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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2011년 10월 02일 16시 13분  조회:4970  추천:28  작성자: 강순화

      “추억의 길목” 응모작품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글 / 강 순 화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더니 늙었다 하기엔 아직 이른것 같은데도 젊은시절의 추억만 떠올리면 어쩐지 가슴부터 울렁거린다. 6-70년대의 중학생이였다면 거의다 겪어 온 일이겠지만 새파란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온 그 광활한 대지에 사랑과 련민이 남아서일가? 아니면 그 시절에 얼키고 설키였던 아픔과 방황, 정열과 랑만 때문일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바래지고 잊혀진 그 흑백의 인생드라마들이 갑자기 오색찬연한 칼라로 바뀌여 주마등마냥 눈앞을 스친다.

    무지개 같은 희망에만 부풀어있던 19살 중학생이《지식청년》이란 신식 모자를 쓰고 일곱 년륜의 춘하추동을 저 산너머에서《재교육》을 받아왔다. 소를 몰고 두엄을 끄고 모를 심고 기움을 매던 그 고달픈 기억들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더우기 그 향촌학교의 교직생활, 시골애들과 뛰놀며 글을 가르치고 노래를 배워주던 그 젊음의 추억들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청춘의 멜로디였다.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으로     


     1968년 가을,《인민일보》첫면에《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하여 66, 67, 68년급, 3기의 초,고중 졸업생들은 모두다 광활한 천지 - 농촌으로 재교육 받으러 가야했다. 남부러워하는 교육자의 가정에서 태여나 문학가의 꿈을 키워오던 천진랑만한 장미꽃소녀는 하루아침에《문화대혁명》의 된서리를 맞고《당권파》딸로,《검은5류》자녀로 전락되였다. 대학에 추천되고 입당도 눈앞에 두었었는데 그 금빛찬란한 희망은 휘몰아쳐오는 폭풍취우에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오직《모든것은 모주석의 지시대로》해야만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지고무상의 정치요, 항변할수 없는 철칙이며 그 세대 8천만 중학생들에게 락인된 특이한 이력서였다.   

     붉은기가 휘날리고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환송소리 속에서 우리는 어록책을 손에 들고 이불짐을 등에 멘채 커다란 해방패 트럭에 빼곡이 실려 아무런 주저도, 두렴도 없이 용감하게 도시를 떠났다. 얼마를 살고 돌아올지 말지도 모르는 삶의 불모지를 향해 근심어린 부모님들의 얼굴을 뒤에 남긴채 우리는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룡정을 벗어나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계곡을 꿰질러 그리 넓지 않은 흙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고 달려 당도한 곳은 바로 변강산촌 백금향이였다. 또다시 두만강기슭을 따라 20여리 길을 더 내려가서야 우리의 종착지인 심포마을에 도착하였다. 열 다섯호의 인가들이 하얀벽의 한옥차림으로 산비탈에 옹기종기자리 잡고 있었는데 마을 동쪽 언덕우에 번듯이 지어놓은《집체호》붉은 벽돌집은 그야말로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았다. 김대장과 마을사람의 열정적인 안내로 우리는 행장들을 풀어놓고는 우선 서넛씩 사원들의 집에 나누어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인가가 드믄 그 시골에서는 마치 무슨 경사나 난듯이 집집이 두부를 앗고 시루떡을 쪄서 도시에서 온《지식청년》을 환대하였다. 반나절이나 트럭에서 부대낀 우리는 처음으로 농촌의 순두부며 떡이며 구수한 된장국을 마주하게 되자 너나없이 계눈감추듯 퍼 먹어댔다. 참으로 진주성찬이 따로 없었다. 

     저녘을 먹고 밖에 나가 보니 마을 앞에는 푸르른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가 보였다.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는 이웃나라 조선의 인가들이 어슴프레 보이고 있어 참으로 신기한 변강산촌 이였다. 도시의 온갖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우리들은 시골마을 산등성에 조용히 불타오르는 저녁노을이며, 푸르른 논밭과 앞마당의 각가지 남새 그리고 뒷산의 울긋불긋한 과수나무들이 그렇게 신비롭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열네명의 애숭이《지식청년》들은 이렇게《집체호》라는 특이한 대가정의 호주가 되여 함께 살게 된것이다. 


