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으라, 뉴몰든이여!
안수옥
“여보!”
“엄마!”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밤 11시 반, 공항에 도착한 나는 출입구에서 꽃물결을 련상케 하는 수백송이 빨간 장미꽃다발을 한품에 안은 남편과 딸애의 목멘 소리를 듣기 바쁘게 사처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끌고 나오던 짐차와 크고 작은 트렁크들을 죄다 팽개친 채 엎어질듯 출구를 빠져나와 미친듯이 달렸다. 어느 사이 우리 세식구는 자석처럼 한데 뒤엉켜 붙었다. 마치 누가 갈라놓기라도 할가 봐 두려운듯이 우리 세식구는 그렇게 서로를 꽉 부둥켜안은 채로 울고 웃으며 그 동안의 그리움을 달랬다. 장장 16년 만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이뤄진 눈물어린 애절한 상봉이였다.
“여보, 많이 야위였구만. 얼굴에 주름도 늘고. 그동안 고생만 시켜서 실로 미안하오.”
“엄마, 하도 보고 싶고 그리워서 밤마다 엄마 사진을 보며 아빠 몰래 가만가만 이불 속에서 울었어요. 다신 외국에 안 가실 거죠?”
어느덧 반백을 넘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남편과 스무살을 훌쩍 넘긴 딸애의 거짓 없는 실토정이다. 고향땅을 다시 밟은 것도 꿈만 같은 일인데 오매불망 그리던 가족들을 마주하는 순간 내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흘러내렸다. 어차피 해야만 했던 귀국이였음에도 나로서는 실로 쉽지 않은 선택이였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그토록 찾아헤맸던 가족들에 끌려 나는 단연하게 귀국의 길을 선택했다.
런던의 히드로공항에서 북경까지, 북경에서 다시 연길까지 장장 열네시간도 더되는 고된 려정 끝에 나는 드디여 금쪽같이 소중한 가족과의 상봉의 꿈을 이루었다.
2005년 봄, 나는 겨우 열살 난 딸애와 남편의 배웅 속에 리별의 눈물을 휘뿌리며 연길공항에서 북경에 가는 려객기에 몸을 실었다. 북경에서 다시 미국으로 날아가기로 되여있었는데 여섯개 나라를 경유해 미국으로 날아간다던 려객기는 결국 영국에 머물렀다. 거금을 내고 일확천금을 꿈 꾸며 떠났던 나로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맹랑하고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여 짐을 푼 곳은 뉴몰든이라고 하는 영국 런던의 한인타운이였다.
한국관, 수라관 등 여러 한국식당들을 전전하며 일을 했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일했던 곳은 뻐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일분 거리에 있는, 갈비탕과 꽃게장으로 유명해진 〈진고개〉라는 한국식당이였는데 히드로공항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부대끼며 귀국전까지 옹근 7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힘들지 않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눈빛으로나 손동작으로도 대화가 잘 통했다. 일하는 과정에 간혹 연변에 있는 식구들과 워이신으로 영상통화할 때가 있었는데 피부와 머리칼 색갈은 물론 사용하는 언어마저 우리와 전혀 다른 동료들의 모습이 비낄 때마다 식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맙게도 나의 동료들은 그 때마다 그들의 특유의 미소와 매너로 답례를 하군 했다.
런던은 또 세계에서 부동산 가격이 높기로 소문난 곳으로서 그만큼 집값과 집세 또한 어마어마하다. 100평방메터 남짓한 아래웃층으로 되여있는 집을 거의 10칸으로 나누어 세를 주는데 한칸의 집세가 한달에 인민페로 치면 7,500원 좌우였다. 제일 싸구려라도 6,000원 정도였다. 지출을 줄이려고 우리는 방 한칸을 세내여 함께 간 동료들이 같이 들었다. 매일 다람쥐 채바퀴 굴리듯 하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용케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언젠가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신념이 받쳐줘서였다.
