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해와 더불어 살아온 30년
김태호
시간이 흘러흘러 내 나이 어느덧 5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섰다. 그렇다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추억을 더듬으며 살아갈 나이는 아님에도 요즘 들어 옛추억에 빠져드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노라니 후회되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혼 하나만은 참 잘했구나 싶어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보겠다고 안해와 함께 앞만 보고 달려온 30년 세월, 강산이 세번 변할 만큼 긴 그 시간을 우리 부부는 고생을 락으로 삼으며 동고동락해왔다.
우리 부부는 고중시절에 만났다. 고중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연변대학에, 안해는 길림재무학원에 입학한 뒤로 4년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쌓다가 졸업한 이듬해 설에 혼례식을 치르게 되였다. 삼대가 어울려 사는 집안에 맏며느리로 들어선 안해는 우로는 시할머니와 시부모님, 아래로는 시동생, 시누이와 한집에서 살게 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여 안해는 임신을 하게 되였다. 사회 초년생인지라 로임봉투가 얇았던 우리 부부는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아이를 지웠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로임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진황도의 한 사영기업에 들어갔다. 로임이 두둑한 데다 보너스도 많았으나 기업의 경영분위기가 하도 살벌해서 매일 살얼음 우를 걷는 기분이였다.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단호하게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서 며칠 쉬며 쌓인 피로를 풀고 나니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삐 돌아치는 안해의 모습이 눈에 안겨왔다. 더 이상 빈둥대며 밥만 축내다 정말 백수가 되여버릴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정신을 차리고 구직의 길에 올라 우여곡절 끝에 교통부문에 취직하게 되였다. 그 무렵 안해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애를 안겨주니 그야말로 경사가 겹쳐 집안에서는 매일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고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얼마 뒤, 직장에서 아담한 아빠트를 분배받은 우리 부부는 세간 나 딴살림을 차렸다.
아들애 돌이 지난 얼마 뒤의 어느 날, 쉬는 날이 없이 장사하러 시장에 나가던 어머니가 목이 켕기고 허리가 결린다면서 드러누웠다. 그렇게 누운 어머니는 종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연변병원을 찾아가 세밀한 검진을 받은 결과 페암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나와 안해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당시 어머니의 년세가 57세였으니 따져보면 딱 지금의 내 나이였다. 진단이 나서부터 세상 뜰 때까지 통증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우리는 근 5개월 동안 눈물로 얼굴을 씻다싶이 하며 우울하게 보냈다. 림종시 어머니는 나와 안해를 옆에 불러놓고 가쁜숨을 몰아쉬면서 자식 둘을 맡겨두고 떠나는 게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가 세상 뜬 후 부모님이 살던 집을 팔고 식구들은 우리 집으로 옮겨왔다. 병원비로 빌린 돈에 어머니가 생전에 장사를 하면서 냈던 빚이 더러 남아있었던지라 그걸 갚아야 했다. 워낙 크지 않은 집은 어른식구 네명이 불어나니 더 비좁게 느껴졌다. 안해는 매일 퇴근하자 바람으로 대가족의 식사준비를 하느라 돌아치면서도 한번도 부르튼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 뜬 후로는 워낙에 활달하던 아버지는 진종일 우울하게 보냈다. 그런 아버지를 안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로인활동실 같은 데로 나가서 기분이라도 바꿔보라고 권했다.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이던 아버지가 글쎄 몇달후 우리를 불러놓고 새 가정을 이루겠다고 알리는 게 아니겠는가? 어머니를 여읜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아 그다지 내키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을 비웠다. 아버지가 새어머니한테로 옮겨간 뒤로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지냈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아무런 구속 없이 편히 지내셨다. 낮에 우리가 출근하면 우리 부부의 침대에서 낮잠을 주무셨는데 년로한 분이다보니 누웠던 자리에 비듬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방안에서도 벽을 짚고 다녀야 하는지라 새하얀 벽에 여기저기 손자국이 남았음에도 안해는 언제 한번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1년 쯤 뒤, 두 동생이 취직하고 연길로 떠나자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설득하여 할머니를 모셔갔다. 하지만 긴 세월을 두고 정을 쌓아온 사이도 아닌 고부간이 한집에서 부대끼자니 아무래도 불편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어느새 그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안해가 나서서 할머니를 도로 집으로 모셔왔고 그 뒤로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게 되였다.
