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번 날, 이사짐을 싸다가 사진첩 몇 개를 들춰보게 되였다. 부모님께서 소중히 간직해주신 덕분에 옛날에 찍은 사진도 있고 근간에 찍은 사진도 있었고 빛 바랜 흑백도 있고 천연색컬러도 있었다. 그걸 한장 한장 들여다 보노라니 무한한 감개가 차분히 젖어오른다…
앙-앙- 울보챘을 아기 때도 련상되고 물덤벙술덤벙 흙탕물에서 입성을 적시던 개구쟁이시절도 아물아물해나고 깜장 헝겊가방을 메고 엄마의 손에 손목을 잡혀 학교로 끌려가던 일도 떠오르고 중학시절에 홍위병완장을 끼고 군례를 올리던 모습도 나타나고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 일원으로 문화궁무대에 처음 오르던 장면도 눈앞에 선하고 수백메터되는 지하막장에서 석탄구루마를 밀던 정경도,량식숙식품가공공장건물을 짓느라 건축시공대 대원들을 이끌고 얼음장이 서걱거리는 부르하통하에 뛰여들어 모래를 파내던 일도,우등불을 피워놓고 진주임과 함께 당기앞에서 선서하던 모습도,청년간부양성반에서 배우던 무산계급독재리론도,기본로선공작대로 인평촌에 내려가 신호탄발사비밀을 정탐하던 계급투쟁도,대학시험을 치겠다고 외가집뛰뜰안 살구나무밑에서 왕왕 내리 읽던 복습제강도,중산복왼쪽웃호주머니덮개끝에다 달랑 달고 학교정문에 들어설 때면 꺼내놓고 학교문을 나설 때면 밀어넣던 하얀 연변대학빠찌도,세계명작을 독파하겠다고 뒤고방 창문같은 도서관접수구에 매달려 꺼내던 누런 소설책도,내 글이, 내가 쓴 글이 활자로 인쇄되여 찍혔던 "연변문예"잡지도,조선족문단에서는 두번째로 수여받은 "연변문예문학상"증서도,편집부에 배치받아 첫 편집한 원고가 전국문학상을 타게 되여 편집보람을 느끼게 했던 "몽당치마"소설도,문학통신학부를 내오고 "개간지"부간을 꾸리던 나날도,"지하활동"으로 꾸려냈던 "특수사명","황야의 복수","장백산부간","과학정보","독자의 벗" 등 총서와 부간들도,적을 두고 나와서 상점과 식당을 꾸리며 가가호호에 문전송달하던 일도,"농가"를 꾸린답시고 허줄한 봉고차를 몰고 농촌부락을 굽이굽이 돌며 부르릉거리던 노릇도…
이처럼 얍술하게 빨깍거리는 사진 몇장을 통해 내가 걸어온 50여년이라는 세월을 생생하게 돌이켜 볼수가 있었다.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진을 통해 자기의 일생을 돌이켜 보군 한다. 정말 사진발명가 다게르에게 큰절을 올려야 할 것 같다.“그래도 제일 좋은 기념이 사진이다"란 말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그렇다.백성들의 생활에서는 사진이 제일 생동하고 제일 간편한 기념품으로 되고있다.듣는 말에 의하면 사진기가 우리 고장에 금방 나왔을 때에는 사진찍기를 죽기보다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속의 요귀가 생사람의 허울을 홀딱 발가간다는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의 겉모양을 그대로 종이장에다 옮겨놓을수 있겠느냐 하는것이였다. 그후 사람들이 사진이 찍혀나오는 과학적원리를 터득했을 때에는 그것이 일종 사치품으로 되여 일반 백성들은 일생에 한두번 아니면 두세번밖에 찍지 못했었다. 우리 집에는 싯누렇게 된 화투장만한 노할배의 정면 탈모사진 한장이 있다. 노할매의것은 없고. 노할배는 허연 중치막을 입고 찍은 것 같은데 그런 사진이라도 있었기에 그 당시의 정황을 얼마간 상상해볼수가 있었다. 최저한 유전학각도에서 내가 노할배를 얼마나 닮았는가를 짐작해 볼수가 있었던것이다. 만약 몇장 더 있었더라면 당시의 생활환경을 여러 측면으로 분석하고 추리하고 상상해볼수가 있었을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지금 광복전에 찍은 사진을 보관해 둔 분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해방후에도 나라의 경제가 락후했고 우리네들의 생활이 궁핍했기에 사진을 찍고 싶은대로 찍지는 못했다. 허나 기념될만한 일에는 사진을 빼놓지 않았었다. 