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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와의 상봉나날 이야기
2013년 10월 12일 10시 58분  조회:5001  추천:14  작성자: 강순화

                   

                                            이모와의 상봉나날 이야기
                                                                                                                                                                                                             글  /  강  순 화
 

      


      나에게는 이모 한분이 계신다. 1934년생이시니 올해로 어느덧 79주세인 셈이다. 세월이 무정했었는지? 운명의 조화였던지?  이모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 조카딸은 세살에 엄마를 잃었고 그때 이모와 갈라져서 왕청에서 연길로 떠나왔었다. 내가 다섯살나던 해 이모가 한번 연길로 찾아오고는 오랜 세월동안 연락도 없이 서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았었다. 나의 머릿속엔 이모가 그때 우리집에 찾아와서 나를 둘처 업고는 밖에 나가 웬지 모르게 하염없이울기만 하던 기억만이 어렴풋하다.
 
     이모는 왕청역에서의 그 리별이 수십년 지난 오늘에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려난다고 한다. 아빠품에 안긴 철없는 애기가 엄마 죽은줄도 모르고《엄마는?》하고 졸라대자《엄마는 갔다...》,《이모는?》,《이제 안녕!  해야지...》아빠의 말이다. 세 살난 나는 얼른 고사리 손으로 아빠입을 막으며 이모도 함께 가자고 울며 떼를 썼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25세 젊은 청년 나이로 상처를 하였었고 그후 왕청교육국에서 연변한어사범학교로 전근하게 되어 어린것을 안고 길을 떠난 것이였다.
     
      그때 중학에 다니고 있는 이모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생전의 부탁대로 반주임댁에 기거하기로 했었다. 조카딸과 형부를 눈물로 떠나보내고 이모는 몇날 몇일 가슴이 꽉 막혀서 숨도 바로쉬기 힘들었단다.  반주임은 이모더러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야 가슴이 풀린다고 했다. 마침 청명이 돌아와 이모는 선생님을 따라 그집 로인들의 산소에 갔었는데 곁사람들이 통곡하는 그 분위기에 이모도 덩달아 실컷 소리내여 울었단다.  그랬더니 과연 마음속에 굳어 있던 엉어리가 조금은 풀리더라는 것이다. 그 세월 사람들은 가슴속에 맺힌 한과 설음을 그렇게 밖에 풀수 없었던것 같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20세기 90년대 초,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이나 변한 어느 여름날, 이모는 어쩌다 또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간 출가하여 딸 다섯을 키워왔고 이모부는 병으로 돌아 가셨으며 큰딸 도순화가 큰 병으로 료녕성 안산의 <천산병원>에 입원하여 앓고 있을 때였다. 그때 잠시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도 종종 만나보시고 새 엄마와 동생들도 만나면서 얼마동안 계시다 간 후 우리들의 왕래는 다시 시작되였다. 그번에 이불장에서 나의 낡은 첫날이불을 뜯어보고 그렇게 슬피 우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엄마나 이모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헌 솜을 주어모아 새색시 이불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시집갔을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결혼하던 그 70년대에는 첫날 옷감도 이불등도 마음대로 살수 없어서 남의 집에 수소문하여 빌려 샀었고 15원짜리 트렁크 하나에 어록책과 하향하여 입던 검은 고리둥 옷 한벌을 넣고 시집갔었는데 이모가 그 사연까지 다 알았으면 더욱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혈연의 끈끈한 정이 아닌가 싶다.
 
      그후의 어느 가을날,  나도 시간을 내여 이모가 계시는 흑룡강 계동에 찾아가서 이모와 동생들도 만났고 또 선화 련화 은화 등 동생들도 우리 집에 놀러 오군 하였다. 금년에 어쩌다 련화가 또다시 연락이 와서 내가 다시 찾아가게 되였고 오래동안 보지못한 이모와 동생들도 다시 만나고 한주간 잘 지내고 왔다.  인젠 옛날같지 않게 모두가 생활이 피였고 이모도 새 아빠트에 들어서 편히 계시고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  다만 이모 다리가 너무 불편한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직 정신도 맑으시고 옛 이야기들도 잘하시며 몸에 큰병은 없는듯 한데 무엇이 문제인지 온기있고 펀펀한 다리가 전혀 움직일 수 없단다. 다리신경을 지배하는 소뇌에 고장이 생긴 모양이다.  년세가 많으시니 수술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고 계셨다.

       같이 살고 있는 넷째딸 선화가 하도 알뜰히 챙겨드리고 잘 보살펴 드리니 식사도 잘하시고 텔레비도 잘 보시며 마음은 안정되고 계신듯 했다. 이젠 모든 고생이 다 옛말로 되고 좋은 세상 만나서 좋은 생활을 좀 더 오래 향수하셔야 할텐데 그저 멀리서 걱정뿐이다. 이번 걸음에 이모와 함께 일주간 있으면서 밤에 낮을 이어 들어 온 지난세월 이야기들이 너무도 소중하여 이렇게 하나하나 글로 엮어 본다.

