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람은 사돈에 팔촌까지 따지면 다 일가친척으로 걸린다는 말이 있다. 혹시 어느 친척집에 결혼잔치거나 환갑잔치 같은 대사가 있어 가보면 과연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무슨 아즈바이요 올케요 당질이요 생질이요 하며 법석일 때면 나는 머루덩굴처럼 뻗은 그 복잡한 관계로 하여 만나는 친척들을 어떻게 부르며 인사를 어떻게 올렸으면 좋을지 몰라한다. 그래서 이상벌 되는 남자면 돌아가며 아즈바이라 존칭했고 녀자면 무조건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친척들의 폭소를 자아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셈이 든 녀석이 아직도 촌수를 가릴 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도 도시에서 온 친척들은 이런데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농촌 친척들이 이런 복새판에서는 독판을 치며 더 야단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익지 않은 개살구나 먹은듯이 입이 쓰거워나서 말도 않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던 해의 양력설에 있은 사촌형님의 결혼식 때였다. 잔치를 치른 이튿날 아침에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 이 상 저 상에 모여앉아 해정술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가 앉은 술상에는 촌수를 모를 분들이 몇이 앉아있었다. 《하, 젊은이 잔을 내오.》 나의 옆에 앉은 허리가 늘씬하고 거쿨지게 생긴 장년이 벌쭉거리며 나더러 술을 죽죽 내라고 권했다. 그는 시체에 따르는 멋을 피우느라 검정 사지옷 앞섶을 헤쳐놓고 새하얀 와이샤쯔 깃을 내놓았지만 시골티만은 여전하였다. 엊저녁 오락판에서 그가 곱새춤을 추며 잔치손님들을 웃기던 장면이 떠올라 나는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술잔을 들었다. 《아즈바이, 그럼 같이 냅시다.》 나의 말에 그는 무릎을 탁 치며 삼검불 같은 머리를 흔들어댔다. 《허, 이거 참, 아즈바이라니? 술만 술이라구 체신 없이 초면인사를 홀딱 잊어먹었구만. 이 젊은이와 내가 어떻게 걸리길래 나를 아즈바이라고 하는가? 《우리 셋째 숙부님의 맏아들이요.》 사촌형님이 이렇게 소개하자 모두들 또 촌수를 캐고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시시한 문제에 들어가선 밑뿌리까지 캐고야 마는 괴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느 옛날에 북산에다 모신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내리훑고 올리 세더니 무슨 꼬부랑 셈을 셋는지 글쎄 그 사람이 나의 구촌조카벌 된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더욱 난처했다. 년세가 아버지와 엇비슷한 사람을 조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고 거기에 〈님〉자를 붙여 부르자고 해도 별로 거북했다. 그렇다 하여 계속 아즈바이라고 부를수는 더욱 없었다. 허나 그는 오히려 젊은 아즈바이를 만난것으로 하여 반갑다면서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헤여질 때 그는 우선수선한 얼굴을 해가지고 돈 5원을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내가 극구 사양하니 그는 벌컥 성을 냈다. 《왜 이러오? 나는 농민이래두 그렇게 좁쌀을 켜는 인간은 아니오. 구차하게 살 때도 제 앞의 인사는 다 차렸을라니 이젠 살림도 펴이는데 그래 처음 만난 아즈바이를 보고 가만 있겠소?》 나는 할수 없이 그 돈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그 돈을 내여놓으며 사연을 말했더니 어머니는 대뜸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았다면서 나를 크게 나무랐다. 《그 술주정뱅이가 너를 곱다고 돈을 주겠니? 이제 봐라. 또 문턱이 다슬도록 다니지 않는가구. 에그, 철부지야! 어째 그리두 세변을 모르니?》 불똑불뚝하는 동생이 방안에서 라지오를 조립하다가 어머니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시끄러워 소리쳤다. 《어머니, 좀 그만 하십시오. 돈 5원을 가지구 뭘, 이다음 오면 돌려 주지요 뭐. 그래도 자꾸 오면 쫓아버리구…》 어머니는 그래도 머나 가까우나 친척인데 어찌 그럴수 있느냐고 동생을 나무랐다. 