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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년세계》잡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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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송을 바라보며
2020년 11월 06일 10시 25분  조회:450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천년송을 바라보며

류서연


그 날, 오래간만에 바람도 쏘이고 기분전환도 할겸 문우들과 함께 가까운 산으로 봄나들이를 갔다. 차에 몸을 싣고 30여분을 달려 우리 일행은 드디여 목적지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리니 산바람 특유의 내음이 물씬 풍겨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너무 싱그러워 한껏 산바람을 들이마시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났다. 몇달을 고스란히 집에만 들어박혀있다보니 자연의 싱싱함이 무척 그리웠던 모양이다.
문우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한편 살랑살랑 나무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상쾌함을 온몸으로 만긱하며 산속을 걸어가노라니 금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직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맑고 시원한 공기, 그 고요한 흐름 속에 반가운 선배문우들과 함께 있다는 것에 마음 끝자락까지 즐거워진다. 그동안 답답하게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일시에 빠져나가는듯 후련해졌다. 도시의 탁한 바람과는 달리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운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 기분은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벌써 짙은 록음으로 푸름을 토해내는 산, 이름 모를 산새들이 아름다운 목청을 돋구어 봄을 노래하고 여기저기 피여난 들꽃들이 별처럼, 눈동자처럼 반짝인다. 산은 그렇게 자연의 풋풋한 냄새가 그리워 찾아온 우리를 품에 포근히 안아주었다.
이 때, 평시에도 감성이 풍부했던 문우 한명이 갑자기 탄성을 올렸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문우가 가리키는 한그루의 천년송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헉—” 내 입에서도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왔다. 세월의 두께와 년륜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타래떡처럼 빙빙 타래져 줄기줄기 뻗은 뿌리가 지면에까지 울퉁불퉁 일각을 드러냈고 무성하게 자란 가지는 하늘을 떠이고 있는 듯하였다. 세월의 무게를 한몸으로 감당하면서 뿌리를 깊이 박고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폭염과 혹한과 칼바람을 견뎌왔으면 저렇게 비틀리고 또 비틀리며 자랐을가? 뼈저리게 비장한 생명의 이악스러움, 그런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그 강인한 모습에 가슴이 젖어들었다.
나는 넋을 잃고 천년송을 보고 또 보았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온갖 인내로 시련을 딛고 억세게 자라난 소나무는 초록빛으로 적막이 흐르는 산에 한줄기 생기와 생명을 부여해주는 것 같았다. 넋을 잃고 천년송을 바라보노라니 저 나무가 어쩌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네 인생과 너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새삼스레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게 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의 삶에는 즐겁고 행복한 일도 많았겠지만 고달픔과 아픔 때문에 몸서리치도록 괴로웠던 적도 참 많았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서 병치레가 잦았던지라 동년에 대한 추억을 꼽으라면 아팠던 기억밖에 없는 듯하다. 지금도 페니실린주사를 맞을 때마다 겪었던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아픔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고 잔등에 따가운 뜸을 뜨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기억이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후에 교원이 되여 강단에 오르고 중매결혼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가슴 벅찬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출국붐이 산간 도시에도 불어치면서 아리랑가락에 울고 웃으며 행복을 피워오던 수많은 단란한 가정들이 리산의 아픔에 허우적거리는 비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였다.
우리 가족도 례외가 아니였다. 마흔 고개를 바라보던 남편은 잘살아보겠다는 꿈을 안고 결연히 출국의 길에 올랐다. 남편이 없는 내 삶은 삽시에 맹물처럼 슴슴해졌다. 웃음과 행복이 사라진 집안에는 고독과 외로움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져있었다. 그래도 한번 맺은 부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내 가족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20여년 동안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걸 감내해왔다. 생활의 세파에 비틀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외로움과 슬픔을 가슴 속에 꾹꾹 묻어두고 고독을 잘근잘근 씹어삼킬 수 있었던 건 가족의 의미와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남편이 열심히 돈을 벌어 살 만해지니 운명이 나를 희롱할 줄이야. 2017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유선암이라는 진단 앞에서 나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고개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대로 물앉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을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아직 채 이루지 못한,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있었기에 삶의 끈을 단단히 부여잡고 가족이라는 뿌리에 발을 꼭 붙인 채 이를 악물고 수술에 이어 여섯차례의 힘든 항암치료를 이겨내고 드디여 내 생의 새봄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 순간, 남편도 언니도 아들도 나를 붙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다시 태여난 듯한 희열과 감격에 흠뻑 젖어 남은 인생은 누구보다도 멋지게 살려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있었는데 운명은 거짓말처럼 또 한번 나를 조롱했다. 아들이 벌려놓은 사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거의 백만원에 달하는 빚을 떠안게 되였다. 하루아침에 낭떠러지에 선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거액의 빚은 커다란 올가미가 되여 내 목을 죄여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러저리 치이고 끌려다니는 삶은 그야말로 아픔과 외로움과 괴로움의 련속이였다.
‘이번의 위기는 또 어떻게 넘기지?’라는 걱정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나날들이 하루, 이틀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통장에 넣어둔 비상금을 탈탈 털어 급한 불부터 끄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고 가쁜숨을 헐떡이며 거의 백만원에 가까운 빚을 다 갚고 나니 어느덧 통장은 텅텅 비여있었고 내 몸은 군데군데 멍이 들어 만신창이가 되였다. 그래도 마음은 여느때보다 후련했다. 내 몸을 지지리 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위돌을 드디여 내려놓았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토록 힘든 시련들을 용케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이였다. 나는 다시한번 얼기설기 비틀리며 자라난 천년송을 바라보았다. 땅속 깊이 파고든 뿌리 덕분에 소나무는 천년 세월이 흐르도록 끄떡없이 푸름을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다. 살아오는 동안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가족이라는 든든한 뿌리가 지켜주었기에 나 역시 그 어떤 시련도 넉근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삶의 무게가 바위처럼 어깨를 짓눌러도,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가족이라는 뿌리가 있는 한 결코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도리를 세월의 년륜을 고스란히 한몸에 안은 천년송을 보면서 깨달았다. 이후에도 가족이라는 이 뿌리를 꽉 부여잡고 주어진 하루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이 베풀면서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된다.
이 시각 다시한번 줄기줄기 타래지고 얼기설기 비틀린 뿌리를 딛고 자란 천년송을 보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내 삶의 뿌리를 땅속 깊이 단단히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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