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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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의 문학꿈1
2013년 06월 26일 08시 53분  조회:1961  추천:4  작성자: 홍천룡
시절의 문학꿈
홍천룡


1
“문학이란 무엇이냐?”
퇴근길에 들린 술집에서 술에 얼근해진 젊은 친구가 문학잡지를 쥐고 마구 흔들어치며 억설을 쏟는다.
“소위 문학이란 책을 놓고 말하면 책가위이요 랭면을 놓고 말하면 고명이요 모두부를 놓고 말하면 마늘양념간장이지요…”
“에끼, 이 사람아, 무슨 허튼 소릴!”

내가 꾸중을 하자 그는 더구나 부풀어 오르며 낯짝을 해뜩거렸다.
“아닙니꺄, 까놓고 말해서 문학이란 빛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죠! 문학해서 돈이 나옵니꺄 녀자가 나옵니꺄? 기껏해서 술 몇잔 생기겠지요. 술잔이나 기울면서 허황한 꿈이나 꾸고 …”
“어허, 이 사람 점점 더 왜지밭으로 달아나네. 안되겠어!”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차분하게 젖어가는 밤공기가 머리를 헹구어준다. 구름없는 하늘은 짙은 쪽빛융단을 깔아놓은듯 검푸르기만 하다. 초저녁인데 벌써 별들이 나타나 깜박인다. 아득하게 요요해 보이는 별무리를 바라보노라니 멀고 먼 옛날 허연 코물을 국수오리처럼 달고 다니던 개구쟁이시절이 떠오르고 그 시절 고향의 밤하늘이 떠오른다. 역시 여름 밤, 공기가 청청하고 별들이 총총한 여름밤이면 정구네 마당가에는 쑥태를 태우는 노오란 내굴이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그 주위에는 늘 동네 조무래기들이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해서 빙 둘러앉아있는다. 그러면 귀신옛말을 귀신같이 하는 정구형님이 귀신같이 앉아서 귀신옛말을 한다. 옛말에서 나오는 귀신은 저마다 팔방미인이다. 사람이 하는 노릇도 귀신이 다 할 줄 알고 사람이 하지 못하는 노릇도 귀신이 다 한다. 사람은 땅우에서만 헤집고 살지만 귀신은 땅우에서도 살고 하늘에 올라가서도 살고 바다밑에 들어가서도 자유자재로 산다. 귀신옛말을 들으면서 나는 신비한 환상세계를 엿볼수 있었고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랑만의 즐거움을 맛볼수 있었으며 상아아씨처럼 달나라로 훨훨 날아갈수 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줄도 알게 되였다. 그것이 문학의 길에 들어서는 한쪽 발이 되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무슨 일이든 남보다 색다르게 해보려고 광분하군 했었다.

학교 때에는 작문숙제를 늘 엉뚱하게 써내서는 비평을 받기도 하고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남보다 더 특수한 일을 하려고 날뛰였다. 18살에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우겠다고 밤마다 석탄실이차에 따라다니며 차를 몰았고 19살에는 정식로동자가 되겠다고 누구도 가지 않는 삼도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기도 했고 20살에 정식로동자가 된다음에는 8개월만에 화선입당을 하고 시 선진생산자와 시 모범당원이라는 계관을 쓰고 찦차에 앉아 모주석저작학습활용강용회마다 불리워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장중하게 문학공부를 한답시고 필을 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준확하게 대학교 2학년 후학기부터였다. 학과공부는 중학생아이들이 책가방을 뒤고방에다 메치듯 뒤전에다 밀쳐놓고 말이다. 울바자밑의 봉선화가 피여나기까지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자연적으로도 많은 요소가 수요되고 인공적으로도 많은 가꿈이 따라가야 한다. 지금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글을 쓴답시고 필을 긁적거리게 된데는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끼쳐주신 분이 몇분 계신다. 간단한 실례를 든다면 이러루한 에피소드도 있다.

"문화대혁명"이 고조로 치달아 올라 전국형세가 한결같이 “붉은 바다”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우리 공원가의 “쏠쏠이패”들은 매일 할노릇이 없어 짝패를 무어 서시장거리를 한고패씩 휘젓고 다니는 것이 업이였다. 그러다가도 어디에서 공판대회가 열린다 하면 무리를 지어가서 구경하군 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시내 어느 무리의 “짜새끼”(도적무리에 든 도적놈을 가리키는 은어임)가 몇년징역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였다. 징역년수가 높은 자일수록 우리는 재주있는 놈이라고 더 높이 보았다. 70년도 초반이라고 기억되는데 어느 날 로동자문화궁에서 또 공판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우리는 무리를 지어 가보았다. 그날 공판이 끝난다음 죄범을 실은 트럭이 굴러왔는데 맨 앞에 선 차우에는 얼굴이 하얗고 눈이 움푹 꺼져들어간 죄수가 가슴에 "김학철(金学铁)"이라는 "개패(죄수의 가슴에 건 간판을 당시 속되게 이르던 말)"를 걸고있었다.

"어느 무리 짜새끼야?"
"연길바닥에서는 면목이 없던 놈인데…"
“보매 되게 날랜 눔이야!”
……
차림새를 보니 건달같아 보이는 두 청년이 주고받는 말에 곁에 섰던 중년사나이가 그들의 말을 시정해주는것이였다.
"짜새끼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라구."
그 말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찌 죄인이 될수 있다는건가! 아니 그래?… 나는 그 중년사나이를 올려다보며 다급히 물었다.

"그래 저 분이 소설을 쓰신다는 그 김학철…"
"그래그래, 맞다. 너 죄꼬만 녀석이 아는것도 많구나. 반동소설을 썼으니 도적질한것보다 죄가 더 중한거지."
나는 그때까지 김학철선생님을 본적도 없고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도 못했었다. 다만 언젠가 정구형님한테서 연변에도 김학철선생님같은 분들이 소설을 많이 쓰고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때 나는 이다음 크거들랑 글을 잘 쓰면 그런 분들을 만나볼수 있겠지 하는 미련을 품고있었다. 헌데 그날 포승에 묶이워 "개패"를 걸고 트럭에 실린 "현행반혁명분자-김학철"이를 이처럼 비참한 눈길로 보게 될줄이야!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 세상이 너무 허무하다는 감을 느껴보면서 이다음 어느 땐가는 감옥으로 가더라도 한번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이나마 가져 보았었다.

