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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말일의 단상
김인섭 2013-11-07
래일이 립동(立冬)이란다.일각(一覺)*하면 겨울에 들어서는 환절의 경계선에서 또 한 해를 마무르는 뒷정리를 해야 한다하니 어쩐지 우수(憂愁)가 몰려오고 허허롭게 쓸쓸해 진다.서성대다가 사무실 맞바라기*의 산을 바라보니 단풍의 유혹이 집요하고 은근하다. 해변에 자리 잡은 이 산간도시의 이때는 년중 제일의 호천기 계절인 것이다.일터에 담겨있어도 빈 껍질만 지키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육신 전부를 주어들고 청정한 공기도 마실 겸 마음도 가라앉힐 겸 야틈한 도시림 메숲을 찾아가는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산객들의 산책을 배려하여 만들어 놓은 유보도에 들어서니 심산유곡은 아니라도 가을의 결실을 거두는 락엽기(落葉期)의 숭엄한 계절이 분명하다. 한해살이를 마무리하는 라신(裸身)을 드러낸 이령림(異齡林)속의 가을 풍경은 왠지 서럽고 을씨년스러움이 넘치는 애상이다. 인간의 무지에서 떠오르는 비상(悲傷)이 아닌지 모른다.나무들의 만개와 조락이 질서적으로 순환하며 자연의 경개가 이뤄지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며 그 존재의 가치가 아닐까.그런데도 인간은 처연한 심정이 되어 서글픈 망향가를 되뇌이고 있다.
식물학자들의 리론을 들어보니 이 지역에서 나무가 일년 삼백예순날을 수분이나 영양을 공급받는다면 겨울추위로 동사(凍死)한단다. 이 같은 불행한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나무는 <자각적>으로 단풍을 만들어 잎새들을 줄기로부터 떨어뜨려 래년 자신 부활의 밑거름으로 되게 한단다.이렇게 동면하는 동목(冬木)으로 되면서 자기의 새로운 도약을 벼른단다. 이들은 때가 되면 미련없이 묵은 것을 버리고 침묵으로 자기를 살찌우다가 봄이 오면 장엄한 환생으로 새 삶을 맞이하는 것이다.부정의 부정 철학을 한치의 어김도 없이 지키는 그 생명 론리는 실로 경이롭기만 하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무한상승의 궤도를 따라가는 나무숲의 윤회전생(輪回轉生)을 보며 만물의 령장이라고 으시대는 인간 세계를 바라본다.최근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데 빛발치는 과거를 자랑하며 권좌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던 권력자들이 공권력을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두르면서 동물적 욕기(慾氣)를 발설하다가 쇠고랑을 차고 줄줄이 옥살이에 들어가는 뒷모습이다.지어 목을 내대는 락명(落命)의 반대급부(反對給付)를 지불하며 참회의 눈물을 짓는 가긍한 모습도 가긍하기도 하다.한심하게도 요즘엔 부정자금을 꿀꺽했다 하면 천만대에 억(億)소리가 울리는데 만민이 기가 막혀 기막힌 것도 모르고 있다.그 친구들이 <쑨 죽이 죽이지 밥이 될가.>는 때늦은 참회 소리를 들으며 입이 씁쓸하기도 하다.
세속의 천박한 가치기준에 연연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졸장부들의 막막한 사정을 보니 인간 자체의 푼수가 나무보다 모자라도 좀 모자라는 게 분명하다.한살이를 끝내고 래년을 기약해야 하는 세월 속에 차분히 침잠(沈潛)*하는 나무의 성격에서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무슨 리치를 터득해야 한다.과욕과 집착에 사로잡힌 나를 나무와 견주면서 냉철한 리성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보라! 인간도 수목같은 비움、떠남、버림의 철학으로 자기 승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자기를 잉태하는 지혜를 가진다면 참다운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매체에는 비판과 자아비판이란 말구절이 자주 들먹거린다.아마도 비판이라면 뭐를 비워라.내려놔라 하는 것이고 자아비판이란 이것을 내치고 저것도 버리겠다는 뜻일 것으로 이해한다.진정 나무처럼 버리고 비우는 미학을 마음에 심는다면 인간사회에 감도는 혼탁한 공기가 일소될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거머쥐겠다고 욕심을 부리기 전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되지 않을가!
(끝)
주:
일각: 잠에서 한 번 깨어남
맞바라기: 마주 바라보이는 곳.
침잠: 물속에 깊숙이 가라앉거나 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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