300원밖에 안되는 월급으로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두 동생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당시로서는 출국해서 돈 버는 것이 유일한 지름길이자 출로였다. 나는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류학비자를 받고서 부푼 가슴을 안고 출국길에 올랐다. 마치 다람쥐 채바퀴 굴리듯 매일 바삐 돌아치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후에는 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초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식당에서 일하고 난 뒤 오전에 쪽잠을 잤다. 일을 마치고 세방에 들어서는 순간 피곤이 몰려와 말 한마디 못하고 폭 고꾸라져 굳잠에 빠져들었다. 일하러 다니던 식당은 항상 손님들로 붐벼서 홀서빙에 설겆이까지 하다 보면 허기가 지는 일이 다반사로 되였다. 때로는 주방에서 일하다가 배고픔을 참느라고 두 손으로 싱크대를 부여잡고 꿇어앉아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배가죽이 허리에 달라붙고 눈앞이 새노랗게 된다”는 말의 진의를 깊이 실감했던 나날이였다.
이를 앙다물고 버텨내던 그 어려운 나날에도 집에서 시할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애를 키우며 굳세게 살아가는 안해의 모습과 아들애의 귀여운 얼굴, 연길공항에서 내 이름을 웨치며 배웅하던 아버지와 동생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서 얼른거려 기운을 찾군 했다.
1년 동안 죽기내기로 일했는데도 학비를 물고 생활비를 빼고 나니 남는 게 별로 없자 아쉬운 대로 공부를 접고 돈을 버는 데만 전념하기로 했다. 다행히 운 좋게 중의안마기술을 접하게 되였고 솜씨가 어느 정도 손에 익자 〈중국기공정체원〉이라는 안마원을 차렸다. 이 때로부터 그나마 돈이 한푼두푼 쌓여졌다. 야무진 안해는 내가 보내준 돈을 한푼이라도 허투루 쓸세라 꼼꼼하게 모아두었다. 돈이 얼마간 모이자 안해는 아버지 앞으로 집을 마련해드리자고 했다. 얼마 뒤 안해와 토론 끝에 아버지 앞으로 방 세개에 객실이 딸린 120평방메터짜리 아빠트를 갖추어드렸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새집으로 모셔갔다.
그 뒤로 모든 일들이 마술처럼 술술 잘 풀려나갔다. 남동생과 녀동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근사한 직장으로 전근하더니 각자 훌륭한 혼처를 구해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안해는 저세상으로 간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맏며느리로서의 자리를 흠 잡을 데 없으리 만치 튼튼히 지켰다.
그제야 어깨가 가벼워진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간만에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한동안 쉬고 난 뒤 이번에는 한국에 나가 중국어학원을 차렸다. 그럭저럭 학원 운영이 잘되니 우리 가족의 생활도 전례없이 윤택해졌다.
한창나이에 15년이라는 세월을 떨어져 보낸 우리 부부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무색할 만치 마음속에 서로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한 채 늘 서로를 그리워했다. 일본에 있을 때나 한국에 있을 때나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왔는가?’ 하는 생각을 한시도 접은 적 없었고 안해 역시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꿈 꾸며 원망없이 외롭고 힘든 날들을 용케 버텨냈다.
결혼 30주년을 맞은 요즘, 장가 갈 나이가 된 아들을 보면서 세월이 덧없다는 생각마저 갈마든다. 결혼생활의 반을 떨어져 지내다보니 커가는 아들애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 짙은 아쉬움이 가슴 한구석에 깔려있다. 아들애의 변성기는 언제 쯤이였는지, 사춘기는 또 어떻게 넘겼는지…
이제 우리 부부가 오손도손 잘살아갈 일만 남았다. 이제 더 이상 서로 떨어져서 그리워하는 일 없이 오손도손 함께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안해와 더불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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