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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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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중국항전의 최전선에서 싸운 김자렬과 강석훈
2008년 04월 11일 12시 59분  조회:5025  추천:62  작성자: 김성룡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1937 7 7 로구교사변(溝橋事變)으로 시작된다. 로구교사변전 비록 동북과 대만, 하북 등지가 일제의 통치와 예속을 받았지만 반동군벌과 국민당의 타협정책으로 하여 전민의 항일전은 시작되지 않았다. 1936 12 12, 국민당의 애국장령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 서안사변(西安事變) 일으켜 중국은 재차 국공합작의 국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침략군이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대거 침략을 시작하자 중국 전민의 항일전이 개시되였던것이다. 그러므로 중국력사는 로구교사변으로부터 1945 일본의 항복까지를 항일전쟁시기로 규명하고있다.

 

(권립 교수) 항일전쟁시기는 7.7사변부터 45 8월에 일제가 투항하고 연안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동북을 향해 진군할때까지입니다. 시기는 그대로 8년간의 항일구국전쟁시기이고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관건적인 력사기입니다. 5천년 문명을 갖고있던 중국이 일제의 예속하에 식민지로 되느냐 아니면 독립을 고수하느냐 하는 력사시기입니다. 이시기에 중공과 전국여러민족인민들의 노력에 의하여 2 국공합작이 실현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민당군대는 정면전장에서 싸우게 되었고 중공의 령도하의 섬북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남방의 홍군은 신편 4군으로 편성되여 적후 항일근거지를 개척하고 적후에서 일제와 판가리싸움을 벌였습니다.

 

2004 1 7, 답사팀은 중국 항일전쟁의 전면개시를 의미하는 유적지 로구교로 갔다. 북경시 풍대구(豊臺區) 완평성(宛平城) 위치한 로구교는 중심과 20거리를 두고있다.

로구교는 완평성밖의 영정하(永定河) 놓여있다. 답사팀은 번화한 시가지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30 가량 달려 완평성에 도착하였다. 성루와 성곽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완평성을 지나자 다리 란간에 수많은 돌사자가 줄져있는 로구교가 보였다. 동쪽 다리목에는 로구효월(盧溝曉月)이라는 오랜 비석과 정자가 있었다. 연경(燕京) 8경의 하나로 소문난 비석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썼다는 로구효월 넉자로 하여 유명해졌던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로구교 시가 적혀있었다.

로구효월 비석을 지나 로구교 다리에 올라섰다. 지금은 다리로 사용하지 않고 관광지로 개방하고있었다.

전부 돌과 조각으로 축조된 다리는 800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중국 고대 3 명교(名橋) 자리를 차지한다. 기재에 의하면 1189년부터 축조된 다리는 처음에는 광리교(廣利橋) 부르다가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이 로구하(盧溝河 후에는 영정하)였기때문에 후에 로구교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11 다리 기둥을 가진 로구교의 길이는 260였고 너비는 10 달했다. 다리는 돌로 만들었고 다리 란간에는 정교한 돌사자를 조각하여 놓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돌사자의 머리, , , 밑에 형태가 각이한 작은 돌사자들이 숨어있는것이 보인다. 크고 작은 돌사자가 너무 많기때문에 현지에는 로구교의 돌사자는 헤아릴수 없다는 속어가 있다. 현재 초보적인 통계에 의하면 돌사자가 도합 498개가 남아있다 한다.

바로 아름다운 다리에서 일본침략자들을 저격하는 전투가 시작되였고 국민정부군에 있던 조선인 장교 김자렬(子烈) 강석훈(姜錫勳)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의 초기접전을 치렀던것이다.

1937, 국민당군 29 10 장병이 하북, 차할(察哈爾), 북평, 천진 지역을 수비하고있었다. 당시 북평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은 빈번히 군사연습을 진행하면서 본격적인 중국침략의 구실을 찾고있었다. 7 7, 일본군은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구실로 완평성내로 들어와 수색하려 하였지만 중국군의 거부를 받았다. 그리하여 쌍방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8일부터 일본군은 완평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 새벽, 로구교를 사수하던 중국군이 반격을 시작하여 부근의 적들을 물리쳤다.

