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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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수상(隨想)
2015년 01월 05일 11시 21분  조회:2768  추천:1  작성자: 김인섭
창밖을 굽어보니 젊은 여성들이 각인 각양의 양산을 받쳐 들고 태양 복사를 차단하는 모습이 볼거리로 되었다. 이 해변 도시에서 마가을을 상징하는 특유의 거리 풍경이다. 여름날엔 기압이 낮고 습도에 온도까지 높아 행인들이 벌이는 부채의 방서(防暑) 작전과 땀을 씻어내는 수고가 만만찮은 역사였는데, 어느새 지구의 새로운 온도 배치에 따라 염증(炎蒸)이 동냥가듯 가버리고 유쾌지수가 서서히 높아가고 있다. 일광 조사가 세어지며 일교차가 커지고 열기가 선기에 밀리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 비록 여열의 잔류는 감돌아도 후덥지근한 인고에서 해방되는 성추(盛秋)에 진입한 것이다.

가을철의 식물은 푸름의 극치를 이루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나날들을 떠나 보내며 장엄한 조락으로 자기만의 특기인 광합작용 결실을 세상에 전납(全納)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린다. 무수한 미물들이 온도와 빛을 감지하고 시간을 또박또박 재면서 새소리와 더불어 환절을 호소하는 계절예보의 선률을 뽑아내는데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은 강렬한 삶의 자세로 화신(化身)의 자태를 바꾸며 자연에 순응하는 정중동(靜中動)의 멋진 철의 변화를 연출해 내고 있다. 만물의 동태(動態)와 더불어 인간들도 작열하던 태양, 씽씽하던 나무들과 함께 대지의 숨가쁜 움직임에 동승하여 설렁거리는 추풍으로 수런거리는 사시의 변화를 갈채로 맞이하고 있다.

추래추거(秋來秋去)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우주의 무한순환이다. 식물 세계는 봄철에 초록 세상을 이루고 여름의 열띤 발돋음을 한 뒤에 여념없이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오달진 열매맺이로 한살이의 대미(大尾)를 수놓으며 책임 완성을 당당히 세상에 실증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그들이 인류에게 펼쳐보이는 고오한 풍채이기도 하다. 이 수확의 향연은 눈물겨운 생업을 위하여 로고를 치르는 인간들을 몽환경에 몰아넣기도 한다.

이렇듯이 가을을 맞이한 식물들은 자신의 환생을 위한 결의와 영생을 향해 나가는 미학으로 인간을 얻음과 잃음의 대비 속에서 과거을 뉘우치고 새 생활을 잉태시키는 엄숙한 사색에 몰입하게 한다. 환열과 예찬으로 맞아야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추풍낙엽의 쓸쓸한 우수(憂愁)에 현혹되어 에이그 팔자타령이나 되풀이 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가을을 타는 계절성기분장애란 환절기증세 때문인가. 나이 들어 퍼석퍼석해지는 퇴행적인 심리 변화인가.생계 영위를 위하여 숨가쁘게 뛰다니며 늘 피해 의식에 물젖어 있고 운명도 세상도 나에게만 모질게 대한다고 타발병이 골병으로 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청량한 갈바람은 소슬한 기분만을 쌓아주고 햇빛 줄기가 줄줄 흐르는 나무 숲도 처량한 여음만을 실어주니 실로 이상자(異常者)의 감정도착이고 원인불명일 수 없는 이질적 역발상이다.

이 맥락을 따라 나를 돌아보니 적자생존이란 혹독한 생물론을 좇아다니던 업보가 늘 상반되는 반상(反想) 관습을 뿌리깊게 심어놓은 것인지 싶다. 잘 조명해 보면 운명의 기세에 눌리어 삶의 길에 잔뜩 개핀 고단함과 서글픔을 무마시키는 지혜가 태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긋한 삶의 혼돈과 갈등 속에서 가을의 초목금수(草木禽獸)처럼 풍요와 빈곤、부활과 사멸의 변증법적 이치를 얼마라도 이해했더라면 우주의 조화가 당신을 얼마 조롱하더라도 충분히 감수(甘受)하고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의 감수가 남기는 사색은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느낌이 달라진다. 어쩐지 늘 회한에 덧붙여 떠나보낸 추억과 야망이 눈 앞에 즐비하게 줄을 잇는다.주어진 그대로 만끽하고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참된 인생관은 외면하고 허무한 미련 덩어리들을 맘속에 쌓기만 하였으니 그 속이 편할 수가 있을가. 뭇사람들은 일년 일차의 가을 결실이 령적(靈的)인 축복이라며 환희속에서 재릿하던 마음을 삭이고 있는데 그 사람은 거친 란상에 휩쓸려 빌빌거리며 지난 환각에서 살아가고 있다. 늘 초목이 시드는 정서를 음울한 기분에 감정이입(感情移入)하는 것이다.

전근대식 무한경쟁 이론을 금과옥조와 같이 선양하며 편싸움 맞싸움도 불사하는 어리떨떨한 현실을 비켜서 진실한 자기를 투영하여 이(利)를 위하여 의(義)를 도외시 않았던가를 까밝혀야 한다. 설익은 남가일몽이 자초했던 전세월의 버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당혹스럽고 랑패스러워도 가슴에서 진동하는 서글픈 망향가는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이 으슥한 수렁에서 빠져나와 쓰잘머리 없는 집착을 팽개치고 자연의 가을처럼 버리고 거두는 천리의 궤도에 당당히 올라선다면 가슴에 옭맺힌 태엽도 풀리고 정보시대의 공존공영、쌍리공생의 개화된 사상이 얼마라도 고일 것이다.

생각을 굴리다 보니 오늘이 냉철한 이성과 서릿발 치는 성찰로 자기를 살찌워야 할 적시적기란 느낌이 절박해 진다. 세속의 천박한 가치에 연연하며 불만족과 푸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구석진 골방에서 넋두리 독주만 마시지 말고 세월과 부침을 함께 하는 예지(叡智)를 키워야 한다. 곁사람들의 다수확을 자꾸 흘깃거리지 말고 가을이 가르치는 무언의 진리를 넌지시 넘어보며 생명을 잠식하는 시간을 빌어가지고 지난 인생을 진지하게 려과해 봐야만 한다.

달아나는 세월은 가속도 질주를 하고 있다. 이젠 세월이 내 편이 아님을 더 실감하게 된다. 그래도 멀쩡한 미래가 있으니 창조주와 자연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음을 개의치 아니하고 려명이 밝아오면 소년의 용기를 살리어서 약한 다리라도 힘을 올리어 다음 가을을 향해 쩌벅한 발짝을 뗄가 한다.
(끝)
2015-01-04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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