소금물을 더 많이 마신 사람이 다르긴 달랐다. 이듬해 가을을 잡아든 어느 장날에 나의 구촌조카가 정말 우리 집으로 찾아왔었다. 그는 아래우를 모두 검정 골덴으로 해 입었다. 습관인지 앞섶을 헤쳐 누르끼레한 퇴색한 와이샤쯔깃을 내놓았는데 로출된 목젖 아래살이 햇볕에 타서 벌거우리했다. 《지금 농촌에 별게 있슴둥? 자 이거 아즈바이들에게 맛이나 보입소.》 그는 작은 보따리를 헤치고 어머니앞에 애들 주먹만한 사과배를 한 열댓근 되게 내놓았다. 어머니는 얼굴에 손님을 반기는 기색이라곤 띠우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마당으로 나가 고기며 남새들을 사들고 와서는 한상 푸짐히 차려놓았다. 나의 구촌조카는 입이 헤벌쭉해서 아버지와 같이 술을 나누었다. 60도짜리 술이 둬 잔 들어가 배안을 들볶아 놓자 그는 말이 많아졌다.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것이 좋긴 좋은데 족보를 태우고 새각시들이 너울을 못 쓴다고 하니 서운하다고 하고 나서 주석어르신님이 나라대사를 처리하시는데 영명하시지만 다만 무지한 농민들더러 대자보를 쓰라고 하신 일이 골치 아프다고 했다가는 또 그것을 부정하기도 하며 지꺼분하게 늘여놓았다. 《조부님―》그는 자기와 나이 비슷한 아버지를 이렇게 존칭했으나 반말을 썼다. 《그 잔을 마저 내오. 난 이래봐도 밭고랑을 타고 세계혁명을 내다보는 빈고농이요. 그저 돈이 없어 세계각지를 돌아보지 못했을 따름이지. 돈만 있으면야 나도 윁남이랑 아프리카같은데 가서 혁명을 해보겠소. 아니 그런데 이거 글쎄 돈을 좀 벌어야겠는데 농사가 영 형편없이 되여가고 수입이란게…》 《에익! 골이 뗑해 이거 못해 먹겠다.》 내가 한창 구촌조카 입에서 무슨 현행죄에라도 걸릴 말이 나올가봐 속이 조마조마해서 연신 헛기침을 에헴에헴 깇어대는데 마침 책상에 엎드려 반도체 라지오를 수리하던 동생이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후닥닥 일어섰다. 그 바람에 마실을 나왔던 아래집 아주머니도 정지간에 앉아서 두 눈을 치뜨고 입을 딱 벌렸다. 그가 떠나갈 때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사탕과자나 사주라고 돈 5원을 주었다. 그는 그 돈이 엇갚음이라는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친척들간에 이렇게 오고 가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인지 별로 사양치 않고 넙적 받아넣는 것이였다. 그후 2,3년동안에 그는 장보러 올 때마다 얼근하게 몇 잔 하고 우리 집에 들려서는 서너근씩 되는 찹쌀을 쏟아놓지 않으면 삶은 풋강냉이 같은 것을 내놓군 했다. 허나 이런 일도 오래 가지 못했다. 〈대혁명〉이 심입됨에 따라 공장에서 림시공을 처리하는 바람에 나도 밀려나왔고 어머니도 더는 〈5․7〉도로를 걷지 못하게 되였으며 동생은 절름발이여서 집체호로 내려가지 못하고 집에 들어박혀 반도체를 가지고 장난쓰며 하루 건너씩 돈비럭질하였다. 그러니 아버지 월급 50원에 매여 살자니 자연 돈잎이 그리웠고 돈 때문에 말다툼할 때가 많았다. 이런 형편에 귀한 손님이 와도 반갑지 않겠는데 나의 구촌조카는 시내에서 사는 사람은 돈을 물쓰듯 한다고 여기는지 드나드는 차수가 점점 더 잦아졌다. 인제는 무슨 쌀되나 강냉이 같은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없는 집으로 왜지나 살구 같은 것들을 들고 다녔다. 그것도 술이나 적게 마셨으면 괜찮으련만 늘 리태백이 되여가지고는 아버지와 〈대채평공〉을 하면 무슨 좋은 점이 있는가고 꼬치꼬치 캐여묻는가 하면 또 자기는 총각 때 힘이 장수여서 팔도금광이며 이도백하벌목장으로 막벌이를 자주 다녀 돈을 많이 벌었다고 자랑하였다. 집식구들의 눈에는 그가 점점 미워났다. 아버지의 엄한 눈길이 아니였다면 동생은 벌써 그를 집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77년도 모내기철이였다. 나의 구촌조카는 장을 본 빈 마대를 둘러메고 또 우리 집에 들렸다. 때마침 이날은 일요일이라 집식구들이 모여앉아 물만두를 빚고있었다. 《허허, 내 다리 길긴 긴데. 거 좋은 걸 하는구만!》 그가 입이 벙글써해서 우스개를 피웠지만 누구 하나 마주 보고 웃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어째 또 왔소?》 아버지도 이젠 그가 주책없이 다니는데 대해 슬그머니 역증이 나시는지 물어보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돼지 팔러 왔소, 빌어먹을 거, 80원에 흥정을 붙였더니 60원이상은 더 못 간다고 하지 않겠소. 젠장 다른 때 같으면 안 팔 걸 돈 쓸 일이 생겼으니 할수 없단 말이요. 그래 그까짓 거 뭐, 시끄러워서 60원에 팔아치웠소.」 