졸업, 결혼, 참군… 때문에 80년대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이 두세줄씩 렬을 맞춰 찍은 집체사진들이였다. 개인사진도 증명사진이 아니면 증명사진이나 다름 없는 정면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찍은것들이여서 판에 박은듯한 감밖에 안난다. 그런 사진들이지만 지금에는 아주 귀한 기념사진으로 되고있다. 연길시 신흥소학교서쪽에 있는 “리조식당”에 들어가보면 옛날 연길시내 도시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칸칸마다 걸려있어 그 식당의 일개 독특한 풍경을 이루어 손님들의 눈길을 끈다. “오, 우리가 살아왔던 연길시내 모습이 저랬던가!” 감개가 무량해지면서 그 옛날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추억에 잠겨보게 된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말기에 우리 웃집에는 김광영이라는 중학생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사진기를 가지고 다녔었다. 누가 사진기를 다룬다 하면 대단한 어른으로 볼 때였으니깐. 파아란 중학시절부터 사진기를 다루며 사진을 찍고 사진을 연구해왔기에 그는 지금 저명한 촬영가가 되여 수많은 예술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의 생활에는 사진에 관한 재미나는 이야기들도 많았다. 사진 한장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 할 때도 있었고 사진 한장에 의해 행복한 한 가정이 이뤄지기도 했다. 직장의 기대앞에서, 교정의 숲속에서, 사래 긴 밭머리에서, 훈련장 한쪽 구석에서 돈지갑속에 끼인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남몰래 들여다 보며 달콤한 꿈을 꾸고 무지개 같은 미래를 동경해온 사람들이 얼마였던가!
새세기에 들어서면서 웬간한 사람들에게는 다 사진기가 있게 되였다. 특히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진이 모든 령역에서 그 작용을 남김없이 발휘될수 있었다. 생활이 다채로워지면서 사람들의 가치관념, 도덕관념, 심미관념도 가일층 승화되고 물질적생활과 정신적생활에 대한 추구도 가일층 높아지게 되였다. 인젠 촬영도 일종 대중적인 예술활동으로 되였다. 지금은 표상적인 기념성이나 기록성적인 현상을 찍는데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심세계에까지 파고들며 찍어낸다. 사랑, 행복, 희망, 쾌락뿐만 아니라 번뇌, 절망, 탄식 등 반면 세계도 찍어내고있다. 좀 더 차원이 높은 촬영가들은 사물을 다층차, 다측면, 다각도로 관찰하고 반영하며 시공간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예술적극치에 도달할수 있는 사진을 찍어내려고 노력하고있다.
이전에 내가 꾸렸던 잡지에서 부기원사업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남영자씨가 전번날 친척방문차로 왔다가 나한테 디지털카메라 한대를 선물해왔다. 사진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샤타를 꾹꾹 누르면 저절로 찍혀나오는 “괴물”이였다. 그걸 컴퓨터에다 이어놓으니 찍은것들이 환하게 나왔다. 헌데 누가 환하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수준이 발바닥인 그 사진을 누가 시간을 팔며 봐주겠는가! 슬그머니 배짱이 생겼다. 좀 구도도 강구하고 장면포착도 틀어쥘줄 알고 나름대로 풍격이나 특색도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것이 혹시나 내 일생에서 사진예술을 위한 첫발자욱이 되지나 않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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