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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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
2013년 06월 19일 09시 13분  조회:1056  추천:0  작성자: 홍천룡

•수필•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

홍천룡

 
 어릴 때 내가 살던 싸리골 마을에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었다. 마을 한복판에는 두레박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을 축으로 여러 갈래 길이 오불꼬불하게 가가호호로 통했다. 제일 큰 길은 남쪽으로 곧게 뻗은 신작로였는데 현성과 통했다. 마을을 떠나가는 사람, 동네로 찾아오는 사람 다 그 길을 통해 오고가고 했다. 동네 아저씨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현성까지 가면 세계각지로 다 갈수 있단다. 다만 돈이 없고 가난해서 못갔을 뿐이였지… 그 다음에는 북쪽 뒤산골짜기로 올라가는 달구지길이였는데 수레바퀴에 의해 패인 홈채기가 두 줄기의 철길마냥 길을 따라 평형으로 뻗어올랐다. 온동네 땔나무가 그 길을 통해 실려온다. 동네 어르신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길을 따라 뒤산을 넘어 산발을 타고 계속 가면 운무속에 아아하게 치솟은 백두산까지도 갈수 있단다. 다만 호랑이, 곰, 승냥이 같은 야수가 범람해서 가기 무서웠을 따름이지… 

그 외에도 동쪽으로는 푸르른 주단처럼 펼쳐진 논밭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펑퍼짐하게 등을 내민 강냉이밭과 조이밭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큰강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그리고 윗마을, 아랫마을, 앞동네, 뒷동네에서 제각기 마을밖으로 통하는 소로도 많았다.

마을사람들의 발자국이 제일 많이 찍힌 길은 그래도 남쪽으로 뻗어나간 신작로였다. 먼 옛날 할아버지의 아버지이신 노할배께서도 그 길로 노할매랑 할배랑 남부녀대하여 이 마을로 들어왔다가 갈 길이 막히자 짐을 푼 것이 그대로 눌러 앉고말았단다. 그 후에 백부님이 흰 중치막자락을 펄펄 날리며 그 길로 동경고학을 떠나셨고 또 그후에는 삼촌이 가슴에 뻘건 꽃을 달고 그 길로 조선전선으로 나갔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는 날 꼭 돌아오마 하던 삼촌이 한장의 렬사증으로 되여 돌아올줄이야! 영원한 과부가 되고 영원한 렬사유가족이 된 아주머니가 유복자인 형철이를 업고 늘 동구밖 비슬나무밑에 서서 저녁노을에 가물가물해지는 신작로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애잔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내가 깜장 헝겊가방을 메고 그 길로 학교를 다닐 때에는 길 량켠에 팔뚝만한 애어린 백양나무가 줄느런히 늘어서있었고 길녘에는 코스모스며 민들레며 할미꽃들이 빨갛게 노랗게 하얗게 피여있었다. 그때 아침해를 맞으며 등교길에서 부르던 노래가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


푸른 가로수는 하늘하늘 춤추고

예쁜 꽃송이는 방울방울 웃어요.

학교로 가는 길은 하냥 즐거워

……

이 노래를 부르며 나는 구름송이 같은 꿈결에 몽롱히 젖어들었고 민들레의 포자엽 같은 희망의 씨앗을 길녘에 날렸었다.

크면서 나는 그 길로 중학교도 다녔고 그 길로 고중도 다녔고 그 길로 큰 도회지에 있는 대학교로 갔었다. 대학교문을 나와서는 갈래갈래 뻗은 길로 연변 각지도 돌아다녔고 중국 내지도 띄염띄염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며 북조선도 띄염띄염 돌아다녀 봤다.

연변을 놓고 봐도 연길시를 축으로 남쪽으로 나가면 이민사의 흔적이 력력한 룡정이 있고 룡정에서 오랑캐령을 넘으면 북조선 회령이 내다보이는 두만강가에 이를 수 있고 북쪽으로 이란고개를 넘어 가야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빨찌산 옛말이 깃든 왕청에 이르게 된다. 동쪽은 훈춘인데 소반령을 넘어가면 삼국이 내다보이는 두만강하류인 방천에 이르게 되고 서쪽은 이룡산을 끼고있는 안도인데 거기에서 서남쪽으로 달리면 아아한 백두산에 이르게 된다.

