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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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창작의 세가지 현상시대
2013년 07월 30일 14시 56분  조회:1738  추천:1  작성자: 홍천룡
평론

문학창작의 세가지 현상시대

홍천룡

어느 땐가 문학편집과 작가협회회원들의 문단상황에 대한 견해발표모임이 있다는 전화통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중요한 모임이라 제딴에는 좀 어마어마하게《포》를 쏘자고 발언고를 준비했었다. 헌데 아쉽게도 그날 모임에서 랑독하지 못했었다. 두가지 원인이였는데 하나는 그날 토론초점이 준비한 발언고내용과는 천리나 떨어진 어느 한 작품에 집중되면서 열렬해졌던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찬시간이 다 되여왔기때문이였다.

전번날 《문학과 예술》잡지 주필님과 만난자리에서 그의 원고부탁이 있었다.

《난 평론가도 아닌데…》했더니 그가 작품을 감상한 소감도 좋고 문단상황에 대한 소견도 좋으니 써보라고 고무해주었다. 믿어주고 밀어주는 고마운 부탁이니 써보리라 맘먹었다, 헌데 정작 쓰자니 무얼 어떻게 써야 할지 막연해났다. 애꿎은 담배만 태웠다. 몰몰 피여오르는 담배연기속에서 령감이 떠오른다는 말이 빨간 거짓풍선이라는 감이 들었다. 오히려 타래치는 연기따라 생각이 점점 헝클어지며 퍼지기만 했다. 안되겠다싶어 송구함이나 표시하자고 전화를 드는 순간에 그 발언하지 못했던 발언고가 생각났던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 발언고를 찾았다. 찾고보니 발언고라 역시 어수선했다. 할수없이 어설픈 발언고를 다시 정리하며 어설프게 써냈다. 어설픈 수준이니 별수 없었다.

《수도물》시대
쏴— 쏴— 무더운 여름날 수도꼭지를 탈아놓으니 시원한 감이 얼굴을 감싸준다. 아들놈이 큰대야에 수도물을 꼴똑 채워놓고 도마도며 참외며 오이를 왈왈 불궈놓는다. 먹기도전에 입안이 썽—해나며 상큼한 감이 든다.
《야, 맥주나 수도물처럼 콸콸 쏟아졌으면 좋겠어.》

《임마, 물 좀 절약하며 써라.》
《야, 아버지두 답답함다. 흔한게 수도물인데두.》
아들놈은 툴툴거리며 대야를 한쪽으로 밀어놓고는 시허연 물줄기로 퍼져내리는 수도물에 골을 들이밀어넣는다. 그리고는 머리며 얼굴을 마구 문대며 연신 푸푸거린다...

그래, 집안에서 제일 많이 써야 하고 제일 쓰기 편리하고 제일 흔하게 쓰는것이 수도물이 아닌가! 몇년전에 일본의 한 경제학자가 세계적인《수도물》시대가 바야흐로 닥쳐오고있다고 예언하였다. 상품이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광고가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맥주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자연히 책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영화며 텔레비드라마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게 될것이라는것이다. 서점에 가보면 책이 점점 더 많아진다. 허리굽혀 들어가는 책가게에도 신문잡지만 수백종 된다. 컴퓨터인테넷에 들어가면 마치도 물고기 왁실거리는 양어장에 뛰여든것 같다. 어느 놈부터 잡아야 할지...

음식도 너무 풍성하게 차려놓으면 맛있는줄 모르고 너무 흔하면 먹고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사람의 감수란 참, 묘하다. 그 옛날 사랑채세집방에서 살 때 귀한 손님이 오면 퍼런 비닐통을 들고 《쑈풀》(小铺儿)로 달려간다. 땅콩접시에다 짠지쪼각 달랑 놓고 생맥주 한컵씩 카- 하며 넘기고는 명태를 쭉 찢어 짭짭 씹어먹던 그 맛, 세계형세를 론하고 문학을 론하고 인생을 론하던 그 격정, 지구를 안고 세계를 울릴 호기였다. 마시면 마실수록 시원해지던 그 생맥주, 씹으면 씹을수록 쫄낏쫄낏해지던 그 명태쪼각, 말하면 말할수록 호매로워지던 그 마음속 호소, 통쾌하고 한없이 즐거웠던 그 밤, 그 밤이 왜 그토록 짧았던고?

