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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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예술 · 천당
2013년 07월 11일 08시 21분  조회:1459  추천:0  작성자: 홍천룡

홍천룡

상전벽해라 나도 어느덧 손주녀석을 안게 된 할아버지가 되였다. 톡 치면 깨여질듯한 말쑥한 유리살결에 깜장 포도알처럼 또릿거리는 눈을 가진 손주녀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한장의 예술사진 같다. 아직은 엄마와 엄마의 젖밖에 모르는 아이를 놓고 벌써 곁에서 아이의 먼 장래를 위해 “날개”를 달아준다. 인기많은 예술가로 되겠냐, 돈많은 기업가로 되겠냐, 아니면 학식깊은 학자로 되겠냐고.
텔레비에서 아름다운 선률이 흘러나오면 아이가 그쪽으로 귀를 벌쭉거린다. 그러면 또 새로운 “발견”이 생긴다. 봐라, 예술세포가 있는 아이가 아무데가 달라도 다르다. 생일상에서 아이가 복판에 있는 빨간 사과에 눈독 들여 왼손을 내밀자고 오른손으로 상을 짚었는데 그 손에 백원짜리 지페가 집히게 되였다. 봐라, 돈복이 있는 아이가 다르긴 다르지. 이다음 틀림없는 갑부야. 아이가 방안에서 벌벌 기여다니다가 아빠가 떨군 볼펜을 주어들고 아무데나 대고 긁적거린다. 봐라, 학문을 닦을 아이는 벌써 아이때부터 알린다. 필을 쥔 모양부터 다르거든…

나는 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 어려서부터 예술의 감화를 받으며 심신을 도야시키지 못하고 자랐다. 내가 자라던 동네는 백여호나 되는 큰마을이였지만 라지오가 있는 집이 두세집밖에 없었으니까 정규적인 음악소리를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었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들을수 있는 리듬적인 곡조래야 동구밖 개울가와 논밭으로부터 울려오는 개구리들의 대합창이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자갈사태가 쏟아지듯 요란했고 방문을 꾹 닫으면 자장가인양 요요하게 귀전에서 멀리 메아리친다. 그 자장가속에서 도야지나 강아지와 뒹구는 목동적인 꿈나라로 들어가군 했다.

어느 날, 복순이네 집앞을 지나다가 그 집의 라지오에서 우렁차게 울려나오는 “사회주의 좋다”란 노래소리를 듣게 되였다. 얼마나 박력있고 경쾌한 선률이였던가! 나는 그집장재(널판지로 세운 울바자)에 매달려 넋을 잃고 들었다. 빨래를 널고있던 복순의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놀랍게 악청을 뽑았다.

“요놈, 뭘 도적질하자구 눈이 빨개 거기 매달려있느냐? 냉큼 물러가지 못해! ”

얼마나 아쉬웠던지! 헌데 이웃집 선희누나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있었다. 나는 감자“까마치”(누룽지)를 주면서 그 누나한테서 그 노래를 배워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노래를 가사 한마다 틀리지 않고 부를수 있게 된것이다.

당시 우리 조무래기들이 다룰수 있는 악기라고는 버들피리따위였다. 봄에 물이 잘 오른 버들가지를 꺾어가지고 손칼로 손가락만큼 잘라서 속대를 쏙 뽑아낸다음 중간쯤에 구멍을 뚫고 입술에 물고 낯이 지지벌게 나도록 불면 비단폭이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것도 짧게 한것과 길게 한것이 소리가 다른데 길게 하자면 속대를 뽑아내기 곤난해진다. 잘못 뽑아 바늘귀만한 구멍이라도 생기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별로 듣기좋은 소리는 아니였지만 그걸 해서 불면 그래도 아이들이 좋다고 모여든다. 그것이 소리의 매력이였을가!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고 기억되는데 동네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복순이네 큰오빠인 광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그를 “풍각쟁이”, 혹은 “빠이롱쟁이”라고 불렀다. 지금에 와서 기억을 더듬어봐도 온동네 치고 그마큼 훤칠하고 멋있게 생긴 사람은 없었던것 같다. 한번은 우사칸마당에서 무슨 경축대회가 열려서 동네의 남녀로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북장단에 새납소리가 요란한 가운데서 할아버지들이 퉁소를 불고 아줌마들이 꼬리치마를 펄럭이며 너울너울 돌아갔다. 나중에 그 “풍각쟁”광이가 구경군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중간에 나섰다. 점잖게 말 몇마디 하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던지는 모르겠으나 그 목청이 둥글소의 영각소리처럼 웅글졌고 입을 어찌나 크게 벌렸던지 저 입이 귀밑으로 올리 짜개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앞섰던 기억이 난다.