대한민국을 놓고 봐도 서울을 축으로 갈래갈래 길이 삼면 바다로 쭉쭉 뻗어나갔다. 동해로 서해로 대한해협으로! 해안가를 따라 점점이 박힌 제도, 군도, 해도들이 하늘에 별무리가 내려 앉은것만 같다.

북조선을 놓고 봐도 평양을 축으로 갈래갈래 길이 동해로 서해로 백두산으로 금강산으로 길게 짧게 뻗어나갔다. 산이 많은 곳이라 벼랑길이 많았고 벼랑길마다 절승을 이루고있었다.

중국의 장강이남은 사철 푸른 봄과도 같다. 항주, 소주, 가흥일대에 가서 뻐스를 타고 한바퀴 빙 돌면 길가에서는 노오란 유채꽃이 끝없이 아우러지는가 하면 파아란 논밭이 층층히 겹놓이여 눈뿌리를 빼준다. 길을 가다가 막히면 나룻배나 보트를 탈수 있다. 농촌마을엔 육로보다 수로가 더 많다. 길마다 골목마다 물이 골똑 차서 찰랑거리는데 문만 열고 나서면 배를 탈수 있다. 가끔씩 고풍스러운 석돌아치교아래에서 패랭이를 쓴 녀인이 몸을 한들거리며 노를 젓는 모습은 유유히 흐르는 한가락 선률을 방불케 한다. 그야말로 “강남수향”(江南水乡)의 싱싱한 싱그러움에 시원히 젖어볼수 있는 곳이다. 허지만 아무리 경치가 좋고 유정한 곳이래도 우리 조선족이 살수 있는 고장은 아니였다.

중국의 중원지구나 남방에는 경치가 수려하고 살기가 좋은 곳이 많다. 허나 우리 조선족이 살기에는 별로 적합한 곳이 없다.

한번은 한국문학작가회의 강원지회를 찾아 강원도 속초시로 가본 적이 있다. 초행이라 모든 것이 신기하게 안겨왔다. 북한강과 소양강 연안을 따라 태백산줄기를 굽이굽이 에돌며 뻗어나간 포장길 연도에는 하얀 읍내거리며 파랗고 빨간 지붕을 인 농촌마을들이 연이어 나타나군 했다. 그림속의 그림 같기도 하고 스크린속에서 이동하는 화면 같기도 했다. 차창 밖으로 쑥 안겨왔다가는 서서히 빙 돌며 뒤로 밀려가는 포전이랑 마을이랑 개울가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와보는 고장이라 생소한데도 있었지만 눈에 익은 곳이 더 많았다. 어쩌면 고향 마을의 이웃집 아줌마를 몇년만에 이 고장에서 만난 기분과도 같았다. 왜 이처럼 신통할가? 마치도 우리 고장 룡정에서 회령과 마주 앉은 삼합으로 나가는 길녘 같기도 하고 화룡에서 무산쪽에 있는 남평으로 가는 길 같기도 하고 북조선 원정리에서 나진항으로 나가는 길 같기도 했다.

산기슭을 따라 아담하고 밝게 들어앉은 부락들이며 뙈기뙈기 다루는 포전들이며 펑퍼짐한 언덕바지에 우거진 과일숲이며 그 사이를 거미줄 치듯 굽이굽이 에돌아 흐르는 냇물이며… 바로 이런 고장이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포전도 있고 숲도 있고 하늘에서는 제비가 지지배배, 들판에는 둥굴이의 워낭소리 둘렁! 그 어떤 해설도 필요 없고 그 누가 속이자고 해도 속일 수 없는 고장, 백의민족의 하얀 넋이 하얗게 슴배여 응고된 고장이다. 그래서 서로서로가 신통히도 떼닮은 곳들이다. 이런 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세세대대로 살아왔고 우리도 그 속에서 커오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 백의민족은 서로 국적이 다르고 제도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핏줄이 한줄기인 것만은 속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서로서로가 다르다. 이명박대통령이 이끄는 대한국민들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지도하는 북조선인민들 또한 어느 길로 가고 있고 호금도주석의 령도하에 있는 중국의 해외동포들은 또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가는 길이 다름에 따라 그 길이 탄탄대로로 이어질수도 있고 가시덤불 오솔길에 들어설 수도 있고 천 길 나락 낭떠러지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노래 한마디가 있다.