그는 바로 대장부답게 헐값으로나 팔아버렸다는 듯이 옷을 훌훌 벗어내치고는 사양도 하지 않고 아버지 밥상앞에 퍼더버리고 마주 앉아서는 아버지가 따라주는 술잔을 넙적 받아서 쭉 들이켰다. 나는 어쩐지 속이 몹시 불쾌해났고 동생도 분이 치밀어 씩씩거렸다. 《벌써 모내기는 끝냈소?》 아버지의 물음에 그는 코방귀를 뀌였다. 《흥, 어느 천년에 끝나겠소. 숱한게 한데 몰켜서는 자가사리 끓듯 하니, 꼴보기 싫어서 원!》 《아니, 자넨 그래 모내기도 안 끝났는데 흥뚱흥뚱 나다닌단 말인가?》 《흥, 모내기고 뭐고 난 그렇게는 일해먹고 싶지 않소. 농사군이란게 그래두 씨종자 하나를 뿌려서는 낟알 한줌 얻는 재미가 있어야지. 하, 그런데 이거라구야, 일을 하나 안하나 그 본새요. 많이 한 놈이나 적게 한 놈이나 모두 한 사발에 뜬 숭늉물처럼 대하니 일할 맥이 나야지.》 그는 춤방울을 튕기며 괜히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자네 형세에 뒤떨어졌군, 지금은 〈4인무리〉가 독판칠 때가 아니란 말이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너나없이 모두 일떠나 계급투쟁고리를 더 억세게 틀어쥐고 있는 판인데 아직도 무슨 농사법이고 뭐고 할게 있소.》 《아따, 이거 과연 실루, 계급투쟁인지 뭔지 우리 농사군과는 하등 상관이 없단 말이요. 그래…》 그가 한창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렝이 나가는지 모르고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동생이 불뚝해서 드레지게 쐐기를 박았다. 《그런 말은 집에서 하는것보다 장마당에 나가 하는것이 좋겠습꾸마!》 나도 그런 말을 하면 좋지 않다고 하니 그는 술잔을 다시 쥐며 《그래, 그래! 자네들의 말이 옳네! 백성들이 정치를 운운해서 무슨 먹을 알이 있나? 자, 조부님, 술이나 들기요.》하고는 술을 한잔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입을 쓱 닦고나서 화제를 슬쩍 돌려 일가친척들 가운데서 잔치 치른 문제를 가지고 줄연설을 하다가 아버지의 기색이 돌아진것을 보자 때를 놓칠세라 비위 좋게 싱글거리며 속에 품고 왔던것을 꺼냈다. 《허허, 조부님, 알겠지만 우리 부친 환갑이 금년이 아니오? 글쎄 남처럼 버젓이 차릴수는 없지만 또 차리지 않을수도 없지 않소, 헌데 지금 농촌에 어디 돈이 나올 구멍이 있소? 그래 가을에 바치자던 돼지나 팔아 옷감과 큰상감을 마련하자고 했던 것이 글쎄 돼지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바람에 옷감값도 모자라는 판이요. 어찌겠소, 또 공걸음을 할수도 없고 해서 이 집에 와 먼저 한 10원쯤 꾸자고 하는데…》 《아유, 10원이 아니라 20원이래두 있으면야 드려야 합지. 헌데 글쎄 이번 달엔 주인이 출장나가 진 빚을 몽땅 갚고 쌀을 타고보니 지금 부엌바닥이 반반해지는데 석탄도 못 사들이고 있는 형편이꾸마.》 어머니가 그의 말꼬리를 밟으며 곤난한 소리를 했다. 《아니, 엊그저께 나온 돈을 벌써 다 썼단 말이요?》 아버지의 이 말에 옆에 앉은 나까지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눈치코치 없는 아버지한테 눈을 흘기며 천연스레 픽 웃었다. 《어이구, 돈을 그리 많이 받으며 큰 소리는?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없어졌습꾸마.》 《하, 이거 딱하게 됐군. 좀 어떻게 다른 방법을 대서라도 꿔줍소. 다음에 올 땐 꼭 갚아드리겠으니.》 늘 큰소리만 땅땅 치던 그가 우리 집에 와 이렇게 궁한 사정을 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럼 내 저 아래 장동무한테 가서 호조금이나 좀 꿔오지.》 아버지가 저가락을 놓고 일어서려고 하자 어머니가 버럭 성을 냈다. 《그저 쩍하면 호조금이요. 그만두오, 내 이웃집에나 가보지.》 어머니는 씽하니 문을 열고 나갔지만 이웃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허청간에 들어가더니 인차 5원짜리 두장을 쥐고 나왔다. 정작 발각발각하는 돈을 내놓으니 그처럼 사정하던 그가 어쩐지 낯빛이 흐려지며 안받겠다고 손을 움츠러뜨렸다. 아버지가 그의 팔을 끌어당겨 손에 돈을 쥐여주어서야 그는 마지못해 받으면서 다음에 올 때 꼭 갚아 드리겠다고 재삼 다짐했다. 그런데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지나갔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에그, 그 돈 10원을 다 받았구나, 없을 땐 1전이 다 그리운데.》 어머니는 손에서 돈잎이 떨어질라 하면 나의 구촌조카를 외워대면서 이렇게 랭가슴을 앓았다. 《친척간에 그까짓 돈 10원을 가지구 자꾸만 외울게 있소?》 어머니의 푸념에 아버지는 이와 같이 엇섰다. 《한다리 사이가 천리라고 팔촌, 구촌이 다 뭡니까? 