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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국민혁명군의 동정과 양림
2007년 07월 16일 19시 18분  조회:4070  추천:49  작성자: 김성룡

  국공합작이 이루어짐에 따라 중국혁명의 고조가 나타났지만 이시기 중국은 거듭되는 혼란을 겪고있었다. 도처에 크고작은 군벌들이 나타나 자기의 지반을 확대하고 세력을 확충하기에 열벌하였다.

  광동의 혁명정세에 당황해난 제국주의와 지주, 매판 자산계급은 봉건 군벌들을 매수하여 광동정부를 공격하게 하였고 비법 상인단체를 부축여 무장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광동의 불안정 국면을 수습하고 더욱 큰 혁명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손중산과 국민당은 혁명군 확건에 진력하였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4기까지 도합 4천 9백여명이 졸업했다. 국민당은 이들을 토대로 각지에서 병사들을 모집해 국민당 군대를 확건하기 시작했는데 1924년 10월까지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한 교도단(教导团)이 창건되였다. 교도단은 불법상인들의 총기 9천여자루를 몰수해 무장하였고 쏘련으로부터 중무기를 구입하였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광동과 광서의 여러 불법민간 단체와 군벌, 반란군을 진압하는 작전에서 황포군관학교 사생들은 지대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의 군대도 부단히 확건되여 십여만 정규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광동을 중심으로 국민혁명이 고조되고있을 때 중국 북방에서는 두 개 군벌간의 큰 혼전이 진행되였다. 장작림(张作霖)의 봉계(奉系)군벌과 조곤(曹锟)의 직계(直系)군벌이 북방통제권을 위해 치렬한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두 군벌이 혼전을 거듭하고있을 때 서북에 웅거해있던 풍옥상(冯玉祥)이 봉계군벌을 도와줌으로써 직계군벌이 대패하고 조곤이 감금되였다. 1924년 겨울, 직봉대전의 승리를 이룩한 장작림, 풍옥상, 단기서(段祺瑞)는 손중산에게 전보를 보내 함께 국가대사를 의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손중산은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손중산이 북경으로 떠난 틈을 타 진형명(陈炯明)이 7만명에 달하는 군사를 끌어모아 광주로 공격해 왔다. 국민정부는 대원수부 철갑차대와 황포군관학교 두 개 교도단, 허숭지(许崇智)의 월군(粤军)을 주력으로 진형명을 진압하는 제1차 동정을 시작하였다.

  1925년 3월, 황포군관학교 학생대대를 선봉으로 한 동정군 주력은 혜동(惠东)으로 진격하였다. 동정군의 선봉을 맡은 두 개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에는 많은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이 포함 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혁명가들도 있었다.

 (권립교수) 광동혁명정부가 제1차 동정을 할때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 제4대대 대장신분으로 2백여명 학원을 거느리고 동정에 참가하였습니다. 해풍과 륙풍, 면호일대에서 진형명의 부대와 접전해 크나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광동혁명정부의 동정에 참가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림(杨林)과 리빈(李彬)을 꼽을수 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학생대대의 교관이였던 양림은 학원들을 이끌고 동정군의 선봉으로 나섰으며 황포군교 3기 졸업생이며 4기 학생대대 구대장이였던 리빈도 교도단에 합류해 진형명 반란군과 싸웠다. 그리고 양림의 련인이였던 리추악(李秋岳)도 이시기 광주에서 정치부 동정선전총대에서 사업하면서 선동공작에 적극 참가하였다.

  동정군은 선후로 해풍(海丰), 게양(揭阳), 조안(潮安)을 공략하였지만 좌익을 맡은 양희민(杨希闵)의 운남 군과 류진환(刘震寰)의 광서 군이 소극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동정군 주력의 배후가 적에게 로출되였다. 

  동정군의 위급한 상황을 만구하기 위해 주은래와 쏘련 군사고문은 장개석을 도와 주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교도단의 천여명 전사들은 만여명에 적들을 항격하였다. 교도단이 적의 주력과 치렬한 접전을 진행하고있을 때 동정군의 주력이 적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동정군은 면호(棉湖) 부근에서 진형명의 주력군을 소멸함으로써 일차 동정(东征)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해 냈다.

  1925년 3월 12일 북상한 손중산이 북경에서 병으로 서거한 후 국민당의 실권은 왕정위와 장개석의 손에 장악되였다. 광주 국민정부가 혼잡을 거듭하고있을 때 제국주의와 광서군벌의 지원을 받은 진형명은 다시 군대를 끌어모아 광주로 공격해 왔다. 그리하여 국민정부는 1925년 9월 28일 제2차 동정을 시작하였다. 장개석이 동정군 총지휘를 맡았고 주은래가 동정군 총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이때 국민혁명군은 재편성을 거쳐 전투력이 강하고 비교적 정규화된 5개 군으로 조직되였다. 동정군은 광주를 위협하는 양희민운남군과 류진환의 광서군을 진압하여 후환을 제거한 후 다시 진형명이 둥지를 틀고있는 동강(东江)지역의 문호인 혜주(惠州)를 공격하였다. 쏘련에서 지원한 비행기와 야전포까지 동원된 전투에서 혁명군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혜주를 성공적으로 공략하였다.    

 동정군의 공산당원들의 적극적인 정치선전과 성항(省港)파업 로동자와 농민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혁명군 각 부대는 파죽지세로 진형명의 잔여부대를 광동에서 몰아냈다.

