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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컵] 돼지고기 먹는 날이 명절날이였다
2020년 10월 09일 08시 20분  조회:604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돼지고기 먹는 날이 명절날이였다
 
김동욱

 
작년은 기해년, 60년 만에 돌아온 황금돼지해라며 년초부터 세간이 떠들썩했다. 민간에서 돼지는 복과 재물을 상징하는 동물로 통한다.
 
돼지 하면 몇십년전, 내가 살던 마을에서 떠돌았던 우스운 일화 하나가 떠오른다. 한 할머니가 시장에 새끼돼지를 사러 갔다가 마침 새끼돼지를 팔고 있는 한족 남자를 만났다. 손짓, 몸짓 해가며 건네는 할머니의 말이 실로 걸작이였다.
 
“얼둬디 버치 이양디, 텁석텁석 츠디, 니 이양디 마이!” 귀가 버치처럼 크고 먹새가 좋은 새끼수퇘지를 사겠다는 뜻이였다. 일장 폭소 끝에 할머니는 결국 마음에 드는 돼지새끼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세월에 우리 마을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대일에 참가하면서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부업이 돼지치기였다. 그 때 생산대에서는 일년 량식을 분배하면서 꼭 벼겨를 같이 나누어주었다. 돼지를 기르는 데 벼겨 만한 사료가 없었다. 돼지는 그야말로 먹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죽을 먹어대는 게 특히 가관이였다. 처음에 그 커다란 주둥이로 건데기부터 텁석텁석 먹어대는데 그 소리가 요란할 뿐만 아니라 주둥이 량옆으로 죽물이 쭉쭉 뿜겨나온다. 큰 건데기를 다 먹고는 주둥이를 죽 속에 들이박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작은 건데기를 우물우물 먹어치운다. 나중에 벼겨를 죽 우에 고루 뿌려주면 죽물을 쭉쭉 들이켜 어느새 구유가 밑바닥이 드러난다. 죽을 다 먹고는 네 다리를 쭉 뻗고 해볕쪼임을 하면서 쿨쿨 잠을 자는데 그런 상팔자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 세월에 돼지를 기르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먹을 식량마저 빠듯하고 지금처럼 사료가 흔치 않다보니 주로 풀을 뜯어서 겨와 함께 삶아서 먹였다. 아낙네들은 생산대일을 하면서 쉴 참에 짬짬이 돼지풀을 뜯어서는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머리에 이고 오는데 그 거리가 멀 때에는 7, 8리도 넘었다.
 
당시 우리 집에도 돼지가 한마리 있었는데 안해는 생산대일을 하는 짬짬이 돼지풀을 뜯고 나무잎을 훑어서 돼지먹이로 주었다. 어느 날, 배추를 겨에다 삶아서 돼지한테 먹인다는 것이 그만 식히지 않고 뜨거운 것을 그대로 주는 바람에 돼지가 중독이 되여 바닥에 쓰러졌다. 귀를 베여 피를 흘리게 하면 독이 빠져 살아난다던 어르신들의 말이 갑자기 떠올라 그대로 해봤더니 과연 돼지가 숨을 고르게 쉬더니 어정어정 일어났다. 다시 살아난 돼지가 하도 대견스러워 나와 안해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다가가 돼지 등을 도닥여주었다.
 
이튿날, 안해가 생산대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글쎄 돼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두살 된 아들애를 둘쳐업고 네살 난 딸애 손을 잡고 마을을 거의 훑다싶이 하며 안해는 돼지를 찾아다녔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담임을 맡고 있다보니 집안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안해가 마을 어구에서 중등 크기의 검정 돼지를 발견했다. 발악을 하는 돼지를 억지로 몰고 집으로 가겠노라 진땀을 빼고 있는데 딸애가 옆에서 엄마의 옷자락을 잡당겼다.
 
“엄마, 이거 우리 돼지 아니야.”
 
“너 어떻게 알아?”
 
“귀에 벤 자국이 없잖아.”
 
“맞아, 우리 돼지가 아니구나.”
 