그까짓 돈 10원이 문제인것이 아니라 허풍치며 다니는 꼴이 더 괘씸스럽단 말입니다.》 아버지가 입을 다무시면 동생이 또 결이 나서 이처럼 두덜거렸다.어쨌든 우리 집식구들은 그 돈 10원에서 그 구촌조카가 어떤 위인이라는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들 하였다. 그해 동지달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날 저녁 무렵이였다. 동생이 텔레비죤을 조립하겠으니 돈을 내라고 어머니와 졸라대니 어머니는 없는 돈을 어디 가 도적질해 오라는가고 밥그릇들을 왱강댕강 들었다 놓으며 신경질을 썼다. 집안이 너무 부산하여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마당엔 온몸에 눈을 새하얗게 덮어쓴 어떤 사나이가 아이를 데리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내……내가 왔네.》 눈바람이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안고 휙 후려치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쳐들며 여겨보았다. 그 사람은 홑옷바람에 머리에는 세수수건을 동였고 그의 오른쪽 다리에 딱 붙어선 아이는 발끝까지 내리닿은 헌 솜옷을 둘쳐입고 솜이 비죽비죽 내민 개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서 오돌오돌 떨고있었다. 《아빠, 난 추워! 빨리 집에 가자, 응―》 《응, 그래! 이 아저씨네 집으로 들어가자! 어이구, 아저씬게 아니라 너에게는 큰할아버지 벌이 되겠구나.》 그 말에 나는 문을 열며 집안의 불빛으로 그 사람을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 원래 나의 그 구촌조카였다. 눈확이 푹 꺼져들어가 면상이 더 험악해보였다. 그가 아이를 데리고 문안에 들어서며 인사를 하는 바람에 집안에서 모자간이 다투던 소리가 딱 그쳤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의 눈치를 흘끔흘끔 엇갈아 보며 조심스레 구들구석 쪽으로 올라가 앉더니 아이를 끌어다 무릎에 앉히고는 모자를 벗겨주었다. 아이는 대여섯살 먹어보이는 녀자애인데 앙상하게 여윈 파리한 얼굴에 한쌍의 귀염스러운 쌍까풀눈을 또릿거리며 초들초들 말라터진 입술을 반쯤 벌리고 할할거리더니 콜록콜록 기침을 깇어댔다. 나의 구촌조카는 습관대로 옷섶을 헤쳤지만 와이샤쯔깃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송구스럽게 두손을 마주 비비며 주책없이 겨울집을 저물어 뛰여들어 안됐다고 어머니에게 연신 사과하는것이였다. 우선우선한 얼굴로 집안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그가 오늘은 수척해진 얼굴에 수심을 푹 끼고 송곳방석에 앉은듯 어쩔줄 몰라하는 모양이 어찌보면 불쌍하고 가련하기도 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동안 집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생겨 한번도 놀러오지 못하게 된 사연을 쭉 말했다. 허지만 그 돈 10원은 이미 잊어버린것으로 치고 수염을 쓱 닦고 나앉자는 셈인지 한마디도 없었다. 어머니는 가마목에 오금을 꺾고 사려앉아서는 듣는지 마는지 가타부타 응대도 없고 동생은 책상에 마주 앉아 씩씩거리고있었다. 그도 저 혼자서 말하기가 무색해나는지 말을 얼버무려버리고는 담배를 말아물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집안의 공기는 당금 폭발할듯 팽팽히 죄여들었다. 다만 가마에서 몇줄기의 하얀 밥김이 푸르륵거리며 내뿜기고있었다. 아버지 무릎에 앉은 어린이는 그 밥가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손가락을 빨며 아버지 가슴에 대고 자주 몸을 비벼댔다. 나의 구촌조카는 담배를 한모금씩 빨고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몇번 입술을 실룩거리다가도 어머니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군 했다. 담배를 태운 다음 그는 어머니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부님은 이렇게 늦게 퇴근하심둥?》 참 그도 꽤 역은 축이다. 이 집에 와서 무엇을 좀 얻으려면 다른 사람과는 아무리 사정해 봤대야 헛수고이고 오직 아버지만이 수월하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에 지금 아버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퇴근이고 뭐고 외지 출장을 나갔수다.》 어머니의 부르튼 소리에 그는 한매 얻어나 맞은듯 몸을 흠칫 떨었다. 