지금은 귀한 손님이 오면 무슨 국제반점이요 세기호텔이요 하는 장소로 번쩍거리게 모신다. 진수성찬에다 고급맥주를 마시지만 기분나게 벌컥벌컥 마셔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맛있다고 료리를 짭짭 소리내며 먹어대는 사람은 더구나 없다. 오고가는 말도 공식적인 인사치례나 건투를 비는 어구들이다. 술이 서너순배만 돌아도지루하다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친구들이 있게 된다.

중국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많아서 손해볼게 없고 많아서 나쁠게 없다는것이다. 있는것이 없는것보다 낫고 많은것이 적은것보다 좋다는 우리의 생활론리이다. 우리 민족은 많은것 없이 살아왔고 모든것이 부족하게 살아왔었다.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날 좀 두두룩하게 벌어서 사고싶은걸 사고 먹고싶은걸 먹고 놀고싶은걸 놀며 흔장만장 써보는것도 뭐 크게 잘한다고 춰줄 일은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제멋에 살줄은 안다고 해야겠다.

우리의 문단상황도 대개 이러한것 같다. 없던데로부터 있게 되고 적던데로부터 많아지게 되는 과정을 걸어왔었다. 문학붐이 일기 시작했던 70년대말에는 작품 한편 발표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었고 책 한권 빌려보기가 이웃집아저씨네 돈꾸기만치나 힘들었다. 대학교 2학년시절이라고 기억된다. 문학작품은 언어예술인데 언어가 풍부해야 써낸 작품도 토실토실한 도야지처럼 잡아먹기 알맞춤하게 살이 진다고 천세봉의 작품을 한번쯤 훑어보는것이 좋겠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학교도서관을 찾았었다. 천세봉의 《석개울 새봄》을 차용해보자고 도서관의 뒤고방뙤창문같은 그 창구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번마다 허리굽혀 골을 들이밀고는 소리쳐본다. 번마다 나간게 안들어왔다는 답복이였다. 몇십번째였던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체육시간에 남몰래 빠져나와 도서관에 갔더니 면바로 그 책을 물리러 오는 조문학부학생과 맞띄우게 되였다. 얼마나 기뻤던지! 책을 넘겨받고보니 싯누런 포장지겉가위에다 시꺼먼 붓글씨로 제목을 써놓은것이였다. 슬슬 피루어보니 너무 보풀이 져서 앞몇페지는 기본상 글씨체가 알리지 않았고 기수페지 오른쪽아래면이 다슬어 반달이 된 곳이 적지 않았었다. 그날은 저녁식사때도 모르고 밤을 패가며 보았다. 색시를 안고 이불밑에서 황홀한 꿈을 꾸기보다 더 들큰한 향수였다. 그당시 얻기 바쁜 책 한권을 빌려다 본다는것이 더없는 행복이였다. 헌데 지금은 책이 많으니 그걸 다 읽어볼 시간도 없거니와 또 읽어본데도 그런 행복감을 느껴볼수가 없다.

작가협회 사오백명되는 회원들가운데서 해마다 작품집이 수십권내지 수백권씩 나오고 거기에 달마다 나오는 각종 잡지에, 날마다, 주일마다 나오는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작품들을 합치면 얼마나 되겠는가! 옛날에 비하면 그야말로 콸콸 쏟아지는 수도물이라 할가 봄날의 우후죽순이라 할가! 복받은 독자들은 백화원 꽃밭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나비가 된셈이다.

세월은 글쓰는 사람들에게도 흥그럽게 돌아간다. 작품집이 나오면 무슨 발간의식이요 축하모임이요 좌담회요 하면서 문단의 저명인사들을 모셔놓고 작자에게 꽃바구니를 안긴다 축사를 올린다 하며 서로서로 덕담으로 보듬어주고 분위기를 돋군다. 클라이막쓰는 오찬에 가서 이루어진다. 서로서로 술잔을 나누며 축하도 해주고 고무격려도 해준다...