  양희민과 류진환의 반란을 진압하고 두 차례 동정을 진행하는 전투에서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희생되였다. 광주시 장주도 평강(平冈)에는 <동정진망렬사묘(东征阵亡烈士墓)>가 있다. 황포군관학교로 가는 장주도 나루터에 위치한 렬사묘 정문은 거대한 기념아치로 되었다. 흰 대리석으로 된 아치형 문을 지나 들어가니 가파른 언덕에 여러 가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니 푸른 잔디밭과 해묵은 용(榕)나무가 우거진 정원에는 학생군묘(群墓), 소장묘(少将墓), 진렬관(陈列馆)이 있었다. 답사팀은 진렬관에서 조선혁명가들의 이름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유감스럽게 희생자들의 적관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양희민, 류진환 진압에서 희생된 최영(崔瑛)렬사와 오준걸(吴俊杰)렬사의 이름을 보아서는 조선민족인 듯 해 보였지만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3기 인명책에서도 이들 이름을 찾을수 없어 단언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당시 황포군관학교에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고 이들은 또한 교도단과 함께 공정군의 선봉으로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동정진망렬사묘>에도 분명 조선청년 희생자들의 고혼이 묻혀있을 것이다.

  광동에서 혁명하는 가운데서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원들을 주로하는 혁명군대가 있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혁명군대를 만들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독립단(独立团) 건립에 힘썼다. 이시기 국민당도 군대개편에 열중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4군 제12사 산하에 세 개 대대가 있었다. 그중 34대대를 개편하게 되었는데 공산당은 이 대대를 군부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는 독립단으로 만들었다. 엽정(叶挺)이 단장을 맡았다.

  독립단은 대원수부(大元帅府)의 철갑차대 전원과 황포군관학교의 부분적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주도로 하여 광동, 광서, 호남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1924년 손중산의 동의를 거쳐 조직된 대원수부 철갑차대는 주은래의 지도하에 황포군관학교 1기 졸업생인 주사제(周士弟)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였다. 그리하여 이 부대는 줄곧 중국 공산당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아왔다.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적지 않은 공산당원들을 독립단에 보냈다. 이들은 독립단의 영장, 련장, 패장으로 배치되였다.

  1925년 11월 광동성 조경(肇庆)에서 약 2천명 병력을 가진 독립단이 조직되였다. 엽정을 비롯해 각급 지휘원은 대부분 공산당원이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주은래의 파견을 받은 조선혁명가 양림이 이 부대의 제3영 영장을 맡았다.

  공화국창건후 인민해방군 상장(上将) 계급을 가진 주사제는 <주사제회억록>에서 양림에 대해 이렇게 회억하고 있다.  

  “양녕(杨宁)은 또한 삐스티(毕士悌)라고 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에서 제3기 학생대 제4대대 대장을 맡고있었다. 1926년 5월 독립단이 광동에서 북벌을 시작할 때 당에서는 그를 다른 곳에 가서 사업하도록 배치하였다.”

  주사제가 회억하는 양녕이 바로 조선혁명가 양림이다.

  양림(1898--1936)은 1898년 조선 평안북도의 한 애국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김훈(金勋)이였고 사업 수요로 양주평, 양녕, 삐스티, 주동무, 양림 등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따라 3.1운동에 참가한 양림은 아버지가 일제 놈들에게 살해되자 1919년 늦가을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县) 합니하(哈泥河)로 갔다. 그는 통화에서 신흥무관학교(新兴武官学校)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웠다.

  1920년 5월,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양림은 왕청현(汪清县) 서대파(西大坡) 반일무관학교에서 사업하였다.

   양림이 중국 동북에서 반일활동에 참가하고 적극적으로 군사지식을 배울 때 일제는 중국 동북에 있는 반일 유격대를 주시하게 되었다. 1920년 10월 일본침략자들은 훈춘에서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동북에 출병하였다. 놈들은 마적떼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상인과 경찰국을 습격하게 하고는 이를 구실로 출병했던 것이다. 당시 동북을 차지하고있던 봉계군벌 두목 장작림은 일본과 타협하면서 일본의 출병에 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일본침략자들은 연변지역에 들어와 반일 유격대를 추적하면서 조선족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신년 참변>이다.

  동북에서 힘을 키우고있던 조선인 반일 유격대들은 이때 서로 단결하여 일제침략군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김좌진을 비롯한 동북지역 반일유격부대가 길림성 연변지역에 집중되였던 것이다. 양림은 유격대를 따라 화룡현(和龙县) 청산리 백운평(白云坪)에 매복해 있었다. 반일유격대가 이미 준비하고있는 줄을 모르고 이곳저곳 방화하면서 추적해 오던 일본침략자들은 청산리에서 유격대의 매복에 들었다. 양림은 한 개 중대의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은 일본침략군은 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으며 반일유격대의 청산리대첩을 이룩하여 전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가 있은 후 일제는 더욱 많은 군대를 끌어모아 토벌해 왔다. 게다가 유격대 내부에서도 여러파벌로 갈라져 언쟁이 계속되였다. 반일 유격대는 드디어 우세한 적들에게 밀려 로씨야 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단순히 이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조직력을 더욱 강화하고 더욱 우세한 병력을 키워야 했다. 유격투쟁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총화하면서 양림은 중국 관내로 향했다. 그는 더욱 선진적인 군사기능을 배우고 민족해방의 진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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