가시덤불 헤치고 험난을 물리치며

이 발자국 떼노라 길이 어디메냐

묻노니, 길이 발밑에 있거늘

……

삼천리 강산이 비분에 떨던 그 시기, “한일합방”경술국치에 천만 동포들이 구경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슴을 치며 낙루하였었다. 이완용은 무릎을 꿇고 매국의 길에 들어섰다. 민족을 모르고 나라를 모르고 살아온 인간이였으니깐. 김구는 애국계몽의 길을 찾아 해외에서 가시덤불을 헤쳤다. 도탄속에 빠진 민족과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충청북도 영동의 시골 마을에서 한 청년이 왜놈 순사를 때려눕히고 마을을 떠나 만주로 향했었다. 낮에는 대통로에 들어설 수 없었고 밤에는 길을 외끼군 했다. 산간벽지로 시골 마을을 에돌며 숲속을 비집고 삼림을 꿰지르고 태산준령을 톺고 강하개천을 헤가르며 길 아닌 길로 두달동안 걸어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용정에 이르러 명동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독립”이란 나라찾는 길을 찾게 되였다. 그는 자기의 일체를 나라와 민족을 찾는 독립사업에 바치려고 맘먹었고 후에는 독립군에 들어가 백두의 밀림속을 넘나들며 수많은 왜놈들을 무찔렀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가 참의부와 정의부지간의 한차례 충돌에서 대방의 총에 맞아 죽었다. 결국은 다 같이 독립에 나선 사람들의 총에 맞아죽은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는 독립을 향한 길에도 당년에 만주로 가던 길처럼 갈래갈래 굽이굽이 다르게 뻗은 길이 많은 줄을 몰랐던것이다.

명년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은 수많은 미망인을 남겼고 수많은 고아를 만들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을 초래시켰다. 서로 눈에 불을 켜고 동족끼리 쏘고 찌를 때 그대들이여,집에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해 보았는가? 눈이 또랑또랑 해서 기다릴 아들딸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들이라고 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허지만 전쟁이란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생사판가리마당이다. 누가 그런 마당을 만들어 놓았는가? 이런 역사의 인간비극을 시나리오로 꾸미고 연출해낸 것도 우리 민족이였고 그걸 역사의 무대에서 공연한것도 우리 민족이였고 그걸 보면서 눈물을 흘린 것도 우리 민족이였다. 6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전쟁에 대한 “법정”이 개정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비극이 빚어졌고 오늘까지 이어졌을가? 서로서로의 가는 길이 달라서?

하긴 불행을 많이 당한 것만큼 우리에게도 복이 많이 떨어졌었다. 한국에서나 북조선에서나 또는 중국의 연변에서나를 막론하고 더는 외국인의 예속을 받지 않고 자기의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기의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였다. 그 어디로 가나 우리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고 그 어디로 가나 우리의 노래를 소리 높이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과 노래소리가 그칠줄 모른다. 나는 한국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가정을 보았고 북조선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부부를 보았다. 나진으로 갈 때 저슬령밑에서 돌이 금방 지난 아기를 안고 우리 차에 올랐던 한쌍의 부부가 행복에 겨워 서로 구순하게 굴던 모습이 퍽 인상이 깊었었다. 우리 연길에도 행복하게 사는 집이 많다. 허나 그 집이 행복하다 해서 늘 웃음꽃만 피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런 가정일수록 말썽이 더 많고 갈등이 더 심각할 때가 있다.