                                              햇내기들의 농사일 배우기

 
    새 환경의 새 기분도 잠간, 농촌의 생활과 로동이란 그렇게 랑만적인 것만은 아니였다.《일년 농사는 봄에 달렸다》하여 아직 겨울철 찬 기운이 감도는 이른 봄부터 밭에 나서면 음력설을 쇨 때까지 사시장철 들판에서 헤매야 했다. 녀자애들이 자랑해야 할 예쁜 얼굴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꽃치마 한번 입어 볼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기운 광목바지와 초록색 군복웃옷에 약진패 머리수건을 접어쓰면 그것이 류행이고 시체멋이였다. 간고소박이 미덕이니 색부치나 꽃무늬 옷들은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엄금했었으니 말이다. 허나 그 두만강기슭에서의 하많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채색드라마로 되여 오늘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농촌이란 새 천지에 당도하여 제일 처음으로 닥친 일은 가을걷이와 싣걱질이였다. 서투른 솜씨로 낫에 손을 베여가며 벼가을을 끝내자 또 논밭에 무져 놓은 벼단들을 하루바삐 탈곡장에 실어 들여야 했다. 도시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소수레를 몰아야 하는데 아무리 겁모르고 덤벼든다 하여도 햇내기들이라 그 천근무게의 육중한 소발에 밟혀 아우성치며 쩔뚝거리기가 일수였고 벼단을 쌓아 실은 수례를 논뚝에서 번져버리는 등 실수 또한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가을 싣걱질이 끝나면 또 탈곡을 해야 하는데 그때 어데 지금과 같은 현대화기계가 있었는가? 생산대에 두대 밖에 없는 반자동 탈곡기로 코구멍이 까맣게 되어가지고 몇날씩 밤도와 벼를 탈곡해야 했다. 싸늘한 늦가을의 탈곡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할라치면 판들판들하던 깜장눈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벼낟가리에 처박히기가 십상이였다. 음력설 후부터는 또 새해 농사에 쓸 비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소똥, 돼지똥들을 꺼서는 밭에 실어내야 했다. 곡괭이질이 서툰 우리는 온 얼굴에 두엄을 들쓰기가 일수였고 가끔은 입안에까지 튀겨 넣어 저마다 고양이 락태상이 되군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한여름 불볕에서 조이밭 두벌기음을 매는 일이였다. 두만강기슭의 밭고랑들은 어찌나 사래가 긴지 아예 점심 도시락을 허리춤에 차고 시작해야 했다. 밭고랑 중간까지 매고나면 어느덧 해가 구중천에 떠올라 그 자리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잠간 허리 쉼을 하고는 또다시 다그쳐 김을 매서야 저녁해를 등지고 돌아 올수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검실검실 타들었고 야들야들한 손바닥에는 줄줄이 장알들이 박혔다. 허나《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당년의《지식청년》들은 누구 하나 뺑소니를 치지 않았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단련된다더니 우리들이야 말로 농촌이라는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서 일하고 배우며 튼튼한 실농군으로 되어갔다.



                                                  산골과 집체호의 이야기

 
     두메산골 백금향 심포마을의 생활형편이란 말 그대로 가난하고 말끔하였다. 집집마다 장롱에 이불을 얹어놓으면 그것이 전부였고 좀 살림이 괜찮다는 집은 정주간에 큰 식장을 갖춰놓고 그 우에 커다란 꽃 대야들을 두개씩 엎어서 몇쌍 올려 놓으면 그것이 바로 부의 상징이였다. 온 마을에 기철이네 딱 한 집에 17촌짜리 흑백텔레비가 있어서 저녁 후이면 마을 남녀로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모여앉아 연변뉴스와 당시 류행했던 일본드라마를 보군 하였다.
 