이때 동생이 벌떡 일어서며 《사람이 나살이나 그만큼 잡쉈으면 좀 똑똑하게 놀란 말입니다. 말하면 말한대로 해야지, 흥!》하고 내쏘아봍이고는 방문을 박지르고 나갔다. 싸늘한 바람이 콱 몰켜들며 소름이 끼치도록 천정이 펄럭펄럭함에 따라 구촌조카의 낯색이 변해지더니 몸을 무섭게 떨었다. 꺼머꺼먼 눈확에 박힌 두 눈을 뚝 부릅뜬 그 기상이 당금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불뚝성이 살인한다고 어머니도 사태가 잘못된것을 보자 당황하게 자세를 고쳐앉으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밖에선 눈보라가 의연히 윙윙 기승을 부리며 창문을 두드린다. 그는 이윽고 입술을 피터질듯 깨물더니 갈퀴 같은 큰 손으로 천천히 웃호주머니에서 돌돌 만 돈뭉치를 꺼내 부들부들 떨며 어머니 앞에 갖다놓고는 제자리에 와 앉았다. 어머니도 그걸 받지 못했다. 이때 한쪽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자애가 쪼르르 달려가 뼈마디 말랑말랑한 손으로 그 돈을 담쏙 잡아채 가지고는 아버지 앞에 와 뾰로통해서 작은 입술을 내밀었다. 《언니가 가마니 짜서 번 돈을 왜 남줘?》 아버지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메인 소리로 얼렸다. 《자, 우리 해옥이 말 잘 듣지? 이 돈을 저 할머님께……어서 빨리!》 《응―난 싫어 그럼 내 때때옷은?》 해옥이는 누가 돈을 빼앗기라도 하는듯 가슴에 갖다 꼭 움켜쥐고 고집스레 몸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안되겠는지 《그럼 못 써!》하며 해옥이를 끌어당겨 그애 손에서 돈을 빼앗아 내려고 팔목을 쥐여잡았다. 그래도 해옥이는 입술을 옥물고 기어코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질쳤다. 《에그, 이거 그만둡소!》 《하, 이러지 마십소!》 어머니와 내가 일어서서 그들 부녀를 떼여놓으려 하자 구촌조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못 놓겠니?》하고 벼락같이 소리치며 커다란 손을 쫙 펴서 해옥이의 앙상한 뺨을 찰싹 후려쳤다. 해옥이의 애리애리한 뺨에는 커다란 손가락자국이 시퍼렇게 났다. 그러자 해옥이는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손에 쥐였던 돈뭉치를 구들장판에다 활 뿌리치고는 아버지의 목에 와락 매달렸다. 《엉엉, 아빠 나……난, 때때옷 안해 입을래, 엉엉―》 눈물범벅이 된 해옥이는 아버지 일이 섧다고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허비였다. 아버지는 딸애를 꽉 끌어안으며 어깨를 들먹거렸다. 그는 물기 오르는 커다란 두 눈을 꺼벅거리더니 닭알같이 툭 불거져 나온 목젖을 꿈틀거리며 몸을 홱 돌려 문가로 다가갔다. 문을 나선 그는 맨발바람에 달려나오는 어머니를 나오지 말라고 손짓하며 《이거 참 안……》하고는 목이 꺽 메는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보라속으로 휘감겨 들어갔다. 나는 인츰 집안으로 들어와 온 구들에 널린 돈을 한장한장 주어모았다. 모두 10전, 20전, 50전, 1원짜리였는데 1전한푼 차나지 않는 10원이였다. 그 외에도 꾸겨진 종이쪼각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펼쳐보니 약처방과 입원수속증이였다. 입원수속증에는 어린애가 급성페염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과 입원보증금 30원이라는 수자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것과 어머니한테서 20원을 더 가지고 병원으로 줄달음쳤다. 나는 곧추 소아과병동으로 들어가 그 입원수속증을 내보이면서 환자를 찾았다. 의사는 그것을 보더니 《지금 우리도 이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애 아버지가 입원보증금이 모자라서 친척집에 가 꿔가지고 오겠다며 아이를 데리고 나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환자가 밖에 오래 있으면 좋지 못한데》라고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짜릿해 나며 눈굽이 젖어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머리속엔 입술을 실룩거리던 구촌조카의 얼굴과 그 돈 10원을 꼭 쥐고 《내 때때옷》이라고 애처롭게 울던 해옥이가 떠올랐다. 병원에서 나온 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갔을가고 생각해보았다. 