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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엄마의 존재와 가치
강효삼
가정에서 엄마(어머니)의 존재와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고 귀중한지 (아주 섬약한 녀인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욱 절실하다.
내가 여덟살되던 해 엄마가 집을 뛰쳐나갔기에 한창 엄마의 사랑을 무르익히고 살아야 할 나이에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듣는 말에 엄마가 집을 뛰쳐나간 리유는 애정이 없는 혼인이기때문이라고 한다. 부모가 (외할아버지) 독단한 혼인이기에 비록 아들딸을 낳고 살지만 아버지와 엄마사이엔 사랑의 기초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버지는 늘 섬약한 엄마를 개패듯했고 엄마는 그 매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할수없이 집을 뛰쳐나가게 되였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 엄마의 비참한 사정을 몰랐기에 집을 나간 엄마를 미워하고 저주하였었다. 후에 철이 들면서 남들로부터 이런 사정이야기를 듣고 엄마에 대한 미움은 사라졌고 대신 엄마를 동정하게 되였다.
엄마가 곁에 없었기에 부딪치는 온갖 난관과 불행을 나는 일찍부터 뼈저리도록 체험하게 되였다. 어찌 보면 한 가정의 행복지수는 엄마의 존재여부에 달려있지 않을가? 우리를 낳고 키우면서 언제나 곁에서 사랑을 챙겨주어야 할, 세상에 제일 친절한 엄마가 곁에 없었기에 우리 4남매는 얼음장 같이 찬 구들에서 손바닥만한 이불 한채를 덮고 그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엄마가 없기에 나는 중학교를 다닐 때 그 추운 북방의 겨울에도 솜바지도 변변히 못입고 여름운동화를 신고 덜덜 떨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당시 숙사는 모두 널판자를 깐 《방》이였는데 나는 솜이 낡을대로 낡아 또글또글 뭉쳐있는 헌 이불을, 그것도 크지 않은 이불이지만 절반을 덮고 절반을 깔고 자야 했다. 옷을 입고 자는데도 밤중이면 너무 추워서 잠을 못이루고 일어나 불길이 점점 사그러져가는 난로곁에서 그나마 온기를 채우려고 앉아서 밤을 지새운적이 한두밤이 아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보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호르몬분비가 잘 안되여 한창 키가 클 나이인데도 크지 못해 지금도 겨우 난쟁이나 면한 체구이다. 아, 엄마가 있었으면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겠는데. 엄마가 있었으면 당신이 이불을 못덮어도 나에게는 꼭 두툼한 새 이불을 덮게 했을것이다.
비록 아버지가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한테 정이 없어서인지 너무도 데면데면하고 몰인정하여 이런 자세한 고통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없으니 성년이 되여 교육사업을 할 때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입맛이 떨어져 입술이 말라터질듯 까칠까칠해도 누가 살뜰히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힘든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때론 굶고 한두개의 과자로 끼니를 에때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른봄 반찬이 너무 귀할 때는 (그때는 가난한 60년대 초) 점심밥을 싸가지고 갈 반찬이 없어서 마른 고추를 반찬으로 했다. 그것을 입에 넣고 씹노라면 무섭게 혀바닥을 자극하여 매운 김에 모래알 같은 밥을 넘길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엎친데 덮치기로 키가 작은데다 약골이 되여 장가가기 힘들었다. 선보러 가면 모두가 퇴짜를 놓는 원인이 바람에 날려갈듯한 약골이라는것이다.
엄마가 없으면 자식들은 결혼에도 지장을 많이 받는다. 나는 60년대에 30이 다되였어야 장가를 갔는데 솔직히 엄마만 곁에 있었더면 좀더 일찍 마음에 드는 대상을 골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따금 해본다.
가정에서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엄마가 없음으로 하여) 웬만하면 참고 견디고 살아야 했으니 이 역시 엄마의 존재와 가치가 나에게 준 피의 교훈이라 하겠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애정이라는 이 청신한 에너지를 배부르게 흡수하지 못하고 늘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심신에 병이 들기 마련이다. 엄마의 헌신적인 노력과 숭고한 령혼이 더욱 큰 사랑을 낳아 건실한 인간을 만드는데 그런 원예사가 곁에 없으니 어떻게 꽃씨앗이 튼튼하게 자랄수 있으랴.
가정의 해볕은 엄마의 미소에서 넉넉해진다. 엄마가 없으니 우리 형제들은 자애를 배우지 못하여 늘 불안과 우울속에서 살았기에 가슴이 넓고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크지 못했다.
엄마는 사랑을 만들뿐만아니라 사랑을 가르쳐주는 최초의 스승이다. 스승이 없이 제자들이 어떻게 사랑의 지혜와 능력을 배울수 있겠는가.
가정의 평화는 대부분 엄마가 심고 키우며 가꾸고 지킨다. 엄마는 주요한 변수가 된다. 물론 아버지의 작용을 홀시하는것은 아니다. 엄마가 곁에 없었기에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모든 사랑과 관용은 대부분 엄마께서 몸으로 행동으로 가르치는것이다. 엄한 교양과 옳바른 례절을 배우지 못하여 저도 모르게 이따금 버릇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할 때 이것이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손실이 아닌가싶다. 단순히 먹이고 입히고 자래우는것도 사랑이지만 사랑하며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엄마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교양의 샘물이다.