이런 모임이 빈번해지니 시뚝해서 잔소리를 하는 량반도 있고 곁에서 보아주기 민망하다고 코웃음치는 군자들도 있다.
《허, 또 그 모임이군. 안가면 좋아않아지.》

《그 량반 작품집이 나올 때마다 부산을 떠는구만. 피곤해난다구.》
《그것도 뭐 작품집이라고 내놓고 법썩꾸려.》
... ...
점차 빈번해지니까 시끄럽고 걱정되여 뒤공론이나 해보는 불평들이라 가히 리해해줄만한 소리들이다. 허지만 필경은 호사인것만큼 좀 너그럽게 봐주면 너좋고 나좋고 다 좋을게 아닌가! 사오십년대에 태여난 사람이라면 최저로 한두번쯤은 호미자루를 만져보았을것이다. 사래 긴 콩밭이나 조이밭김을 두세이랑씩 매고는 밭머리에 나가서 오이랭국이나 감주를 마일 때가 많았었다. 땀발에 익는 몸을 적셔주는 그것이 얼마나 시원컬컬했던가! 농부에게도 순간적으로나마 그런 멋이 있게 된다. 문학창작 역시 고달프고 지겨운 글쓰기농사다. 애타게 써낸 글이라 자기의 작품을 《자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식》이 세상에 태여났는데 그래 술 한잔 들어 축하하지 않겠는가! 그 《자식》이 밉든 곱든간에, 그 《자식》이 많든 적든간에 다 귀여운것이다. 때문에 그런 모임이 빈번해진다고 시끄러워하시지 말고 군소리 없이 가서 축하해주는것이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윈칙이 아니겠는가! 요청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로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말없이 축하를 보내주는것도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량심이라 하겠다.

《뭐, 그것도 작품이라고 내놓고 히뜩거려!》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어떤 작품은 학교작문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개인서신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어처구니없이 덜익어 시쿨기만 한것도 있다. 수도물도 맑을 때 있고 흐릴 때가 있다. 자식이 많으면 개중에는 《범새끼》도 있고 《시라소니새끼》도 있게 되는 법이다. 수준이 낮은 작품이 있어야 수준이 높은 작품이 알릴수 있지 않겠는가!

자연적인 동물계의 생태평형규률을 살펴보면 재미나는 현상들이 많다. 쥐들의 번식이 얼마나 빠른가. 지금 쥐를 깨끗하게 소멸할 뾰쪽한 수가 없다. 이쪽에서 약을 친다 착고를 놓는다 하면 벌써 저쪽에 가서 무리로 번식해나간다. 우글거리는 쥐무리를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헌데 쥐잡이능수인 뱀과 부엉이는 이 세상 그리 많지 못하다. 산양, 들소, 들말 등 초식성동물들은 수십마리, 수백마리씩 무리를 지어다니지만 그걸 잡아먹고 사는 사자나 호랑이같은 육식성동물들은 많지 못하다. 사자는 기껏해야 대여섯마리씩 무리를 지어다니고 호랑이는 단독행동이 많다. 그걸 비유해서 인류력사도 육식하는 민족이 강세할 때가 많았고 소식하는 민족이 그 압박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인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뭐, 그 말이 남녀궁합처럼 딱 들어맞는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내가 알고있는 력사숲을 헤집고 봐도 대개는 그러한것도 같다.

지금 우리의 작품창작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사자》나 《호랑이》같은 작품이 적고 《산양》이나 《들소》같은 작품이 많다. 듣건대 장백산야생동북범이 거의 멸종경지에 이르렀다가 요즘 훈춘변두리에서 가끔 두각을 내밀어 가뜩이나 심장이 약한 촌민들을 놀래웠다고 한다. 우리 문학동네에도 동북범같은 《호랑이》몇놈이 슬근슬근 내려와 《따웅!》하고 주변산곡간을 울려놓았으면 좋겠다. 문학동네에는 노루심장을 가진 사람이 별반 없으니 놀라 달아날 우려는 있을것 같지 않다. 저마다 장수이다. 어떤 장수는 적장 한놈을 베고 평생 명장이 되였고 어떤 장수는 평생 천군만마속을 좌충우돌하면서 수없는 병사를 무찌르고 명장이 되였다.

말하기는 부끄럽소만 필자의 경우도 전자에 속하는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근 30년전 대학교 3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한창 철없이 뛰놀 때라 문학동네 강아지가 되여보겠다고 《구촌조카》라는 소설 한편을 써냈다. 뭐, 지금에 와보면 소학교아이들 작문이나 다름없는 작품이였지만 그당시에는 확실히 호랑이새끼의 《따웅!》하는 울부짖음이 되여 시골의 문학동네에 범소리흉내를 냈던것이다.수천수만 독자들의 추천표와 편집과 평론가선생님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아 그해 문학상을 땄던것이다. 그후 세속의 소용돌이속에 빨려들어 허우적거리다보니 거의 붓대를 꺾다싶이 하였다. 지금도 술좌석같은데 앉아 아무개라고 소개하면 모르지만 《구촌조카》하면 대개 50대이상 사람들은 알아봐주는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 얼굴이 화끈해날 때도 있다.

