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론 찬평(猫論 讚評)
2011-07-20
최근 인터네트에서 등소평의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을 곡해하고 폄하하는 글들이 오른 것을 보고 거부감을 떨칠 수 없었다. 주요하게 심각한 빈부격차,만연하는 부패악상과 도덕심의 하락,상대적 행복감의 저하 등등 현상을 백묘흑묘론에 원인을 귀착시키면서 개혁개방의 성과를 축소해석하는 것이다.
반대로 묘론의 본의를 왜곡하고 그의 실질과 의의에 대해 뒤틀린 평결을 내리는 유상(謬想)이 일그러진 사회의식과 그릇된 정책의 근원으로 되어 오늘 사회에 만연되는 반사회적, 반시대적인 탐오,회뢰,자원낭비,환경파괴,민생민권의 침해 등등의 부산물을 양산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를 경험하며 살아온 일인로서 력사의 진실을 피력하는 것이 서로간의 인식을 소통시키고 바른 사상을 가지는데 유조하다고 생각하였다.
백묘흑묘론의 유래
지난 세기 50년대 말-60년대 초, 중국은 제도적으로 고착된 탈현실적인 리상주의 리념과 관료주의적 관리 방식에 의해 경제는 엄중한 침체되었었는데 특히 농업 생산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농촌에서는 여러가지 채산 형식이 유행되었어도 특히 가정도급식의 방식이 인기가 높고 유력시되어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최고 지도층 내부에서는 큰 시비거리여서 다부분 맴버들은 입조심 말조심하며 회피책을 대는 형국이었다.
바로 그때의 1962년7월7일, 등소평은 공청단중앙제3기7중전회의 대표들을 회견할 때 농업생산책임제의 가부 선택에 대하여 대답하면서 어느 것이 그 지방에서 생산을 회복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면 곧 좋은 형식이다.만약 군중이 그것을 수요한다면 곧 채택하고 비합적인 것을 합법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그리고 혁명 전우인 류백승의 <누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던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이다.>란 경구로 형상적인 설명을 가하였다.이것이 저명한 백묘흑묘론의 유래이다.
말의 진의는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생산 발전을 저애하는 구식을 개변하고 경제 수준과 군중의 요구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여 생산을 추진해야 한다는 특정된 의미었다. 오늘 보면 그지없이 간단한 말마디도 당시에는 해직당하고 정쟁의 몽둥이 세례를 겪을 각오가 없으면 조련히 던지지 못하는 험언(險言)이었다. 등소평은 감히 내뿜었다. 세계는 등소평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후의 정치 풍파, 특히 <문화혁명>(1966년)가운데서 등소평의 실제로부터 출발하는 사업 풍격은 정치적으로 이단시되어 강서성의 어느 시골의 공장에서 류형 생활을 하게 된다.등용되어 복직한 후 등소평은 붕괴의 변두리에 이른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자기의 이념을 되살리어 최대의 노력으로 가능한 한도내에서 혼란을 정돈하는 용단을 내리었다.하여 재차 정면 공박을 받았는데 최고 지도자까지 백묘흑묘론이란 례화(例話)로 들고 그에게 비판을 가한데다 정치 궁노수들의 밀집한 화살 강공을 받고 또 자리에서 쫓겨나고 전국적인 비판을 받는 원죄를 들쓰는 불우의 변을 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판이 거셀수록 등소평은 철석간장의 호남아로 득명되고 군계일학의 실재론자로서 더더욱 유명해졌고 민심은 일거에 등소평에게 쏠리었고 세계는 중국의 운명을 등소평의 부침과 연계시키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였다. 그때부터 백묘흑묘론은 그의 사상의 대명사로 되기 시작하였다.
白猫黑猫설이 론에로의 전환
문화혁명의 종식으로 중국은 새 시대에 진입하였다.그러나 장시기를 거쳐 형성된 경직된 사고방식과 그 정책의 뿌리는 너무도 깊었다.중국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기로에 이르렀다.
이 관두에 등소평을 대표로 한 개혁의 주력들은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라는 테마의 이론적 대토론을 전국적 범위에서 벌리었다.이는 당시의<두개 무릇>으로 표현된 개인 숭배를 종말 짓고 미신을 타파하고 실제로부터 출발하는 사상로선을 확립하는 전민적 사상의 일대 력사적 전환이었다. 위대한 사상해방운동이라 불리는 이 의식형태의 혁명은 1978년 12월에 열린 중공11기3차전회를 위해 리론적,사상적 기초를 다짐으로서 중국공산당은 력사의 항선을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한 개혁 개방에로 돌리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 회의에서 등소평이 선포한 개혁개방의 선언은 중국의 현대사에서 보면 중국공산당의 탄생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이은 후 중국의 천재를 개벽하는 하나의 위대한 력사적 사변으로 평가된다.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목표가 확실시 되는 때 중국의 정치,사상 분야에는 재차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하는 사상 혼돈이 발생하고 이데올로기의 론쟁이 다시 벌어졌다.