그들이 나갈 때는 이미 차시간이 다 지난 뒤여서 차는 못 탔을 것이고 려관에 들자 해도 돈을 다 털어놓은 그가 어떻게 려관에 든단 말인가, 다른 친척도 없을 텐데…… 나는 인차 룡성골로 향한 신작로를 따라 달음질쳤다. 한 시오리 길을 달려 청석바위가 솟은 굽인돌이를 지나는데 바람을 등진 으늑한 길옆 바위아래서 흑흑 느껴우는 소리가 어슴프레 들려왔다. 손전지로 그곳을 비춰보니 바로 그들이였다. 전지불이 비쳤는데도 구촌조카는 그냥 딸 해옥이를 품에 안고 앉아서 락루하고있었다. 나는 그 정상을 보니 가슴이 쓰려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해옥이부터 보려 했다. 《해옥이가 어떻슴둥?》 그제야 그는 산중에 범이 내려와 해옥이를 채간다고 여겼는지 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어 해옥이부터 등뒤로 재껴 업었다. 《제가 왔습꾸마!》 내가 손전지로 자신을 비춰서야 그는 아이를 도로 내리워 가슴에 안으며 나를 무섭게 쏘아보는것이였다. 《자네 왜 왔는가?》 나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내가 입원수속증과 돈을 꺼내자 그는 부릅떴던 눈을 내리덮으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필요없네.》 《예?!》나는 그의 가라앉은 차디찬 목소리에 서리발처럼 온몸을 휘감는 불길한 예감이 쑥 들었다. 그 솜옷안에서는 할할거리는 소리도 기침소리도 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미친 사람처럼 솜옷을 헤치고 해옥이의 얼굴을 비쳐보았다. 입가에 노르끼레한 거품이 물려있고 두 눈은 꼭 감겨져 있었는데 오똑한 코밑만이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쇼크상태에 처한것 같았다. 더 지체할수 없었다. 《아이를 이리 보냅소. 내가 업고 갈테니.》 내가 다짜고짜로 그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안으려고 하자 그는 아이를 콱 나꾸채며 비분과 절망에 빠진 어조로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이러지 말어! 내 속에 불이 인다!》 목갈린 소리지만 날이 서지 않은 그 말이 나의 가슴을 마구 허비였다. 《이러지 마십소, 노여운 일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앞으로 제가 사죄하겠으니 량해하십소. 허나 지금은 이 아이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둥?》 나의 말에 그는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흑흑 느껴울었다. 나는 그를 더 안위할 새도 없이 해옥이를 둘쳐업고는 쏜살같이 산아래 마을로 달려가서 병원에다 전화를 쳐서 구급차를 불렀다… 그해 겨울이 지나가고 해토가 되여 대지에 봄기운이 돌 때 나의 구촌조카는 생산대의 선대금으로 산 송아지를 끌고 우리 집에 들려 돈 30원을 내놓으며 그때 입원보증금을 보충해 주었길래 해옥이가 위험에서 벗어나 지금은 건실한 몸으로 유치원에 다닌다고 알리면서 새해부터는 어쩐지 하는 일 없이 시간이 바쁘다면서 어머니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는것을 보면서도 랭수 한 사발만 마시고 돌아가더니 그후엔 까딱하지 않았다. 머나 가까우나 다니는 것이 친척이라고 그래도 그 구촌조카가 이 몇해동안 드나들던 정이 있어서 나는 장날이면 혹시 그가 오겠는가고 속으로는 은근히 기다려 보기도 했다. 그후에 나는 다시 취업하게 되였고 아버지 봉급도 올라갔으며 어머니도 가두일을 하면서 일정한 보수를 받았다. 동생은 텔레비죤 수리소를 세울 준비에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이제 구촌조카가 놀려오면 절대로 푸대접을 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속으로 별렀다. 어머니도 그런 생각인지 어째 놀러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몇번이나 외우는것이였다. 허나 그는 두해나 지나가도 오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그가 그리워났다. 80년대 첫 음력설을 앞두고 어느날 나는 동생을 데리고 거리에 나가 설맞이 물건들을 사가지고 오다가 무선전〈귀신〉인 동생한테 끌리워 오금상점으로 갔다. 상점안은 고객들로 들끓었다. 라지오며 텔레비죤을 사들고 머리를 내젖는 사람들을 보면 태반은 엉성하게 멋을 피운 농촌의 청장년들이였다. 우리가 텔레비죤부속품 진렬대앞에 이르자 웬일인지 모였던 사람들이 우르르 헤여지는것이였다. 동생이 흩어져가는 사람들속에서 무엇을 봤는지 사람들속을 마구 비집고 들어가며 판매원에게 성급하게 물었다. 《텔레비죤 주파수 대역선택 스위치가 왔습니까?》 《하, 이 동무 오늘은 한발 늦었구만, 방금 다 팔렸소.》 