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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2020년 12월 08일 14시 26분  조회:604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천우컵]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리정화



나는 친척언니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있는 엄마이다.

남편은 7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20살 때 아버지가 억울한 루명을 쓰게 되면서 온 가족이 변방에서 내륙지구로 강제 이주를 하게 되였다. 이주한 후에도 수모와 박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맏이인 남편은 어린 남동생 둘과 아버지를 보살피느라 힘든 나날을 보냈다. 불우한 어린시절에 겪은 고통의 후유증 때문이였을가? 남편은 성격이 칼날 같았고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눅잦히지 못해 곧잘 역정을 부리군 했다. 이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바로 하루가 멀다하게 잦은 남편의 술주정이였다.

후일 시아버지가 명예를 회복하게 되자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는 념원을 내비치면서 우리는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하게 되였다. 고향에 돌아가면 남편의 술주정도 좀 나아지려나 싶었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남편의 술주정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남편의 고향에는 몇집을 빼고 대부분 남편의 형제들 아니면 친척들이다보니 하루가 멀다하게 술상이 벌어졌는데 저녁에 술상에 마주앉으면 이튿날 날이 밝아서야 파하기가 다반사였다. 남편은 매일같이 술에 푹 절어있었고 집안은 사흘이 멀다하게 아수라장이 되였으며 가난은 칡넝쿨처럼 칭칭 감겨들었다.

어느 마가을의 새벽녘, 장밤 술을 마신 남편은 고주망태가 되여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태산같이 쌓인 집안 일에는 나 몰라라 하면서 하루가 멀다하게 술에 절어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남편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나는 눈살이 꼿꼿해서 남편을 쳐다보며 “일은 하지 않고 만날 술독에 빠져있으면 어떻게 살아요? 이러다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이렇게는 못살겠으니 리혼을 해요.”라고 고함을 질렀다. 활화산마냥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끝내는 참지 못하고 ‘리혼’이란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리혼하자는 말에 남편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내 인생에는 절대 리혼이란 게 있을 수 없어!”라며 고함을 지르더니 옆에 놓아두었던 솥뚜껑을 집어들었다. 술에 취하면 손에 무엇이든 잡히면 마구 들부시는 남편인지라 그 순간 머리 속에는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였다. 덴겁해서 “엄마, 가지 마세요.”를 연신 웨치면서 내 다리를 붙잡고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두 딸애도 뿌리친 채 허겁지겁 도망쳐나왔다.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맨발로 뛰쳐나와 마을의 계곡물을 첨벙첨벙 건너던 그 해 두 딸애의 나이는 고작 일곱살, 여덟살이였다.

맨몸으로 뛰쳐나왔던지라 손에 한푼도 없이 휘청거리는 두 다리에 의지해 현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도 인기척 소리가 들리면 혹여라도 시집 식구들이 뒤쫓아오는 게 아닌가 싶어 숲속에 잠간잠간 몸을 숨기기도 했다. 나는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초들초들한 입 속으로 삼키며 힘겨웁게 굽이굽이 여덟 고개의 대팔령을 허영허영 올라갔다.

드디여 대팔령 봉우리에 올라섰다. 벼랑 끝에서 죽음의 사자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아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스쳤고 소름이 돋는 전률에 나는 눈앞이 캄캄해나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마치 세상에 버림받아 숲속 한가운데 버려진 고아라도 된듯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았지만 문득 엄마를 찾아 헤매는 어린 두 딸애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귀전에서 울리는 듯하여 가슴이 미여지게 아파왔다. 마침 참나무에서 도토리 한알이 떨어지더니 또르르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주으려는 순간 멀지 않는 곳에서 반짝이는 두 눈과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앙증맞은 다람쥐였다.

‘다람쥐도 자기 새끼들의 겨울나이를 위하여 량식을 장만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자식을 버리고 비겁한 도망자가 되다니 참으로 한심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저려났다.

쌉쌀한 도토리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나서 나는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평소에는 걷기 쉽던 내리막길이였건만 이미 맥이 빠질 대로 빠졌던지라 마치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는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 걷는듯 발걸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한걸음한걸음 내디뎠다.