《너 뭐 〈구촌조카〉 한편을 던지고 평생 작가라고 점잖을 빼?》
《자식, 내가 언제 점잖을 뺐어?》
고금중외에 소설 한부, 시 한수, 노래 한곡, 그림 한폭으로 평생 대가로 인정받아온 명인들이 적지 않다. 채권놀음과 흡사하다 할가! 어떤 사람들은 채권에 재미를 붙여 수년간 수만원씩 처넣으며 채권을 샀지만 추첨되지 못해 궁지에 빠져서도 그냥 호기를 피우며 돈을 꿔서라도 밀어넣는다. 헌데 어떤 사람들은 별로 궁리도 없이 스치는 호기심으로 단 한번에, 단 몇푼 돈에 추첨되여 승용차를 타거나 몇백만원부자가 된다. 세월속의 어떤 일들은 리해하기조차 어렵게 공평스럽지 못하다.

수십년동안 문학창작에 혼신을 태우며 수백편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가 있다. 어느 한 모임에서 그를 장편 몇부, 중단편 몇백편을 써낸 작가라고 소개하였다. 뒤좌석에 앉은 몇사람이 수군덕거렸다.
갑: 《거 대단한 분이신데 대표작으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는가? 당신 봤나?》

을: 《글쎄, 이름을 들으니 어디서 본것같은데. 이봐 자넨?》
병: 《그렇지. 거 제목이 뭐더라, 한번 보다가 지루해서...》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신문출판방송 등 분야의
기자, 편집, 문화사업일군들이였다. 우리 사회의 제일 고급독자들이라고 인정해야 할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사유법칙으로 추리분석해본다면 수십년동안 수백편 써낸 작품들이 고급독자들에게 준 인상이 아리숭해졌다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아리숭해졌을게 아닌가!

여기에서 원칙적인 시비가 터진다. 그래 한두편 명작으로 이름 날렸다해서 문학동네좌상으로 모시고 한평생 부지런히 글을 써온 사람은 명작이 없다해서 동구밖파수군으로 내세우면 되겠는가? 구경 어느쪽이 더 위대한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지금 소시장에 나가 소 한마리를 사자면 몇천원 내번져야 한다. 괜찮은 소는 만원묶음을 내놓고 흥정해야 한다. 헌데 범을 사자면 값이 없다. 자그마한 연길시내에도 백만부자, 천만부자는 물론, 억만부자까지 있다. 값이 있다면 어느 놈이 대부금을 끄집어내서라도 살것이다. 범은 고기뿐만 아니라 뼈다귀마저 명약으로 쓰이지만 너무 귀하다보니 잡아먹게도 못한다. 무송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다시 범을 때려엎었다면 옥살이를 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문학에서도 진정한 명작은 값이 없다.

《여보게, 자네 과거에 그처럼 위대한 명작을 써냈는데 요즘 골을 싸매고 들어앉아 다시 명작 한편 더 써내게. 내 몇백만원 메칠테니까.》
옛날에 명작을 써냈다고 오늘 또 명작을 써낼수 있을가? 명작이란 누가 시켜서 써내는것도 아니고 투자해서 그 효과를 보는것도 아니고 계획을 세워서 써내는것도 아니다. (간혹 그런 경우도 있을수 있겠다는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이런 명작을 누가 한평생에 한편을 써냈든 두평생에 반편을 써냈든 다 위대한것이다. 값이 없는것이니깐. 의례 동네좌상으로 모셔야 할것이 아닌가!

여기까지는 절반 시비를 가른 셈이다. 그래 호랑이만 호랑이라고 소를 무시해서 이 문학동네가 살아갈수 있겠는가? 시골이라 문학동네는 농가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문학》이란 밭을 갈아 《창작》이란 농사를 지어먹고 산다. 소가 없는 농부를 제농사군이라 할수 있겠는가! 한때는 《농부 애비없이는 살아도 소가 없이는 못산다》는 말까지 있었다. 최저한 추석날에 소고기국물이라도 마실수 있어야 동네인정이 도는것이다. 소도 부지런히 기르면 새끼치기를 자주 해서 늘어나게 된다. 작품농사도 그런것이다. 부지런해야 식구들도 먹여살리고 동네구제도 할수 있고 동네추렴에도 한몫 낼수있는것이다. 누구나 명작 한편 냈다고 그늘밑에 앉아 부채질만 하다가 건너마을색시가 더 고운가 해서 들락날락하며 세월을 보낸다면 곡식밭이 쑥밭으로 되여 범이 새끼를 칠게 아닌가! 독자들이 명작 한두편만 펼쳐놓고 자꾸 뜯어볼수는 없는것이다. 아무리 좋은 명작이라 해도 벌써 두번 다시 보면 재미없어지는것이다. 한평생 수십편, 수백편씩 되는 작품을 써내온 다산 작가들이 없었다면 우리 문학동네에는 진작 기근이 들어 동냥살이로 뿔뿔이 다 흩어졌을것이다. 그보다 방방곡곡에 있는 독자들이 그동안《배》를 곯아왔을게 아닌가!