《예?! 야, 이거 참 맹랑하군!》 동생은 한발 늦게 온 것이 너무나 맹랑해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판매원에게 사정했다. 《판매원동무, 혹시 창고에 남겨둔 것이 없는지요. 우리 소조의 몇몇 구직청년들이 텔레비죤수리부를 내오자고 수리시험에 달라붙었으나 요즘 이 스위치가 없어 부득불 시험을 정지하였습니다. 어떻게 좀 방법을 대주십시오.》 《지금은 상품이 오면 다 매대에 내놓기에 창고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에참, 다 형님 탓이요. 부식품상점에 가 줄만 서지 않았더라면……》 실망한 동생은 또 나에게서 탈을 잡으며 해내려고 했다. 《젊은이, 사정이 정 그렇게 딱하다면 내 샀던걸 주지.》 뒤에서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말 고마운분이 다 있구나!〉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동생은 떡함지나 안겨준다고 좋아서 《정말입니까?》하고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의 얼굴이 눈에 안겨드는 순간, 나와 동생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게 누군가? 후리후리한 키에 광대뼈가 불끈 돋은 길죽한 얼굴, 그 얼굴에 박힌 어글어글한 우멍눈이며 우뚝한 매부리코며 벙글써 열려진 큰 입……나의 구촌조카가 틀림없었다. 그는 국방색 양털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안에는 커피색 텔릴렌중산복을 입었는데 헤쳐진 앞섶으로는 눈같이 희디흰 와이샤쯔깃이 내보였다. 발에는 번쩍번쩍하는 방한용 목구두를 신었는데 쭉 차리고 선 그의 자태는 아주 름름하고 위풍 있었으나 어딘가 아직도 시골티를 가시지 못했다. 《자, 이걸 받고 60원을 내놓소.》 그는 아직 털모자를 눌러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것 같았다. 내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올리려는데 저쪽으로부터 《아버지, 이런 걸 샀어요.》하는 야무진 소리와 함께 쪼르레기가 달린 인조가죽 저고리에 빨간 털실수건을 친 녀자애가 돛천 멜가방을 들고 구촌조카앞으로 달려오고있었다. 발가우리한 능금볼에 한쌍의 새별같은 눈을 가진 녀자애는 그야말로 눈 속에 핀 한송이의 꽃을 방불케 했다. 그 깜직한 쌍까풀눈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그가 해옥이라는것을 알아내지 못했을것이다. 《해옥아, 너 이렇게 컷구나.》 내가 해옥의 팔목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어리둥절해서 나와 동생을 번갈아 뜯어보던 구촌조카는 그제야 우리를 알아보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하, 난 또 누구라구, 그간 무사히들 보냈소?》 《예! 해옥이가 정말 충실해졌습니다.》 나는 이렇게 인사를 받았으나 동생은 면구스러워 우물쭈물하며 머리를 들지 못했다. 《자, 작은 아즈바이 이걸 받소!》 그는 텔레비죤수상기주파수대역스위치가 들어있는 종이함을 동생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동생이 안 받으려 하니 그는 벌컥 성을 냈다. 《이거 참, 아즈바이틀을 차리느라고 이러오? 그래 정말 안받겠소?》 동생은 하는수 없이 그걸 받은 다음 돈지갑을 들췄다. 텔레비죤수상기의 부속품들을 사려고 그는 늘 많은 돈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날 돈지갑을 몽땅 털어봐도 50원밖에 안되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나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그래서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돈지갑을 꺼내려고 서둘렀다. 《하, 그까짓 돈 10원을 가지고 뭘, 그만두오, 이 돈도 원래 받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면 또 이 작은 아즈바이가 물건을 안받을게구, 이거 정말, 쯧쯧!》 그는 할수 없이 받는다는듯이 머리를 슬슬 외로 탈아치며 동생의 손에서 돈을 받아쥐고는 나의 팔을 끌어내리우며 혀를 끌끌 찼다. 그바람에 쭈물거리던 동생도 활발해져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구촌조카를 잡아끌었고 나도 해옥이의 팔목을 쥐여끌면서 상점문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반갑게 맞아들였다. 집안은 웃음꽃이 피여 명절을 쇠듯 끓었다. 