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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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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호가장전투
2014년 02월 01일 15시 27분  조회:7983  추천:0  작성자: 김성룡

항일전쟁시기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진출한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만악의 일제와 피흘리며 싸웠다. 그들의 항쟁은 중국관내 조선인 반일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한페지로 엮어지고 있다. 1941년말에 있었던 호가장전투는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의 하나였다.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 대부분 대원들은 적후에서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하려는 념원을 안고 화북으로 진출해 화북지대를 편성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용사들은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선전공작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대적공작과 민중선전을 진행하던 조선의용대는 호가장 마을에서 뜻하지 않게 적의 공격을 받아 혈전을 치르게 되였다.

석가장에서 주문빈렬사의 동상이 모셔진 화북렬사릉원을 보고나서 2003년 10월21일 오후 답사팀은 유명한 호가장전투가 있었던 원씨현(元氏縣) 호가장으로 출발하였다. 원씨현 현성을 거쳐가려면 길을 많이 에돌아 가야했기때문에 차는 곧추 호가장 마을로 달렸다. 석가장시를 벗어나 근 한시간정도 달리니 낮은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태항산의 여맥인 이곳 산들은 대체적으로 높지 않았지만 산줄기와 언덕이 많았다. 산에는 단풍이 들어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이따금 산기슭을 따라 오붓한 마을들이 보였다. 30여분 더 가니 산간에 위치한 호가장 마을이 나타났다.

산세를 타고 가옥들이 줄지어있었는데 집들은 모두 지붕이 평평한것이 특징이였다. 집집마다 지붕에 옥수수이삭과 옥수수대를 말리고있었다. 마을 바른편 언덕에는 감나무들이 많았다. 감을 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할아버지가 사닥다리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면 할머니는 밑에서 그것을 바구니에 담았다. 한없이 정적한 산간 마을, 그림같이 아름다운 고장이였다.

하북성 석가장시 원씨현 호가장마을

감따는 늙은 량주

마을입구

호가장 촌민위원회

 마을 어귀에서 곡식을 말리는 로인에게 물어 촌주임을 찾아갔다. 촌정부에 가보니 사무를 보는 사람은 없었고 어린아이 하나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있었다.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촌의 호전증(胡栓增 1945년생)서기를 만났다. 호전증서기는 우리가 조선의용대의 호가장전투에 관련해 알아보려고 왔다고 하자 선뜩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그는 1995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인 로인 분과 그들 자녀들이 이 마을에 찾아 온적이 있다고하였다.

호가장 마을은 아득히 먼 수(隋) 나라 때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호씨 성을 가진 한 관리가 전란을 피해 이곳에 오게 되였다. 그후 그 관리의 가족을 중심으로 인가(人家)가 점차 많아지면서 드디어 마을이 형성되였다. 900여명 인구를 가진 마을은 현재 200여 세대가 살고있는데 모두 성이 호씨이다. 마을 청장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고 마을에는 로인과 아이뿐이였다. 마을 뒤쪽에는 호가장소학교가 있었다. 낡은 교실에서 수십명 어린이들이 공부하고있었다.

소학교를 지나 마을 뒤에 이르니 골짜기 너머 뒷산으로 향한 오솔길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조선의용대가 철거하던 전적지였다.

호전증서기는 오솔길을 가리키면서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 길을 따라 뒤산으로 철수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마을 로인에게서 당시 전투상황을 조금 들었다면서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룡팔채(龍八寨)라는 곳이 있는데 의용대 대원들은 그쪽으로 피신하였다고 하였다.