그다음 분은 강장희선생님이시다. 그 분과 나는 한 직장에서 함께 일했었다. 당시 우리 량식숙식품가공공장의 행정부문은 두개 조로 나뉘여졌는데 하나는 정공조(政工组)이고 하나는 생산조였다. 정공조산하에는 민병, 공청단, 공회, 인사, 보위, 총무 등 부문이 포함되였고 생산조산하에는 생산, 판매, 구입, 회계, 통계, 운수, 보관 등 부문이 포함되여있었다. 내가 정공조 조장이였기에 일상적인 사무는 내가 처리하게 되여있었다. 당시 강선생님은 신문과 금방 복간한 “연변문예”잡지에 글을 써서 발표하고 계셨다. 나의 사무실과 간벽을 사이두고 있었기에 그인 매번 자기의 글이 실린 신문이나 잡지를 먼저 나한테로 들고 와서 보이군 했다.
“쑈훙(小洪),이것 보오. 내 쓴 글이 또 실렸다니.”

가는 실눈이 시물거리는 너부죽한 얼굴에는 은근한 자호감이 일렁거리고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가 글을 척척 써서 발표하는데 대해 흠모의 정을 금치 못했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내지 않았다.
“로쨩(老姜), 이런 글을 써서 발표하면 무엇이 생김둥?”
그러자 강선생님은 얼굴에 피여나던 미소를 거두고 정색해서 이런 말을 했다.
“쑈훙, 문학이란 돈이나 물질을 보구 하는 노릇이 아니오.”

그리고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는가 하는 경력담을 들려주는것이였다. 남의 경력담을 듣기 좋아하는 나는 의례 퇴근길에 그이를 모시고 간이식당으로 가군 했다. 둘이 앉으면 근들이 흰술 한근에 소고기생회 한접시면 필이였다. 보기만 해도 얼큰한 소고기생회만 들어오면 강선생님의 코등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송 내돋쳐 알릴락말락 반짝 빛을 뿌렸다. 그러면 인차 기분이 돌아져서 쾌적한 분위기속에서 문학과 인생을 론할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문학의 예술성과 감화력을 감지할수 있었고 습작의 간고함과 성공의 희열성을 습득하고 창작의 충동성을 가지게 되였다.

당시 “연변문예”편집부에서는 과외작자들의 창작강습반이거나 “화평회”같은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있었다. 강선생님도 통지를 받고 단위령도의 비준을 얻어 몇번 참가하셨다. 헌데 한두번이지 그냥 비준받자고 말을 떼기가 난감할 때가 있었다. 나의 기억에는 개산툰에 가서 강습반을 꾸린다고 할 때였다. 행정간부들의 외출허가는 공장의 2호인물이고 생산을 책임진 진주임의 비준을 맡아야 하는데 아마도 입을 떼기가 난처하셨는지 강선생님은 나의 사무실에 들어와 푸념하셨다. 나는 그이의 속심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과외작자로서 그번 강습반이 그에게는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얼마나 가고싶었겠는가를!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될 것 같았다.
“로쨩, 아무 사람과도 말하지 말고 떠나는 날 말없이 떠나갑소. 그렇지 않아도 로쨩이 그런 강습반에 자주 다닌다고 전번 회의에서 말이 있었습꾸마.”
생산단위여서 공장의 출퇴근감독이 엄했고 청가제도가 층층이 세워져있었던것이다.
“그래서 될가? 돌아와서 진주임이 가만 놔둘가?”
“내 비준을 맡고 갔다고 합소. 로쨩이 떠난다음 내가 진주임한테 말해놓을테니깐요.”

행정적으로 따지면 공장내에서 내가 5호인물이였지만 젊은이들이 많은 공장이라 나의 역할은 2호인물에 못지 않았었다. 그래서 진주임도 많은 면에서 나의 의도를 마음대로 꺾지는 못했다. 강선생님이 떠난다음 내가 그 일을 진주임께 털어놓았더니 그는 대뜸 낯빛이 뚝뚝해지면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것이였다. 분명 자기를 무시했다고 노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닐세라 어느 한 당원생활회의에서 진주임이 이름은 찍지 않고 일부 당원간부들이 청가제도를 무시하고 월급행위로 무정부주의사조를 부축하고 있다고 맹렬한 비평을 가하는것이였다. 나는 꾹 참고있다가 나중에 자아검토를 하고나서 “반공격”을 개시했었다. 공장내의 문예인재와 체육애호가들을 관심하고 지지해주어야 한다고, 아무리 생산단위라고 생산만 틀어쥐고 혁명은 틀어쥐지 않겠는가고! 확실히 그해 연길시“5•1절”경축문예회연에서 우리 공장의 여러 개 절목이 집체상을 타게 되였는데 거기에는 강선생님이 직접 가사도 써주시고 또한 문화관의 친구를 모셔다 무용과 음악을 가르쳐주게 한 공로도 컸던것이다.

