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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의 장사길
2020년 11월 06일 10시 13분  조회:467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파란만장의 장사길

김시린


흔히 중년에 접어들면서 우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을 어엿하게 키워야 하는 중임을 짊어지게 된다.
우리 부부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깬다고 철밥통이라 굳게 믿고 있던 직장이 없어지면서 우리 부부는 하루아침에 백수로 나앉게 되였다.
가슴에서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지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 무렵 농촌에도 한창 개혁의 물결이 출렁일 때라 우리 부부는 고심 끝에 장사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장사를 하자면 우선 먼저 무슨 장사를 할지를 정해야 하고 그 뒤로는 장소를 정해야 했다. 자금이 딸리는 신세라 남들처럼 영업집이나 매대를 세 맡을 엄두는 못 내고 장사군들이 띄염띄염 널려있는 장마당 부근 길옆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서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 국영상점에서 잘 팔리지 않는 비닐제품을 외상으로 내다 팔기로 했다.
소래나 물통 같은 비닐제품은 가볍기는 해도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지라 밀차가 아니면 운반하기 어려웠다. 아침에 밀차에 물건을 싣고 장마당 길옆에 나가서 팔다가 점심이 되면 다시 밀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밀차를 끌고 장사하러 나가는 날들이 반복되였다. 그렇게 몇달이 지났지만 물건을 넘겨받을 때 가격이 워낙 높았던지라 떨어지는 게 별로 없었다.
그 무렵 돌공장을 운영하던 형님이 3천원짜리 은행수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아무 때나 현금으로 갚으면 되니 힘들 때 보태라며 내 등을 다독여주는 형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돈을 꼬박꼬박 제때에 갚으니 국영상점에서는 자꾸 저희들 물건을 가져가라 했지만 이미 번 돈에 형님이 가져온 돈까지 있으니 배짱이 두둑해져서 연길이나 심양에 가서 물건을 해오기로 했다. 작은 돈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의 노력으로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그런데 돈을 좀 버는 것 같으니 인차 배 아파하는 경쟁자들이 나타나 가격을 내리는 바람에 우리도 덩달아 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는 바람에 품종을 늘이지 않고는 죽벌이도 안되였다. 고민 끝에 사발과 바가지 그리고 수저와 같은 생필품들을 더 늘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1년 사이에 품종이 500여가지로 늘어났다.
전혀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우리 부부에게 장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떤 날은 온하루 앉아있어도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별로 떨어지는 게 없는 장사인데 아주 렴치없이 값을 흥정하는 고객을 만나는 날이면 “왜 그냥 가져가시지 그래요.”라고 한마디 콱 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고객인지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혼잡한 틈을 타서 하나를 사고 두세개씩 훌쩍 쥐고 달아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치다보니 거스름돈을 더 줄 때도 많았는데 늦게나마 찾아와서 돈을 다시 돌려주는 마음씨 고운 사람들도 있어 마음이 훈훈해났다.
어느 하루, 여느때와 같이 길옆에 난전을 벌려놓고 앉아있는데 농촌에서 온 듯한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생산재료상점이 어디냐며 물어보았다. 내가 좀 멀리 떨어져있는 층집을 가리키며 바로 저 건물이라고 알려드렸더니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서 “어느 층집, 어느 층집?”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아까부터 일감을 기다리고 있던 삼륜차부를 불러 “이 할머니를 저 생산재료상점까지 모셔다 드리오.” 하면서 돈 2원을 꺼내 삼륜차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삼륜차부가 “바로 코앞인데 무슨 돈까지 주느라고. 오늘 선심 한번 거하게 베푼다고 생각합지.” 하며 한사코 거절하더니 이내 로인을 싣고 떠났다. 나처럼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장사군한테 2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였을 텐데 그걸 굳이 마다하는 삼륜차부가 대뜸 거인이 돼보였다.
그렇게 몇해가 흘러 우리 이 지방에도 출국바람이 불면서 장사를 하던 조선족 장사군들도 하나둘씩 출국길에 올랐다. 외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순간 귀가 솔깃한 적도 있었지만 자식들을 위해 평생 고생을 한 부모님에게 차마 우리 자식까지 맡아달라고 입을 열 용기가 없었다. 나서자란 고향땅에서 어떻게든 아이들을 출세시켜보겠다는 오기로 작은 장사를 꾸준히 견지해갔다.
그런 우리 부부가 믿음직스러웠던지 친척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외국으로 가면서 수중에 있던 돈과 외국에서 번 돈마저 선뜻 우리한테 맡기면서 보관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음력설 기간을 제외하고 일년 내내 등이 휘도록 돌아치는 내가 안스러웠던지 어느 하루 안해가 이렇게 일하다 언제 지쳐 쓰러질지 모른다면서 이미 모은 돈에 사촌들이 우리에게 맡긴 돈까지 합쳐 영업집을 꾸리는 게 어떠냐며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진작 안해랑 똑같은 마음이였던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마음에 드는 영업집을 마련했다. 집이 헐망하니 수리해야 할 곳도 많았는데 이젠 제 집이나 다름없으니 구석구석 알뜰하게 손질을 봐야 했다. 집을 허무는 공지에 찾아가 널판자를 헐값에 구매하여 대패질을 해서 덕대를 만들었다. 뼁끼칠을 해야 하는데 간판까지 포함해서 적어도 10통은 필요했다. 당시 뼁끼 한통에 12원이였으니 10통이면 120원이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색종이를 사기로 했다. 한장에 1원씩 하는 색종이를 사서 밀가루 풀로 붙였더니 제법이였다. 그렇게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드디여 우리에게 속하는 영업집을 갖추었다.
이젠 추운 겨울에 두툼한 솜옷에 털모자를 눌러쓰고 진종일 길옆에서 뼈속까지 스며드는 엄한에 발을 동동 구르는 고역도 없게 되였다. 여름 내내 뜨거운 해빛을 등지고 땀을 훔치며 싸구려를 웨칠 일도 없게 되였다는 희열에 나와 안해는 그 날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련한 영업집에서 우리는 그 뒤로도 별별 고객들을 상대하며 몇십년 동안 장사를 이어나갔다. 결코 쉽지 않는 선택이였음에도 덕분에 참을인자의 진정한 의미를 깨쳤고 우리의 삶에는 그래도 해살이 가득하다는 걸 깨닫게 되여 참 다행스러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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