그처럼 멋있던 “풍각쟁이”가 이웃집 강철네 훗어미와 함께 뒤산 수수밭에서 서로 끌어안고 죽었다는것이다. 그 수수밭으로는 우리 조무래기들이 늘 “깜부지”(꺼먼 수수벌레통)를 따먹으러 다녔던 곳이다.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게 생긴 강철네 훗어미를 마을에서는 “멋따개”라고 불렀다. 심양이라는 고장에서 한 문공단에 다니며 춤을 유명하게 췄다는데 무슨 어떠어떠한 문제로 쫓겨나서 여기로 오게 되였고 강철네 훗어미로 되였다는것이다. 멀쩡한 총각이 유부녀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그당시 사람들로는 아무리 어떻게 생각해봐도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당시 “웅덩개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줄집에서 살았는데 우리 앞줄에 소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림선생님이 계셨다. 림선생님은 그들 둘의 죽음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둘이 마음껏 살수 없으니까 극락세계나 찾아보자고 천당에 올라간거지.”

마을에서 글깨나 깨쳐본다는 사람들은 림선생님의 말씀에 수긍했고 매일 집안먹거리때문에 부지런히 뛰여다니는 사람들은 미친 년놈들이 마을 풍기를 더럽히고 동네망신만 시켰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굿거리에 놀아났던 할망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천당은 매일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즐길수 있는 극락세계라고 한다. 인간세상에서는 먹고 입고 살기 위해서 고달프게 일해야 하고 고달프니 병이 생기고 병이 생기니 죽음이 있게 되고 죽음이 있게되니 비통하고 비통하니 일하고싶지 않게 된다. 일하지 말고 잘먹고 잘살자니 남을 얼리고닥치고 남과 싸워야 했고 싸움이 있으니 쫓겨나고 피를 흘리고 또 죽음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인간세상에서 살자면 번한 날이 없게 된다는것이다. 번한 날이 없는데 언제 노래부르고 춤추며 흥얼거릴 겨를이 있겠는가! 사람은 즐거워야 노래를 부르게 되고 춤을 추게 된다고 한다. 또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게 되면 자연 심정이 즐거워진다고 한다. 그 도리를 나는 “사회주의 좋다”라는 노래를 배우면서 깨우쳤던것이다. 곁에 “까마치”친구들이 없어 심심할 때면 그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려본다. 그러면 인차 신바람이 나서 가만있지를 못한다. 흥이 나면 그 선률에 맞춰 “깔락뜀”을 뛰기도 했다. 확실히 노래와 춤에는 이런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풍각쟁”광이와 “춤추개” 강철네 훗어미는 이런 매력에 끌려 매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려고 했던것이 그렇게 되지 못하니 “천당”으로 올라갔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세상에서는 왜 매일 고달프게 일만 하게 되고 “천당”에서처럼 매일 노래부르고 춤추며 즐길수 없느냐는것이다. 미신깨나 믿는다는 할망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천당”에는 농사질 같은 고달픈 일이 없다는것이다. 자연적으로 자라는 “천도복숭아” 한알을 따먹어도 몇백년쯤은 살수 있다니깐. 그러니 “천당”에는 고달픈 일들이 없고 병도 없고 얼리고닥치고 하며 싸울 필요도 없다는것이다. 그윽하고 안온하니 심정이 즐거울수 밖에 없고 즐거우니 매일 노래 부르고 춤출수 밖에 없고 노래 부르고 춤추니 자연 더 즐거워질수 밖에 없다는것이다.