그리고 한분은 김관웅박사님이시다. 그 분과 나는 대학교 동기동반 동창생이였다. 동창생들지간의 년령차이는 엄청났다. 사회에서 십여년간 공작하다가 온 사람도 있었고 금방 고중을 졸업하고 들어온 학생도 있었다. 아마 학교교육이 보급된이래 중국에서 그것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 뒤끝이라는 특정된 력사배경하에서만 있을수 있는 아이러니한 현상이라 하겠다. 나는 나보다 세살이상인 그를 “로찐”(老金)이라고 불렀다. 그 때 그는 벌써 집체호생활도 겪었고 군부대단련도 했었고 출판업계에서 저작도 번역했고 문학작품도 쓰고 계셨다. 우리 반에서는 선망과 존경의 우상이였다. 성격이 소탈하고 박식하여 우리 어린 또래들은 모를것이 있으면 늘 그와 물어보았고 그러다가도 속에 내키지 않거나 달통되지 않으면 그와 변론하기를 즐겼다. 그와의 변론은 언제나 열렬했고 서로 지지 않겠다는 즐거운 게임이였고 감성으로부터 리성으로 승화되는 과정이였으며 그의 학문을 “도적질”해내는 쾌감적인 분위기였다.
지난 세기 70년대말기는 어리둥절한 가운데서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기였다. 관념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그에 따라 대학교교정에서는 세가지 바람이 불어쳤다. 탐구바람, 련애바람, 문학바람이 교정의 구석구석마다에서 회오리쳤었다. 낯짝이나 좀 사내답게 생기고 좀만 더 츨츨하게 빠졌더라면 나도 련애바람에 말려들어 죽자살자 하는 랑만의 그 파도에 표류해보는 풍류사 한페지를 교정에 남겼을텐데… 그것이 대학시절에 남긴 유감이라면 제일 큰 유감이겠다.

못난 새끼오리 동동 뜬다고 나같이 못난 놈은 한번 문학에서나 떠보자고 마음먹었다. 또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조문학부나 우리 중문학부의 대부분 동학들이 문학에 열광하고있었던것이다. 하물며 우리 반에는 “로찐”과 같은 문학스승도 계시고 또 문학과 문학번역에 뜻을 둔 동창생들이 여러명 있었으니까 뒤심이 있다고 속이 든든해났던것이다.

그 당시 “로찐”네는 부모네 집 방 한칸을 따로 도배해서 살림살이를 하고있었다. 우리반 문학도들이 대여섯명만 그 집에 가서 앉으면 방이 꽉 차는 비좁은 방이였다. 어떤 녀석은 널마루에 퍼더버리고 앉았고 어떤 녀석은 문턱에 걸터앉아서 생맥주에 명태쪼각을 찢으며 문학과 인생에 대해 열변을 토하군 했는데 저마다 중국과 세계의 문단을 주름잡으며 달리는 준마였고 당금이라도 세계명작을 써낼 것 같은 대가의 자태였다. 문학으로 삶을 영위해가면서 한번 우리 말 우리 글로 세계를 흔들어보겠다고 꿈꾸는 시각이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분위기에 그 꿈속에서 헤매던 그 시절이 그립다.

열변을 토하고 돌아온 날 저녁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담배대를 꼬나물고 비좁은 방안을 휘젓거리며 위대한 구상을 무르익히노라면 불현듯 뽀얀 운무속으로 반짝 번개같이 뇌리를 탁 내리치는 것이 있다. 옳지, 바로 그거야 그것! 잡았다, 잡았어! 세상을 놀래우는 명작이 잉태하는 과정이 아닐손가! 그것이 날아날가봐 담배불을 부벼끄고는 부랴부랴 이불부터 쫙 펴고 거기에 엎디여 턱을 베개에다 걸고는 원고지우에다 필을 날린다. 필끝에서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며 부서진다. 래일모레면 저기 저 문단봉우리에 함박꽃이 활짝 피여날게 아닌가! 그 불꽃처럼 튕기던 령감이 달아날가봐 날이 밝아오는줄도 모르고 대학교등교시간도 까맣게 잊고 필만 날린다. 그렇게 이삼일 써낸 “명작”을 한시급히 문학월간지에 내서 세상사람들에게 빨리 알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워 일분일초라도 지체될세라 우편국으로 달려가서는 편집부주소에다 “편집부책임자앞”이라고 밝혀서는 부쳐보낸다. 그것도 위대한 “명작”이 분실될가봐 잔돈이 더 들어붙는 등기우편으로 말이다. 프로레타리아 강철작가 오스또롭쓰끼도 원고를 분실당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지 않았는던가! 우편국을 나서니 정말 하늘이 맑아보이고 그 맑은 하늘로 내 마음이 한마리의 비둘기가 되여 포르릉 날아오른다.

그제날 건축시공대 대장질 할 때 그날 떨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 무더운 여름날 퇴근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한두시간씩 땀동이를 흘리군 했었다. 임무를 완성한다음 서늘하게 깃드는 어스름에 땀에 전 몸을 식히며 대원들과 우스개를 피우면서 “쑈풀치기”(소매점찾아들기)하는 멋이란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모른다. 그때는 체력로동으로 인한 육체상의 기분전환을 위해 생맥주를 마셨다. 오늘은 뇌력로동으로 인한 정신상의 기분전환을 위해 한잔 들어야 하겠다. 우편국에서 돌아오는 걸음에 마을어구에서 “쇼풀치기”를 했다. 한잔 마시면 가슴이 쩡 열리던 생맥주, “명작”을 써낸뒤에 마시는 맥주는 더욱 더 시원하기만 하다. 한잔 또 한잔…
“주인님, 이 상점 이름이 뭐던가요?”

“북광상점.”
“아, 그렇지. 오늘이 며칠이던가요?”
“8월 5일, 목요일.”
“아, 그렇지. 8월 5일, 위대한 8월 5일, 드디여 내가 오늘 이 북광상점에서 명작을 마무리지은 기분에 잔을 기울이며…”
“이봐 젊은이, 금방 뭐라했나?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아하, 무슨 날인가구요? 그건 이다음 차차 알게 될겁니다. 자, 맥주 한컵 더!”
“인젠 그만하지? 앉은 자리에서 벌써…”

상점주인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젊은 친구가 더 마시면 주정이나 부릴가봐 근심되는 모양이였다. 비츨거리며 상점문을 나서니 만천하가 노래진다. 이삼일동안 밤낮이 따로없이 련속작전한 피곤이 일시에 몰려드는지 눈까풀이 천근무게마냥 내리드리워 눈을 뜰수가 없었다. 겨우 집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진 것이 그대로 마루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야, 드디여 발표되였다. 내 글, 내 작품이 드디여 활자로 찍혀나왔다.
“자식, 쓴다더니만 끝내 써냈구나.”동학들의 부러운 지껄임.
“천룡이, 희망이 있소. 힘을 내오!” “로찐”의 고무의 말씀.
“천룡씨, 정말 대단해요. 문학공부를 한다더니만 끝내 작가가 되였군요. 축하해요!”

