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장에서의 나날들
윤종기
매번 달콤한 꿀을 먹을 때면 20여년전 한국에서 고달프게 양봉을 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 나는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에 가게 되였다. 그리고 행운스럽게도 한국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런데 1997년에 금융위기가 들이닥치면서 수많은 건설회사들이 부도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물론 내가 다니던 건설회사도 예이제없이 그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하여 여러곳을 전전했지만 본 나라 사람들도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든 시국이니 곤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렇게 한동안 방황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강원도 린제군에 위치한 어느 양봉장으로 가게 되였다.
평생 농사일만 해온 터라 양봉업은 고사하고 양봉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내가 과연 양봉장의 일을 거뜬하게 할 수 있을런지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 같은 불경기에 일자리를 찾은 것만 해도 불행중 다행인데 찬밥, 더운 밥 가릴 신세가 아니였다.
1998년 5월 1일, 서울에서 떠나 강원도 린제군 뻐스터미널에 도착하자 사전에 통화했던 양봉장의 김사장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인사를 나눈 뒤 김사장이 몰고 온 소형 화물차에 몸을 싣고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양봉장에 도착하였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양봉장에는 몇백상자는 족히 돼보이는 벌통들이 줄느런히 늘어섰는데 그 주변은 온통 윙윙 날아다니는 벌천지였다. 5월 한달은 한국 국내에서 이동양봉을 하여 아카시아꿀을 채집하는 시기로 이 때 벌어들인 수입만 해도 일년 수입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한다. 내가 양봉장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문 저녁 무렵이였다. 저녁이 되면 벌들은 보금자리인 벌통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김사장 그리고 기타 두명의 일군은 벌들이 벌통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300상자 되는 벌통을 10톤 용량의 트럭에 실어놓았다. 그리고 채밀에 필요한 여러가지 공구와 식량, 채소, 생수, 천막을 걷어서 전부 차에 실었다. 이게 바로 이동양봉을 하는 데 필요한 준비작업이였다. 무거운 벌상자를 두시간 동안 등에 지고 날랐더니 온몸은 땀벌창이 되였다. 모든 물건들을 트럭에 다 싣고 나니 저녁 아홉시가 되였다. 트럭은 밤길을 헤가르며 남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우리가 새벽에 도착한 곳은 경상남도 통영의 어느 한 산골이였다. 아카시아나무들로 빼곡한 산에는 꽃들이 만개하여 온 산이 새하얀 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적이 드문 청정지역으로 싱그러운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밀원이 풍부한 곳이였다. 우리는 숨 돌릴 새도 없이 300상자의 벌통들을 다시 하나하나씩 들어내려 다섯줄로 정연하게 줄 지어놓았다. 그리고 천막을 쳐 우리 일군들의 잠자리와 취사칸을 만들었다. 날이 희붐히 밝자 부지런한 꿀벌들은 벌집에서 나와 윙윙 하늘을 날아예며 꿀을 채집하느라 분주하게 돌아쳤다. 며칠간 무덥고 맑은 날씨가 이어지면서 올해에도 꿀풍년이 들 것 같다며 김사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덕분에 우리들도 성수나게 일을 하여 꿀을 듬뿍 채집할 수 있었다. 양봉장에서 일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30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방충모를 쓰고 장갑을 낀 채 채밀을 하는 작업이였다. 하루는 고사하고 잠간만 있어도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벌들이 옷 사이로 들어와서 콕콕 쏘아대니 얼굴이 퉁퉁 붓고 온몸에 벌독이 퍼져 근질거려 초보자인 나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30년을 양봉장에서 뼈를 굳힌 김사장은 꿀벌에 대해 아는 지식이 많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도 척척 일을 잘해나갔다. 벌들이 손등에 붙고 얼굴에 붙어도 벌독을 타지 않았는데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였다. 이건 30여년간 쌓아온 경험과 그동안 벌들과 쌓아온 애틋한 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마음속으로 나름 대로의 판단을 내렸다. 나는 김사장의 세심한 가르침을 받는 한편 시간이 나는 대로 양봉에 관한 서적을 읽으면서 양봉기술을 익혀갔다. 나중에 귀국하면 양봉전문가가 되여 밀원이 풍부한 고향땅에서 양봉업을 해보자는 야무진 꿈도 꿔보았다.
꿀이 아미노산, 효소, 호르몬, 당분 등 많은 성분이 함유된 으뜸 가는 건강식품이라는 건 이번 양봉일을 하면서 알게 되였다.
꿀 한근을 빚자면 꿀벌들이 몇만송이 꽃에서 채집해온 화분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달콤한 꿀은 부지런한 벌과 인간의 신근한 로동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듯 싶다.
30여년간 오직 양봉업에 골몰하여 두 자식을 대학공부시키고 널직한 아빠트를 장만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김사장은 부지런한 꿀벌과 닮은 데가 참 많았다. 꿀벌의 부지런한 정신과 김사장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끈질긴 정신은 내 삶의 본보기가 되였다. 김사장처럼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판다면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일에서 삶의 희열과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며 역경 속에서도 자기 나름 대로의 목표에 따라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 수 있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
3년간 양봉장에서 일하면서 그 어려운 시기에도 남부럽지 않게 목돈을 챙기고 그보다도 꿀벌처럼 부지런히 사는 인간이 되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여 지금도 그 세월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울렁거리군 한다.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김사장과의 인연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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