       그 옛날 우리 엄마가 꽃다운 스므살 나이로 살아 계실 때 이모는 여나므살 되는 소학생이 였단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가 1928년생이니 이모와는 여섯 살이나 차이가 있었다. 워낙 늦게 섬이 들어 만날 애보다 못하다고 꾸중을 들었다는 이모는 그때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한평생 농사로 뼈를 굳힌 외할아버지는 광복이 되는 해 왜놈들이 투항하여 도망가면서 동북 할빈지역에 퍼트려 놓은 그 무시무시한 731세균에 간염되여 몇일 밤낮으로 몸부림치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고 외할머니도 얼마 오래 계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모 위로 외삼촌이 한분 계셨는데 일찍 참군하여 동북해방 전쟁과 항미원조까지 참가하셨다가 전쟁터에서 폐병을 얻고 돌아왔었다. 부모님이 안계시니 하나밖에 없는 누나인 우리엄마 손에서 살뜰히 병시중을 받았으나 얼마를 못 견디고 젊은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한다.

      의지가지 할 곳 없는 이모는 엄마가 결혼하여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았단다. 내가 태여나니 이모에게는 이 조카딸을 돌보는 일이 당연한 의무로 되었다. 늘 애기를 등에 업고 밭에나간 엄마를 찾아 젖을 먹이군 했다는데 이모 기억에 말못하는 애기인 내가 얼마나 령리했던지 업혀서 젖먹으로 가면서도 이모가 딴 생각에 팔려 길을 잘못가면 잔등에서 버득거리면서 손으로 앞을 가르켰다는 것이다.

     첫돌 생일에는 상에다 쌀 한공기,  팟 한공기 그리고 이모가 쓰던 몽다리 연필 한대와 엄마 호주머니의 잔돈 몇장을 꺼내 놓았다는데 엄마와 이모가 얼른 무엇을 잡으라고 하니 글세 제일 먼저 그 꽁다리 연필을 쥐고 다음으로는 돈을 쥐였는데 한장이 방에 떨어지니 기어이 주어서 다시 쥐더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는지 평생 이날까지 공부하는 것은 나의 첫째가는 취미였고 또 지금까지의 인생을 걸어오면서 크게 돈 그리운 줄 모르고 산 것도 같다.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온 첫돌 생일상의 전통오락이 과연 그저 장난에만 그치는 일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던 1947년말, 그때는 아직 중화인민공화국탄생 직전인지라 지하혁명활동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뒤따라 나선 엄마는 임신 때에도 막달까지 밖에서 활동하였고 애기를 낳은 후에도 아이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한다. 당시 길림성 서란현 부녀 부주임(주임은 항일 녀간부인 한족녀성이였음)을 담임하고 있은 엄마는 당의 지시에 따라 전현부녀들을 동원하여 이불솜을 거두고 집집이 실을 짜서는 양발과 수갑을 손수떠서 해방군께 보내는 활동들을 하였단다.

      련속되는 전선지원 활동들로 엄마는 각 지방을 돌며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니느라 애기 젖도 바로 못 먹였다. 어린 나는 항상 이모등에 업혀서 배고파 칭얼거렸다 한다. 한번은 이모가 이삭 주어온 감자를 부엌에 묻어 놓고 잠깐 소피보러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글쎄 방에서 놀던 두살 애기가 어느새 한길도 더 되는 부엌밑에 떨어져서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감자 익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 어떻게 굴러 내려간 모양인데 어데 다치지나 않았는지 이모는 너무도 기가막혀 그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무엇이 먹고 싶었으면 무서운 것도 모르고 그 깊은 부엌까지 떨어져 내려 갔을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여서 60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이모는 그때일만 생각하면 늘 놀라군 한단다.
    
      1949년초 당의 파견으로 아버지가 동북군정대학에 가시고 집에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넷째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들려보니 녀자들만 살다나니 땔나무를 하지 못해 애기가 차디찬 방바닥에서 언 기저귀를 깔고 누워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서란현 부근에 있는 큰집들에서는 모여서 토론하고 우리 세 식구를 셋째 큰아버지 집에 위탁하여 살게 하였다.