꿈결에나 찾아가던 몇몇 꽃분이 같은 얼굴에서도 함박꽃 같은 웃음이 활짝 피여나며 축하의 인사가 날아든다. 세상이 이래서 살만하구나! 헌데 손바닥만한 단편이 좀 시시해! 기나긴 인생행로에 등대와도 같이 머나먼 미래를 비춰줄만한 장편대작을 써내자! 그래 소뿔은 단김에 뽑으라고 내 오늘부터 또 필을 들고 쓰자. 필이 어디에 있냐? 원고지가 어디에 있냐?

팔을 허우적거리며 아무리 찾아도 필이 손에 쥐워지질 않는다…
“야, 일어나라. 너 이게 마루바닥에서 무슨 주제야!”

필을 찾느라 허우적거리는데 누가 궁둥이를 잡아두드린다. 눈을 떠보니 상을 찡그린 어머니가 가슴츠레한 눈으로 흘겨보고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꺼부적거리며 일어나 보니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아마도 마루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뒹군 모양이였다. 젠장, 작가가 이게 무슨 꼬락서니야! 나는 옷에 먼지를 툭툭 털었다. 풀썩풀썩 시뿌연 먼지가 피여올랐다.

“어이구, 이 먼지를, 밖에 나가 못털가? 썩 나가!”
어머니가 장난꾸레기를 내쫓듯 마구 밀어낸다.
“앗따실루 참, 엄마, 인젠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되우. 내가 지금 무슨 사람이 된 줄 알기나 아우?”

“무슨 사람이겠냐? 학생이지. 학생이란게 술을 퍼마시구 이게 무슨 꼴이냐! 어서 못 나갈가? 이 입성주제를 어쩌누? 금방 빨아서 입혔더니…에그에그, 저런저런, 저것두 원 대학생이누!”
“엄마, 난 인젠 학생이 아니라 작가란 말이우 작가. 알겠소? 홍작가가 됐단 말이우.”
어서 나가라고 손사래를 치던 어머니가 팔을 내리우며 덩둘한 표정을 짓는다.

“작가라니? 대학도 졸업하지 않구 작가질 한다냐? 졸업하면 선생질 한다더니…그래 작가질 하면 한달에 얼마나 탄다더냐?”
“앗따실루 엄마두 참, 작가란 거 뭐 전문직업이 아니구, 거 뮈라구 할가…됐소됐소, 어이구!”
나는 몸을 돌려 밖에 나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쇠귀에 경 읽기지. 어이구, 작가두 모르구 무슨 멋에 세월을 살아왔누?”

그날 저녁부터 나는 담배대를 꼬나물고 방안을 왔다갔다 서성거리며 장편대작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담배 한통씩 태우며 구상을 무르익히느라 머리속알머리까지 욱씬욱씬해나도록 뇌즙을 짰지만 어쩐지 그 놈의 구상이 무르익혀지질 않았다. 낮이면 낮마다 교실에 앉아서 창밖을 멀거니 내다보며 편집부의 희소식이 언제면 날아오겠는가고 학수고대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가고 일주일이 지나가고 한달이 지나갔는데도 편집부쪽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다. 이럴 수가 있나! (편집부선생님들의 수준이라면… 한번 찾아가서 내 의도를 엿쭈어본다?) 이튿날 나는 원시초고뭉텅이를 안고 쭈클거리며 하남시장곁에 있는 편집부를 찾아갔다. 복도에 들어서니 마침 몸집이 시리시리한 량반이 테굵은 안경을 코등에 걸고 나와 두리번거리고있었다. 어쩐지 주눅이 싹 들며 그 사람한테로 다가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맹랑하게도 되돌아서 나오고말았다.
(작가가 되려면 자세를 좀 높여야 해! 시시하게 작품을 내주지 않을가봐 편집부를 찾아다녀? 못난 놈!) 그 길로 나는 동반동창 “로꾸이”네 세집으로 찾아갔다. 이불밑에서 잡지를 훑어보느라 꾸무럭거리는 그를 불러 앉히고 원고를 내밀었다.

“이걸 보라구. 내가 구상하구 직접 집필한건데 어떤가 좀!”
“야 이거참, 아직 밥도 안먹었는데…”
“로꾸이”는 시쁘둥해서 팅팅 붓긴 눈두덩이를 주무른다.

“지금 밥 먹는게 중요한가? 위대한 작품을 눈앞에 두고… 먼저 보라구. 볼새에 내가 맥주를 사올테니.”
“맥주는 무슨 맥주야? 식전부터!”
“앗따, 그래 위대한 작품을 놓고 맹물에 놀겠는가?”

나는 그집 퍼런 비닐통을 찾아들고 상점으로 달려갔다. 내가 생맥주에 마른 안주를 사들고 돌아오니 “로꾸이”는 시무룩이 웃고있었다.
“재밋게 썼구만. 습작숙제로 바칠건가?”
“숙제라니, 무슨 숙제?”
나는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냐는듯 덩둘해졌다.
“전번 습작시간에 심선생님이 습작품 한편씩 써내라고 포치했는데 당신이 또 빠진 모양이구만.”