일본주둔군은 타협의 환상을 버리지 않는 중국 당국과 계속 담판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북평쪽에 집결시키고 대규모의 공격전을 준비하였다. 국민당은 일본에 사죄하고 사건 조작자를 징벌하며 로구교 주변의 정규군을 철수하는 일본의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어주면서 이른바진덕순(秦德純), 송정(松井) 협정 체결하였다.

사태확대를 두려워하는 국민당 장교들의 심리를 리용해 주력부대를 끌어 모은 일본침략군은 드디어 협정을 찢어버리고 북평, 천진을 전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29군은 우세한 적들과 영용히 싸우다가 철수하였다.

국민정부군의 유명한 항일명장인 장자충(張自忠)부대에는 조선인 장교 김자렬(子烈) 강석훈(姜錫勳) 있었다. 김자렬은 180사단 소장급 참모장으로 있었고 강석훈은 113려단 228 상좌급 부관으로 있었다.

 

(권립 교수) 전국적인 정면항전의 전투가 로구교전투였습니다. 로구교를 지키던 부대가 바로 항일명장 장자충의 29 장병들이였습니다. 여기에는 운남강무학당 12기생이며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나온 김자렬 소장이 있었습니다. 김자렬 장군은 장자충의 명령을 받들고 진공해들어오는 일본군의타격을 안겼습니다.

 

김자렬의 원명은 김정흡이고 호는 동천이며 김세준(世晙)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사람으로서 1913년에 일본으로 가서 도꾜 와세다대학 정치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 리대소를 알게 되였다.

1914 겨울, 구국의 뜻을 품은 김자렬은 홀몸으로 삭풍이 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경에 왔다. 그는 중국말을 익힌 상해에 갔다가 항주(抗州) 절강체육전문학교 3기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선후로 녕파(寧波) 경찰청과 항주시 소방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에 다시 상해에서 조선인보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리범석(李範奭) 비롯한 지사들과 함께 운남강무학당(雲南講武學堂) 12 포병과에 입학하여 군사기술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후 김자렬은 상해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하였고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보았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희망을 국제적 승인과 원조에 기탁하고 혁명군대 양성과 무력투쟁을 중시하지 않는 림시정부에 실망을 느끼고 북상하여 북경, 동북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21 김자렬은 동북의 독립군과 단체들을 통합시킬 뜻을 품고 북경에서 박용만, 신채호, 신숙 지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주비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들은 동북과 관내 각지의 군사단체의 통합을 주장하고 림시정부 불신임안을 채택하고 국민대표대회 소집을 내놓았다. 1923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소집이 이룩되였으나 아무런 결과를 보지 못하자 김자렬은 다시 중국 동북을 주무대로 활동하였다. 그사이 그는 로씨야에 가서 조선독립운동 지원을 요구하였고 조선에 잠입해 폭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4 북경에서앞장이라는 간행물을 창간하고 반일활동경비를 모금하고있던 김자렬은 리대소를 만나 그의 소개로 중국 서북군 장령 풍옥상이 꾸린 장가구(張家口) 국민군간부학교(國民軍幹部學校)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김자렬은 항일사상이 강한 풍옥상을 따라 서북에서 군벌들과 싸웠고 1927 봄에 북벌군과 회합하였다. 그후 풍옥상과 함께 장개석을 반대하는 중원대전에 참가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31, 김자렬은 29 38사의 장자충 부대에 편입되여 려단참모장으로 임명되였으며 후에는 180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장자충장군을 따라 항전의 전투인 로구교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후 대아장(臺兒莊)전투, 서주(徐州)전투에 참가하였고 1940년에는 호북성 조양(棗陽) 남과점(南瓜店)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전투에서 부대 사령관이였던 장자충이 적들에게 포위되여 장렬히 전사하였다.

장자충이 희생된후 김자렬은 일선부대를 떠나 국민당 후근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독립운동을 적극 동조해주었다. 1945, 항일전쟁이 승리하자 조선으로 나가려 북경에 왔지만 가지 않고 1961년에 북경에서 병사하였다.

 

(권립 교수) 유명한 항일장군 장자충의 부대에는 강석훈이라는 연변의 훈춘에서 항일투쟁에 참가한 상좌부관이 있었습니다. 강석훈 상좌는 7.7사변 당시에 전사들을 거느리고 랑방역으로 들이닥친 일제를 요정냈습니다. 1938년에는 산동성의 다섯차례의 전투에 뛰여들어 용맹을 과시했습니다. 3 회전에서 그는 일제에게 타격을 주었다. 강석훈은 일제가 투항할때까지 줄곧 최전선에서 싸웠습니다.

