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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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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창설지
2014년 03월 06일 12시 39분  조회:5356  추천:0  작성자: 김성룡

1938년 일본침략자들이 수십만 대군을 몰아 무한을 포위공격할 때 포연이 자욱한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조선혁명가들은 2년 남짓한 동안 국민당 통치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과 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전과 부패한 국민당 통치는 조선혁명가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1941년부터 조선의용대 주력을 중심으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북상하여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왔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 주력은 팔로군과 함께 어깨겯고 싸우면서 새로운 당을 창립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하북성 섭현 하남점진은 1943년이후 조선혁명가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이에 앞써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는 하북성 섭현 중원향과 태항산 중심부에 위치한 좌권현에서 활동하였다.

섭현 하남점진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답사팀은 2003년 10월 23일 오후에는 중원향 중원촌으로 향했다.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에서 활발한 대적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화북에 있던 많은 조선 이주민들이 조선인 항일부대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수많은 열혈 조선청년들과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병사들은 기회를 타서 조선의용대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신속히 장대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직을 재정비할 중요한 회의를 개최하려했다. 그러나 1942년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대한 일제의 몇차례 토벌로 하여 회의는 7월까지 미루어졌다.

적의 5월 포위토벌을 극복한 조선의용대는 섭현 중원향 중원촌에 집결하였다. 팔로군 포병퇀 퇀장으로있던 무정도 포병부대 창설임무를 완수하고 이 시기 새로운 임무를 맡으러 중원촌에 왔다. 이들은 중원촌에서 조선청년련합회(朝鮮靑年聯合會) 제2차회의를 소집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전신인 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섭현 중원향 중원촌의 일각

마을 입구의 문루



중원촌 62번지, 무정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머물렀던 곳



62번지 주민집, 무정이 머물렀다는 가옥

중원향은 섭현 현성에서 4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향 소재지인 중원촌에는 천여명 인구가 살고있는 작은 마을이였다. 섭현에서 산서성 좌권현(左權縣)으로 통하는 도로가 마을 옆을 지났다. 이따금 마을의 고요를 깨치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농민들은 평지에 조이삭을 말리고있었다.

마을은 조그마한 언덕에 자리잡았는데 우리는 마을 한쪽 귀퉁이에 있는 중원촌 62번지로 찾아갔다. 중원촌 62번지는 커다란 4합원 구조의 건물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이 있었고 정면에 흙집 한채가 보였다. 매우 낡은 2층 건물이였는데 한쪽 구석에 아직 주민이 살고있었다.

리사화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중원촌에 온 무정과 조선청년련합회 요원들은 이곳에 거주하였다. 집주인은 양언군(楊彦軍)이라는 30대 젊은이였다. 양언군의 할아버지 양면환(楊面煥)은 이 집에서 무정과 조선의용대 간부들을 주숙시켰다고 한다. 무정은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현지인들과 가까이 하기위해 현지의 마청산(馬靑山)과 관주로(關柱勞)를 경위원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양면환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양면환로인도 무정은 중원촌에서 훌륭한 군견 한 마리를 길렀고 군견을 리용해 편지를 전하기도 하였다고 생전에 회억하였다 한다.

62번지의 낡은 2층 건물은 수십명이 거주할수있었고 또 수십명 정도의 회의도 소집할만해 보였다. 그러나 리사화로인은 1984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의 간부들이 중원촌을 답사할 때도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는지 마을의 다른 유적지인 원정보사(元定寶寺)에서 열렸는지 분명하게 지적하지 못했다고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열렸다는 사람도 있었고 원정보사에서 열렸다는 사람도 있었다는것이다.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의 재정비를 목적으로 한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는 1942년 7월 14일부터 중원촌에서 열렸다. 각지 분회의 대표들까지 모두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결성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되였다.

(권립교수) "대회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하였습니다. 국민당이 조선의용대 번호를 취소하자 이곳에서 독립적인 조선의용군을 만들었습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도합 천여명이나 되였습니다. 이들은 중공중앙의 호소를 받들고 대생산운동에 참가한 한편 적후사업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대회에서는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국번(蔡國藩 원명 김호 金浩), 김창만, 왕지연, 리유민, 진한중, 리춘암 등 11명을 독립동맹 본부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고 김두봉을 집행위원회 주임으로 선거하였다.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박효삼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대장을 맡았다. 조선의용군은 1944년초 주력이 연안으로 이동할 때까지 줄곧 태항산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화북지대는 조선의용대 대원, 각지에서 온 학생, 소상인, 류랑자, 일본군 통역관 종사자들을 교육 흡수해 근 200여명에 달했다.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각대로 나누어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항일유격구에서 활동하였다.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가장 많이 집중되였고 산동이나 섬서, 화중에도 흩어져 활동하였다.