“아니아니, 그건 아니야! 그까짓 작문숙제를 바치자구 내가 맥주를 사들고 다녀? 시시하게스리! 이건 직접 편집부에 정식으로 투고하는거라구.”
나는 시뚝해서 골을 내저었다.
“어벌통이 크건만 그게 어디…”

“아니 그래 작품이 안됐다는 말인가? 좀 똑똑하게 말해주게!”
장사에서 밑진 놈이 탈을 잡는다고 나는 괜히 “로꾸이”와 걸고들었다. 그가 마시든 말든 나는 맥주 한통을 다 마시고 그 집에서 나와버렸다. 집에 와서 다시 어지럽게 갈겨뭉개놓은 초고를 뒤적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로꾸이”가 제기한 의견들이 어딘가 속을 콕콕 찌르는데가 있는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시 첫 시작부터 수개하기 시작했다. 수개한다음 몇몇 동학들에게 보였다. 역시 긍정해주는 사람은 없고 생각밖의 의견들이 줄줄 튕겨나왔다. (이 눔들 수준이 요것밖에 안돼? 명색이 대학생이라는것들!) 나는 머리가 뻥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작문숙제를 달리 쓸 필요도 없이 이걸 바치고 선생님의 의견이나 들어보자! 그런데 습작시간에 심선생님이 그 위대한 작품을 전반 학생들 앞에서 줄거리를 소개한다음 전형분석을 가할줄이야! 그때 무안에 빠져 골도 들지 못했던 꼴이 지금도 생각하면 눈앞에 선하다. 강단에 높직이 올라선 심선생님이 팔을 내저으시며 “물이 쏴−하고 흘러내릴 때면…”하는 구절을 외우시면 교실안에서는 와−하고 폭소가 터지군 했다. 그 위대한 작품속에는 물이 쏴−하고 흘러내릴 때마다 작중 주인공인 처녀의 행동거지, 심리상태, 애정표현이 다양하게 변화되는 과정이 정채롭게 묘사되여있었던것이다. 심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물이 쏴−하고 흘러내릴 때면…”하고 읽었을 때에는 전반 교실이 떠나갈듯한 폭소가 터졌었다. 그 폭소속에서 나의 첫 미발표 완성작이 끝을 보고말았던것이다…

한편 작품으로 세상을 놀래워 놓고 하루밤새에 작가가 되려던 꿈이 깨여지자 저으기 사기가 저락되였다. 맥주를 마셔도 말오줌처럼 찝질하기만 했다. 학교가기도 싫어졌고 책보기도 싫어졌다. 그런데다가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작가월급이 언제쯤부터 나오냐고 따져묻기도 했고 작가가 되더니만 맥주값이 더 들고 담배돈이 더 날아난다고 고깝게 골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우리 몇몇이 앉은 자리에서 “로찐”이 대개 이런 말을 했다. 작품 한편을 완성하자면 정말 공력을 들여야 하는데 생활체험으로부터 구상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전형화부각으로부터 성격변화에 이르기까지 생활론리에 맞아야 하고 형상이 생동하고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언어예술인것만큼 언어토대도 잘 닦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고무를 받고 큰힘을 얻었다. (그래, 한술에 배 부르는 법은 이 세상에 없지. 한걸음 한발자국씩 떼보자!) 그후부터 나는 매 한편의 작품, 매 한부의 명작을 본다음에는 그 감수를 일기로 적었고 어휘를 풍부하게 장악하느라 애를 썼다. 그리고 습작삼아 생각나는대로 몇편 써보기도 했다. 허나 발표하겠다고 들뜨지는 않았다. 한편을 쓰고는 랭정하게 검토해보고 수개하군 했다. 그러다가 “진심”이라는 단편소설이 “대중문예”(지금의 “도라지”잡지 전신임)잡지에 발표되여 25원이라는 원고료가 날아왔다. 머리에 털이 나서부터 그때까지 처음 나의 글이 활자로 찍혀나온것이였다. 축하할만 했다. 나는 그 돈을 어머니께 맡기면서 한상 잘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이게 작가 월급이냐? 량식국에 쌍발(출근)할 때보다 적구나.”
“월급이 아니라 원고료요. 글을 쓴 값이란 말이오. 작가가 되여 글을 써내면 돈이 이렇게 척척 나온단 말이오.”
“오, 전번에 그 퍼런 잡지에 둬어장 실린 글값이겠구나. 웨 백장쯤씩 써낼거지.”

“그래 엄마, 이 아들이 이제 저명한 작가가 되여 백장 아니라 천장씩, 만장씩 써내서 엄마한테 돈을 마대로 메다 바칠게.”
“흐흐, 너 큰소리는 잘 치더라.”

량식국에 있을 때 나의 로임은 삼십여원이였고 그전에 림시공질할 때에는 사오십원씩 탔고 삼도탄광에 가서 채탄공질 할 때에는 96원씩 탔었다. 당시 주급단위에서 자그마한 부과장직을 맡고있던 아버지의 로임이 68원이였던것이다.
아무튼 그 원고료덕분에 그날 친구들과 함께 밤을 패며 잘 먹고 잘 놀았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이런 좋은 일이 한달에 한번쯤은 있게 만들자고 맘먹었다.
그 이듬해, 즉 1981년도 여름방학이였다. 어느날, 조양천교동촌에 있는 아재와 아즈바이가 놀러왔다. 어머니는 퇴근길에 돼지고기와 감자국수를 사들고 와서 국을 끓여 대접하려고 했다. 내가 부엌바닥에 내려가 불을 지폈는데 부엌아궁이로부터 내굴이 뽀얗게 밀려나왔다. 어머니와 나는 캑캑거리며 눈물을 쥐여짰고 아재와 아즈바이도 집안에 앉아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에구, 시내살림두 이 꼴이구나. 월급쟁이 부러울게 없다야!”