      그때 두살도 안된 애기인 나는 벌써 남의 집인것을 알고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한다. 혹시 빛다른 음식이 생기면 자기가 먼저 먹는것이 아니라 얼른 짚어서는 큰아버지한테 달려가 목을 그러안고는 큰아버지 입에 먼저 밀어 넣더라는 것이다. 큰아버지는 너무도 귀여워 항상《요 잰내비같은 영물을 봐라! 》하면서 수염이 가득난 볼로 애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며 이뻐서 안고는 방을 한바퀴 돌군 했다고 한다. 아직 세상물정도 알수 없는 그 어린 생명에게 벌써부터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하는 운명이 시작 되였던 것 같다. 
     
      엄마가 폐병에 걸린 외삼촌을 림종까지 붙안고 병시중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그 병에 전염되여 1년도 못되게 앓다가 22세의 꽃다운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셨다. 그후 이모는 중학교 반주임 집에서 초중을 마치고 반년 후에는 수리중등전업에 입학하였다. 군속이자 고아인 이모는 국가에서 주는 공비로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에는 흑룡강 밀산현 수리국에 분배되여 사업하게 되었다. 당시 그 현성에는 중등전업을 졸업한 지식인 녀성간부가 하나도 없었음으로 이모는 대단히 중용되였다고 한다. 현에서 큰 대회를 할때면 항상 현장 옆에 앉혔다고 하니 알만한 일이 아닌가.

      그 직장에서 이모부를 만나 1남 1녀를 낳았댔는데 대약진때 아들애가 그만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단다. 이모는 너무도 상심하여 신병을 얻었고 그 타격으로 직장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후 또 아들을 바라고 딸 넷을 련이어 낳아 딸 다섯을 키워 왔다. 그래도 이 조카딸이 항상 그리워서 큰딸 이름을 아예 나와 똑같게 순화라고 짓고 항상 불러 보았지만 그 세월 그 곤난한 생활형편에 언제 숫한 애들을 버리고 조카딸을 찾아 떠날 겨를이 있었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이해할만도 한 일이다.

      이모부는 원래 가정이 있는 전업군인이였는데 일찍 상처하였고 광복후 애들은 부모님들이 데리고 한반도에 있는 고향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모부 생전에 부모님 고향땅의 주소를 알았었지만 남한길이 막혀 있었던지라 수십년간 이산가족으로 서로 찾지 못하고 있다가 80년대 말에야 이모가 나서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그분들을 끝내 찾아내고 말았다. 그후 이모는 두차례나 한국에 초청되여 시집식구와 남편의 자녀들을 만나 뵈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목사로 일하는 시삼촌의 영향으로 이모는 다시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또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다 교회를 세곳이나 세우기도 했었다. 어찌나 헌신적으로 교회를 위해 일했던지 이모는 한국측의 신용을 얻어서 몇년간 많은 경제적 후원도 받았고 점차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또 계동판에서는 이름있는 권사로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한평생《주》를 믿고《주》에 혼신을 바쳤으니 인제는 정녕《하느님》의 딸인듯 싶다. 이번에 내가 가기 전날 이모는 꿈속에서《천당》에 가 보았단다. 그렇게 눈부시고 찬란한《천국》이였고 많은 성도들이 이모를 기다리고 있더란다. 인생 로년에 더욱더 깊이깊이 믿고 있는 그 신앙, 우리 유물론자들과는 달리《저세상에 또 다른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가 분명 있다》고 믿고 있으니 어찌보면 이모한테는 유일한 정신적 의탁이요, 마음의 마지막 안신처인듯 싶다.    
  
      어릴때 갈라진 이 조카딸이 혁명가、교육가의 자식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도 잘 키워 왔으며 크게 근심없이 살고 있으니 이모도 인젠 마음을 놓을 것이다. 나도 인젠 예순을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나간 세월 모두가 이 세상에 태여난 모두에게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였던 것 같다. 어릴때의 그 슬픔도 설음도, 커가면서의 그 억울함도 고달품도 모두가 한생의 잊혀가는 악몽이듯이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그 세월에 묻어두고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모와의 상봉 이야기》을 한단락 마무리 하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지했던 그 어린시절의 그 불행한 환경이 나를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잊혀가는 희노애락의 추억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그 격전의 나날, 조국해방의 포소리속에서 이 세상에 태여 난 한 갸날픈 생명이 이 나라가 걸어온 60여년과 동반하여 온갖 시련과 역경을 다 견디여 냈으며 자신의 신근한 노력과 분투로 후회없는 한생을 살아 왔으니 인제는 만족 할만도 한것 같다. 세 살에 엄마 잃은 그 불쌍한 아이, 그 여리고 순진한 눈물의 소녀, 그 천진랑만한 장미꽃 청춘이 어느덧 벌써 지천명(知天命)을 다 지났고 이순(耳順)길에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모든 것을 용서하며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오직 지나온 인생 경력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뜻깊은 삶에 최선을 다하며 제2의 인생길에서 끝까지 열심히,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희망이 아닌가 생각한다.

                                                                                                                      2013년 10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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