한국에 가서 몇 년씩 벌고 돌아온 친구들이 술좌석에 앉아 개탄할 때가 많다. 한국에선 하루 건너씩 농성이다 데모다 하여 소란스럽고 국회에선 당파분쟁이 그칠줄 모르고 거리에 나서면 일하고 먹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렇게 잘 사는 나라로 됐느냐 하고 말이다. 한국은 광주민주화운동이후부터 점차 유신체제에서 벗어나 진정 민주화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민주화의 힘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 진정 느껴보지 못했다. 오늘날 지금의 이 시각까지도 한국의 각 여당과 야당지간에는 국민의 권리와 리익을 놓고 분쟁이 치렬해지고있다. 분쟁이 치렬해질수록 그것이 통합과 가깝게 통하게 되는것이다. 즉 분쟁속에 통합이 있고 통합속에 분쟁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차가 많은 한국에 길이 한갈래 뿐이면 어떻게 될가? 당년에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국도건설을 추진시킬 때에 미친 짓을 저지른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었다. 지금에 와보면 그때 그런 비난속에서도 견정하게 그 일을 추진시킨 것이 얼마나 영명한 결책이였다는 것이 알린다. 북핵문제도 그렇다.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가 말가 하다가도 툭 끊어지며 시끄럽게 반복에 반복을 중복해왔다. 그래서 한반도가 세계의 주목을 끄는 초점이 되였다. 아직까지 그 어느 회사의 광고나 그 어느 영화의 포스터도 이처럼 놀라운 효과를 낸 적은 없었다. 문제의 해결이 시끄럽게 감기고 얽혀질수록, 무단적이고 극단화에 이를수록 문제는 해결하기 곤난해진다. 해결하기 곤난하다는 점이 바로 해결할 기회가 박두했음을 암시해주는 신호인것이다. 베이징“6자회담”이 진행해온지 이미 6년이 지났으니까 이제 다가올 6년내, 즉 2015년내에는 북핵문제가 철저히 해결될것이다. 정말일가? 우리 서로서로 두눈을 꼭 감고 두손을 모아쥐고 점치기게임을 해보자!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는 험난도 있고 절벽이 가로 막힐 때도 있게 된다. 허지만 세월이 거꾸로 흐르는 법은 없다. 길이 험난하면 메우고 닦으면 되는것이고 길이 막히면 빙빙 돌아가도 되고 거길 뚫고 터널을 뺄 수도 있다. 길이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빼진것이니까. 길에 나서면 자연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희망이 보인다. 동해의 일출을 보려고 동틀무렵의 어둠을 헤쳐 나갈 때의 그런 기대감, 그 희망, 얼마나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던가!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뜬다. 그것이 우리에게 매일과 같이 생의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다.

차를 몰고 한강대교위에서 질주하는 중절모사나이여, 대동강유보도에서 치마자락을 날리는 녀인이여, 두만강언덕위에서 소잔등 타고 피리부는 목동아, 백두산정상에 올라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고 한나산정수리에 올라 서해의 낙조를 그려보시지 않으려는지… 차를 모는 아저씨, 녀인의 걸음이 더디다고 나무리지 마시라. 녀인의 걸음은 언제나 사뿐사뿐 안전한 걸음. 사뿐사뿐 걸어가는 처녀동무, 목동이 탄 소가 늦다고 나무리지 마시라. 소는 어정어정 걸어야 멀리 가는 법. 소를 타고 늑장 부리는 목동아, 차를 몰고 질주하는 아저씨를 원망하지 말아. 갈 길은 멀고도 먼데 시간은 너무나도 무정하단다.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개혁과 창조의 길을 열어주는 강한 리더십이 있고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보귀한 경험과 우수한 전통이념이 있다.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은 길마다 너무나도 험난하고 장애가 많다. 그걸 소통시키고 연결시켜야 하고 서로서로지간에 리해와 통합이 이루어져야 진정 통일이 실현될수 있다.

마지막으로 필을 놓으면서 친구 김학송씨가 지은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시내물 흘러흘러 가닿는 곳은

꽃구름이 잠자는 가없는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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