그 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타박타박 40킬로메터나 되는 길을 걸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현성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며칠 쉬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쥐여준 돈 백원을 들고 무작정 다시 길림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길림에 도착한 나는 친구의 소개로 식당에서 림시로 주방보조일을 하기로 하였다. 지낼 곳이 마땅치 못하다보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식당 한쪽에 있는 어둑침침한 작은 방에서 지내야 했다. 매일 일을 마치고 나서 저녁이 되면 지친 몸을 웅크리고 앉아 넋 놓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아기별들은 마치 어린 두 딸애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 같았고 그 눈물은 고스란히 내 가슴으로 흐르고 흘러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두둥실 떠오른 달님을 바라보노라니 친정엄마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친정엄마는 만성 위병에 시달리면서도 우리 여섯 자매를 반듯하게 키워낸 강한 분이였다. 가냘픈 몸으로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엄마였다. 그런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내가 한창 엄마의 사랑이 절실한 내 자식을 버리고 이렇게 도망을 나온 비정한 엄마로 되다니…

하루를 일년 맞잡이로 보내면서 겨우 한달간 버텨 수당을 받자마자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의 빈자리를 느끼고 마음을 돌리기라도 한 건지 남편은 전례없이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술주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가 오는가 싶더니 한달이 좀 지나자 그 상이 장상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은 현성에서 40여킬로메터, 향정부에서도 20여킬로메터 떨어진 심심산골이라 애들을 공부시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이 참에 남편의 술버릇도 뗄겸 우리는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기로 용단을 내렸다.

이사짐을 싣던 날, 줄곧 우리와 함께 생활해왔던 시아버님은 두 눈을 부릅뜨며 “못난 자식, 이 애비를 버리고 떠나겠다구? 못 간다, 못 가!” 하며 날이 퍼런 도끼를 들고 이사짐을 싣는 맏아들을 향해 불호령을 내렸다. 시아버지의 눈에서는 불티가 튕겼고 남편은 얼굴이 숯덩이처럼 까맣게 질린 채 망부석마냥 굳어져있었다.

시아버지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면서 란리를 부렸다. 나는 도끼를 들고 있는 시아버지의 서슬에 기절초풍한 나머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심장은 당금이라도 튀여나올듯이 들뛰였다. 죽을 만큼 무서웠지만 이대로 굽어들면 영영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면 아버님은 아들과 함께 사세요. 저는 제 새끼를 데리고 가겠어요.”

어떻게든 자식들을 지켜야겠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용기를 내여 시아버지께 강경하게 맞섰다. 나의 당돌한 모습에 잠시 주춤한듯 싶더니 얼마 안되는 이사짐을 싣고 떠나려는 순간, 시아버지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남편의 발등을 도끼로 푹 내리 찍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식간에 남편의 발은 온통 피범벅이 돼버렸다. 나는 숨이 꺽 막혔고 심장이 벌렁거리며 하늘땅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입술을 앙다물고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면서 옷섶을 찢어 남편의 상처를 싸맸다. 그렇게 시아버지의 거센 반대도 무릅쓰고 갖은 고통과 상처만 안겨준 시집마을을 미련없이 떠나 맨주먹으로 언니가 살고 있는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렇게 새로운 도시에서 세집살이를 하면서 아득바득 일하여 열심히 애들을 키웠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고 온갖 사랑과 노력을 몰부어 뒤바라지를 했더니 큰딸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인민교사로 되였고 작은딸은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서 석사공부까지 마치였다. 현재 두 딸은 모두 행복한 가정을 뭇고 각자 자신의 일터에서도 맡은 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딸들을 모두 성가시키자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황혼리혼’이란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남편의 그 우락부락하는 성격을 참고 견디는 데 적응되였다고 스스로 위로하다가도 가끔씩 폭발하는 그 괴퍅한 성격을 더 이상 수용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살아가고 있는 자식들에게 나 때문에 친정이 산산조각이 나는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부부가 화목하게 잘살아야 복이 들어온다.”고 입이 닳도록 일러주던 엄마인 내가 해서는 안될 선택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저울의 한쪽에 지구를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엄마를 올려놓는다면 저울은 엄마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무거웠지만 나에게 더없는 행복과 보람을 선물해주었고 힘든 인생길에서 수없이 많은 가시덤불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엄마’라는 그 이름의 무게를 깨달았기에 지금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모든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단단히 지킬 수 있었다.


나는 오늘도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지고 노을지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설익은 필묵으로 한송이 소담한 먹꽃을 피우며 지난날 고난의 광야를 헤쳐온 마음속의 지난 응어리를 뜸질해본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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