물론 모든 엄마가 다 사랑을 배워주는것은 아니다. 비록 엄마가 곁에 있다 해도 사랑을 가르쳐주지 못하여《에밀레》 자식이 화를 입게 되는 슬프고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것이라 생각한다.(아버지에 비교해서 말이다.)
엄마의 존재는 늙고 병들어 누워있어도 의연히 가정에서 귀중한 존재이다. 한 불효자가 나에게 진솔한 고백을 하기를 엄마가 장기간 반신불수로 누워계시기에 귀찮아서 어서 세상을 떠버렸으면 하고 바랬는데 정작 세상을 뜨고 엄마께서 계시지 않으니 집이 갑자기 텅빈것 같더란다. 그러면서 설사 누워계신다 해도 가정에는 엄마가 계셔야 바람벽에 기대인듯 믿음이 있게 된다는것이였다. 이젠 없지른 물이라며 평소의 불효를 그토록 후회하는것이였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너무 무시해서는 안된다. 엄마가 주추돌이라면 아버지는 그우에 세운 기둥과 같은 존재이다. 기둥이 세워져야 비로소 집을 짓게 되는것이 아닌가. 그러나 가정엔 그래도 엄마가 있어야 한다. 근로와 인내와 사랑과 흉금으로 식솔을 어우르고 보듬어주는 조용하지만 자상하고 소박하지만 웅심깊은 엄마의 가슴이 없다면 밖에 나가 일을 저지르고 들어와도 누가 따뜻이 위안해줄것인가.
혹시 먼 길을 떠난다 해도 누가 제일 자식의 안위를 근심하고 걱정하는가. 어릴 때 엄마의 등에 업혀본 사람들은 평생 기억할것이다. 바람 세찬 날 엄마의 등이 얼마나 큰 바람막이가 되는가를. 그 등에 업히면 얼마나 편안하고 미덥던가! 아버지의 엄격함과 엄마의 자상함이 잘 결합된 가정을 우리는 리상적인 가정이라 할것이다. 이런 가정이면 더욱 좋고 설사 아버지가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인품이 모자라더라도 좋은 엄마만 있으면 리상적인 가정이 될수도 있다.
이제 다 같은 부모인데도 엄마를 더 따르는 리유를 알만하겠다. 항상 가슴을 열어놓고 그 넓은 가슴에 자식을 심어 키우며 자식에게 모든것을 다 바치는 엄마는 《녀인은 약해도 엄마는 강한》 부류에 속하는 녀자들이다. 아마 자식들더러 막부득이한 경우에 엄마와 아버지중 누구를 선택하려는가 물으면 모르긴 해도 대부분 엄마를 선택하겠다 할것이다. 이는 다 같은 부모로써 아버지의 슬픔이기는 하지만 어찌하랴. 자식들한테는 그 누구보다 엄마가 제일 귀중하고 필요되는것을. 나도 자식들한테 아버지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 가정엔 엄마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엄마를 더 따르고 생각해주라고 솔직히 말한다.
엄마는 흙이고 온상이다. 자식의 수양과 덕성이 많이는 엄마에게서 유전된다. 약하지만 강한 엄마의 존재, 《작지》만 큰 엄마의 가치, 엄마의 사랑이 없으면 착하고 옳바른 인간으로 거듭나기 쉽지 않다. 특히 딸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딸을 보려면 그의 엄마를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엄마가 현숙해야 자식도 현숙하다. 그래서 남자들이 안해를 맞을 때 인물도 보지만 그보다 지혜롭고 교양 있는 녀자를 맞아들이고싶어한다. 그것은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이다.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세번 이사를 간 맹자의 어머니, 그리고 한석봉의 어머니… 세계의 걸출한 명인들과 인재들이 배출된 리유중의 하나가 엄마의 영향과 작용이 컸기때문이다. 가정에서 엄마가 잘못하면 그 멀리 후손들한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나는 며칠전 출가한 딸애한테 처음으로 아버지로서 교훈적인 전화를 했다. 이제 엄마가 되였으니 꼭 노력하여 현숙하면서도 강하며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만들어 사랑을 가르칠줄 아는 능력 있고 교양 있는 엄마가 되라고. 그래야 자식이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수 있다고 가르쳤다. 일거수일투족― 엄마의 행동이 아버지보다 더 가까이 더 일상적으로 아이한테 다가서기에 그 누구보다 엄마가 본보기로 된다.
지금껏 많은 가정들이 혼란을 거듭하던 끝에 파렬까지 되는 리유의 하나가 아버지의 문제도 있겠지만 엄마 의 책임이 크다. 요즈음 우리 민족의 가정파괴의 문제점이 어쩌면 엄마의 역할이 하강된것이 아닌가싶다. 물론 남자들이 제 구실을 못해 생기는 련쇄반응이라 하지만 확실히 조선족 엄마들의 인간적인 자질이 도시진출과 해외나들이로 하여 많이 색바래지고있지 않는가. 하여 엄마를 잃은 많은 자식들이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사막 같이 허허로운 고통을 감내하고있다. 바라건데《에밀레》하는 뼈저린 하소연과 목갈린 분노를 자식들로부터 받지 않게 엄마다운 처신을 잘해야 할것이다. 녀성이 잘되여야 민족도 잘된다는 말이 이제 절실할 때다. 엄마는 분명 최초의 스승이고 또 마지막 스승이다. 엄마의 소질이자 자식의 소질이고 자식의 소질이자 민족의 소질이거늘 엄마의 존엄과 가치를 더더욱 피부로 감안해야겠다.
2007년 1월 10일
연변문학 2007년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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