국제전화비용이 엄청난 데다가 중국과 영국의 시차가 7~8시간 좌우였던 까닭으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가족들과의 통화가 아주 드물었다. 내가 일하고 있을 때면 가족들이 단잠에 빠져있을 때라 고충이 있어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엄청 힘들었다. 그래서 집에 컴퓨터를 마련해놓고 늦깍이 나이에 그 조작법을 익히겠노라 얼마나 모지름을 썼는지 모른다. 나와 영상통화를 하려고 남편도 집에 컴퓨터를 마련하고 나서 스승까지 모시고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컴퓨터로 영상통화가 가능해지자 우리 가족은 서로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컴퓨터에 붙어 살다싶이 하며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푸는 한편 외로움을 달랬다.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다. 처음 3년간은 딸애와 가족들이 그리워 눈물로 밤을 지새다싶이 했지만 그 뒤론 돈을 벌어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악착같이 일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30대의 싱싱한 푸르름을 넘어서서 초로의 오십대 언덕에서 점차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게 되였다. 소학교에 다니던 딸애도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을 다니게 되였으며 평생을 기탁한, 결혼할 남자까지 생겼다고 알려왔다. 사실 이번에 귀국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원인도 딸애의 결혼식 때문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들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서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지금은 그냥 지나간 추억이라 웃어넘길 수도 있다만 그동안의 마음고생이야 어찌 한두마디로 추려낼 수 있으랴! 정상적인 체류가 아니다보니 귀국할 기회가 없어 수시로 갈마드는 그리움을 몰아내기 위해 모지름을 써야 했고 몸이 아파도 정규적인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지어 어느 한번은 비상검사를 피하느라고 랭장고에 몸을 숨긴 적도 있었다. 고된 로동에 열 손톱이 다슬 대로 다슬어 물건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발목뼈가 쑤셔나도 그 통증을 씹어삼켜야 하는 고된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다행히도 이곳은 로동법이 잘되여있어 정규적인 휴식일이 있는가 하면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무조건 가게 문을 닫아야 했기에 시름 놓고 휴식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객지생활에 서서히 습관되여갔다. 런던에 집을 사서 가족들을 초청해 함께 사는 동료들도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워이신으로 딸애의 문자가 날아왔다. 남자친구가 청혼을 했다며 딸애는 무척 들떠있었다. 그동안 딸애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결혼식만은 남부럽지 않게 잘 치러주고 싶었다. 달력을 펼쳐보니 결혼까지 앞으로 시간이 약 일년 쯤 남아있었다. 결혼비용에 조금이라도 더 보태려고 좀더 머물러있다가 결혼식 한달 전 쯤에 귀국하겠다고 딸애와 약속했다. 하지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얼마 뒤 딸애로부터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별을 전달받게 되였다. 사태가 례사롭지 않다는 걸 짐작한 나는 서둘러 귀국수속을 밟았다. 마땅한 사람을 구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던지라 가게에 미리 사직서를 냈다. 가게 사장님과 사모님은 불에 데기라도 한듯 와뜰 놀라했다. 그동안 쌓은 정이 있는 데다 주방보조로 일하며 가게를 거의 도맡아 관리해온 내가 하루아침에 그만둔다고 하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다고 언젠가는 리별하게 되리라 짐작은 했다만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 몰랐다며 사장님은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가게는 대뜸 죽가마처럼 끓어번졌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마저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서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8개월만 더 일하면 보너스까지 얹어주겠다는 사장님의 후한 권유마저 물리치고 나는 서둘러 귀국을 선택했다. 우리 식구가 잘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였던 만큼 천금을 준다 해도 남편의 소중한 생명과 딸애의 행복과는 바꿀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결심을 내리고 나서 2020년 1월 9일에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티켓을 끊었다. 내가 드디여 귀국한다는 소식이 약이 되였던지 남편의 병도 날을 거듭하면서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수고대 끝에 우리 가족은 드디여 가족사에서 한페지로 남게 될 상봉의 날을 맞이하게 되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거늘 강산이 두번이라도 변했을 법한 16년 만에 고향땅을 밟았으니 실로 감구지회가 컸다.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 따뜻한 몸, 꺼슬꺼슬한 턱수염과 무르익은 능금 같은 딸애의 얼굴을 이렇게 지척에서 맘껏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행복에 겨워 눈물을 걷잡기 어려웠다.
귀국전, 이제 돌아가고 나서 후회할지도 모른다며 넌지시 귀띔해주는 동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와보니 고향은 그렇게 낯설지도 락후하지도 않았다. 고속철도가 통하고 있고 택배업, 통신수단이 더할나위없이 편리해졌으며 거리도 한결 산뜻하게 와닿았다. 구역관리도 엄청 잘되여있어 비닐봉지가 사처로 날려다니며 거리를 휩쓸던 살풍경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그동안 외국에서 번 돈으로 남편한테는 자가용차를, 딸애한테는 살림집을 선물로 마련해주었는데 남편이 직접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연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십여년전에 촘촘히 들어섰던 초가집들은 아담한 주택으로, 조선족동네는 민속촌으로 태반이 바뀌여있었다. 도시의 변화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눈에 띄우는 아빠트단지마다 록화가 잘되고 관리가 잘 따라가서인지 아늑하고 정갈했다. 아빠트 정원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있었는데 요즘은 정책이 좋아져서 둘째까지 보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어난다고 남편이 흐뭇해하며 들려주었다. 내가 출국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집 한채 마련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였는데 16년 만에 고향땅을 다시 밟고 보니 저마다 현대적인 아빠트에다 외제 자가용차까지 갖추고 남부러울 것 없이 잘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모바일시대라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결제가 가능했다.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부지런하면 어디서든 잘살 수 있는 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싶다. 아직도 뉴몰든에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20년도 넘게 품팔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소리높이 웨치고 싶다.
돌이켜보니 뉴몰든은 지구촌의 여러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삶의 공식을 새롭게 창조하는 공간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태여나서 자란 고향은 말 그대로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정감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였단 걸 고향땅을 다시 밟으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잘, 있으라, 뉴몰든이여! 그리고 고마워, 고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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