 얻은 긍정적인 부분들이지만 반면에 잃은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우리의 영농실력이 많이 뒤떨어지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농민들이 한국으로 나갈 때에는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맸지만 한국에서 10년 일하고 돌아와 보니 그 기간 다른 민족들은 대중형 농기계를 갖추어 놓고 조선족들이 내 놓은 토지에 규모화 경영을 실현해 인력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우리 삶의 터전에서 거대한 수입을 창출하며 막강한 영농실력을 과시하면서 지역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족농민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의 토지를 찾아 농사를 짓자 하여도 소농경영수준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리 애를 쓰고 농사를 지어도 얼마 떨어지는 것이 없으니 다시 토지를 그들에게 임대를 주고 임대비를 받거나 그들의 밑에서 고용일꾼으로 일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찌 잘 살수 있겠는가?
  조선족농민들이 한국노무송출에서 돈을 좀 벌어 빈곤에서는 해탈되었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기의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니 결국에는 실력이 강한 자에게 먹히게 된거나 다름 없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역우세도 잃고 있다. 하여 조상들이 억척스레 가꾸어 놓은 우리 삶의 터전이 온전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각 향촌마다 우리 민족을 주체로 한 전문농장이나 농민전업합작사를 꾸려 외지에 나가는 촌민들이라도 이런 전문농장 혹은 농민전업합작사에 토지를 들여 놓고 주식형식으로 농장이나 전업합작사경영에 참가한다면 자기의 토지도급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농촌집체경제조직성원이면서도 농장 혹은 전업합작사의 성원으로서의 지위와 시장주체의 평등지위를 가질 수 있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족 인구의 대 이동으로 하여 지금 조선족 농촌마을이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심각하다. 대부분 조선족들이 한국노무송출이나 대도시로 나간 지 10년이 거의 되고 일부는 10년, 15년, 20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은 언어가 통하는 동족국가이고 한국노무는 짧은 시일내에 많은 돈을 벌어 빈곤에서 해탈할 수는 있지만 필경은 자기의 나라가 아닌만큼 우리가 한평생 살 곳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서 내 고장, 내 집에서 사랑하는 내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자지방의 자연우세를 충분히 살려 내 땅에서 농사도 짓고 다각경영도 하고 더 크게는 제2차산업, 제3차산업과 같은 구상으로 새로운 창업을 하면서 조상들이 우리에게 넘겨준 삶의 터전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권고하고 싶다.
  3년 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사회를 조사하고 중국조선족들의 실생활을 체험하였으며 중국에 돌아와서도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조사하였기에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해 분석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 한국과 재한 조선족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여러 편의 글들을 써서 여러 언론매체에 발표할 수 있었으며 2012년에는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라는 1만 2000자에 달하는 묵직한 글도 써서 "중앙인민방송",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 등 여러 매체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년에는 3농문제 관한 계열칼럼을 써서 "길림신문"에 발표하여 "오늘의 화제"2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총적으로 나는 중국조선족이다. 나는 우리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유리한 일을 하는 것으로써 힘이 자라는 데까지 나의 여생을 바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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