그후 나는 공원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많은 노래를 배웠다. 글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니 학교가 “천당”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학교를 지각할세라 부지런히 잘 다녔다. 당시 공원소학교 북쪽에는 지금처럼 넓은 공원로가 동으로부터 서쪽으로 쭉 올리 뻗었는데 비포장도로여서 혹간 화물차가 지나가면 누런 모래먼지가 일군 했었다. 그 길 북쪽에는 요란스러운 목재가공소가 있었다. 가공소울안에는 한아름씩 되는 원시적인 통나무가 군데군데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가공소내에는 그 통나무를 부리우고 쌓고 다시 허물어서 가공소직장안으로 메여나르는 목도군이 이삼십명 있었다. 한여름, 그들은 런닝그바람에 통나무를 날랐는데 고동색근육이 불끈불끈 살아나서 육색이 좋았었다. 통나무를 메여나르는 작업은 대개 이러했다. 두가닥짜리 큰 쇠갈구리를 통나무에 걸고 갈구리웃쪽 구멍에 멜대를 꽂은다음 좌우에서 그 멜대를 어깨에 메고 통일지휘에 따라 함께 일어서고 함께 발을 떼고 나가야 했다.

그들은 둘둘씩 짝을 맞추고 통나무의 크기에 따라 여섯, 여덟, 혹은 열명씩 한팀이 되여 통나무 한대를 메여날랐다. 통나무가 많이 들어올 때에는 가공소울안면적이 제한되여있었으므로 높이 쌓아야 했다. 기중기가 없는 세월이라 그 육중한 통나무를 몽땅 목도군들이 인력으로 한대한대 올리 쌓아야 했다. 목도군들은 두껍고 긴 널판자를 둬어메터가량 사이를 두고 두줄로 꼭대기까지 편다음 그걸 딛고 통나무를 메여올린다. 만약 열 사람이 통나무 한대를 메여올린다면 열사람의 보조가 일치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큰사고를 빚어낼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반급대렬행진할 때면 반장의 “하나, 둘, 셋…” 하는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군 했었다. 하지만 목도군아저씨들은 그처럼 위험하고 긴장한 작업을 하면서도 딱딱한 구령소리로 보조를 맞추는것이 아니라 아주 구성지고 고저강약리듬이 완연한 선소리먹임으로 보조를 맞췄던것이다. 열명중 한사람이 선소리를 치면 기타 사람들이 후렴식으로 따라 부르면서 발을 맞춰 목도를 메였던것이다. 그 장면은 그야말로 예술의 종합적인 표현형태였다. 청아하게 울리는 선소리군의 목소리, 그에 따르는 웅글진 목도그루빠의 후렴소리, 한뼘의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절주있게 움직이는 열사람의 스무개 다리, 해빛에 반사되여 뾰족뾰족 돋아나는 등곬의 땀방울, 지렁이처럼 불끈거리는 이마의 피줄들…

선소리군들이 먹이는 선소리에는 고정된 내용이 없었다. 무엇을 보거나 무엇이 생각나면 즉흥적으로 말을 꾸며 불렀는데 호언장담도 있었고 패설육담도 있었고 고달픈 하소연도 있었다. 지나가는 고운 녀자를 보고 희롱질 치는 선소리도 있었다. 무더운 날, 듣기싫은 선생님의 강의에 잠기가 꺼풋꺼풋 습격해서 흐리마리해질 때면 목재가공소로부터 울려오는 선소리가 자장가인양 교실안을 흔들어놓는다. 그 선소리가 어떤 때에는 경쾌하게 들리고 어떤 때에는 비장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목재가공소안에서 큰사고가 일어났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통나무무지가 무너져내리면서 사람이 깔려죽었다는것이다. 목재가공소로 인파가 골물처럼 밀려들었다. 마침 하학시간이라 우리들도 책가방을 둘러메고 사람들속에 끼여들어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홀연, 인파가 량쪽으로 쫙 갈라지더니 등뒤에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왔고 그 뒤로 일여덟살 되여보이는 남자애가 눈물범벅이 되여 아버지를 부르며 따라왔다. 여기저기에서 동정에 어린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이구, 저 불쌍한것들을 남겨놓구 가다니!”

“그래두 죽은게 불쌍합지비.”
“고달픈 일을 고달프게 하다가 끝내 천당으로 갔구만.”
… …
“천당?” 나는 할망구들이 말한 적이 있는 그 극락세계를 떠올렸다. “천당”으로 간다면야 왜 아기업은 저 어머니가 저렇게 울며불며 통곡하고있을가!

나는 나의 일생에서 공연예술과는 인연이 없을것으로 추정했는데 “문화대혁명”이라는 력사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중학교에 올라가 학교의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들게 되였던것이다. 지금에 와서 나도 일찍 학교문예선전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활약했다고 하면 누구도 곧이 듣지를 않는다.