가을을 마친 호가장 마을

렬악한 조건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있는 호가장마을 어린이들

조선의용대의 호가장 전투에 대해 설명해주는 호전증서기(오른쪽 두번째)

조선의용대 전사들이 철수하였다는 마을 뒷길

팔로군이 통제하고있는 화북지역에 모인 조선의용대는 1941년에 화북지대로 편성되여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서 투쟁하기 시작하였다. 화북지대의 지대장은 박효삼이고 부지대장은 리익성이였으며 김학무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새롭게 편성된 화북지대는 무장선전활동과 간부양성, 적후 조직활동을 비롯한 3대 방침을 확정하였다. 특히 화북지대는 무장선전 활동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전민의 항전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1941년에 들어와 중국의 항일전쟁은 대치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의 인민들을 항일에로 이끌고 일본군을 와해하며 화북에 있는 조선인을 쟁취하기 위해 본격적인 무장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화북지대는 3개대로 나뉘여 평한철도(平漢鐵道 북평으로부터 무한까지)연선에서 활동하였다. 제1대는 대장 리익성과 지도원 진한중(陳漢中)의 인솔하에 하북성 한단(邯鄲)이남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는 대장 김세광(金世光)의 인솔하에 석가장 부근의 원씨, 찬황(贊皇), 림성(臨城) 부근에서 활동하였으며 제3대는 대장 왕자인(원명 최인 崔仁), 지도원 박무(朴茂)의 인솔하에 석가장 이남 한단 이북의 사하(沙河), 형대(刑臺), 무안(武安)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대원들은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좌담회, 련환회, 군중집회를 가지고 그들의 항일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적의 진지에 접근해 적군을 와해시키는 함화(咸話)를 진행하였다.

 

(권립교수) “1941년 12월에 있은 호가장 전투. 그날 화북지대 제2대 대장 김세일 동지는 전사 스물아홉명을 거느리고 호가장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선전사업을 했고 항일조직사업을 도왔습니다다.”

 

김세광이 이끄는 화북지대 제2대는 1941년 11월 중순경에 무장선전 활동을 개시하였다. 20여명 대원들은 의용대 총부 소재지인 산서성 동욕진(桐峪鎭)을 출발해 원씨현에 이르렀다. 그들은 석가장 지역 각지 정세를 살피고 그곳 군중들을 동원할 선전물을 준비해가지고 길을 떠났다. 원씨현에 도착한 그들은 현지의 항일무장부대인 원씨현 독립영(獨立營)의 환영을 받았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원씨, 북영(北營), 왕가장(王家莊) 등지를 다니며 좌담회와 군중집회를 가졌고 또 무장(武莊)의 적 보루에 접근하여 대적 함화를 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각각 자신의 역할을 발휘하였다. 일부 대원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도 하고 노래도 배워주면서 군중집회를 가졌다. 이때면 다른 대원들은 일제를 반대하는 구호를 바람벽에 써놓거나 삐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위험한것은 대적 함화였다. 의용대 대원들은 적진과 50킬로메터 거리를 두고 메가폰으로 반전선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류창한 일본말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죄행을 폭로하면서 죄악의 전쟁을 멈출것을 권고하였다. 함화는 대체로 밤에 진행하기때문에 적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일반적으로 출동하지 않았다. 이처럼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제2대 대원들은 12월 11일, 찬황으로 가던 도중 호가장 마을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원씨현 경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제2대는 12월 11일 첫 전투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날 새벽 일본군 30여명과 괴뢰군 40여명이 선옹채(仙翁寨)를 습격하였다. 적정을 발견한 전투원들은 신속히 반격에 나섰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독립영 전사들과 함께 유리한 지세를 점하고 일제히 사격하였다. 뜻하지 않은 반격을 받고 적들은 많은 시신을 남기고 도주하였다. 선옹채 전투에서 의용대와 독립영은 사상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100여명의 적들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선옹채 전투가 있은 다음 조선의용대 제2대는 서안사변 기념일인 12월 12일에 호가장 마을에서 선전활동을 진행하기 위해 호가장으로 갔다. 선옹채에서 호가장 마을까지는 산길로 30여분 거리였다. 밤이 깊어지자 대원 고상철(高相喆)이 보초를 서고 기타 대원들은 호가장 마을의 큰집을 빌어 투숙하였다.