아즈바이가 나가며 비양거렸다.
“어이구, 검정개 도투(돼지)수 하우. 아즈바이네는 북데기나 때는 신세에. 우리 시내에서는 그래두 석탄을 땐다우.”
뽀얀 내굴에 잠긴 내가 맞받아 한마디 찔 갈기니 아즈바이 또한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야, 우리 촌놈들은 북데기를 때도 이렇게 내굴을 먹으며 밥을 짓는 법은 모르고 산다야, 쳇!”
“포화”속에서 어머니와 나는 얼굴이 시루떡이 되면서 끝내 감자국수에 돼지고기를 푼덕푼덕 썰어넣은 국을 맛있게 끓여냈다. 창문마다 활짝 열어젖히고 내굴을 뺀다음 우리는 저녁상에 삥 둘러앉았다. 반주술 둬어잔이 들어가자 호방한 아즈바이가 말이 많아졌다. 아즈바이의 입이 터지기 시작하면 그 동네 마을안팎 일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아즈바이와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면 더없이 구수하고 즐거운 기분이다.
이튿날 아재와 아즈바이를 보내고 어머니는 출근하면서 나한테 일을 시켰다.

“너 밤낮 책만 붙들구 있지 말구 머리두 쉬울 겸 구들이나 좀 뜯어라. 아무래 구들고래가 멘 것 같구나.”
내가 사회에 나와 일하면서부터 우리 집 구들은 기본상 내가 뜯어고치군 했다. 어쩐지 내가 뜯어고친 구들은 불길이 잘 들군 했다. 그래서 동네 청을 받고 이웃들의 구들을 고쳐준 적도 몇번 있었다. 그러면 돼지고기장물에 술대접은 빠지지 않는다.

“이마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령감쟁이들처럼 어디서 그런 재간은 배웠노?”
동네 나그네들이 풋내기같은 죄꼬만 녀석이 구들을 척척 뜯어고치는 꼴이 희한했는지 혀를 찰 때가 있었다. 기실 불이 잘 들게 구들을 놓자면 주요하게 세곳이 관건이다. 즉 부엌아궁이의 높이와 가마후렁이에 내는 구멍높이와 크기, 그리고 구들고래의 제일 끝머리인 구새밑의 “개자리”이다. 이 세곳에서다는 모두 벽돌 석장이상 높이의 격차를 두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모병이 많이 생기는 곳은 “개자리”이다. “개자리”를 빼는 위치와 간격, 그리고 깊이를 잘 조절해주지 못하면 구새가 내굴을 제대로 빨아올리지 못하는것이다.

그날 나는 공장에 있는 친구 둘을 불러다 구들을 뜯었다. 뜯고보니 구들고래가 꽉 멨고 또한 여름에 불을 제대에 때지 않은 탓에 “개자리”에 습기가 좀 차있었다. 구들고래를 훑어내고 습기찬 “개자리”에 마른 석탄재를 살짝 깔아주고나니 점심 때가 휠씬 지난 뒤였다. 얼굴에 검댕이칠을 한채로 간이식당에 가서 개장국 한그릇씩 먹고와서 구들돌을 놓고 벼짚을 썰어넣어 이긴 진흙으로 “거미줄”을 치고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거미줄”을 친 구들은 바짝 말리워야 한다. 장밤 패면서라도 바짝 말리운 다음 이튿날에는 모래를 많이 섞은 몰탈로 “낟가노리”(온돌웃면을 몰탈로 얇게 바른 것)를 해야 한다. “낟가노리”는 천천히 말리우는 것이 좋다. 빨리 마르게 하면 구들이 쫙쫙 갈라터지게 된다.

어머니가 수고했다며 퇴근길에 명태를 사다가 국을 끓여주었기에 나와 친구 둘은 생맥주에 만포식했다. 밤에 내가 “거미줄”을 친 구들을 말리워놓으면 이튿날 두 친구가 일찌감치 와서 오전내로 “낟가노리”를 다 해놓기로 약속했다.
그날 밤, 나는 널쪼각을 짜개서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길이 허리를 굽히며 활활 빨려들었다. 그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땔나무가 마른 널쪼각이여서 빨리 붙기도 했고 빨리 꺼지기도 했다. 널쪼각 대여섯개를 아구리에 밀어넣으면 담배 둬어대 태울 여지는 있었다. 아구리로부터 비껴나오는 불빛에 전신이 훈훈해나기도 했다. 나는 불을 피우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면서 아궁이안의 불길이 비춰주는 불빛에 잠겨 끝이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저 머나먼 시골에서 사래긴 콩밭기음을 매던 아줌마가 목이 말라 땀만 발발 흘릴 때 시원한 오이냉국이 담겨 출렁거리는 “퉁재”를 메고 지나가던 동네집 나그네… 몇년후 시가지 번화한 거리로 땀을 뻘뻘 흘리며 삼륜인력거를 모는 그 동네집 나그네가 금방 내린 손님에게서 차비를 받고있는데 까만 승용차가 스르르 미끌어져 오더니 그 옆에 와서 무겁게 멈춰선다. 차문이 열리며 까만 정장을 한 녀인이 내린다. 바로 그 사래긴 콩밭기음을 매던 아줌마…

지주성분을 가지고 죽은 아버지때문에 학교 때에는 홍소병, 홍위병에도 못들고 마을에 돌아와서는 공청단에도 못들고 동네 멍텅구리 석두도 드는 민병련에도 못들고 내내 서른고개를 넘도록 장가도 못간 덜먹총각이 자살하려고 몇번 독한 마음을 먹었다가도 시름시름 병환에 계시는 로모때문에 죽지도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마을의 꽃분이인 로지서의 막내딸 영실이가 시집을 가지 않고있었다. 영실의 도적사랑에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 덜먹총각, 그 어느 날부터인가 영실의 아래배가 비죽이 나오면서부터 동네에서는 “전쟁”이 폭발된다. 그런데 그럴 때에 대학교입시제도가 회복되면서 덜먹총각이 대학으로 가게 된다. 4년대학공부기간, 영실이는 아이도 키우고 병환에서 골골거리는 시어머니도 돌보면서 별별 고생을 다 하며 졸업하고 돌아올 대학생을 기다린다. 그런데, 또 역시 그런데 졸업을 앞둔 대학가에서는 교정의 “모란꽃”으로 불리우는 한 처녀대학생의 아래배가 또 비죽이 나오기 시작한다…