1992년초,등소평은 남순강화에서 간결하고 결정적으로 론단을 내리었다. 계획 혹은 시장의 다소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를 정성하는 구별점이 아니다.어느 것이 정확한가 하는 판단 표준은 그것이 사회주의 생산력의 발전에 유리한가,사회주의적 국가의 종합적 실력을 제고하는 데 유리한가,인민의 생활수준 제고에 유리한가 하는 것이다. 다분한 철리와 박력있는 촌언는 또 한차례의 이념적 분쟁을 종식하고 사상적 질곡을 부심으로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시장경제의 건설에로!라는 방향을 기치 선명히 확립하고 국가의 건설을 정확한 발전 도로에 진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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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단계를 거치면서 정설화되고 구체화된 명쾌한 유물사관의 산물인 등소평의 리론은 백묘흑묘론을 그 징표로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개혁개방을 이끌어낸 묘론의 중심중부(中心中部)는 생산력 향상과 전체적 국력의 향상, 인민의 생활수준 향상, 사회주의 현대화에로의 매진 등으로 요약된다.
백묘흑묘론의 의의
백묘흑묘론은 역사의 수요에 부응하여 기운찬 론리적 힘으로 중국의 낡은 구조를 개축하고 나라의 대문을 전세계로 열어놓는 금열쇠로 작용하였다. 중국 사회는 이미 튼튼한 물질적,정치적,문화적,외교적 기반을 마련하였을 뿐만아니라 세계화로 향하여 나아가는 불가역적인 중국 특색의 발전 도로에 올라섰으며 세계와 공동히 발전하는 견고한 기틀을 잡아 놓았다.
등소평이 20여년 사이에 13억을 이끌고 곤궁을 빠져나간 자체는 인류의 기적이 아닐수가 없다는 것이 세론의 일치한 평가이다.락후한13억 인구대국, 극심한 지역 격차, 복잡한 지리 환경, 정치,경제,문화,외교,민족 등 모순이 얼기설기 교착된 나라에서 이미 달성한 성과만으로 세계가 괄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백묘흑묘론의 발전
중국은30여년의 건설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고 국제 사회도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정보사회,지식사회를 대변하는 문명의 리기(利器)들은 사회의 일사천리 발전을 떠밀고 나간다.시장경제의 기본 구조가 확립되었고 사람들의 정치사상,경제사상,법률사상,문화사상은 전례없는 변화를 가져왔으며 문명 대국의 건설은 장엄한 중반전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낡은 체제의 잔여가 아직도 넓은 터전을 지키고 있으며 새로 나타나는 다량의 반시대적
우수마발[牛溲馬勃]과 시류를 역행하는 반작용력도 거센 힘을 자랑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실천으로 현란한 옥석혼효(玉石混淆)의 신구물속에서 요용건을 취사선택해야 한다.뭇사람들이 교아절치(咬牙切齒)하는 부패물도 새 제도의 확립으로부터 발본적인 제거책을 찾아야 한다.
중국은 새로운 시대적 높이에 올라섰다. 지난날의 낙후한 경제와 인민의 물질적 수요간의 절박한 모순이 확연히 해결되었다면 오늘의 중국은 경제,정치,문화,환경개선,자원보호,지속적 발전 등등의 제반에서 균형적,전면적,지속적인 발전을 요하는 력사 시기에 들어섰다.변화에 걸맞는 리론,정책,방침과 조치들이 실천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
대안이라면 백묘흑묘론에 내포된 변증유물론 정신을 계속 지양하여 현시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경제토대와 상부구조의 모순을 해결하는 새 리론을 중국 특색에 맞게 독창하여 나라를 끌고가는 것이다.국보간난(國步艱難)의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더없이 어려워도 진행해야 한다.아니라면 역수행주,불진칙퇴(逆水行舟,不進則退)가 된다.
오늘 당중앙이 제출한 과학적 발전관을 관철하는 전민적 노력이 공정하고 공평하고 민주적이고 번영하는 참신한 사회를 실현하는 새로운 사상해방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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