 

중원촌의 원정보사 옛터,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 소집지

 밖에서 본 원정보사 옛 담

진동남지구는 태항산지역 팔로군 전방총사령부와 129사 사령부가 위치한 곳으로서 중국 팔로군의 활동중심지이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조선혁명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집중되여 있었다. 초기에는 진광화와 윤세주가 이곳 조선혁명활동을 이끌었고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동맹의 주요간부들이 책임졌다. 진동남지구는 독립동맹의 총부 소재지이고 의용군의 중심지로서 줄곧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1942년 8월, 리익성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 13명 대원을 거느리고 진찰기지구로 진출하였다. 이곳은 팔로군 115사가 개척한 항일근거지로서 산서성 동북부의 오대산을 중심으로 산서북부, 차할, 하북 북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이에 앞써 조선혁명가 림평(林平), 채국번, 고생호(高生鎬), 김무가 이곳에서 활동하고있었다. 이들은 1941년 12월 10일에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리익성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진찰기에 온후 군대는 리익성이 책임지고 적후공작은 채국번이 맡았으며 재편성한 조선독립동맹 진찰기 분맹은 공명우가 책임졌다. 진찰기지구는 조선인이 많았던 북경, 천진, 당산, 기동으로 쉽게 진출할수있었고 또 중국 동북이나 조선 국내에 거점을 만들기 편리하였다.

진서북(晉西北)지구는 려량산맥(呂梁山脈)을 중심으로 한 산서성 서북 산지를 말한다. 하룡이 이끄는 팔로군 120사가 이곳 흥현(興縣)에 주둔하면서 섬북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있었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최채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최창익, 허정숙, 최영(崔英)이 진서북에서 활동하고있었다. 그러다가 최창익과 허정숙이 떠났다.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1942년 11월 13일에는 김세광, 문명철, 최채, 최영이 흥현에서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을 창립하였다. 분맹 책임자는 김세광이였고 조직위원을 맡았던 문명철은 팔로군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문명철(1914―1943)은 전라남도 사람으로서 중국에 건너와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그는 호남성 북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국민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41년 그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했고 1942년, 조선독립동맹 진서북 분맹 조직위원을 맡았다. 그는 수차 적후를 넘나들면서 적과 싸웠다. 1943년 4월 14일, 백여명 적에게 포위된 문명철은 두명 중국인 전사와 함께 싸우다가 마지막에 수류탄을 터뜨림으로서 적과 함께 죽는 희생을 선택하였다.

연안을 중심으로 한 섬감녕(陝甘寧) 지구에는 일찍부터 조선혁명가들이 많이 모여왔다. 이곳은 태항산 항일근거지 다음으로 조선혁명가들이 가장 많이 집결된곳이다. 항일군정대학과 동북간부훈련반(東北幹部訓練班)에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그리고 팔로군 359려단에는 주덕해(朱德海)와 리권무(李權武)가 있었다. 정률성과 주덕해가 선후로 섬감녕 지구의 조선청년련합회 지회를 책임졌다. 그러다가 1942년 태항산으로부터 김두봉, 한빈, 윤치평(尹治平), 조렬광, 권혁(權赫 일본녀성), 연군(燕軍) 등이 연안에 도착하여 1943년 1월 10일 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을 창립하였다.

항일전쟁후 팔로군 115사는 부분적 유격대를 산동에 파견하여 산동 각지에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주혁(朱革)과 로민(魯民)을 산동에 파견해 조선인 쟁취활동을 진행하게 하였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1대 대원들이 산동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주혁이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 주석을 맡았고 리명이 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로민은 교동(膠東)분맹을 세워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에 50여명 맹원을 확보하였다.

1943년, 하북성 창려현(昌黎縣) 철남에서 조선독립동맹 기열료 분맹이 창립되였다. 일찍부터 기동에서 활동하던 리대성(李大成)이 조직위원을 맡고 진국화(陳國華)가 선전위원을 맡았으며 주연(朱然)이 정치주임을 맡았다. 책임자는 진찰기 분맹의 군 책임자였던 리익성으로 나타나고있다. 한편 산서성 태악산(太岳山) 지역에는 리옥근, 관건, 조소경(趙少卿), 하앙천(河仰天)이 선후로 팔로군 적군공작부(敵軍工作部)에서 활동하였다.

팔로군 통제지역뿐만 아니라 신사군 활동지역에도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있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공산당이 령도하는 신사군은 장강 이남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환남사변(晥南事變)을 겪었지만 신사군은 계속 강소, 절강, 안휘를 비롯한 화중지역에서 장대해졌다. 1944년 1월, 홍택호(洪澤湖) 부근에서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과 조선의용군 화중지대가 성립되였다. 독립동맹 본부에서 파견한 리성호(李成鎬), 김윤덕(金潤德), 손달(孫達)이 주요책임자로 되였다.

 

하북 로태농장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가 태항산 조선의용군 군정학교를 다닌 항일간부 김응삼과 강재렬



북편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항일간부 최명세



상해에서 강소북부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항일간부 김현대



동만에서 관내에 가서 조선의용군에 입대한 항일간부 최강

벽에 대적구호를 쓰고있는 조선의용군 전사

태항산에서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창설은 중국 관내조선인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조선독립동맹은 각지에 지하투쟁 일군을 파견하여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단합시켰으며 중국공산당과 적극 협력하여 일제와의 최후승리를 준비해나갔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소재한 연안뿐만 아니라 팔로군이 통제하고있는 광활한 적후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으며 강남의 신사군에도 간부들을 파견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장병들은 생산운동에 적극 참가하는 동시에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적과 싸웠으며 무장선전, 정보수집, 포로교양을 진행함으로써 조선의용군의 력량을 크게 확대시켜나갔고 또한 중국항일전쟁에 큰 기여를 하였다. 

 

 

(권립교수) "화북조선청년 련합회는 중공중앙에서 무정동지, 진광화, 리유민 등을 태항산근거지에 파견하여 1941년 1월 10일에 건립한 단체입니다. 회장은 무정이 맡고 조직부장은 리유민이 선출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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