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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2020년 12월 29일 09시 19분  조회:717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돋보기

현명규


책을 보다가 잠간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책상 우에 놓아둔 돋보기의 한쪽 다리가 부러져있었다. 보나마나 개구쟁이 손자놈의 ‘걸작’이였다. 하도 아까워서 부러진 부분에 접착제를 발라 고정시킨 후 테프로 단단히 동여놓았다. 모양이 좀 어수선해서 그렇지 사용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딸애가 몇푼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궁상을 떤다며 새걸로 바꿔드릴 테니 당장 버리라고 야단이였다.
걸고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집구석에서 사용하면 되는 걸 가지고 구태여 새것을 살 필요가 없다면서 나는 끝까지 우겼다.
기실 이 돋보기는 오래전 딸애가 선물한 거였다.
56세 생일을 앞두고 있던 어느 하루, 북경에 있는 큰딸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이번 생일엔 무슨 선물을 보내드릴가요?”
“선물은 무슨… 너희들이 오손도손 잘살면 그게 나한테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전화를 끊고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 딸애가 보낸 물건이 도착했다. 꽤나 묵직했는데 열어보았더니 옷 한벌과 안경 한틀이 들어있었다. 물건과 함께 엽서 한장도 들어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아버지, 생일을 축하합니다. 책을 즐겨보시는 아버지한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돋보기를 부쳐보냈습니다…”
실은 지천명을 넘어서면서 시력이 예전 같지 않아 부담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 큰 활자로 된 글씨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작은 글씨는 희미하게 보여서 책을 볼 때마다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그런데 큰딸이 이렇게 돋보기를 보내주니 설중송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되여 한국에 있는 작은딸도 돋보기를 부쳐보냈다고 전화로 알렸다. 언니가 금방 보내왔는데 뭘 하러 돈을 랑비하느냐며 핀잔을 줬더니 자기가 사보낸 건 외국명품이라느니, 인민페로 저그만치 이천원은 한다느니, 문학창작에 도움이 된다느니 하면서 안경을 받으면 꼭 걸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동안 조카들이 선물한 것까지 두루 합쳐보니 집에 있는 돋보기가 저그만치 아홉개나 되였다. 그럼에도 다리가 부러진 돋보기를 버릴 수 없는 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우리 집은 3대가 한집에서 사는 대가족으로서 어머니의 어깨에는 온 집안의 가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실려있었다. 더우기 밤늦게까지 쉬지도 못하고 식구들의 해진 옷이며 양말, 장갑 등을 손바늘로 한뜸한뜸 기워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어머니한테는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환갑을 넘긴 지 이슥한 어머니가 피발이 선 눈으로 옷감들을 코끝에 들이대고 바느질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해났다. 끄덕끄덕 졸다가 가느다란 바늘끝에 손가락을 찔리는 바람에 놀라서 깨났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난데없는 백통테 돋보기를 걸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게 되였다.
“어머니, 웬 돋보기예요?”라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뒤집 사돈할머니가 빌려주었어. 돋보기를 걸구 있으니 신선이 된 거 같다야. 눈앞이 훤하니 일이 척척 잘되네.”라며 연신 감탄하셨다.
사돈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마실을 왔다가 어머니가 일하는 모습이 하도 보기가 딱해서 돋보기를 빌려준 모양이였다.
제대로 된 돋보기 하나 갖추는 게 어머니의 평생의 소원이였을 수도 있겠다만 나는 장가를 든 이듬해까지도 어머니의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생산대에서 대장이 시키는 일이나 굽석굽석 해오다가 호도거리가 시작되자 농사경험이 적은 데다 밭까지 메마르다보니 넉넉치 않은 소출로는 근근히 호구나 할 형편이였다. 푼돈도 좁쌀처럼 쪼개 써야 하는 형편인지라 돋보기 사는 일은 자연히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딸애가 네살 때 급성위장염에 걸렸는데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는 바람에 탈수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인데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도 아무도 돈을 선뜻 빌려주지 않았다. 아파서 눈물을 똑똑 떨구는 딸애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아파났다. 어쩔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앞집의 할머니가 비방 하나를 알려주었다.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했더니 설사가 기적같이 뚝 멎었다. 귀인을 만난 셈이였다.