구촌조카는 외투며 웃옷을 활활 벗어내치고 와이샤쯔에다 회색 털쪼끼바람에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술을 나누며 흥에 겨워 이야기를 하다가도 껄껄 크게 웃었다. 그는 두해 동안에 닭치기, 돼지치기에다 소를 세 마리나 길러 팔아 몇천원 벌어서 빚을 다 갚고 텔레비죤까지 갖추었는데 명년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지을 계획이라고 하면서 이젠 일밭에 나가 일을 할라치면 일욕심이 점점 더 많아져 기운만 난다고 기껍게 말했다. 《자, 조부님, 그 잔 마저 내오. 앞으로는 농촌생활이 도시생활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지 않을게요. 조부님도 퇴직하면 우리 마을로 오라이! 살기 좋소! 먹을게 적어 걱정이겠소, 돈잎이 그립겠소, 몇해만 지나면 집집마다 텔레비죤을 다 갖춰놓겠는데 부러울게 뭐 있소? 하, 이젠 차비를 팔지 않고서도 뜨끈한 구들에 토시고 앉아 세계각지를 다 볼수 있단 말이요.》 《그 집에 있는 텔레지죤이 외국제입니까 국산입니까?》 그가 한창 주흥에 입심을 부리는데 웃방에 있던 동생이 이렇게 물었다. 《우리 집 텔레비죤 말인가? 상해제네. 말똥떼두 상해제라면 좋다더니만 거 좋긴 참 좋았는데 하, 글쎄 며칠전에 이 해옥이라는년이 숱한 제 또래들을 데리고 와서 어떻게 주물러놓았는지 스위치를 마사놓았단 말이요. 그래 오늘 소장 보러왔던 김에 오금에 들려보니 마침 그 스위치가 있어 샀던게요.》 《텔레비죤수리 같은 건 저 우리 둘째가 잘하오. 갸들이 몇이서 무선전수리소를 내왔는데 영업허가증은 탄지 오래지만 자금이 모자라 지금 개업을 못하고 있소.》 아버지의 이 말에 구촌조카는 무릎을 탁 치며 성낼 때처럼 목에 핏줄을 세웠다. 《아니, 그래서야 되겠소? 자금이 얼마나 모자라오?》 《한 천여원 모자라는 소리를 하더구만.》 《천여원이라……》 그는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무슨 속구구를 하는지 미간을 찌프리고 생각하더니 불시에《자―》하고 소리치며 손을 놀려 털조끼 밑으로부터 빨간 비단에 싼것을 내놓았다. 집식들은 모두 의아해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소 사러 가지고 왔던 돈 500원일세. 아직 봄도 이른데 바쁘지 않으니 작은 아즈바이 요긴한 일에 먼저 보태게나!》 집식구들은 모두 감동되였다. 동생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구촌조카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속이 좁게 논 저를 용서해 줍소. 이제 꼭 수리소를 잘 꾸려 이 크나큰 방조에 보답하겠습꾸마!》 《아따 과연 실루, 지나간 일들을 가지구 무슨 그럴게 있나?》 그는 동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너그럽게 웃었다. 《어이구, 모두 그 개도 안먹는 돈 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면야 무슨……》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행주치마자락으로 눈굽을 찍었다. 《아니꾸마! 절대 돈 때문이 아닙지비. 저도 이전엔 돈이란게 사람의 인심을 박하게 하는 몹쓸게라고 생각했댔지만 지금에 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절대 그런것이 아니꾸마! 내 이 이태 동안에 벼락부자가 된게 무엇 때문이겠슴둥?》 《옳소, 절대 돈문제가 아니오.》 그의 말에 아버지도 이렇게 수긍하셨다. 《이게 다 공평한 정책이 우로부터 내려왔기때문이꾸마. 헌데 글쎄, 그전에는 〈대채평공〉이요 뭐요 하고 평균주의를 실시하니 누가 맥을 내겠슴둥. 밭에선 범이 새끼를 치는데도 밭머리에선 계급투쟁을 합네 하구 입씸질만 하니 그게 무슨 정책이란 말임둥? 젠장!》 나의 구촌조카는 누구와 다투기라도 하듯이 눈을 부릅뜨고 침방울을 튕겼다. 해옥이가 옆에 앉았다가 귀여운 눈으로 아버지를 흘겨보며 앵두입을 삐쭉거렸다. 《아버지두, 참 지나간 옛말은 그만하시고 재미나는 이야기나 하세요.》 그 바람에 모두들 즐겁게 웃었다. 구촌조카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해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다. 너희들이 커서 일할 때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거야! 그때 가면 정말……》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웅숭 깊은 두 눈으로 창밖의 먼산들을 이윽토록 바라보는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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