오만가지 구상이 얼기설기 얽혀서 뜬김처럼 서려오르는것이였다. 그 속으로 천천히 사유의 노대를 저어가다가 문뜩 엊저녁에 아즈바이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하여 구상의 돛대를 다른 한 풍력에 맞추었다. 부엌아궁이안에서 널쪼각이 픽-픽- 소리를 내며 타번지고있었다. 계속 구상에 잠겨 노대를 저어가다가 머리속 저 멀리로부터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오고있었다. 마주 달려가며 찬찬히 여겨보니 너무나도 익숙한 면목이였고 또한 너무나도 생소한 모습이였다… 바로 그 사람, 그 인물이야! 꼭 붙잡아야 해! 나는 그 사람, 그 인물을 붙잡아다 내 뇌리속에 가둬넣기 위해 장밤 패며 담배 한통을 다 태웠다…

이튿날, 두 친구가 와보고 혀를 찼다.
“야, 잘 말랐구나. 너 엊저녁 밤을 팼지? 이제 이 우에다 ‘낟가노리’를 하면 그저그만이겠다. 자, 빨리 서둘러 점심전에 끝내자.”
“아니아니, 미안하지만 너희들 돌아가 줘. 내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이거 참, 안됐구나.”
내가 팔을 내젓자 그들은 의혹이 생겨서 덩둘해졌다.

“밤새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너 어디로 가야 하니?”
“아니 가긴 어디로 가? 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야 이게 밤잠 못자더니 머리가 돌지 않았어?”
“그래. 머리가 돌았다 돌았어. 이제 지랄을 부리기전에 어서 돌아가!”

나는 무작정 그들 둘을 돌려보내고 림시 숙식처로 정한 헛간에 들어가 두리반상을 놓고 그 우에 원고지를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엊저녁 구상에 떠오른 그 사람, 그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녁에 어머니가 퇴근해서 뒤죽박죽이 된채로 있는 집안팍을 돌아보고 목청을 빼며 야단을 쳤다.
“야, 일을 이렇게 건둥반둥 꼬리를 팽개쳐놓으면 어쩌니? 그래 퇴근한 이 에미가 한밤중에 하라는거냐? 이 답답한 녀석아!”

“엄마, 날 건드리지 마오. 나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한밤중에 하든 한대낮에 하든 그건 다 엄마 맘대루야. 그렇지 않으면 래일 삯군을 부르든지. 나 오늘부터 위대한 명작에 대한 구상과 집필과정에 들어섰는 바 요즘은 내손을 바라볼 생각은 아예 하시지도 말 것!”
“저런, 저런, 어이구 기가 차서 원, 25원짜리 작가가 되더니만 틀거지가 대단해졌구나. 이다음 어떤 색시가 들어와 그 틀에 맞춰줄런지…에그에그!”

내 성미를 잘 아는 어머니는 더 닦달을 부리지 않고 이런 푸념을 남기고 몸을 둘쳐 나갔다. 그 푸념속엔 그 어떤 미진한 기대감도 은근히 깃들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튿날 어머니는 동네 령감 두분을 삯군으로 불러놓고 출근하였다. 나는 그들이 일하든 말든 관계치 않고 글만 써내려갔다. 글은 쓰면 쓸수록 나를 흥분시켰다. 이틀에 초고를 마무리짓고나니 령감들이 해놓은 “낟가노리”도 거의 말라가고있었다.

대충 갈겨 쓴 초고를 들고 친구들을 찾아가 의견을 들어봤더니 생각밖에도 무릎을 치는 녀석에 엄지를 내미는 녀석도 있었다.
“야, 이거 정말 니가 쓴거야? 니가 쓴거라면 ‘포’를 쏜 셈이다!”
“근자에 보기 힘든 력작이야! 글쎄 네손에서 이런 작품이 떨어졌다는게 물음표를 던질만한 일이거든. 혹시… 그럴수는 없겠지만 어디서 힌트를 받았다거나 그 어떤 작품을 모방…”

나는 더 참을수 없었다.
“야- 이 눔들, 사람보기를 와늘 더럽게 보는구나. 래일 연길시내 경찰이란 경찰은 다 풀어서 수사를 벌려 봐! 이것과 너 그 뱁새눈만큼이라도 비슷한 작품이 이 세상에 또 있는가를! 자식들, 이제 원고료가 나오면 너희들 맥주잔이 차려질려니 생각지도 마. 명태껍질만 태워서 줄거야!”

나는 집에 돌아와 친구들의 의견을 참작해서 삭제할건 삭제하고 수개할건 수개하고 보충할건 보충해넣은다음 다시 베껴서 정식으로 “연변문예”편집부에 투고했다.
별로 자아감각이 좋아져서 길가는 처녀애들을 보고도 휘파람을 휙-휙-불고 길가의 돌멩이를 보고도 발길로 차버리군 했다. 이번에는 별로 지루하게 기다리지 않았는데 희소식이 골목바람을 타고 날려왔다. 연변신화인쇄공장에서 “연변문예” 제 11기를 찍고있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박힌 문장이 인쇄되여 나오더라는것이였다. 나는 인차 친구를 찾아 인쇄공장에서 찍고있는 그 인쇄종이쪼박이래도 “훔쳐”낼수 없겠느냐고 간절한 심정을 비췄더니 이튿날 그 친구가 활자의 기름도 채 마르지 않은 인쇄종이를 둘둘 말아서 내앞에 내놓았다. 펼쳐보니 확실히 내 이름이 박힌 “구촌조카”라는 작품이 활자로 인쇄된 종이였던것이다.