결국 그 날, 안해는 돼지를 잃어버렸다는 실의에 빠져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마당에서 안해의 새된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우리 돼지가 찾아왔어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바지도 입지 않은 채 달려나갔다. 꿀꿀거리며 먹이를 달라고 안해 바지가랭이 주위를 맴도는 돼지를 보는 순간 저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자래운 돼지를 결국엔 팔아버렸다. 당시 우리 집으로 말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였다. 그 때 우리 세대는 돼지를 키워 판 돈으로 세가지 중기—재봉침, 자전거, 시계를 갖추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이 세가지를 다 갖춘 집은 그야말로 부자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은 가난뱅이 교원가정이다보니 이 세가지중 한가지도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살림이 어찌나 팍팍했던지 안해가 교원한테 시집 가겠다는 처녀가 있다면 밥을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겠노라고 롱담 삼아 말한 기억도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런데 돼지를 팔아서 목돈을 쥐였으니 이젠 그중에서 하나 쯤은 장만해도 괜찮지 않을가 하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 당시 몸값이 장난이 아니였던 손목시계는 몰라도 벽시계는 살 수 있겠다 싶어 흥분되여 밤새껏 상론하다 늦게야 잠들었던 일이 어제일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그 쇠 같은 돈을 안해가 잘 건사한다고 어딘가에 숨겨놓았는데 후에 쓰려고 보니 찾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집에 있는 트렁크를 몽땅 뒤지고 옷이란 옷은 전부 찾아서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돈은 온데간데 없었다. 한번은 식사를 하다가 혹시 까래 밑에 있지 않나 해서 훌 들어보고 나서 울상이 되여 밥도 채 먹지 않고 일하러 나가던 안해의 뒤모습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그러던 어느 날, 안해가 빨래를 하려고 이불거죽을 벗기니 그 안에서 돈이 무더기로 나올 줄이야! 이게 웬 떡호박이냐며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안해는 그길로 달려가 돼지고기를 사왔다. 그 날 돼지고기와 당면을 함께 넣고 끓인 장국을 둘러싸고 우리 집은 명절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 때 나와 애들 둘은 도시호구이고 안해 혼자 농촌호구로 생산대량식을 탔기에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잡곡밥을 먹었다. 점심도시락을 그냥 잡곡밥으로 해서 싸들고 다니는 안해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동네 아줌마들은 늘 자기가 들고 간 입쌀밥을 안해에게 밀어주군 했다. 그 당시 생산대에서는 도시호구가 있는 집엔 입쌀을 가져다주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하지만 순박하고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입쌀밥 우에 옥수수밥을 얹어서 우리 집에 가져다주군 했는데 그 고마움이야 어찌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이밥 먹게 되였다고 손벽 짝짝 치며 기뻐하던 어린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반죽된 감정을 억누를 길 없어 가슴은 고동친다.
 
그 세월에는 돼지고기를 먹는 날이면 바로 명절날이나 다름없었다. 아글타글해서 키운 돼지를 판 날은 어쩌다 목돈을 만지는 날이였고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장국을 먹을 수 있는 날이였으니 실로 설을 쇠는 기분이였다.
 
그 당시 생산대에서는 흔히 모내기가 끝나면 돼지를 잡아서 집집마다 고기를 나눠주었다. 창고 밑바닥에 올망졸망 널려있는 돼지고기 덩어리 우에는 세대주의 이름과 돼지고기의 무게가 적혀있는 종이장이 놓여있었다. 그 때는 삼겹살을 선호하는 시기가 아니였던지라 엉덩이살이나 목살이 차례지면 모두들 입이 함박 만해졌다. 삼겹살이 많이 차례졌다고 얼굴이 푸르딩딩해서 고기를 나눈 사람과 목에 피대를 세우고 걸고드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집은 안해만 농촌호구였기에 달랑 한줌 되는 고기가 차례지군 하였는데 그것도 부위를 알 수 없는 아주 볼품 없는 것이였다. 그 작은 고기를 네식구가 나눠먹으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만치 보잘것없더라도 소중했다.
 
또 돼지를 잡는 날에는 청년조, 중년조, 로년조로 나눠서 고기를 나눠주기도 하였는데 그 때마다 우리는 함께 모여앉아 추렴을 벌리군 했다. 술이 둬순배 돌아가니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렸겠다, 팀끼리 흥겨운 노래소리에 맞춰 춤판이 이어졌다. 북장단, 바가지장단, 접시장단에 맞춰 어깨춤, 엉덩이춤, 양걸, 댄스까지 저마다 장기껏 별의별 춤을 다 추어대는데 어데 가도 구경할 수 없는 시골풍경이였다. 얼굴이 땀벌창이 되여도 춤판은 그냥 이어졌고 그 열기가 자정을 넘어서도 식을 줄 몰랐다. 조무래기들도 오구작작 모여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흥겹게 놀아댔다.
 
그 때 우리 청년조에서 돼지고기소를 듬뿍 넣고 만든 입쌀만두는 그야말로 별미였고 광주리에 담아 바줄로 매서 김아바이네 우물에 담갔던 맥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달콤한 감로수였다.
 
“오늘은 뭘 해먹을가요?”, “드시고 싶은 거 있음 말해보세요.” 요즘따라 종종 듣는 말이다. 생활이 풍요로워진 만큼 배에 비게가 들어앉았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돼지고기 볶음채가 한상 가득 올라도 웬지 저가락이 그 쪽으로 가지 않는다. 날마다 명절이더라도 함께 즐길 사람이 없어서 참 쓸쓸하다. 다 나은 삶을 살겠노라 제각기 흩어져 지내니 한데 모여 북적거리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 거기에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일년에 겨우 한번이나 만날 수 있던 자식과 친척들과도 여직껏 영상통화로만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 동네에 나가도 저만치 떨어져서 마스크 너머로 인사를 해야 하니 더구나 인정이 그립다. 가난했어도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과 오구작작 모여 행복을 꽃 피웠던 시절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리워나면서 돼지고기 먹던 날이 명절날이였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로년세계>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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