 

강석훈 북경부근의 랑방(廊房) 역에서 장자충 부대의 113려의 228단과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일본침략군과 싸웠다. 그는 1896 조선 종성군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여났다. 중국 연변의 훈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중국 동북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고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시기 그는 조기공산주의자 리동휘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1년에 상해에서 손중산의 소개로 풍옥상의 서북군에 가게 되였다.

1937년에 강석훈은 풍옥상의 지시에 따라 29 113려단의 소좌부관으로 랑방에 주둔하고있었다. 로구교사변이 일어난후 그는 중국측을 대표하여 랑방을 통과하는 일본군인들을 단속하였다. 7 18, 수백명 일본군이 천진으로부터 랑방을 거쳐 북평쪽으로 가려하였다. 그는 이를 가로막고 거듭 교섭하다가 끝내 접전을 시작하였다. 강석훈은 228단의 기총련을 거느리고 랑방역 부근에서 사수하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은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승세를 잡았지만 명령에 따라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강석훈은 재정비한 장자충의 59군을 따라 산동성 림기(臨沂)전역에 참가하였다. 그가 소속된 38사와 김자렬이 참모장으로 있던 180사는 59군의 두개 주력부대였다. 부대는 차엽산(葉山)전투, 사자령(沙子嶺)전투에서 영용히 싸웠다. 59군은 림기지역에서 일본침략군의 주력의 하나인 이다가끼(板桓征四郞) 5사단의 공격을 수차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다가끼의 지원과 협동을 받지 못한 다른 일본군 주력인 10사단은 대아장(臺兒莊)부근에서 만여명의 사상을 내면서 거의 전멸되다싶이 하였다. 림기전투와 대아장전투로 이어진 대아장전역의 승리는 중국의 정면전쟁의 대승으로서 일본군의 불가전승이라는 신화를 깨뜨렸다. 그러나 국민당의 피동적인 전략으로 정면전장의 불리한 국면은 돌려세우지 못하였다.

그후 강석훈은 계속 국민당부대를 따라 일제와 싸웠으며 기회가 있으면 공산당부대와 조선의용대를 도와주었다. 1941, 그는 조선의용대를 도와주다가 국민당 특무들에게 발각되여 옥고도 치렀지만 풍옥상의 담보로 석방되였다. 항일전쟁 승리후 그는 33집단군의 명령에 따라 하남성 상구(商丘)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였다.

중국 항일전쟁의 전면개시를 의미하는 로구교 유적지를 떠나 완평성에 들어갔다. 완평성은 성루와 성곽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여있었다. 성내에는 지금도 수많은 단층집들이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뻗은 몇갈래 길이 있었다. 완평성 중심에는 1987년에 대외로 개방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 있다. 현대식 건물이였는데 기념관 정원은 잔디와 각가지 화초, 기념조각으로 장식되여있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기념관에 들어서니 길이가 18, 높이가 5 달하는 거대한 구리조각이 눈앞에 안겨왔다. 군인, 지식인, 농민, 로동자, 상인, 아동들이 꿋꿋이 자세로 침략자들을 항격한다는 내용이였다. 공화국 국가에서 쓴것처럼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을 축조(用我們的血肉鑄成新的長城)한다는 내용이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정숙하게 서있는 구리조각 인물들은 관람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고있다. 대청 천정에는 8개의 커다란 종이 걸려있었다. 종은 8 항일전쟁을 의미하고 외래침략자에 항격하는 경종을 계속 울린다는 뜻을 내포하고있다.

5000 되는 전시청은 종합내용, 일본침략군의 폭행, 인민의 항쟁, 항일선렬 네부분으로 나뉘여 5000여점의 소중한 사진과 문물, 친필유고, 서적들을 전시하고있었다.

8년간 지속된 중국의 항일전쟁은 로구교로부터 전면 시작되였던것이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에는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참여하였다. 로구교 전투를 치른 장자충부대에 김자렬과 강석훈이 있었고 기타 부대에도 많은 조선인이 참가하였다.

로구교사변후 1938년에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였다.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은 중국의 국공합작과 함께 전례없는 통합의 모습을 보이고 중국 관내 전장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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