“당신이? 좀 작작 불라구.”
“보기와는 다르구만. 어디한번 좀 표현해보지. 확실하게!”

생활가운데서 우리는 늘 이런 현상을 보게 된다. 예술적인것이 아닌 것 같은데 예술품인것이 있고 예술품인것 같은데 예술이 아닌것이 있다. 무엇이나 결핍했던 그 세월에 우리의 공연절목은 대개 우렁찬 혁명가곡에 주먹을 내흔들며 대렬을 바꾸는것이 많았다. 예술절목이라기보다는 률동적인 집단체조표현에 더 가까운것이였다. 그런데도 많은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고 지어 외국손님을 모셔놓고 공연하기도 했었다.

70년도 겨울이라고 기억되는데 우리는 농촌순회공연을 나가게 되였다. 홍군의 2만5천리장정정신을 따라배운다고 도보로 돌아다녔다. 하루에 이삼십리씩 걷고는 저녁이면 절목을 공연했다. 대부분 우사칸마당에서 로천무대를 리용했고 조건이 괜찮은 고장이면 학교구락부같은데서 공연했다. 전기가 없는 고장이면 뜨락또르헤드라이트를 켜놓고 공연했고 뜨락또르도 없는 고장이면 아예 헝겊뭉치에 디젤유를 쳐서 불을 단다음 홰불처럼 사처에다 피워놓고 우등불공연을 했던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격정적이고 랑만적인 분위기를 돋궈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 선전대는 모든것이 군사화였고 전투화였다. 농촌의 로천무대였지만 제대로 무대화장을 하고 나섰고 복장이나 공연도구도 제대로 다 갖춘다음에야 나서게 했다. 한번은 한 녀대원이 날씨가 춥다고 까만 장갑을 끼고 무대에 나섰다. 그랬다고 그날 밤, 총화에서 호된 비평을 받았었다. 자산계급아가씨들의 생활작풍을 무대에 옮겨놓았다는것이다. 눈물을 똑똑 떨구며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그 녀대원의 모습에 우리는 측은해나는 감을 금치 못해 눈을 감아버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인심이란 후했다. 우리가 간다고 찰떡을 치고 두부를 앗고 지어 어떤 곳에서는 돼지를 잡아엎기도 했다.(당시 돼지 한마리를 잡자면 소대, 대대, 공사의 비준을 받아야 했음.) 구경군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어떤 고장에서는 집체로 손잡이뜨락또르를 타고 몇십리밖에서 달려오기도 했었다. 그 열정에 우리도 온하루 “장정”한 피곤을 싹 잊고 만강의 열정으로 공연했던것이다.

도끼봉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석산촌으로 갈 때였다. 당시 석산촌에는 전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전철수동지가 대대당지부 부서기 겸 민병련장책임을 맡고있었다. 그날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었다. 한 시오리쯤 눈길을 헤치고 가고나니 대원들은 저마다 기진맥진해졌다. 눈은 그치지 않았는데 바람이 일면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금방까지 낯이 빨개지면서 땀흘리며 왔는데 조금 모여앉아 쉬게 되니 인차 낯이 파래지면서 추워져 몸을 오돌오돌 떨게 되였다.

다시 일어나서 걷자니 다리가 천근무게나 되는상 싶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자기의 공연도구들을 지고메고 떠났는데 그 짐이 적지 않았다. 특히 손풍금이나 바레동, 북과 같은 악기들은 체적이 컸을 뿐만 아니라 무게도 꽤나 무거웠다. 비록 서로 엇바꿔가면서 메주고 들어주었지만…

앞에는 높다란 산마루가 아츨하게 가로 놓여있었다. 그 령을 넘어야 석산촌에 이를수 있었다. 대지의 모든것이 눈속에 파묻혀 주위는 하얀 면사포에 감겼고 눈보라에 그 면사포가 파르르 떨고있었다. 눈보라에 길도 알리지 않았다. 올리막에 들어서면서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어떤 대원들은 벌벌 기기도 했다. 산중턱까지도 올라가지 못했는데 어떤 녀대원들은 아예 퍼더버리고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감한 일이였다. 뒤이여 대여섯명 되는 녀대원들이 련이어 덩달아 퍼더버리고 앉아 울어댔다. 아직은 열대여섯살밖에 안먹은 나긋나긋한 소녀들이였으니깐. 그 녀대원들앞에 남대원들이 모여들었다. 한명씩 업고 올라갈수만 있다면… 할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니 부득불 돌아갈수 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인지 녀대원들의 울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헌데 돌아간다는것도 막연한 일이였다. 절반도 더 걸어왔는데 돌아가자면 또 반나절이나 걸리게 된다. 지도교원과 대장이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애타게 서성거렸다. 어떤 대원들은 배고프다고 눈을 움켜쥐고 서걱서걱 씹어 먹기도 했다.