“야, 성공이다, 성공! 내 인생이 180°로 확 도는거야! 자, 가쟈!”
나는 그 종이를 말아쥐고 휘휘 내둘렀다. 그 친구가 덩둘해서 눈을 치떴다.
“가긴 어딜 가?”
“쑈플(상점)!”
“자식, 또 쑈플치기야? 나 지금 출근시간이다. 너의 이 종이때문에 겨우 허가를 맡고 나온거야. 제시간에 돌아가지 않으면 이달 장려는 ‘물깍지’야. 그러니…”

“야- 이 자식, 인생이 확 도는 판인데 무슨 출근이야! 지금은 ‘쓰딸린그라드격전’같은 격변기야. 그래 이런 격변기에 마른 정신에 놀아야 한단 말이니? 말 같잖은 말! 어서 가쟈!”

나는 무작정 그 친구를 끌고 “쇼플치기”하러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 작품이 발표된후 사회적반향이 아주 컸다. 대개는 학생으로서 이처럼 완숙된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는 후론들이였다. 하학하고 교정에 나서면 혹간 하얀 대학빠찌를 달고 두세씩 짝을 지어 가던 녀학생들도 나를 보고 할끔거리며 쏙딱거리군 했다. 아마도 “저 애다. 그 소설의 작자야. 히-, 그저 그렇구나. 쑬쑬하지.”라고 저희들끼리 웃었을것이다. 교원들도 나를 보고는 눈살을 쪼프리시며 고개를 끄덕이시군 했다. 아마도 “너 어물쩍하구나!”하고 속으로 긍정해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야말로 고무풍선을 타고 붕 떠다니는 기분이였다.

그해 년말에 가서는 더 큰 희소식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연변문예”잡지가 복간된후 1980년도부터 “연변문예문학상”을 설치하고 독자들의 추천표에 따라 후선작을 뽑고 해당 전문가들의 평의를 걸쳐서 문학상 작품을 선정했던것이다. 당시 “연변문예문학상”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유일한 최고문학상이였다. 첫해 첫기에 농민작가 정세봉선생님의 “하고싶던 말”이 제일 높은 추첨표수로 당선되였고 두번째 해인 1981년도에 제2기로 생각밖에 나의 작품 “구촌조카”가 제일 높은 추첨표수로 당선되였던것이다. 뭐, 지금에 와보면 그저 그런 작품이지만 그 당시에는 확실히 우리 문단을 들썽해놓았었다. 정말 꿈을 꾸다가 현실로 꿈을 꾸게 된 꿈이였다. 나를 놓고 볼 때 인생길에서 제일 큰 성과를 거둔 셈이였다. 우리 말 우리 글로 우리 민족의 문화진지를 고수할수 있는 해병대 수호천사가 되였다는 긍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르기도 했었다.

시상식 날, 주급 지도일군들과 문련주석들(작가협회가 문련에 소속되여 있었음), 그리고 문학계의 원로선배님들, 나의 문학지우들이 참석하였다. 그날 너무 격동된 나머지 수상소감을 어떻게 피력했던지 지금 기억에 남지 않는다. 저녁축하연에서 나는 상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부어올리고 맞잔을 하다보니 연회청의 샨데리야등이 빙글빙글 돌아갈 지경으로 취했다. 한밤중에 누구의 부축을 받으며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택시도 없는 세월에! 원래는 부모님들앞에 문학상영예증서와 상금을 내놓아 기쁘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두분 다 주무시고 계셨다. 그들이 주무시는 모습을 내려다 보며 나는 코마루가 찡-해나서 술을 많이 깼다. 어머니의 이마에도 주름이 많아졌고 아버지의 이마에도 주름이 많아졌다.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올랐다. 나는 슬며시 집을 나와 야간상점을 찾아갔다. 소주 한병에 소고기통졸임 한통, “닭똥과자” 한봉지에 사탕 한봉지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그걸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무시는 침상머리에 놓고 이런 생각을 했다. 인제는 내가 종종 아버지와 어머니깨 “닭똥과자”라도 사드려야겠다고. 바야흐로 “25원짜리”작가가 되고있지 않는가! 나는 불을 죽이고 조용히 그 방에서 나왔다…

이튿날 일어나서 어쩐지 옷 매무새에 신경을 쓰게 되였다. 체경앞에서 이옷 저옷 갈아입어보기도 하고 몸에 대보기도 하면서… 종래로 있어본 적이 없던 현상이라 어머니가 의혹스레 눈을 흘끔거렸다.
“또 무슨 행사가 있냐? 작가가 되면 좀 분주스럽겠다야.”

“아니 뭐, 시시한 행사!”
학교정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인젠 체면이 설만한 인물이 되였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면… 사람이 이러지 말아야겠는데… 자그마한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에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도깨비인양 우쭐렁거리기를 좋아하고 좀 큰 성과를 올리게 되면 오히려 그 성과에 먹물이 튕길가봐 조마조마해진다. 더구나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의 인사요 축원의 고무격려이니 앞으로 처신을 제대로 갖출 것 같지 못해 더 근심스러워졌다.

졸업을 앞둔 어느날, 나는 학교정원에서 “연변문예”잡지사의 리상각주필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달려가서 인사를 올렸더니 무척 반가워하셨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학교에는…”
“좀 볼 일이 있어 왔다가는 길이오. 어떻소?”

주필님께서는 나의 정황에 대해 물어보시며 관심을 돌리시였다. 나중에 계속 힘을 내라며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시였다. 나는 스스로 기운이 솟구침을 느꼈다. 며칠후에 학부내에서는 리주필님이 왔다가신 것은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내가 정말 “연변문예”잡지사로 갈수 있을가? 그때나 지금이나 “연변문예”(지금의 “연변문학”)는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최고문학지였으니깐.

또 며칠이 지난후 우리 반을 책임지신 한선생님이 정식으로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동무의 사업배치는 “연변문예”잡지사로 결정되였는데 다른 의견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두말없이 학교의 배치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교원실에서 나온 나는 교정의 잔디밭에서 몸을 솟구치며 “야-“하고 소리질렀다. (됐다, 인젠 됐어! 이제 잡지사에 가면 일년에 소설을 열편, 아니 스무편씩 써서 다 발표할거야!) 1982년도 초여름 대학가의 하늘은 푸르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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