(권립교수) “그날 밤, 그들은 수백명의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였습니다. 동틀 무렵부터 피타는 포위망 탈출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마을 밖에서 뜻하지 않은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대원들은 신속히 일어나 집 앞에 집합하였다. 제1분대 분대장인 조렬광(趙烈光)은 대원 장례신(張禮信)에게 적정을 살피도록 명령하고 기타 대원들과 함께 탈출계획을 연구하였다.

호가장마을에 살던 괴뢰군 가족이 의용대의 상황을 적에게 보고했던것이다. 적은 찬황, 획록(獲鹿), 정형(井陘)의 200명 병졸을 끌어 모아 3면으로 마을을 포위하고있었다. 부근에서 활동하던 팔로군 독립영 1련이 경계하던중 적과 접전하게 되였다. 독립영은 호가장 마을의 의용대를 지원하려했지만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다.

적정보고를 받은 김세일대장은 마을북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손일봉(孫一峰), 박철동(朴喆東), 김학철(金學哲)등과 함께 엄호를 맡았다. 대부분 대원들은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엄호를 맡은 대원들은 부상을 입고 뒤에 처졌다.

(권립교수) “손일봉은 탄알이 다 떨어지고 수류탄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군 8명이 산굽이를 돌며 그를 향해 덮쳐들고있었습니다. 손일봉은 비호같이 덮쳐들어 일본 소대장 한놈을 끌어안고 옆에 있는 바위로 들이쳤습니다. 수류탄의 폭음과 함께 손일봉은 일본군 8명을 저승에 보내며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손일봉은 탄약이 떨어지자 수류탄을 들고 일본군 소대장에게 덮쳤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손일봉은 7, 8명 놈들과 함께 쓰려졌다. 전우가 장렬히 희생되는것을 본 박철동은 계속 적들과 육박전을 치르다가 적의 총검에 찔려 희생되였다. 이들과 함께 엄호를 맡았던 한청도(韓淸道) 역시 적들과 싸우다 희생되였다. 그는 총탄이 떨어지자 원쑤들과 함께 죽을것을 각오하고 수류탄을 터쳤다.

(권립교수) “스물여섯살의 전사 박철동은 일본군 두놈과 육박하여 두놈을 쓸어눕혔지만 온몸이 피투성이 되였고 맨 주먹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창을 꼬나든 일본놈이 또 덮쳐들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내밀고 ‘찔러라, 강도놈아!’하고 웨치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 의용대 전사 네명이 희생되고 많은 부상자를 났습니다. 대장 김세일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김학철 선생도 이 전투에서 체포되여 일본감옥으로 압송되였습니다.”

기타 대원들은 계속 접전하면서 산기슭 오솔길을 따라 독립영이 있는 룡팔채쪽으로 퇴각하였다.

호가장전투에 직접 참가한 장례신선생은 후날 전투 경과와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세대원의 희생경과를 회억하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후에 중국 조선족 문단의 거장으로 된 김학철선생도 바로 호가장전투에서 다리에 총탄을 맞고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60여년전 피비린내와 화약내를 확확 풍긴 처절한 전투가있었던 호가장마을은 지금 적막에 잠겨있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에서 겪은 수많은 대규모 전투에 비하면 호가장전투는 큰 싸움이 아니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를 소멸하였던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를 비롯한 조선의용대 전사들의 영웅적 행동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켜주었다. 그들은 실제행동으로 조선의용대는 수적으로는 적지만 철 같은 대오이고 영웅적 대오이며 조선인민은 두려움 모르는 불굴의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빛나는 투쟁정신과 영웅적 행동은 널리 전해지면서 항쟁에 나선 천백만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이곳에서는 옥수수를 지붕에 말린다

호가장 마을의 낡은 담벽과 대문

의용대 전사들이 수류탄을 터쳐 죽음으로 왜놈들을 소멸했던 탈곡장 

 

한국에서 찾아온 가족들이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렬사의 묘소를 참배하고있다

 

《불멸의 발자취》김성룡저 민족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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