눈보라가 휙 몰아오자 모두들 몸을 오싹 떨었다. 더는 지체할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가고 돌아 안가면 계속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녀대원들은 어떻게 하고?…

그때 뒤켠에 선 누군가 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정”이란 노래를 흥얼거렸다.

“홍군은 원정의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네
만수천산을 한가로이 넘어가네……”
(红军不怕远征难,万水千山只等闲…)

인차 두세 사람이 따라 불렀다. 가락이 리듬에 맞춰지면서 모든 남대원들이 따라 불렀다. 노래소리가 점차 격앙되면서 우리의 가슴이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대장이 앞으로 썩 나서며 두팔을 힘차게 휘둘며 지휘했다. 노래소리는 눈보라를 타고 산골짜기에로 메아리쳐갔다.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기운이 막 솟구쳤다. 대장이 먼저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가장 나어린 녀대원한테로 달려가서 짐을 몽땅 벗겨 자기가 짊어지고 한쪽 팔을 그 녀대원의 팔짱에 끼워넣고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우리들도 저마다 달려가서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은 녀대원들의 짐을 빼앗아메고 그녀들을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노래소리는 멎지 않았다. 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우리는 다시 산마루를 향해 올리 톱기 시작했다.

이어 노래는 모주석의 어록에 곡을 단 “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두려워 하지 말며 만난을 물리치자”로 바뀌였다.우리는 사기가 충전해져 숨가쁜줄도 몰랐다. 설산을 넘는 홍군전사가 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누가 미끌어 넘어지면 서로 달려가 부축했고 누가 무얼 떨구면 그걸 주어가지고 자기가 걸머메군 했다.

어록노래가 끝날무렵에 녀자들의 합창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 전진! 전사의 책임 중하고 부녀의 원한 깊다네… 우리 랑자군들도 총을 메고…”

랑랑한 그 노래소리가 우리 남대원들을 더욱 흥분케 했다. 랑자군을 거느린 “당대표”가 된 기분이였다. 그제날 적진을 무찌르는 홍군전사가 영웅이였다면 오늘날에는 내가 영웅이 아닐소냐! 마치도 눈보라속에서 눈길을 헤치며 령을 톺아오르느라고 곤난을 겪고있는것이 아니라 천당에서 꽃보라속에서 행복에 겨워 흥분에 들떠 춤추고 노래부르고있는것만 같았다. 전반 중학교시절을 돌이켜보아도 그 시각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각은 없었던것 같다.

나중에 우리는 남자가 녀자의 손을, 녀자가 남자의 손을, 서로서로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부르며 령마루로 톺아올랐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지금에 와서 그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역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내리막길에서는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미끄럼질 치며 궁둥방아를 찧으며 즐거운 웃음소리를 반공중에 흩날리며 내려왔다. 얼마나 즐겁고 유쾌했던지! 꿈만 같은 시각이였다. 천당에 가서도 이처럼 생생한 쾌락을 맛볼수 있을가!

석산촌우사칸 회의실구들에 저마다 걸레처럼 축 늘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배가 못견디게 고파났고 얼었던 발이 녹아나면서 아려나는 고통을 느꼈다. 그때에야 인간세상이 천당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천당에는 극락세계만 있다지만 인간세상에는 천당같은 극락세계도 있고 지옥같은 고통세계도 있는것이다. 고통을 겪어봐야 락을 진정 알게 된다. 극락이 있으면 극통이 있게 되고 극통이 있으면 극락이 있게 되는 법이다. 예술의 매력이란 극락과 극통을 전형적으로 가공하고 반영하는데 있다. 오늘날 나는 우리의 사회가 나날이 발전하고있을 때, 우리의 생활도 점차 예술화되였으면 얼마나 좋을가고 천진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그러면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게 된다. 예술화된 우리의 생활자체가 천당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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