    가난한 시골이지만 인품만은 더없이 좋았다. 아직 남새가 나지 않는 초봄에는 집집이 밥에다 간장만 찍어먹을 형편이지만 청명이 되면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일인당 한두근씩 똑같이 나누었고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떡이나 두부 같은 색다른 음식도 온 동네가 똑같이 만들어 먹었다.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집체호에 찾아와서 김치도 담가주고 산나물과 터밭의 남새들도 뜯어다 주었다.

    그때만 해도 도시는 배급제였지만 농촌에 오니 그래도 밥만은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그런데 부식이란 뒷산의 돌배와 퍼런 복숭아 뿐인지라 그저 하루 세끼 밥이 죽어났다. 1인당 800근씩 주는 1년 식량은 항상 부족해서 년말이면 또 생산대에 손을 내밀군 하였다. 어데 그뿐인가 콩가을 때면 밭머리에 둘러앉아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지피고는 입이 새까맣게 콩서리를 했고 강변 모래밭에 락화생을 심으라고 종자를 나눠주면 한 절반은 우선 자기 입에다 심어버리고 마니 밭에 나는 싹은 가물에 콩이 나듯 아예 솎아버릴 념려가 없게 되였다. 사원들은 억이 막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는 이《재교육대상》들 때문에 농민들도 여간만 애먹지 않은 것 같다.


                                                지식청년의 향촌 교직생활  

 
     범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시골에는 대학생은 고사하고 나같은 고중졸업생이면 최고학력자였다. 1년후 나는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민반교원으로 되였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심포학교에는 전교 학생이라야 50명도 안되지만 소학 1학년부터 중학 3학년까지의 반급들이 다 있었다. 교원은 모두 4명이였는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반급은 두 학급 학생을 한 교실에 갈라 앉히고 흑판가운데 줄을 그어 놓고는 복식강의를 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이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올라 겨울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교실의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였다. 모든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은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다. 일곱살 난 소학교 1학년생으로부터 열여섯살 초중 3학년생까지 크고작은 애들이 하학 종소리만 울리면 함께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치고 닥치고 하면서 즐겁게 뛰놀군 하였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오붓한 시골학교의 특이한 풍경이요, 변강산촌의 푸르른 희망이였다.  
  
 
                                              시대의 불행아가 행운아로  
  


     1975년 봄,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갈수 있다는 당중앙의 정책에 따라 우리는 모두 기를 나누어 성시로 돌아왔다. 그 험난한 시골도 어느덧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떠나올 땐 마을의 어른, 아이들과 눈물로 헤어져야만 했다. 연길시에 돌아 온 이튿날로 나는 연변대학인쇄공장에 찾아갔다. 대학을 갈망하던 마음으로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대학교재를 만드는 일이면 최고인듯 싶었다. 과연 공장령도에서는 교원출신인 나를 선뜻이 받아주었다. 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여 해마다 학교의 선진공작자로 되군했다.

     취직하여 2년이 되던 1977년 10월, 국무원에서는 교육부의《1977년 대학교모집사업에 관한 의견》을 비준하고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하였다. 이는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우리들에게 다시금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희망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때는 우리 66년급 고중생들로 말하면 모두 30대 나이였고 거의 다 결혼을 하였었지만 대학공부를 해 보려는 꿈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들애를 해산한지 두달도 안되는 몸이였지만 다시 얻을수 없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어 퉁퉁 부은 얼굴을 해 가지고 10여년간 놓아버린 고중교재들을 다시 복습하며 대학입시준비에 밤을 지새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같은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졸업의 영예를 받아 안고 대학교의 연구기관에서 훌륭하게 사업할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연변대학이란 이 신성한 직장에 내발로 찾아와서 일하며 배우고 진보하면서 한 인쇄공으로부터 대학학부의 교학비서로, 나아가서는 연구소의 부교수급 연구원으로 성장하여 오늘날 정년에 이르기까지 33년간을 일하여 온 것이다.

    《추억의 길목》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 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히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 특수 년대의 열혈청춘들이 이제는 지천명(知天命)을 지나고 이순(耳順)에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본문은 2011년 9월1일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와
                                              중공연변주위 <로년세계>잡지사에서 공동 주최한
                                             《추억의 길목》응모에서--- [우수상]을 획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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