기실 우리의 문단화원은 그들의 부지런한 손끝에서 가꾸어지는것이다. 또한 그들이 있기에 여러 가지 꽃이 제각기 울긋불긋 피여날수 있어 백화원을 이룰수 있었던것이다. 그래 이런 량반들을 동네좌상으로 모시지 않으면 되겠는가? 우선 앞으로 문단좌상으로 될 후배들이 들고일어날것이다.

이러고보면 다 위대한 창작가들인것이다. 한평생 명작을 한두편 써낸 사람도 위대하고 한평생 작품을 수십편, 수백편씩 써낸 사람도 위대한것이다. 결론은 무릇 문학창작에 달라붙은 사람이라면 다 위대한 인물인것이다. 그것은 문학창작이 인간을 연구하고 인간을 그려내는 인간수업이기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연구하는 사업보다 더 위대한 사업은 이 세상에 없다.

이런 위대한 사업을 한평생 한두편 명작을 써낸 사람도 좋고 한평생 수백편 작품을 써낸 사람도 좋고 다 같이 오늘날까지 추진해왔었다. 문제는 래일에는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것이다.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니 우리 문학동네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있다. 시골마을인데도 아스팔트길이 마을복판을 가로 째놓고 승용차며 농기구들이 들이닥친다. 소궁둥이를 치며 밭갈이하던 목가적인 정경도 점차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도 빠르고 무정하게 뭉개며 나가니 마음만 들볶인다. 이럴 때일수록 철학적인 변증법적 사유가 수요된다. 남들이 승용차를 타고 질주한다고 소 탄 놈이 소궁둥이에다 채찍질만 해서야 되겠는가! 소란 놈은 빨리 달릴수록 멀리 못간다. 문학창작 역시 이러한 리치가 깃들어있다고 생각된다. 작품이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있는 오늘날, 남들이 수도를 탈아놓았다고 나도 덩달아 더 크게 탈아놓으면 그 수도물을 누가 다 쓰는가? 쌀도 일고 빨래도 씻어놓았고 구들장판도 다 닦아놓았는데...

작품의 사회효과성에 대해서도 우려되는 점들이 많다. 누군가는 작품집 이삼십권 찍어 친구들한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동네개추렴》식이다. 개를 한마리 잡아놓으면 동네분들을 청해다 대접시키고 집식구들이 모여 둬어끼니 잘 먹을수 있을것이다. 물론, 자작작품에 자아도취되고 안해나 아이들이 감상해줘도 역시 일정한 사회효과성이 있었다고 볼수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할수 있겠다. 허지만 우리가 숭엄한 문학의 대문에 들어서서 신성한 창작의 붓대를 들었을 때에는 이런걸 바라고 쓴것이 아니잖는가! 우리 민족의 얼을 지켜나가고 우리 민족의 위용을 떨치자면 속도가 빠른 글로벌시대일수록 마음을 다잡아먹고 질적인 만속도를 추구해야 한다. 문학명작은 속도전이나 돌격전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토끼와 거북의 달리기에서처럼 거북이 되여야 한다는것도 아니다. 부지런히 쓴다고 해서 명작이 나오는것도 아니다. 빠른것과 늦은것, 많은것과 적은것, 다 문제의 관건이 아니다. 관건은 우리의 눈과 머리에 있다. 우리의 눈길로 세상을 잘 관찰하고 세상의 눈길을 우리한테로 끌어올수 있도록 머리를 써야 한다. 연예인들이 세상눈길을 끌자면 특수한 표현재질에 머리를 써야 하고 우리 문학인들이 세상눈길을 끌자면 세상사람들의 복잡한 정감세계에 눈길을 돌리고 머리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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