그 때부터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마을을 떠나 출세를 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일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해봤자 식구들이 먹을 량식을 제외하고는 남는 거라곤 없는 밭농사에 마냥 발을 묶이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자면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였다.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1987년 10월, 나는 안해한테 모든 것을 맡기고 지인의 소개로 막하로 떠났다. 대흥구역전에서 떠나 기차를 세번 갈아타는 역사를 치르면서 북쪽 한끝에 있는 막하에 도착하였을 때는 찬 겨울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오후였다.
막하역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지난해에 느닷없이 덮친 특대삼림화재로 큰 몸살을 치르고 난 거무칙칙한 수림이 시야에 안겨왔다.
내가 행장을 풀어놓은 곳은 일군들을 위해 벽체만 남은 집에 림시로 지붕을 얹고 문짝을 대수 맞추어놓은 벽돌집이였다.
이튿날부터 바로 일에 달라붙었다. 불길이 스쳐간 나무를 베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규격 대로 쌓아놓는 게 우리가 할 작업이였다. 불길이 핥고 지나간 나무를 베여버리지 않으면 병충해가 만연되여 삼림이 훼멸적인 타격을 받는다니 책임이 무거워졌다. 11월 중순까지는 그럭저럭 일을 하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소설이 지난 후부터는 검뿌옇게 흐린 하늘에서 찬 기류를 타고 매일같이 싸락눈이 흩날리는가 하면 이따금 로씨야 쪽에서 불어오는 성난 하늬바람이 나무초리를 흔들며 거세차게 불어쳤다. 더우기 씨비리의 한류가 날칠 때에는 낮기온이 령하 40도 이하로 뚝 떨어져 손발이 얼어서 오그라들고 얼굴이 찡찡 저려났다.
막하는 중국에서 낮이 제일 짧고 밤이 제일 긴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 일행은 내몽골에서 온 얼굴이 검스레한 곽씨, 할빈에서 온 장씨 등 두루두루 해서 11명이였는데 오전 9시 쯤 일하러 떠나면 오후 2시전에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더 늦게까지 일하려고 해도 매서운 추위 때문에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보다 하루세끼 밀가루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야 하는 게 나한테는 더없이 큰 고역으로 다가왔다. 간혹 돼지고기가 상에 오를 때도 있었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량이였다. 김치, 된장국이 그리워 속이 곪아터질 지경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밀가루음식에 길들여졌다.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턴넬처럼 이어졌지만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 나 하나만 믿고 기다리는 가족들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렸다. 그렇게 2개월 동안의 고난의 려정을 뒤로 하고 양력설을 며칠 앞두고 나는 귀로에 올랐다.
할빈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근에 있는 안경상점에 들렸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저 돋보기 하나를 골랐다. 그렇게 벼르면서 사야 할 만큼 비싼 물건도 아닌데 이제서야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드리게 되여 후회가 갈마들었다. 그래도 늦게나마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렸다는 생각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둥둥 뜬 기분으로 달리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초저녁 때가 다되여서야 나는 집에 들어섰다. 미리 알리지 않았던 터라 기별도 없이 찾아온 나를 보고 식구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해있었다. 이불을 덮고 방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잔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몸져누울 정도로 심해졌을 줄은 몰랐다. 내가 떠난 지 열흘 되던 날, 돼지죽을 주러 나간 어머니가 그만 돼지굴 모서리에 가슴을 박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그 때부터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안해가 조용히 알려주었다. 이젠 갈 때가 되였으니 소용이 없다면서 어머니가 병원으로 가자는 안해의 손을 뿌리쳤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자식한테 루가 되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태연한 모습이 되려 화살이 되여 나의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돋보기를 꺼내 어머니한테 건넸다. 어머니는 힘없는 손으로 돋보기를 오래도록 어루만졌다… 아들이 선물한 돋보기를 써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가슴 아픈 아련한 추억과 자식들의 효도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돋보기를 손에 쥔 채 오늘도 나는 돋보기를 걸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본다.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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